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72화 (272/354)

272. 패트런

하마터면 달려온 그녀를 꼭 안을 뻔했다.

감격에 겨워 기뻐하는 그녀가 ‘모든 영광은 그대에게!’ 그런 적극적인 자세로 확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남자가 아닌 선생님으로 봤겠지?

그렇게 생각하지만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유부녀인 그녀를 포옹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실전 상황을 이해하는 모모코는 괜찮을지 몰라도 하필이면 이방카가 동양 선수와 호흡을 맞추는 것도 불만인 사상이 불순한 자들에게는 공격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멋진 경기를 선사한다면 팬들의 생각이 바뀌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성적이 좋으면 서로에게 윈윈이 될 거예요.”

“윈윈이라…….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까?

이방카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하기야 부친 곁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알려진 커리어 우먼이니 겉으로 드러난 미모에 현혹되면 곤란하다.

그다지 아름답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톡톡 튀는 활력과 자신의 몫을 당당히 해내는 자존감은 필상에게도 점점 더 좋은 이미지를 생성해 내고 있었다.

“저 한국 아주 좋아해요.”

“그런 성향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징후가 드러나고 있지만 저는 일본과 한국의 기운이 역전된다는 일부 선각자들의 말을 믿어요.”

이건 정말이지 기대하지 못한 말이다.

한일 갈등이 소모적 경제 보복으로 이어져 양국은 천문학적인 손실을 봤다. 처음에는 한국이 더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예측했으나 진행된 양상은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한국은 일본에 예속적인 경제 구조를 빠르게 전환했으며 온 국민이 똘똘 뭉쳐 단합된 저력을 발휘했다. 또한 일본 내에서도 양심적인 식자들의 자성의 목소리가 깨어나기 시작해 잘못된 도발을 일으킨 원흉은 결국 일선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미국의 역할이 중요하죠.”

“우리가 처음부터 잘못된 판단을 내린 거 알아요.”

한낱 여성이라고 무시했다가는 큰코다칠 위인이었다.

아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걸 정확히 인지해 시인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일본이 패망할 당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은 철저히 자국의 이익 우선이었다.

전범국인 일본을 자신들의 휘하에 두고 부리기 위해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을 풀어줬고 한반도를 양분해 동서의 힘이 맞부딪치는 전쟁터로 변할 가능성을 알면서도 묵인했다.

미군정은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식민 지배의 틀을 그대로 쓰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에 대해 무지한 그들은 한국인들과 함께 살 생각을 하지 않고 정복자처럼 행동했다.

“적어도 미국이 정의의 편에 서지 않은 것은 사실이죠.”

“국익 앞에 정의는 무의미해요. 지금 한국이 일본의 압박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은 정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한 힘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하지만 명분이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일본이 가진 거대한 영향력을 무력화시킨 것은 바로 한국의 선택과 행동이 옳고 떳떳했기 때문입니다.”

“흐흐.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프로님과 같이 라운드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아빠에게 조른 거예요.”

이것 또한 의외의 말이었다.

골프에 관심이 지대한 트럼프가 직접 나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만남은 애초에 그녀가 기획한 것이란다.

“잠깐만요. 일단 샷부터 하고 얘기하죠.”

“네. 멋지게 붙여 줘요.”

파3 콘테스트는 팬들을 위한 축제다.

판에 박힌 프로들의 팽팽한 경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치열한 삶의 현장을 엿보게 만들지만 지금 이 이벤트는 골프가 팬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호흡하는 운동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잔디밭에 편하게 기대 앉아 프로들의 멋진 샷을 바라보는 이들은 인생의 가장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TV에서나 보던 최고의 선수들이 평소와는 달리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나와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장면은 아직 인생이 살만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쉭!

필상이 티샷 한 13번 홀은 157야드다.

핀이 이단 그린의 아래쪽에 꽂혀 있어 애매하다. 앞에는 벙커도 아닌 제법 큰 연못이 있어 짧게 치는 경우는 드물다.

필상의 9번 아이언 샷도 길어보였다. 탄도가 높았던 타구는 이단 그린의 위쪽에 맞았지만 한 번 튄 공이 거의 제자리에서더니 꿈틀꿈틀 백스핀이 먹기 시작했다.

조금만 경사를 타면 핀까지 굴러 내려올 것만 같았다.

곁에 서 있던 이방카의 비명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피니시를 하던 필상은 얼른 귀를 막아야만 했다.

“백! 컴백!”

“인 더 홀!”

