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5&4
-1야드도 되지 않는 버디 예약! 조던 스피스로서는 아주 죽을 맛이겠네요!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몸은 점점 더 굳고 생각도 많아진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심리적으로 더 쫓길 거라는 말씀이군요. 그런 상황이라면 공 프로가 이번 홀을 가져오는 순간 승부는 거의 기울었다고 봐도 무난하겠네요.
-마른하늘에 벼락이 칠 정도의 이변? 너무 극단적인 비유 같지만 저도 그만큼 무난한 우승을 거두리라고 생각합니다.
골프는 장갑을 벗어 봐야 안다는 말이 있다.
실제 드라마틱한 역전 우승은 자주 일어나는 편이다. 도저히 질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뒤집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기에 전문가로서 무난한 우승을 언급한 것은 적절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실언도 그냥 넘기는 분위기였다.
-하하하. 그건 아마추어들에게나 해당되는 말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큰 대회일수록 믿기 힘든 역전이 잘 나오곤 하지만 빈틈없는 공 프로의 샷 감각이 최고조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필요치 않은 것 같습니다. 하하하.
중계진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스피스가 벙커샷을 했다. 워낙 난해한 샷이었기에 필상의 2업을 기정사실처럼 언급하며 우승을 자축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런데 한참 떠들던 중계진이 벌떡 일어날 상황이 일어났다. 그냥 벙커를 탈출하기만 해도 ‘굿 샷!’ 소리를 들을 상황이건만 아슬아슬하게 벙커 턱을 넘긴 타구가 깃대를 정통으로 맞더니 그냥 홀컵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방금 전 허 위원이 언급한 마른하늘에 벼락이 칠 확률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기적적인 버디가 꼭 필요한 순간에 터진 것이다.
“와아아아! 나이스 버디!”
“조던! 조던! 조던!”
승리를 장담하던 이들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었다.
그 충격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중계진은 방송 사고에 준할 만큼 긴 시간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들의 방정맞은 말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허 위원보다 임 캐스터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조던 스피스! 정말 대단한 선수로군요.
-네…….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여실히 보여 준 벙커샷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도 버디를 잡으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1업으로 앞서기 때문에 침착하게 버디 퍼팅을 성공해야 합니다.
“참 시끄럽네.”
“천천히 하세요.”
“그래야지…….”
사실 굉장히 허탈했다.
이 홀을 잡기 위해 들인 공이 얼마인데?
장타와 정확한 웨지 샷, 그 어느 하나 쉽지 않았다. 그런데 2번이나 실수한 스피스가 적어도 지지 않는 상황이라니!
팬들의 소란을 핑계 삼고 있지만 사실은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짧은 퍼팅이라도 마음이 흔들리면 홀컵도 외면한다는 것을 직시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빠르게 마음을 다진 필상이 다시 한 번 라이를 살피고 차분하게 어드레스를 취했다.
“빨리 빨리! 한국인들 빠른 거 좋아하잖아!”
퍼팅 스트로크를 시작하는 순간 터진 그 외침은 단지 샷을 방해하는 수준의 언급이 아니었다.
모든 스포츠에서 금기시하는 차별적인 발언이었다.
때문에 가까스로 퍼팅 어드레스를 푼 필상은 잠시 숨을 골랐다. 마음 같아서는 소리를 지른 자를 찾아내 대가를 치르게 만들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경기위원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경기 중임에도 즉시 소리를 지른 사람을 찾았고 진행요원들에게 그를 필드 밖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그 광경을 지켜본 팬들의 반응이었다.
“힘내라. 미스터 퍼펙트!”
“그래. 그냥 잊어버리고 경기에 집중해!”
실은 경기위원의 결정에 대한 야유가 터질 줄 알았다. 몇몇 사람은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움직이기도 했다.
하지만 갑자기 필상을 응원하는 소리가 터지면서 어색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전환되었다.
성숙한 골프팬의 자세, 다들 그걸 지지한 것이다.
저간의 상황을 지켜본 필상은 가슴이 뭉클했다.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바람직한 분위기를 갤러리들이 직접 주도하는 모습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아! 반전의 연속이군요!
-어제 하오통과의 대결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을 지켜본 많은 골프 팬들이 한층 성숙해진 것 같습니다. 이 얼마나 보기 좋은 모습입니까!
-역시 골프의 메카, PGA라고 해야 하나요?
-본받을 것이 있다면 국적이나 인종을 떠나 배워야 합니다. 우리 코리안 투어의 팬들도 이런 멋진 자세를 품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열렬히 공감합니다. 세계 최고의 남녀 선수를 보유한 나라답게 선수를 존중하고 팬들을 배려하는 문화, 감히 단언컨대 이미 저희 투어는 그 정도 의식은 갖췄다고 자부합니다.
