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66화 (266/354)

266. 강자의 마인드

“기세가 좋아!”

오늘 스피스의 골프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거였다.

굉장히 정교한 스윙을 가지고 있지만 3라운드만 되면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허망하게 무너지곤 했다.

데뷔 이듬해부터 4년간 메이저 3승을 포함 13승을 거뒀던 무시무시한 기량은 어느 날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아니, 실력은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르나 쉽게 깨지는 유리 멘탈로 인해 그를 응원하는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차라리 기량이 딸리면 모를까, 기껏 우승권에 다가가 놓고 결선 라운드에만 오르면 무기력한 경기를 펼치는 통에 1위에 올랐던 세계 랭킹이 30위 밖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정교한 스윙을 하네요. 하지만 생긴 건 멀쩡한데 새가슴이라면서요?”

“새가슴? 그렇지는 않아. 디 오픈, 더 마스터즈, US 오픈까지 우승한 투어프로잖아. PGA 챔피언십만 정복하면 그랜드슬래머가 된다고.”

“그럼 왜 바닥을 기었던 걸까요?”

“음……. 개인적인 문제일 거야. 자신에게 쏟아지는 팬들의 기대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지.”

그건 어디까지만 추론에 불과했다.

최정상에 올랐던 선수는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다. 올라가기도 어렵거니와 이미 남다른 기량을 갖췄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의 침체기는 사적인 영역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자. 이번 홀에서 첫 번째 승부를 걸어 보자고.”

“네. 오늘은 487야드에요.”

“드라이브.”

7번 홀에서 버디를 낚아 1업으로 앞섰다.

전략대로라면 이번 홀은 안전하게 가야만 한다. 하지만 세 번이나 연거푸 추격을 허용했기 때문에 이제 한 번쯤 도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앞선 상황이라서 이 홀을 잡는다면 2업, 최소한 비기기만 해도 상대에게 주는 부담은 크게 가중될 것이다. 어차피 매치플레이는 누가 먼저 기선을 제압하느냐의 싸움이다.

마침 8번 홀은 긴 파 4홀이다.

내리막이 제법 되지만 티샷을 300야드 이상 보내지 못하면 2온 자체가 불가능하다. 왜냐면 우측으로 휜 꼭짓점을 넘어야 세컨샷 상황에서 그린이 보이기 때문이다.

쉬익!

앞선 홀까지 크게 무리하지 않았다.

그냥 정확한 방향성만 유지해도 가볍게 320야드는 나오기 때문에 세컨샷을 얼마나 붙일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하지만 긴 파 4홀을 만난 필상은 승부수를 던지겠다는 결심을 굳혔기에 평소보다 강한 연습 스윙을 휘두르며 최적의 샷 이미지를 그렸다.

‘아예 그린을 바로 보자!’

487야드를 단번에 공략할 의도는 아니고 그 방향으로 캐리 335야드를 넘기면 넓은 페어웨이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붉은 선으로 나타난 이미지 궤적들은 하나같이 좌측으로 급격히 휘었다. 지상에서는 감지되지 않는 바람이 허공을 장악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까앙!

필상의 티샷 타구는 마치 긴급 출동하는 전투기처럼 낮게 깔리는가 싶은 순간, 어마어마한 속도로 치솟기 시작했다.

그냥 보기만 해도 기분이 후련해지는 정말 파괴적인 힘이 느껴졌다. 그런데 타구의 궤적이 좀 이상했다.

-어? 페이드 샷인가요?

-네. 오른발이 살짝 앞으로 나온 스탠스였던 것을 보면 페이드 샷을 구사한 것 같은데, 지금 에임을 한 방향이라면 굳이 저런 샷이 필요 없을 텐데…….

허 위원은 미처 말을 맺지 못했다.

위험천만하게 우측 숲으로 휘던 타구가 정점을 찍는 순간부터 다시 좌측으로 당겨진 궤적을 그렸기 때문이다.

-뭐죠? 페이드와 드로우를 동시에 거는 샷도 있나요?

-아닙니다. 그런 샷은 만화책에서나 볼 수 있을 뿐, 실전에서는 스핀을 한 방향으로 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저런 기이한 궤적이 나오는 거죠?

-바람. 바람이 부는 것 같습니다.

-허공에 말입니까?

-네. 그렇지 않고는 지금의 저런 샷 궤적을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표면에서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 바람을 어찌 알고 페이드 샷을 구사한단 말입니까?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네요.

-그게 바로 우리 공 프로의 천재성 아닐까요?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해설이었다.

