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71화 (271/354)

271. 파3 콘테스트

“자네도 알다시피 난 골프를 아주 좋아한다네.”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모레 있을 파3 콘테스트에 나랑 같이 나가면 어떨까?”

“대통령께서 직접 제 백을 매시겠다는 겁니까?”

“어차피 하프백이면 충분하지 않던가?”

사실이다.

파3홀만 돌기 때문에 우드나 유틸리티는 필요 없다. 퍼터와 웨지, 그리고 몇 개의 숏 아이언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합중국의 대통령을 자신의 캐디로 쓸 수는 없다. 그가 어찌 생각하든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부담스럽군요.”

‘다시없을 영광’이라는 말을 기대했던가?

그의 여유 만만했던 얼굴에 주름이 그려졌다.

세계에서 가장 파워풀한 인물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 탐탁지는 않았으나 중요한 것은 그가 먼저 찾아왔다는 것이다.

얼굴을 마주하고도 잘 믿기지 않지만 이건 대단한 기회이자 동시에 위기다. 그가 가진 영향력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백인 우월주의를 공공연히 떠드는 그에게 필상의 등장은 미국 경제를 압박하는 외세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때문에 마냥 기뻐할 일도 아니었다. 그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의도를 정확히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혹시 같이 플레이할 친구를 구했나?”

“아닙니다. 출전할 의사가 없었지만 매니저가 덜컥 신청하는 바람에 적당한 인물을 찾고 있었습니다. 저와의 동반 플레이에 거금을 기부할 의사가 있는 분으로.”

이왕 나갈 거면 좋은 일에 활용하고 싶었다.

어차피 승부에 집작하는 대회도 아니고 팬들과 함께 즐기는 이벤트다. 그렇다면 자신과의 플레이를 원하는 저명인사를 찾아 일거양득을 노린 것이다.

그것을 트럼프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선수를 치는 거라면 그에 합당한 대가는 치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 내가 가장 적임자로구만. 하하하.”

“제 매니저와 구체적인 내용이 합의된다면 저로서도 더없이 기쁘고 평생 기억에 남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그가 직접 찾아왔을 때는 골프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곧바로 꺼낼 줄 알았지만 그는 역시 노련했다.

본론을 꺼내기 전에 자신의 위상을 한껏 보여 줘 자연스럽게 상대로 하여금 몸을 낮추게 하려는 의도가 읽혔다.

누구라도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재력과 사업 수단도 굉장하지만 그의 현재 위치는 대한민국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지 않던가!

하지만 필상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골프장에서는 자신이 갑인 것이다. 골프 관련 사업에 미치는 영향력도 필상을 따라잡을 이가 없다. 앞으로는 더욱 가속화될 것임을 필상도, 그도 인정하기에 이런 자리가 성립되었다.

“얘기가 잘돼 다행이군. 그럼 화요일에 보세.”

일찍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타이밍도 예술이었다.

그를 만나는 상대는 가급적 긴 대화를 원하고 기대한다. 그에게 얻을 것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도 쿨하게 그를 보냈다.

차마 배웅하지 않을 수는 없어 현관까지 나갔지만 그의 차가 출발하자 곧바로 집으로 들어왔다. 보통은 차 뒤꽁무니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데, 미련 없이 되돌아서는 필상의 모습을 백미러로 확인한 트럼프의 표정에는 묘한 미소가 번졌다.

‘정말 왔다고?’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거실로 들어온 필상은 바로 이 대표와 통화했다.

이번 사안은 그녀와의 의사소통이 필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사전에 아무런 전조가 없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연락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너무 갑작스럽네. 하기야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 하지만 현직 대통령이 평일에 필드에 나오는 게 가능한 거야?’

“그래서 말인데,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추천해 보세요. 그 왜 있잖아요? 인형처럼 생긴 딸.”

‘이방카?’

필상의 제안은 적중했다.

트럼프도 애초 자신이 나설 생각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워낙 골프 관련 사업에 적극성을 가진 인물이라서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현직 대통령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가 나온 것보다 더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그가 아끼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딸, 이방카가 패션모델 저리 가라 할 만큼 예쁘게 차려 입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 가볍게 인사만 나눈 필상은 팬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화답했을 뿐, 그녀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아무리 예쁘게 차려 입어도 소용이 없었다. 필상의 이름이 새겨진 캐디 복장을 입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녀만 곤혹스럽게 만든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피칭.”

“아, 네.”

