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69화 (269/354)

269. 기브 앤 테이크

“JGTO 분위기가 아주 삭막하다던데?”

“최근 그 나라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삭막하죠. 한때 잘나가던 호황은 다 지나갔고 종이호랑이가 된 지 오래죠.”

“정치나 경제, 이런 거는 내 알 바가 아니고 나한테 중요한 것은 오로지 TPK 일본 사업이지.”

“경제가 파탄이 난 것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가?”

“게다가 제가 똥물까지 끼얹었으니, 송구합니다.”

“하하하! 그래서 내 능력과 정성이 필요한 거지. 쉽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생각만큼 비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기껏 치료해 놨더니 다시 일본으로 가겠다고 한다.

물론 늑골 부상은 완치되지 않았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허리와 척추 부상은 상당히 호전되었는데,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본 사업에 대한 그의 충만한 의욕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치료와 재활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라도 하는 것이 나을 것도 같았다.

안 그래도 경제 상황이 안 좋은데, 모모코에 이어 필상까지 일본 투어 불참을 선언했으니 그의 사업에는 걸림돌이다.

그런데도 비관적이지 않다고 판단하고 의욕을 보이는 미켈슨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나저나 일본에 가시면 우리 봄이 좀 살펴 주십시오.”

“아! 그 깜찍한 여자애?”

“애라고 생각하면 큰코다칠 겁니다. 하하하.”

JLPGA는 이미 4주 전에 개막했지만 봄은 주최 측의 열렬한 초청도 무시하고 다음 주부터 투어에 참가한다.

친자매처럼 지내는 모모코와 같은 일정을 소화하면서 거의 붙어 다닌다고 하더니 일본은 내팽개치고 한국 투어에 참여하려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으나 약속은 지킨 샘이었다.

하지만 굳이 KLPGA 개막전에 출전하는 모모코, 더 마스터즈에 출전하는 필상과 시기를 맞출 필요는 없는데, 참으로 고집스러운 녀석이었다.

“그래. 절대 만만한 스타일은 아니더군.”

“일본에서는 이즈카 하루라고 부릅니다. 루키가 프로 투어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알았어. 같은 소속사니까 신경은 쓰겠는데, 자네는 봄보다 모모코를 더 챙겨야 하는 거 아닌가?”

“휴우! 그러게 말입니다. 가능하다면 제가 직접 백이라도 매고 돕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잖습니까!”

“그야 그렇지. 그런데 한국에서 모모코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고 하던데?”

“고마운 일이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한국 여자 투어가 어디 만만한 곳입니까? 아무리 제 아내라도 결국은 타국이잖아요.”

“글쎄……. 한국 사람들이 일본인을 경시하는 건 알고 있는데, 모모코는 전혀 그렇지 않을 걸?”

그렇게만 된다면 걱정을 한시름을 덜 수 있을 것이다.

그녀라면 사족을 못 쓰는 팬들이 몰려오는 일본 투어를 외면하고 한국 투어를 선택한 모모코다.

아이 때문이지만 그녀의 선택을 한국 팬들이 응원하고 아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남편의 마음일 뿐, 실제 투어에 출전한 그녀가 겪을 환경은 낯설고 외로울 것이다.

미켈슨의 예상처럼 팬들의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회가 되면 무리를 해서라도 지원사격을 해야겠다는 판단도 내렸다.

그렇게 미켈슨은 텍사스를 떠났고 필상도 골프의 성지, 오거스타 내셔널 GC가 위치한 조지아로 날아갔다.

* * *

이젠 어딜 가나 사람이 붐비는 곳이라면 피할 수가 없다. 특히나 대회를 위해 이동할 경우, 필상의 동선을 파악한 기자들을 공항에서 먼저 만나 인터뷰를 하는 것이 몸에 익었다.

애틀랜타 공항에 내려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기자들과 팬들까지 몰려온 이유는 이번 대회가 가지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골프인의 한 사람으로서 위대한 역사의 현장을 방문하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어서 오거스타를 만나고 싶은 저를 이해해 주시고 가급적 간단한 질문만 받겠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인터뷰는 처음 사회를 보는 서 팀장이 진땀을 흘릴 정도로 열정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버렸다.

-이번에 마스터즈를 우승하면 일단 커리어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되는데, 자신이 있으신가요?