사람이 어찌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는 허공에 불고 있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늘 불가능을 가능케 했던 필상의 천재성이 언급되자 캐스터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괜히 맞섰다가는 필상의 안티로 인식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곤란한 번민을 한 방에 날리는 환상적인 장면이 화면에 떴다. 교묘한 궤적을 그리던 타구가 울창한 숲과 벙커를 지나 꽤 넓은 러프까지 넘어 페어웨이에 떨어졌진 것이다.

얼핏 봐도 캐리가 340야드는 넘어 보였다.

-와! 드디어 우리 공 프로의 트레이드마크인 장타가 터졌습니다! 대체 얼마나 날아간 거죠?

-순수한 캐리만 346야드이고 최종적으로 멈춘 지점은 무려 373야드입니다. 373야드. 하하하!

-세게 때린 것 같지도 않았는데, 정말 무시무시하군요.

-작정하고 날리면 대체 얼마나 날아갈지 저도 궁금합니다.

-저 정도라면 장타 대회에 나가도 되지 않을까요?

-하하하! 그건 안 됩니다. 10개를 때려 페어웨이에 들어가는 공이 2, 3개인 그런 스윙이 몸에 익으면 투어를 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굳이 세게 때리지 않고 지금처럼만 조절해도 되지 않을까요?

-물론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영역이 다릅니다. 일발 장타를 노리는 스윙은 진정한 의미의 골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티샷은 골프의 극히 일부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필상의 장타에 중계진이 엉뚱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필상은 팬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티잉 그라운드를 내려왔다.

누가 뭐래도 팬들을 열광시키는 가장 큰 퍼포먼스는 역시 시원한 장타라는 것이 확인된 순간이기도 했다.

필상보다는 스피스를 응원하는 팬들이 절대적으로 많았으나 그 순간만큼은 필상이 이 대결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런데 필상과 교차해 올라가는 스피스는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물론 그걸 탓할 생각도, 그럴 이유도 없지만 마음은 푸근했다.

자신의 성공적인 티샷이 만족스럽기도 하지만 통상 매치플레이 굿 샷은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미사키도 필상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장타를 때릴 가능성이 높겠죠?”

“아니. 저 연습 스윙 좀 봐.”

조던 스피스가 비록 장타를 펑펑 날리는 선수는 아니지만 젊은 선수라면 얼마든지 350야드 정도는 날릴 수 있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이 문제일 뿐, 대다수의 선수들은 희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무리수를 둔다. 지금처럼 상대가 팬들의 환호를 받는 경우라면 더더욱 참기 힘들다.

그런 와중에 스피스는 차분하게 자신의 샷을 했다.

도리어 기대가 깨진 필상이 울적할 정도로 깨끗한 티샷으로 311야드, 페어웨이를 지켰다. 평소보다 조금 세게 치기는 했으나 방향성을 잃지 않을 한도를 벗어나지 않은 깔끔한 샷이었다.

“독하네요.”

“하하하. 남은 거리 181야드는 방향이 좋지 못해.”

“앞 핀도 아닌 좌 핀인데요?”

미사키가 반문한 이유는 그린 앞을 가로막은 항아리 벙커에 빠질 가능성이 낮은 위치에 핀이 꽂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지금 핀이 꽂힌 지점이 그에게는 더 까다롭다고 판단했다. 왜냐면 그가 세컨샷을 해야 할 지점은 그린의 좌측 경계선과 일직선이기 때문이다.

우에서 좌로 불고 있는 바람의 양을 정확히 짚어 내지 못하면 좌측 벙커에 빠질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유치한 발상이지만 행여 바람결에 실려 그에게 전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이스 샷!”

“인 더 홀!”

7번 아이언을 잡은 스피스는 컨트롤 샷을 시행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정확한 임팩트가 이뤄졌기에 그의 팬들은 최고의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을 담아 열렬한 응원의 소리를 더했다.

하지만 필상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페이드 샷을 해도 모자랄 판에 자신의 장기인 드로우 샷을 구사한 것은 무리수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린 우측을 보고 과감한 인 아웃 스윙을 한 것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멋들어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타구가 생각보다 더 많이 휜다는 것을 인지하기 전까지는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좌중은 침묵에 잠겼다.

-바람! 바람이 부는 거죠?

-그렇습니다. 방금 전에 두 선수의 티샷이 좌측으로 말린 것을 봤으면서도 왜 바람을 고려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필요 이상으로 많은 회전이 걸린 드로우 샷을 구사한 건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 점은 제가 봐도 좀 의아하군요.

허 위원은 스피스의 이번 선택을 굉장히 아쉬워했다.