파3 콘테스트는 대부분의 갤러리들이 이동하지 않고 한 홀에 자리를 잡고 모든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편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필상과 이방카의 조를 따라다니는 무리들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때문에 응원의 소리도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홀에서 플레이하는 선수들이 깜짝 놀랄 만큼 비명소리가 커진 이유는 슬슬 구르던 타구가 경사를 타더니 홀컵 속으로 틀어박혔기 때문이었다.

-와우! 장군 멍군인가요?

-의도적으로 백스핀을 먹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방향을 지키기가 상당히 어려운 그린인데, 우리 팀에 굉장한 행운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운도 실력이죠! 이러면 단숨에 단독선두로 올라서는데요! 무려 -10입니다. -10!

파3 콘테스트는 성적이 잘 나오는 편이다.

아무리 그래도 13번 홀까지 10언더라니,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든 스코어였다. 버디 6개에 이글 2개, 그것도 홀인원이 2번이나 나온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 공 프로야 정확한 아이언 샷으로 정평이 난 선수니까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캐디로 나서서 대신 샷을 한 이방카의 홀인원은 정말 너무 드라마틱하지 않나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재주는 부친을 쏙 빼다 박은 것 같습니다. 그 기록은 깨지지 않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웬만해서는 티샷을 맡기는 경우는 드물거든요.

-이러다 혹시 트럼프 대통령이 이곳에 짠하고 등장하는 거 아닐까요? 워낙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좋아하는 사람이잖습니까!

-그럴 가능성이 없지 않아 보입니다. 더욱이 딸이 오거스타에서 홀인원이라는 진기한 기록을 세웠기 때문에 오늘 모든 언론의 초점은 그녀에게로 향할 가능성이 농후하거든요.

더 마스터즈는 출전 조건이 까다롭다.

전년도 기준 세계 랭킹 50위 이내, PGA 상금순위 40위 이내, 작년 마스터즈 공동 16위 이내 등 17개의 초청기준을 만족하는 선수에게만 출전의 영예가 주어진다.

때문에 올해도 102명에게만 참가가 허용되었다. 그중에 한국 선수는 단 3명인데, 파3 콘테스트에 참가한 선수는 필상뿐인지라 우리 팀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이다.

이후 타수를 많이 줄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마추어와 포섬 방식으로 1타를 더 줄여 -11을 기록한 것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우승할 수 있을까요?”

“하하. 쉽지는 않을 겁니다.”

“난 꼭 우승하고 싶은데…….”

경기를 마친 이방카는 인사 후에도 필상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샤워하러 가고 싶었으나 곧 끝날 결과를 지켜보자는 말에 18번 홀 그린 주변에 앉아 타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봤다.

그러다 문득 느꼈다. 지금 이 홀의 주변을 넓게 감싸고 있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본래는 정장 차림이어야 하지만 장소의 특성을 고려해 운동복을 입었다. 하지만 동일한 색에 디자인, 필상의 초감각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부군도 옵니까?”

“네?”

“VIP가 오신다는 거 압니다. 저기, 저기. 총기까지 휴대하고 경계를 서고 있잖아요.”

“남편은 오지 않아요. 지금 유럽 출장 중이거든요. 그런데 그건 왜 궁금하죠?”

“저 같으면 제 아내가 이렇게 젊은 남자와 바짝 붙어 있으면 싫을 것 같아서요.”

“호호호호!”

그녀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배까지 잡고 웃는 걸 보면 정말 이 상황이 그녀에게는 재미있는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조금 더 바짝 붙어 앉는 행동에 깜짝 놀란 필상은 벌떡 일어났다.

“호호호! 이봐요.”

“저는 살아야겠습니다.”

“한국 남자들 정말 귀여운 것 같아요. 호호호.”

그녀의 장난은 계속되었다.

이성에 대한 자유분방함은 이제 한국도 세계 어디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남녀 사이의 묘한 감정과 행동 규범은 동서의 간극이 분명히 존재한다.

흔히 서구 나라들이 더 개방적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야한 얘기나 음담패설은 동양이 더 강렬하고 개방적이다.

그러나 남을 의식하는 행동은 여전히 유교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차피 이성적인 감정이 없다면 그깟 스킨십이 뭐 중요하다고.

“와! 끝났어요.”

“축하합니다.”

“축하는 프로님이 받아야 하는데, 왜 당연하게 느껴지죠?”

“오늘의 주인공이니까요.”