실제 한국인들의 골프에 대한 이해도는 대단히 높다.
골프는 칠 줄 몰라도 국위를 선양한 선수의 경기를 지켜볼 넉넉한 품을 지닌 한국인의 시민 의식은 남다르기 때문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로운 시위로 정권을 교체한 나라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또한 극단적인 주장까지도 다 수용하는 나라, 그래서 더 복잡하고 치열하게 대립하지만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사회는 절대 후퇴할 수가 없다.
답답할 정도로 더디지만 그런 과정을 겪으며 한 발 한 발 발전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텅!
필상은 버디를 놓치지 않았다.
아무리 짧은 퍼팅이라도 심적인 부담이 크면 멀게 느껴지고 엉뚱한 실수가 나오기 마련인데, 필상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다만 환상적인 버디로 기세가 오른 스피스를 어떻게 상대할지, 그에 대한 전략을 새로 구상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정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성실한 플레이!’
기분이나 분위기에 휩쓸리는 순간, 좋은 샷은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473야드 파 4, 9번 홀에 들어선 필상은 도리어 19도 유틸리티를 잡았다.
그리고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샷으로 289야드를 보냈다. 내리막이 많은 홀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결과였다.
“어?”
“의도는 좋네!”
드라이브를 들고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간 스피스의 연습 스윙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필상이 짧게 공략한 것을 본 그가 이번 홀에서는 자신이 앞서가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내리막이 심해 조금만 길게 쳐도 러프 지역을 건너 우측으로 휜 페어웨이에 올릴 수 있는 홀 구조였다.
그냥 조금만 강하게 쳐도 되건만 다분히 보여 주려는 의도가 엿보인 그의 드라이브 티샷은 시기적절치 않았다.
지난 홀의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고맙다. 스피스!’
흥분한 그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게 성공하든 성공하지 못하든.
반드시 좋은 스윙이 좋은 결과를 낳는 게 아니듯, 나쁜 스윙이 최악의 결과를 낳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게 바로 골프의 오묘한 점인데, 과욕을 부린 그의 티샷이 정확한 임팩트가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그의 타구는 페어웨이를 지켰다.
-어! 좀 이상한 결과 아닌가요?
-페이드를 건 장타를 때리려고 한 것 같은데, 타구가 말리면서 오히려 좌측 페어웨이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래도 314야드, 우리 공 프로의 공보다 앞에 있네요.
-아무래도 뜨끔했을 겁니다. 하하하!
허 위원은 그냥 웃어 넘겼지만 그 샷의 의미까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필상으로서는 아주 좋은 기회였는데, 행운이 스피스를 살린 것이다.
운이 좋다는 말을 하는 것이 꺼려져 뱉지 않았을 뿐.
필상도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상황은 생각하기 마련, 미스 샷이 나오지 않은 것을 억울해 하면 자신만 손해다. 차라리 그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샷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189야드에요.”
“5번 아이언.”
좌측 페어웨이에서 그린을 바라보면 북동쪽 사선으로 길게 늘어진 형태다. 때문에 어떤 라운드에서는 장타로 우측 페어웨이를 공략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상대의 실수를 기다렸고 그 그물에 걸렸으나 결과는 기대를 저버렸다. 그러나 아쉬워할 여유가 없었다.
5번 아이언을 잡은 필상은 최적의 궤적을 도출해 냈고 맞바람이 의외로 강하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강하게 때렸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몇몇 고수들은 필상의 판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 팀장. 너무 센 거 같지 않아?”
“다 이유가 있으실 겁니다.”
“이유? 그래, 내가 말을 말아야지.”
TV로 봐도 되는데 미켈슨은 꾸역꾸역 경기장에 나타났다. 서 팀장이 휠체어를 밀고 다니는 모습은 누가 봐도 눈에 확 띄었다.
그를 알아본 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으나 그는 특유의 넉살을 부리며 제발 경기 좀 볼 수 있게 봐 달라고 사정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필드에 나타난 그의 열정을 인정한 팬들도 그를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통행이 불편한 그를 위해 길을 터주는 배려까지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영 심통 어린 표정이었다.
대화를 나누는 서 팀장의 필상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괜히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저거 보세요! 맞바람이 있었네요.”
“그러네. 하지만 버디를 잡기에는 어려운 라이야.”
“두고 보면 알죠.”
꼭 버디를 해야 하는 홀인지는 스피스의 세컨샷 결과에 좌우된다. 매치플레이는 아무리 잘 쳐도 상대가 더 잘 치면 소용이 없고, 못 쳐도 상대가 더 못 치면 이길 수도 있다.
