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 드라마틱하게도
“어? 자네 지금 나와의 대결을 의식하는 건가?”
“그게 아니고 전 아무리 봐도 이길 것 같지 않았거든요.”
“뭐라고?”
미켈슨은 곧바로 발끈했다. 무조건 필상이 자신을 응원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필상의 의견은 오늘 아침을 기점으로 드러난 현상을 진단한 것일 뿐, 미켈슨이 지기를 바란 것이 아니다.
또한 필상도 착각한 것이 있다.
경기의 승패는 반드시 컨디션과 양의 상관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즉 실전은 얼마든지 다른 요소가 작용할 수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때문에 얼굴을 붉히고 있는 미켈슨부터 진정시켜야만 했다.
“역시 트러블 샷의 대가십니다!”
“하하하. 내가 창조적인 샷을 만드는 데 특출한 재능이 있기는 하지. 오늘은 내가 좀 불안해서 그랬는지 위험할 때마다 강한 집중력이 생기더라고.”
“어허! 오후까지 이어지지는 않겠지요?”
“글쎄……. 쭉 이어지기는 힘들 거라고 봐. 대신 다른 무기를 준비해 뒀으니까 각오하라고.”
대체 무슨 무기를 준비했다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필상은 잡념을 버리고 차분하게 샷을 점검했다. 그리고 준결승전이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1번 홀로 이동했다.
“어딜 갔다 온 겁니까?”
“비밀!”
준결승에 대비해 연습해도 모자를 판에 미켈슨은 연습장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정확히 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굳이 비밀일 이유가 없기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필상은 모든 감각을 동원해 그를 스캔했다.
그리고는 굉장히 씁쓸한 사태를 확인했다.
그의 몸에 이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무조건 말리고 봤겠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부상인데도 출전을 강행할 만큼 성적에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난감하네!’
처음에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프로가 승부에 임하면 개인적인 친분을 따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했다고 발끈했던 사람이 정작 필상을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어도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대가 필상이다.
그건 자만이 아닌 객관적인 평가다.
그런데 아무리 비장의 무기를 준비했다손 치더라도, 또 그게 그의 의도대로 잘 먹혀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의 몸 상태로는 우승을 담보할 수 없다.
‘차라리 무리하지 말고 다음을 기약하지!’
은근히 괘심했다.
대체 무슨 무기를 준비했나 했더니 어이가 없게도 심리전이었다. 필상이 샷을 할 때마다 한마디씩 던지곤 했는데, 그게 부아를 돋우기는커녕 필상의 이성을 더욱 냉철하게 이끄는 동기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냉정해진 필상은 무리수를 두지 않고 완벽한 경기를 펼쳤다. 1온이 가능한 첫 홀을 안전하고 정확히 공략해 2온 1퍼팅 버디, 그거면 충분했다.
필상이 장타를 노리다가 실수하기를 바란 것 같았으나 아예 유틸리티를 잡고 정확히 끊어 가는 모습에 그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3연속 버디! 아예 빈틈을 보이지 않는 멋진 퍼팅이네요!
-보시다시피 우리 공 프로는 아이언 샷 감각이 절정에 올랐기 때문에 굳이 모험적인 티샷을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에 비해 미켈슨은 너무 무기력한 것 같은데요?
-8강과는 달리 멋진 리커버리를 보여 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 프로가 먼저 세컨샷을 척척 붙여 버리니까 아무리 잘 쳐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렇군요. 잘해도 비길 수밖에 없다면 저라도 힘이 빠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친한 동료와 경기를 하면 아무래도 좀 느슨해지지 않나요?
-그건 개인의 성향마다 다릅니다. 제 생각에는 오히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필상의 속내를 모르는 한국 중계진은 엉뚱한 해설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홀 연속 패한 미켈슨도 충격을 받았다.
필상이 자신을 이렇게 냉정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법, 필상이 자신의 속내를 꿰뚫고 있음을 모른 채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야! 이거 어디 무서워서 같이 치겠나?”
“저 좀 일찍 쉬게 해 주면 안 될까요?”
“쉬어. 깨끗하게 포기하면 서로 좋잖아.”
미켈슨이 필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다. 오히려 알면서도 기권을 권한 것인데, 그 점도 아쉬웠다.
필상에게 이 대회가 가진 의미를 모르지 않으면서 어쩜 그리도 모른 척할 수가 있는 것인지, 역린을 건드리고 말았다.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요.”
“어디 한 번 붙어 보자고!”
이런 전개는 상상도 못했다.
그냥 서로 최선을 다하면 그만, 감정을 섞으면 서로 피곤해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상태를 감추고 과욕을 부렸다.
굳이 감춘 그걸 언급하는 것이 껄끄러워 참을 뿐, 이미 승부는 난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걱정스러웠다.
행여 무리하다 부상이 심각해지면 어쩌나?
그렇다고 그가 바라는 대로 기권을 할 수는 없는 노릇, 빨리 끝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후! 이거 대체 뭐죠?
-5연속 버디, 매치플레이라서 스코어는 큰 의미가 없지만 이런 기세라면 결승전에 오르는 것은 물론 우승 확률이 굉장히 높다고 볼 수밖에는 없겠습니다.
-와우! 오랜만에 공 프로가 장타를 날렸네요!
-장타요? 354야드를 장타라고 하면 안 되죠. 파 5홀이라서 2온을 위한 최소한의 거리를 보낸 것 같습니다. 물론 5다운인 미켈슨으로서는 암담하겠지만 말입니다.