그녀는 필상이 다정스럽게 대해 주리라 기대한 것 같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방긋 웃으며 뭔가 얘기를 하려 했으나 필상은 대화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자신이 맡은 선수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예쁜 모습이 카메라에 잘 담기길 원한다는 걸 알면서도 무덤덤한 필상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전할 뿐, 홀 공략에만 집중했다.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 그녀의 미모는 필상의 가슴을 전혀 떨리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워낙 깜찍한 미모의 여인들이 주변에 많은 탓인 듯.

“나이스 샷!”

시작부터 자로 잰 듯 정확한 아이언 샷으로 연거푸 4개 홀에서 버디를 잡아냈다. 활짝 웃으며 필상의 클럽을 받아 드는 이방카가 다소 측은하게 느껴질 무렵, 필상의 태도가 변했다.

“4홀 정도 당겨 놨으니 이제 슬슬 레슨을 시작해 볼까요?”

“레슨이요?”

“네. 이번 퍼팅부터는 저와 교대로 플레이를 할 겁니다.”

“그래도 될까요? 저 자신 없는데.”

“하하하. 걱정 말고 그 하프백부터 제게 주십시오. 이젠 교대로 매고 움직일 겁니다. 그 옷도 좀 벗고요.”

“옷이요?”

옷을 벗으라는 말에 대체 무엇을 생각한 것인지 삽시간에 그녀의 얼굴이 벌게졌다. 옷 위에 걸친 캐디 망토를 벗어 달라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은 그녀가 슬며시 째려봤다.

그제야 다소의 곤혹스러움이 느껴졌다. 여전히 아름답다는 느낌은 없었으나 그녀에게서 강한 음기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잠깐 미소를 띠었을 뿐, 필상의 표정은 언제나 그랬듯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것에 답답함을 느꼈는지 이방카의 음성이 더 간드러지기 시작했다.

“라이를 얼마나 봐야 해요?”

“캐디가 라이를 봐 주는 건 반칙입니다. 직접 읽고 자신 있게 스트로크를 해 보세요.”

“근데 제게 너무 정중한 거 아닌가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81년생인 그녀는 필상보다 6살이나 연상이다. 당연히 존칭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음성의 저변에 깔린 담담한 감정을 느낀 그녀는 보다 다정한 태도를 원하는 것 같았다.

물론 필상은 그럴 용의가 전혀 없었다.

“정중하지 않으면 혼날 것 같아서요.”

“누구한테요?”

“아주 무섭고 안젤리나보다 더 깜짝한 여자가 있습니다.”

“네?”

그녀의 음성이 날카롭게 터진 이유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기 때문임을 방증했다. 필상의 정중한 태도가 자신의 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안젤리나 졸리보다 더 깜직한 여인이라니?

너무 극과 극의 이미지이기에 무의식중에 튀는 반응이 나온 것이다. 일순간 자신을 지칭한다고 착각하기도 했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필상이 언급한 여인이 누군지 금방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을 넘어 미국 투어에는 아직 신고도 하지 않았지만 세계 최고의 미녀 골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필상의 아내, 모모코를 생각해 냈던 것이다.

필상은 구태여 그걸 밝힐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녀가 곧 깨달을 것임을 확신했기에 퍼터를 건네며 어서 그린으로 나가라고 손짓했다.

“인 더 홀!”

“이방카. 고고!”

팬들의 성원도 무색하게 그녀는 2야드 버디 퍼팅을 놓쳤다. 물론 프로들도 가끔 그런 실수를 하지만 그녀는 번잡한 상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다행히 정신을 차린 그녀는 텝인 파를 기록하고 물러났다. 미안함이 가득한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마주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퍼팅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뭐에요?”

“남들의 시선을 마음껏 즐기는 건 좋은데, 그 와중에도 자신의 행동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녀의 골프 실력은 평균 이상이다.

그렇지 않다면 함부로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들의 시선을 중시하는 사람들일수록 더더욱 그런 경향은 강하다.

물론 필상이 보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한둘이 아니지만 구체적인 레슨에 들어간 필상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른 거는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공을 끝까지 보세요.”

“스윙은 괜찮은가요?”

“네. 아주 좋아요. 헤드업을 하지 않는다면 공은 무조건 핀에 붙을 겁니다.”

“정말이죠?”

“의심하지 마세요. 끝까지 보고 휘두르면 무조건 붙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때려야 합니다.”

실전에 임한 아마추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거다. 스윙 폼을 교정하는 것은 연습장에서나 하는 일, 필드에 나와서도 스윙에 의문을 가진다면 좋은 성적이 나올 수 없다.

아마추어들이 가장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모두 고개를 쳐드는 것과 연관된다. 시선을 고정하면 척추의 각도 유지되고 일정한 스윙 궤적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오로지 정확한 임팩트만 생각하고 자신 있게 휘두른 샷이 핀 근처에 쩍 붙어 버리자 그녀는 팔짝팔짝 뛰며 기뻐했다.

