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오거스타 내셔널
“타국이라 겪는 서러움과 어려움은 생각보다 훨씬 크더군요. 하지만 저는 골프팬들의 선량한 양심과 현명한 판단을 믿습니다. 부디 있는 그대로 골프를 즐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뜬금없는 말은 아니다.
동양 선수라는 이유로 편견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필상이 미국 국적을 지닌 선수였다면 지금 전 세계 골프계는 난리가 났을 것이다.
위대한 미국을 운운하며 영웅 만들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다만 세계 최고의 무대라면 국적과 상관없이 활동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필상이 그걸 대놓고 말하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모든 환경은 제가 기꺼이 받아들이고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을 탓하거나 팬들에게 야속하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조금만 더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입견 없이.”
성적이 시원찮은 선수였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말이다. 그나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적을 거두고 있는 ‘절대자’라는 닉네임까지 붙은 필상의 조심스러운 언급이기에 숙연했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으나 분위기상 꺼내기가 껄끄러웠는데, 스카이스포츠의 마이클이 나섰다.
-한국인인 공 프로는 미국에서 열리는 더 마스터즈에, 또 일본인 아내인 모모코는 다음 주 KLPGA 개막전에 나란히 출전하더군요.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통화는 하셨나요?
“물론입니다. 마이클. 하루라도 보고를 드리지 않으면 나중에 혼나거든요. 하하하! 아내 모모코는 KLPGA 개막전에, 그리고 아끼는 선수 이즈카 하루는 JLPGA 야마하 레이디스 오픈에 출전합니다. 다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많은 팬들이 응원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부부가 같은 주에 열리는 대회를 동시에 석권한 적은 없는데, 동반 우승을 하면 그 또한 진기한 기록이 되겠군요.
“그런가요? 남자인 저는 상관이 없지만 낯선 환경에서 대회를 치러야 하는 아내는 마음의 짐이 클 겁니다.”
기자회견장에는 한국 기자들도 일부 섞여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인터뷰의 내용은 한국 팬들에게도 전달될 것이다. 그래서 일본 국적인 모모코를 살펴 주십사 한국 팬들에게 부탁한 것이다.
직접 곁을 지키지 못하고 이렇게 당부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팬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여하튼 1시간 이상 진행된 인터뷰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냥 축하받고 포부를 밝히는 정도를 예상했던 필상은 오늘의 경험을 토대로 하나의 결론을 얻었다.
아직도 자신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것을 인지하고 가급적 말을 아끼기로 결심했다.
* * *
“좋긴 정말 좋네.”
“그쵸? 페어웨이는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푹신푹신하고 그린은 유리처럼 빨라 골프 칠 맛이 나는 것 같아요.”
드디어 오거스타 내셔널 GC에 도착했다.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많건만 이미 많은 선수들이 도착해 칼을 갈고 있었다.
필상은 짐도 풀기 전에 미사키와 함께 필드로 나섰다.
정해진 시간 외에는 입장이 금지되어 있지만 그냥 걷는 것까지 통제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필상을 보며 방긋 웃는 관리자의 태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손가락 4개를 펼쳐 보인 것에 대해 미사키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나름의 해석을 더했다.
“4연승 하라는 거죠?”
“아닌 것 같은데.”
“아! 그럼 4대 메이저 대회를 모두 거머쥐라는 거군요.”
“아니.”
“그럼 뭔데요?”
“4시 이후에는 출입이 통제된다는 팻말이 있었어.”
“네?”
그냥 웃으라고 던진 농담인데, 미사키는 이미 지나온 뒤를 돌아본 뒤 자신의 시계를 확인하고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4시까지 30분밖에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필상은 위대한 자연이 허락하고 집념 어린 인간이 다듬은 골프 역사의 일대 역작을 천천히 감상하며 걸었다.
“느낌이 나쁘지 않네.”
“당연하죠. 골프인의 한 사람으로서 오거스타를 방문하는 것은 성지순례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런데 좀 서두르면 안 될까요?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괜찮아. 4시 이후 출입 통제라는 말은 농담이었어.”
“네? 이 아저씨가 정말!”
운동선수 출신들이 순진무구한 경향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녀처럼 똑똑한 여자도 오로지 한 길만 걷다 보니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숙맥이었다.
누군가를 한 번 신뢰하면 어지간해서는 등을 돌리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고된 성공의 여정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모모코도 마찬가지다.
만약 필상처럼 산전수전 다 겪었다면 아무리 마음이 가고 능력이 출중해 보여도 나이 차가 10년 이상 나는 자신과 맺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한 달 이상 집중 관리를 했다더니 그럴 만하군!”
“보통 골프장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죠.”