때문에 비슷한 방향에서 시도된 스피스의 아이언 샷을 바라보는 팬들의 시선은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어떨 것 같아요?”
“짧아!”
“짧으면 해저드인데요!”
필상은 차마 자신의 입으로 시인하기는 거북했는지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타구가 그냥 뚝 떨어……. 헉!
포물선의 궤적이 급격히 꺾이는 것을 확인한 캐스터는 그린에 올라가지도 못할 것 같다는 말을 하려던 차였다.
그런데 그사이 결과가 나왔다. 타구가 떨어진 지점은 그린 가장자리였는데, ‘딱!’하는 굉음을 낸 타구가 기형적으로 높이 튀었다.
벼랑의 축대를 쌓은 암석에 정통으로 맞았던 것이다.
결과는 순식간에 하늘에 맡겨졌다. 그 방향 그대로 잘 튀면 오히려 짧았던 비거리를 만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은 앞이 아닌 위로 가파르게 솟구친 공이 다시 떨어질 때는 백스핀이 걸린 것처럼 뒤쪽으로 휘었다.
“우우우우!”
해저드에 떨어지는 타구에 머리를 감싸 쥔 팬들이 많았다.
티샷은 운이 좋았지만 또다시 행운이 따라 주지는 못했다. 필상이 강하게 때리고도 홀컵을 지나지 못한 자리에 떨어진 것을 봤다면 맞바람을 의식했어야 옳다.
하지만 스피스는 아예 필상의 샷을 참조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좋은 정보를 주기 싫어 이상하게 친다고 판단한 것부터가 실수였다.
그 결과 아주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야 말았다.
다행이라면 그린 에지에 맞고 떨어져 드롭 위치가 그나마 좋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번 칩샷을 넣는다면 필상의 퍼팅을 기다려 볼 기회가 있기에 그는 신중한 샷을 했다.
-그럼요. 장마다 꼴뚜기일 수는 없죠. 하하하.
-상대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침착하게 핀에 붙여 파를 확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대망의 결승전이다.
우여곡절을 모두 뚫고 올라온 최고의 선수들이 맞붙었다. 하지만 긴장이 극도로 고조된 상황에서는 그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허 위원은 새삼스럽지만 확실한 처리를 요구했다.
물론 필상이 그 말을 들을 수는 없다.
그저 그러기를 바라는 것일 뿐.
텅!
별 걱정을 다한다고 타박하던 임 캐스터의 예측이 맞았다.
지켜보는 이들이 모두 긴장했지만 정작 필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과감한 퍼팅을 시도했고 그냥 떨어뜨렸다.
간절히 이기기를 소망했던 홀에서는 비겼지만 오히려 장타를 날리지 않고 상대의 실수를 의도한 홀에서 쉽게 이긴 것이다.
전반을 2업으로 마친 필상은 아직 긴장의 끈을 놓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서 잰걸음으로 걷고 있는 스피스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를 확인한 필상은 마음이 푸근했다.
처음과 달리 걸어가는 내내 손목을 휘저으며 자신의 스윙 폼을 자꾸 확인하는 걸 보니 이미 정상적인 리듬은 깨졌다.
[10번 홀 - 394야드 파4: 2온 2퍼팅 파로 2UP 유지]
[11번 홀 - 189야드 파3: 1온 1퍼팅 버디로 3UP]
[12번 홀 - 584야드 파5: 3온 1퍼팅 버디로 4UP]
12번 홀에서 스피스는 2온을 시도해 성공했다.
하지만 필상이 가까지 붙여 버디 기회를 잡자 이글을 노리고 과감한 퍼팅을 감행했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남은 홀의 수는 자꾸 줄어드는 가운데 지난 홀에서 버디 퍼팅을 놓치며 3홀 차로 벌어진 것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을 테니까.
하지만 강하게 민 스트로크는 퍼터 페이스가 닫혀 맞으며 홀컵과는 한참 떨어진 지점을 지났다. 게다가 너무 길었다.
이글을 놓친 그는 3야드 버디 퍼팅마저 놓치며 스스로 낭떠러지를 향해 바짝 다가간 셈이었다.
-어허! 이렇게 되면 스피스는 도미에 몰리게 되었네요.
이미 승부의 추는 기울었다.
그래도 팬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기대했을 텐데, 기세가 꺾인 스피스는 13번 홀 티샷이 확 당겨졌다.
좌측을 끼고 도는 워터해저드에 빠지면서 도미 상황에 몰렸고 14번 홀에서는 필상보다 더 가까이 붙였지만 필상이 7야드 버디 퍼팅을 넣는 순간, 그의 표정은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희망이 없는 승부를 이어 가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컨시드 버디를 받았으나 결승전의 최종 결과는 5&4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