사실 그녀는 오늘 필상과의 인연을 기화로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그런데 경기에 깊숙이 매몰되다 보니 원래 목적은 잊고 말았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골프의 매력에 담뿍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승까지 했다. 무려 14개 홀을 아마추어가 함께 플레이를 하고도 우승했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곧바로 시상식이 열릴 예정이니 해당 장소에 계신 패트런(patron-후원자. 더 마스터즈는 갤러리를 패트런이라 호칭)께서는 협조해 주시고 순위에 드신 선수들은 앞에 마련된 좌석으로 나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지막 선수들이 홀 아웃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필상이 기다린 시간은 대략 1시간여, 샤워를 해도 2번은 했을 시간이다.

하지만 무료하지는 않았다. 이방카와 대단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지만 느낌이 꽤 좋았다. 트럼프와 그 딸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녀와 함께 사업을 할 수도 있겠다는 신뢰가 생겼기 때문이다.

시상식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마지막으로 우승자를 호칭하는 순간, 사람들의 뜨거운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우승자를 향하지 않고 무대 뒤쪽에서부터 시작한 것이 특이했다.

“오거스타 내셔널 GC. 위대한 골프의 성지에 방문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우승자에게 기념품을 줄 수 있게 되어 그 기쁨은 한결 더 커졌습니다.”

정치인답게 선동적인 톤으로 시작한 연설은 길지 않았다.

앞에 선 이방카가 눈치를 준 탓이다. 얼른 끝내자고.

트럼프는 자신의 딸이 우승자를 돕게 되었고 필상의 넉넉한 배려로 우승에 기여할 수 있어 더욱 의미가 깊다며 딸을 향한 무한 애정을 드러냈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우승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방카가 워낙 스윙이 좋아서 어쩔 수 없더군요.”

“하하하! 어쩐지 여기를 오겠다고 나를 들들 볶더라니.”

대회는 아직 개막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개막 전부터 골프팬들은 물론 온 국민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메이저 대회는 본래 전국 방송은 물론 10여 국가에 실황 중계가 된다.

하지만 트럼프의 등장으로 올해 대회는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골프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미스터 퍼펙트’, ‘절대자’라고 불리는 필상의 기록과 우승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것은 곧 프로 선수에게 지명도와 관련되고 수입과도 비례하기 때문에 필상으로서는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괜찮으면 저녁을 함께하고 싶은데요.”

“그러시죠.”

이제야 본론이 나올 것 같았다.

필상은 트럼프와도 인연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정말 바쁜 것인지, 이방카가 싫어하기 때문인지는 확언하기 어려웠다.

그날 저녁, 이방카와 나눈 대화는 추후 미국 골프계의 변화 추이와 그에 따른 클럽들의 발전 방향에 대한 의견 개진이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박식했으며 진지했다.

아무래도 부친이 운영하는 다양한 사업 중에서 골프와 관련된 것들은 그녀가 주도할 것 같았다. 아니면 형제들과의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미리 선수를 치는 것일 수도 있다.

“성장 가능성이 썩 높은 분야는 아니죠.”

“돈만 꺼내 놓으면 마구 벌리던 시절과 비교하면 안 됩니다. 골프 관련 사업은 물론 앞으로 어떤 사업이든 해당 분야에서 경쟁력이 없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동의해요. 하지만 다른 사업에 비해 수익성이 낮다고 생각해 고민 중이었는데, 프로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확신하게 되었어요. 제가 골프 사업을 꼭 해야겠다는.”

“기존 방식을 탈피할 혁신적인 사고가 없다면 손을 대지 않는 것도 방법일 듯합니다.”

“그 걱정은 별로 안 해요. 당신이 있으니까!”

여태 주변적인 얘기만 나누었지 동업이나 투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이미 TPK가 벌이고 있는 사업에 대한 자료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은 이방카는 필상과 폭 넓은 대화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던 것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다시 재검토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손을 내밀었다.

특별한 제안이나 방식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그냥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표현만 했을 뿐인데, 필상도 딱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본인도 그녀와의 사업이 기대되기 때문이었다.

“바쁜 분을 제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건 피차일반 아닌가요?”

“호호호. 이래서 난 한국 남자가 좋다니까요!”

그녀는 필상의 배려를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했다.

누구나 그녀 앞에서는 온순한 양이 되겠지만 필상은 당당하면서도 속 깊은 행동을 먼저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실력이 좋고 배경이 든든해도, 또 이벤트 대회에 불과해도 아마추어에게 자신의 경기를 나눠 주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마음을 비운 것도 대단했지만 함께하는 그녀가 최고의 샷을 할 수 있도록 최적의 배려를 한 것, 그런 사람이라면 무슨 사업이든 함께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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