그 활화산 같은 에너지에 팬들도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4 이후 2홀을 파로 지나쳤으나 그녀가 붙인 3야드 버디 퍼팅을 필상이 집어넣으며 둘의 환상 호흡이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방카! 미모만 빼어난 것이 아니었군요!

-골프를 좋아하는 아버지 밑에서 어릴 때부터 배워 골프의 기본이 잘 갖춰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실수해도 커버해 줄 공 프로가 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칠 수 있는 겁니다.

-둘이 계속 교대로 치고 있는데, 저래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흥미진진한 팬들의 표정을 좀 보세요. 이 행사의 목적을 가장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우승 가능성이 보이면 확 달려들게 마련인데, 선두 그룹에 있으면서도 저렇게 팬들을 위한 플레이를 하는 것이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승하면 좋은데, 지금처럼 좋은 페이스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요?

임 캐스터는 봤다. 오늘 컴퓨터처럼 정확한 아이언 샷을 선보이는 필상이 샷을 할 때마다 무조건 쫙 붙는 것을.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마조마한 이방카의 샷을 보는 그의 시선에 안타까움을 감춰지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그가 미처 모르는 것이 있다. 흥미롭게도 파 3콘테스트에서 역대로 우승한 선수는 본선 성적이 좋지 않았다.

사람마다 다르다고 할지 모르나 대회가 개막하기도 전에 미리 심력을 소모하는 역효과가 통계에 뚜렷이 잡히기 때문에 구태여 무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178야드는 너무 멀어요. 프로님이 티샷을 하시죠?”

“아닙니다. 우드 잡으면 되죠.”

“그래도 물이 있는데…….”

아마추어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상황은 티잉 그라운드 앞에 물이 보이는 코스의 티샷이다. 굿샷이 아니더라도 적절한 임팩트만 가하면 되는데 잘 치겠다는 의욕과 불안감이 겹쳐 전혀 엉뚱한 샷이 터진다.

3번 우드를 잡은 이방카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다 못한 필상이 다가가 그녀의 앞에서 자세부터 교정해 줬다. 그래도 명색이 대회이건만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팬들은 하나라도 배우는 자세를 견지했다.

“그렇게 하체를 단단히 잡고 끝까지 공만 보면 됩니다.”

“네.”

그저 간단한 원 포인트 레슨에 불과했지만 이방카가 느끼는 안정감은 기대 이상이었다.

다부진 자세를 취한 그녀가 야무지게 클럽을 휘둘렀다. 피니시가 끝난 뒤에도 끝까지 붙든 머리가 굉장히 이상적인 자세를 연출했기에 샷 결과에 상관없이 팬들은 박수를 보냈다.

물론 결과가 나쁠 일도 없었다.

살짝 드로우가 걸렸으나 쭉쭉 뻗어 나간 타구는 그린 앞에 떨어졌고 크게 튀더니 그린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다소 특이한 방향으로 구르기 시작했는데, 팬들의 비명이 들리자 이방카도 얼른 공을 확인했다.

“어어! 저게 어떻게…….”

경사를 거스르는 이상한 런에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스핀이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방향은 달라질 수 있지만 사실은 필상이 한 가지 실험을 하는 중이었다.

상당한 거리를 격한 타구를 자신이 의념만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지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기대한 것 이상의 결과였다.

필상이 의도한 대로 정확히 움직이는 타구를 보며 내심 짜릿한 전율이 돋았다. 그래도 인위적인 홀인원은 과하다 싶어 타구에 힘을 좀 더 실어 보냈다.

그런데 그게 도리어 더 극적인 결과를 연출하고 말았다.

텅!

깃대를 정통으로 맞춘 타구가 튀어나오지 않고 홀컵 속으로 푹 꺼졌던 것이다.

“우와아아! 홀인원! 홀인원이다!”

“이방카 멋지다. 우승해라!”

-하하하! 홀인원이 나왔습니다! 홀인원이!

-스윙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홀인원이라니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일 겁니다.

-공 프로와 함께하면 무엇이든 되는군요!

-이방카가 오늘 경기 전에 태풍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10만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아마 좋은 일을 했기 때문에 하늘이 그에 대한 보답을 내린 것 같습니다. 하하하!

10만 달러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애초에 이 대표와 논의한 찬조 금액에 제한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세계 최고의 선수와 동반 플레이를 해도 만 달러가 상한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이 붙으면서 3만 달러까지 치솟았고 트럼프는 감히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거금을 투척함으로써 경쟁자들을 모두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 대가를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었다.

“봤죠? 저거 보셨죠?”

“네. 저보다 낫네요. 하하하.”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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