“수익성의 관점에서 보니까!”
이곳은 진정한 프라이빗 골프클럽이다.
독특하게도 회원 수가 몇 명인지도 알려지지 않았으며 아무리 거금을 내놔도 결원이 생기기 전에는 입회할 수 없다.
또한 기존 회원들이 거부하면 그 누구라도 멤버가 될 수 없고 회원이 동반하지 않으면 라운드조차 할 수가 없다.
때문에 골프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이곳을 찾는 것이 성지순례만큼이나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대회 기간에는 150달러를 호가하는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매진이 되고 암표가 2,000달러에 매매되기도 한다.
“서 팀장이 기다릴 테니 아멘 코스부터 볼까?”
“네. 좋아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3번 홀에서 방향을 틀었다.
오거스타의 악명을 드높인 11, 12, 13번 홀을 가장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 바람도 적당히 불어 시그너처 홀에 도착한 필상은 이 홀들이 주는 압박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덩달아 강한 투지도 일었다.
며칠 후 이곳을 가득 메울 팬들 앞에서 플레이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 온몸이 뻐근한 것이 흥분이 밀려왔다.
첫 방문인데도 마치 과거의 기억을 더듬듯이 홀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아마도 이곳에 오기까지 온 종일 들여다본 야디지 북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코스 구경은 잘하셨어요?”
“응. 우리 짐은?”
“아! 자원봉사자들이 숙소로 옮겨 준다고 가져갔어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아직 대회가 열리려면 일주일이 꼬박 남았다. 그런데도 일찍 도착하는 선수들을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돕고 있었다.
오거스타라는 이 작은 마을은 더 마스터즈가 열리는 기간이 되면 거의 모든 시민들이 행사를 돕기 위해 나선다.
경제적인 풍요도 누릴 수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자부심이 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대표님이 통화 좀 하고 싶으시대요.”
“알았어. 서 팀장. 샤워하고 내가 직접 연락할게.”
더 마스터즈 주최 측은 필상에게 각별한 대우를 해 주지 않았다. 여타 대회가 기본 경비를 포함 숙소와 차량까지 제공한 것에 비하면 나름 최고 권위를 고집한 셈이다.
이 대표는 그 점을 명확히 했고 때문에 꼭 우승해야 한다는 말도 전했다. 하지만 그건 꼭 통화가 필요한 용무는 아니다.
봄이 되며 더욱 활기를 띤 사업에 대한 특이 사항도 없었기에 오랜만에 그저 안부를 묻는 거라고 생각했으나 전화를 끊으려 하자 용건이 드러났다.
‘나 더 마스터즈 직관하고 싶은데…….’
“저도 대표님이 오시면 든든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성공 못지않게 중요한 사람이 있잖아요.”
‘그야 그렇지…….’
이 대표도 모모코의 한국 투어 적응이 중요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설사 그녀가 미국에 오더라도 적당한 지원팀을 꾸려 조치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대표님이 모모코의 곁을 지켜 주면 저도 훨씬 편안하게 대회에 임할 수 있을 겁니다.”
‘알았어. 그건 걱정하지 마.’
이보영이 미국으로 날아오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하지만 필상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녀의 바람은 알지만 이미 밝혔듯 모모코가 좋은 경기를 펼치는 것이 자신의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필상이 커리어그랜드슬램을 작성하는 역사적 순간을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으나 모모코도 없는 마당에 적절치 않다고 설득했다.
다른 대회처럼 타이거와 미켈슨이 동행하지 않은 점도 염려했으나 혼자이기에 아쉽기보다는 오히려 편안했다. 굳이 일정을 맞추거나 신경 쓸 일이 없어 필상은 모든 것을 제켜 두고 오로지 연습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럼 파3 콘테스트는 누구랑 나가려고?’
“저는 그냥 거르고 본 대회에 집중하겠습니다.”
‘이미 신청했는데? 그거 아무나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팬 서비스를 위해서도 거르지 마.’
이 대표가 미국에 오고자 한 진짜 목적이 드러났다.
마스터즈는 사전 이벤트 행사로 파3 콘테스트를 개최한다. 본 대회와는 달리 전문 캐디가 아닌 가족이나 친구가 백을 매고 때로는 샷이나 퍼팅을 대신하기도 한다.
기숙사 오픈하우스처럼 필드 출입이 금지된 이들에게 캐디를 맡겨 대회가 불러오는 긴장감을 내려놓고 팬들과 함께 즐기라는 의미를 가진 행사다.
바로 그때, 이보영 대표가 필상의 파트너로 함께 참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기분은 이해하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필상은 문득 떠오른 착상을 전달했고 이 대표도 동의했다. 이후 복잡한 상념은 일체 버리고 필상은 스윙 점검과 더불어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데 주력했다.