누가 보면 마치 스피스를 응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의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필상이 걸어온 승부수에 너무 쉽게 빠지면 결승전의 재미가 반감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으흐! 결국 벙커네요. 턱도 상당히 높고 안에 들어가면 핀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데, 이렇게 되면 장타를 날리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을까 싶네요. 하하하!

-장타로 맞서지 않은 것은 나름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상대의 장점을 따라가서는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컨샷은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는데, 자신의 장점을 보여 주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앞섰던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장타로 맞서지 않고 자신만의 공략을 선택한 것은 바람직했다. 세컨샷까지 좋았다면 충격을 받은 사람은 오히려 필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람을 간과한 스피스의 타구가 벙커에 빠지는 순간, 필상은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했다. 물론 그의 표정 그 어디에도 기뻐하거나 흥분한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뭘 드릴까요?”

“52도 갭 웨지.”

너무 높이 띄우면 바람의 영향을 받는다. 수시로 변하는 바람의 양을 장담할 수 없기에 탄도가 높은 샷은 불가했다.

그렇다면 피칭웨지를 잡아 적당히 떨어뜨린 후 굴리는 시도도 고려할 수 있는데, 그 또한 여의치가 않다. 그린 앞에 놓인 벙커가 그 궤도를 방해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필상이 내린 결론은 바람의 영향을 최소화 시킬 수 있는 낮은 탄도의 샷을 구사하되, 강한 스핀을 거는 선택이었다.

미사키에게 받아 든 갭 웨지의 그루브 상태를 확인하고 슬며시 만져 본 것도 그린에서의 런을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한 점검이었다.

‘115야드라 이거지?’

필상은 웨지의 페이스를 평소보다 가파르게 세웠다. 정해진 각도 52를 그대로 유지하면 무조건 뜨기 때문이다.

공을 평소보다 조금 더 우측에 두도록 어드레스를 취한 필상의 스윙은 굉장히 느려, 보는 이의 긴장감을 극대화시켰다.

지금 강행하는 샷은 무엇보다 정확한 터치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마치 벙커샷을 하는 것처럼 가파르게 올라간 백스윙, 하지만 정상을 찍은 클럽 헤드가 내려올 때는 여지없었다.

정확히 찍어 친 헤드가 큼직한 잔디 덩어리를 전방으로 날려 보내며 그 방향으로 쭉 뻗은 뒤에야 피니시로 복귀했다.

-어? 탑핑?

-아닙니다. 스톱!

탄도가 너무 낮은데다가 타구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다고 느낀 임 캐스터는 깜짝 놀라 경솔한 단어를 뱉고 말았다.

끔찍한 미스 샷이 나온 줄 알았기 때문에 필상의 샷 의도를 짐작하고 있던 허 위원도 덩달아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미 떠난 공이 알아들을 리도 없고 말을 들을 리도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기에 멈추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부질없는 행동을 왜 하냐고 타박하던 그가 아니던가.

하지만 절호의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평소의 소신마저도 망각케 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런 행동을 하는 보통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거의 펀치 샷을 보는 것 같은데, 그렇죠?

-네. 강한 스핀을 걸기 위해 찍어 친 샷이었습니다.

허 위원의 말은 곧바로 증명되었다.

그린을 직격한 타구는 낮은 탄도를 고려하면 그린을 넘어 뒤쪽 화단까지 굴러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크게 바운드가 된 공은 믿기 힘든 급정거를 했다.

마치 브레이크가 걸린 자동차처럼 홀컵 바로 앞에 우뚝 멈춘 기기묘묘한 샷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우와아아! 나이스 샷!”

“정말 멋지다. 미스터 퍼펙트!”

진심에서 우러난 팬들의 응원 소리가 빗발쳤다.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 창조적이며 용감한 시도였다. 생각은 할 수 있으나 감히 도전하기에는 부담되는 샷이었다.

“스핀이 아주 제대로 먹혔어.”

“정말 환상적인 샷이었지만 전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런데 프로님은 그런 샷을 하면서 긴장되지도 않으세요?”

“긴장? 으음…….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지. 하지만 그 긴장을 누르고도 남을 강한 집중력을 발휘했지. 하하하!”

“긴장을 누르고도 남을 집중력이요?”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였다.

아무리 절대 강자로 평가받는 선수라도 승부처에 임한 매 순간 떨리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이겨 내는 방법은 가지각색일 수밖에 없는데, 한때는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감과 교만이 한 끗발 차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조금만 오버해도 교만한 마음이 침습하면서 심리적 동요를 일으키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는 것보다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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