“저를 다시 한 번 곤란하게 만드시는군요. 자신감을 피력하는 것이 교만한 모습으로 비치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미 밝혔듯이 저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PGA투어 역사상 3연속 우승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4연승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는 걸 아십니까?

“하하하! 제게 또 하나의 짐을 지우시는군요.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듯 이번 대회도 똑같은 하나의 대회일 뿐입니다.”

필상의 그 말은 이전에도 쉽게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마스터즈가 아주 각별한 대회지만 지나치게 부담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이라는 놈은 앞뒤를 자를 경우, 요물이 된다는 것을 간과했다. 물론 있는 그대로 기사화시킬 기자도 있을 테지만 여유로운 필상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더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또한 평범한 것보다는 뭔가 이슈화를 시켜야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방송의 특성이라, 말을 하고 난 뒤에야 찜찜한 기분의 이유를 알았으나 되돌릴 수는 없었다.

-동업자들이 모두 이 대회에 불참하게 되었는데 그게 다 프로 선수로서 최선을 다하지 않고 한눈을 팔아서 그런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이건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타이거는 자신의 소망을 관철하기 위해 태국으로 떠났지만 역전패의 충격을 못 이기고 의욕이 사라졌다고들 말한다.

그에 대해 본인이 직접 설명하지 않는 한, 필상이 대신 얘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미켈슨은 부상 때문에 피치 못한 상황이다. 그 내용을 알면서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여러 의미가 함축되었다고 봐야만 했다.

“투어시드를 가진 프로라면 대회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어떤 이유로든 본업을 소홀히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죠. 팬들의 성원과 기대를 저버리는 행위도 지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언급한 필상이 잠시 뜸을 들이자 기자들의 표정은 한껏 달아올랐다. 필상의 입에서 기대와는 달리 동업자들을 비난하는 언급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추가 질문을 던지려는 기자들이 우수수 손을 들었으나 필상은 차분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프로 선수도 인간입니다. 바라는 것이 있고 꼭 하고 싶은 일도 있습니다. 현재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을 생각하며 무엇이 최선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 뒤에 행동합니다. 당장은 비난을 받아도 그걸 감수할 정도로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간섭할 수는 없습니다. 그게 설사 열성적인 팬일지라도.”

-앞뒤가 안 맞는 말씀을 하시네요. 그 어떤 변명도 본업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한 핑계로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기자들이 야속하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푸근한 기분도 들었다. 이들은 물론 많은 팬들이 필상과 동업자들이 한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온 말들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연승을 이어 가는 절대자로 칭송을 받지만 아직 타이거나 미켈슨과 비교할 등급은 아니라고 여겼는데, 어느새 같은 반열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런 긍정적인 판단에 인상을 구기지 않고 해맑게 웃으며 응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러분들의 염려와 조언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저는 물론 인터뷰 기사를 확인한 타이거, 미켈슨도 같은 생각일 겁니다. 그들은 아주 떠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각기 사정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일 뿐, 재충전이 끝나고 준비를 마치면 더욱 좋은 모습으로 복귀할 것이니 너무 몰아붙이거나 매도하지는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힘겨운 3연승을 이어 왔다.

그 정도하면 온통 호의적인 기사로 메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지금이라도 빨리 깨어나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이 서는 순간, 필상은 더 몸을 낮추기로 마음먹었다.

언론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기다릴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주가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으며 부정적인 시각도 변화시킬 우군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들의 말에 힘이 실릴 때까지 기다려 주면 그만이다.

아니꼽고 더러워도 공인인 자신의 태도는 의도와 상관없이 오염될 수 있음을 아직은 인정해야만 했다.

당장은 말이 많아도 결국 시간이 흐른 뒤에는 더 좋은 평가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것이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바람직했다.

하지만 꼭 해야 할 말은 있었다.

“한눈을 팔았다고들 하시는데, 사실 이전 대회에서 미켈슨이 얼마나 대단한 경기력을 보였는지 알고 계시죠?”

그 말은 곧 TPK 사업으로 인한 영향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도 부정하기 힘들지만.

-‘절대자’ 때문에 부상을 입은 것 아닌가요?