간혹 연습장에서 만나는 동료들과 인사를 나눈 것 외에는 일체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며 자신의 스윙에 확신이 생길 무렵, 뜻밖의 사람들을 만났다.
모든 연습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시간은 저녁 9시를 훌쩍 넘긴 늦은 시간이었는데, 숙소 앞에 검정색 리무진이 서 있었고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숙소를 에워싸고 있음도 확인했다.
“이게 대체 뭐지?”
“그러게요.”
“서 팀장은 어디 갔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 팀장이 조르르 달려 나왔다. 그리고는 묻기도 전에 먼저 상황을 설명했다. 붉게 물든 안색을 보니 뭔가 특별한 상황이 발생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VIP가 오셨어요.”
“VIP라니?”
“놀라지 마세요. 지금 저희 숙소에 미합중국 대통령이 와 계시다고요!”
“도널드 트럼프?”
“네. 일단 들어가서 인사부터 해요.”
불현듯 떠오른 생각은 있었으나 그래도 너무 파격적이라 숙소로 들어서는 필상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말로 TV에서나 보던 화제의 인물, 트럼프가 소파에 앉아 있다가 필상을 보자 벌떡 일어나 악수를 하자며 다가왔다.
다행이라면 그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치솟았던 흥분이 일시에 가라앉고 차가운 이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스터 퍼펙트. 반갑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떻게 연락도 없이 이 누추한 곳을 찾으신 겁니까?”
미국 대통령을 앞에 두고도 당당한 태도에 트럼프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상대를 인정한다는 느낌이 전해졌기에 필상도 마주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역시 절대자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최고의 선수답게 악력이 대단하구만. 하하하!”
“감사합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악수로 기 싸움을 한다고 알려져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나 봅니다. 하하하.”
필상을 상대로 도발한 것부터가 실수였다.
손에 힘을 가하는 순간, 그의 커다란 손은 필상의 손아귀 안에서 처참하게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비명이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고통이 가해졌으나 용케 잘 참았다.
“난 자네의 열렬한 팬일세. 알다시피 내 일정은 미리 알려 줄 수 없어 이렇게 불쑥 찾아온 걸 이해해 주기 바라네.”
“물론입니다. 앉으시죠.”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골프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큰손들을 꼽는다면 단연 도널드 트럼프도 포함된다.
200개가 넘는 골프장을 운영하는 클럽코프의 에릭 아펠트, 세계 최대의 골프장 운영 프랜차이즈인 트룬 골프의 다나 가마니도 대단하지만 미국 대통령인 트럼프 역시 오래전부터 골프계의 거물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다.
부동산 재벌인 그는 엄청난 자금력을 기반으로 미국과 유럽의 경영난에 빠진 명문 골프장을 저렴한 가격에 사들였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명문 코스들을 모으거나 만든 그는 보유한 코스에서 굵직굵직한 대회를 개최해 왔다.
이미 US 여자오픈, 캐딜락 챔피언십이 열렸으며 차후 PGA 챔피언십도 그가 소유한 코스에서 개최가 결정되기도 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골프에 대한 열정 때문이라네.”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좋은 가르침을 청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났으니 한 수 지도해 주십시오.”
“으하하하! 선수끼리 왜 이러실까!”
자신 소유의 모든 골프장에 이름 붙인 ‘트럼프’를 최고의 골프 브랜드로 만들겠다는 목표는 일찍이 천명한 바가 있다.
과장과 허세가 심하지만, 거대 자본과 과감한 투자로 골프계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점은 골프인의 한 사람으로서 환영할 일이다.
다만 정치에 뛰어들면서 사업은 잠정적인 휴지기에 들어갔지만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여실히 느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늦은 시간에 조지아까지 올 리가 만무하지 않겠나!
“저희는 이제 겨우 사업에 발을 디딘 수준이고 미국 진출은 아직 결정된 것도 없는데, 대통령께서 이렇게 저희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일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나 퇴근하고 온 것이니 사업에 다른 것을 섞지는 말자고.”
“아! 그렇다면 찾아오신 본론을 슬슬 풀어 보시죠.”
“얼마 전에 발스파의 브라이언을 만난 것도 알고 있으니 너무 그렇게 시치미를 떼지는 말게. 하하하.”
그의 표리부동한 표정을 대하고 있노라니, 소리장도(笑裏藏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웃고 있는 와중에도 필상의 생각을 읽으려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만난 것을 안다면 결렬된 것도 알 가능성이 높은데, 그에 대한 언급은 전혀 꺼내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지대로 대화를 끌어가려는 경향이 뚜렷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