“하하. 아픈 상처를 후비시네요. 결과는 그리 되었지만 그건 프로 선수의 숙명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부상을 상대 선수에게 부담시키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두 분 사이에 불화는 없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는 치료와 재활차 떠나며 제게 이걸 주더군요.”

필상은 이곳에 오는 내내 숙지하던 야디지 북을 안주머니에서 꺼내 들어 보였다. 그냥 봐서는 무엇인지 알아볼 도리가 없기에 기자들은 삽시간에 웅성거렸다.

하지만 필상은 그냥 빙긋이 웃고만 있는 가운데, 앞에 앉은 한 기자가 그 내용을 알아보고는 소리쳤다.

-야디지 북! 혹시 그거 오거스터 GC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만약 저를 원망한다면 이런 거를 줄 리가 만무하지 않을까요?”

기자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디지 북은 프로 선수가 소유한 그 어떤 장비보다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두 해 투어를 뛸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 주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기록이 생생히 담긴다.

당장은 아니라도 내년, 그 이후에는 자신에게 우승을 가져다 줄 보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절대 남과 공유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까 야디지 북을 알아본 영특한 기자가 돌연 엉뚱한 말을 던졌다.

-그건 타이거 우즈의 야디지 북이 아닌가요?

“네?”

필상도 얼른 확인했는데, 하필 겉장에 타이거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미켈슨의 야디지 북을 보여 준다는 게 바뀐 것이다.

아무 거나 보여 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굳이 확인하지 않고 꺼냈는데, 그 행동이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미켈슨은 물론 타이거의 야디지 북까지 손에 넣었다면 그건 대충 잡아도 마흔 번 이상의 실전 경험과 8번의 우승이 녹아든 보물과 같은 책자이기 때문이다.

-두 명 모두 당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줬단 말인가요?

“하하하! 그렇게 생각하면 더 기분이 좋아지기는 하네요. 정말 고마운 일이지요. 감사히 활용하고 돌려줄 생각입니다.”

마지막에 돌려준다는 사족을 더 붙인 이유는 그 두 프로가 은퇴를 선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자가 말하길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 의미를 크게 부여했다.

그 이유를 따져 보면 미켈슨의 조언과도 일맥상통한다. 오거스타는 절대 첫 방문자에게 그린재킷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그만큼 난해한 코스라는 것도 다들 공감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타이거와 미켈슨이 필상의 우승을 적극 지원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불필요한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취한 행동이 다른 선수들의 시기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괜한 자랑을 했나 싶었다.

그런데 또다시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나왔다.

-세 분의 우정이 정말 부럽습니다. 틈만 나면 서로 칭찬을 하던데, 그게 다 사업 수단이라고 생각한 제가 부끄럽군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승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믿고 도와주는데 실망시키면 안 되지 않을까요?”

도무지 인터뷰 현장의 분위기를 이끌어 갈 수 없었다.

예상과 달리 우호적이지 않아 당황했고 괜한 짓을 했다고 자책할 때 오히려 포근한 분위기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원지 않는 이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세상 참 불공평하지 않나요? 최고라고 평가받는 선수에게 그런 알찬 정보까지 주어지면 그거 없이 싸워야 하는 다른 선수들은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발언이었다.

필상의 연승을 아니꼽게 생각하고 그랜드슬램은 어림도 없다고 믿던 이들에게 꼬투리가 생겨난 것이다.

그 판단이 서자 필상은 진화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첫 마디부터 너무 파격이었다.

“세상이 공평하다고 생각하시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혜택은 당연하다는 말입니까?

“모든 선수의 능력이 동일하고 같은 조건에서 경기를 할 것 같으면 대회는 왜 하는데요? 불리한 여건을 이기는 선수도 있으며 모든 지원을 다 받아도 지는 선수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입니다. 제가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의 생각을 무시할 의사는 없으나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것을 주는 사람이 어땠을지 말입니다.”

인간관계는 다 ‘기브 앤 테이크’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주어지는 것은 부모를 잘 만나는 것뿐, 받은 것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만큼 줬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냥 인지상정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인터뷰는 다양한 해석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굳이 이런 화제를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미 터진 봇물은 골프팬들에게 많은 화제를 낳을 것 같았다.

그에 관련된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 같고 더 확대되는 것도 원지 않아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를 청한 필상은 인터뷰 말미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보탰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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