5개 홀을 연속으로 진 미켈슨은 버디가 하나도 없었다. 경기 내용이 좋지 못할뿐더러 정상 컨디션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이라도 건강을 생각해 접는 것이 좋을 것 같았으나 필상의 장타에 오기를 드러낸 그는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냈다.
깡!
정확한 임팩트가 만들어 낸 타구는 쭉쭉 뻗어 나갔다. 하지만 피니시를 하던 미켈슨이 갑자기 클럽을 떨어뜨리고는 웅크리고 앉았다.
왼쪽 옆구리를 움켜쥐고 잔뜩 찡그린 그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필상은 얼른 티잉 그라운드로 뛰어 올라갔다.
“아이 진짜! 갈비뼈 나간 거 아닙니까?”
“으으으…….”
대답조차 힘들었는지 신음 소리만 흘린 미켈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상은 얼른 진행요원에게 앰뷸런스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티샷이 떨어진 지점을 바라보는 미켈슨의 시선에 필상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공이 눈에 보입니까?”
“으으으…….”
필상의 타박을 받으면서도 그는 일어서려고 했다. 혹시 괜찮은지 확인하고 괜찮다면 경기를 속행하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더 큰 신음 소리를 낸 그는 이내 드러눕고 말았다. 필상이 판단하건데, 갈비뼈는 물론 근육도 상당히 손상된 것 같았다.
“부상은 왜 속인 겁니까?”
‘알고 있었어?’
대답은 하지 못했지만 그의 눈빛이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게 정확하다는 판단이 선 이유는 그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기 때문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부끄러웠던 듯.
-미켈슨이 부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스윙에 큰 문제점은 보이지 않았는데요?
-지금 다친 것이 아니라 부상을 참고 경기에 나선 것 같습니다. 어쩐지 스윙이 좀 들쑥날쑥하더군요. 아무리 연습이 부족해도 저렇게 일방적으로 당할 선수는 아니거든요.
-좀 허무하군요. 하기야 승패는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으니 시청자 여러분들은 아쉬워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지금은 경기의 승패보다 다친 선수를 먼저 염려해 줘야 할 상황입니다. 필 미켈슨은 나이가 적지 않아 혹시 부상이 치명적이면 은퇴를 고려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 설마 그렇게까지 심각하기야 할까요? 경기에 나설 정도였다면 큰 부상은 아닐 겁니다.
선수의 건강을 먼저 염려해야 한다던 허 해설의 말이 더 심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현역 프로에게 은퇴라니?
하지만 허 해설은 그냥 던진 말이 아니다. 직감에 의존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갑작스런 부상도 기이했고 특히나 옆구리를 움켜쥐고 꿈쩍도 하지 못하는 부상은 드물다.
웬만하면 경기 중이기 때문에 일어서야 한다. 그런데 들것에 실려 앰뷸런스를 타고 퇴장할 정도였으니, 전혀 근거가 없는 예측도 아니었다.
일단 구급차에 오른 미켈슨은 의사의 응급 진단과 처치를 받았다. 극심한 통증을 완화시키는 처방을 받자 찡그렸던 그의 얼굴이 비로소 펴졌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근육의 손상이 심한 것 같습니다.”
“이런 썩을!”
의사의 소견이 나오자 미켈슨은 그제야 경기를 포기했다. 참으로 대단한 집념이 아닐 수 없었다.
얄밉게만 봤던 필상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사근사근 쳤어도 그를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괘심하다는 생각에 아예 일찍 끝내려고 했는데, 그게 그를 자극하면서 무리한 스윙을 강요한 셈이 된 터였다.
물론 그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찜찜한 기분은 금할 수 없었다.
“어서 출발합시다!”
“자네는 왜? 그냥 남아서 연습이나 해.”
“연습이 되겠습니까! 얼른 가자고!”
필상은 망설이는 의사를 독촉했다.
그리고 필상은 앰뷸런스를 함께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의사가 곁을 지키고 있지만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병원에 도착한 미켈슨은 정밀 진단을 받느라 시간이 한참 소요되었다. 무료했지만 자신과 함께 경기를 하다 다쳤기 때문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늑골 골절은 심각했으나 다행히 흉막이나 폐의 손상은 없어 수술할 필요는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서 팀장이 오늘 수고 좀 해 줘.”
“네. 그럴게요. 우리 매니지먼트 소속 선수잖아요.”
“그러네.”
진통제를 맞은 미켈슨은 잠이 들었다.
아무리 처방을 받아도 극심한 통증이 다 가시지 않기 때문에 수면제도 함께 투약했기 때문이다.
서 팀장에게 간호를 부탁한 필상은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의사는 정상적인 치료를 받으면 괜찮다고 했지만 필상의 생각은 달랐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를 필드에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 * *
-곧 결승전이 시작될 것 같군요. 화면을 통해 보시는 바와 같이 정말 엄청나게 많은 골프팬들이 찾아 주셨습니다.
-공 프로의 인기도 대단하지만 우승을 놓고 격돌할 상대가 조던 스피스라는 사실이 팬들을 불러 모은 것 같습니다.
-올 들어 서서히 기량이 회복되고 있는 자국 출신의 천재 골퍼를 응원하기 위해 나온 팬들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주목을 받았고 데뷔했던 19세에 우승하며 신인왕을 수상한 스피스는 투어 3년차인 2015년에 5승을 수확하면서 타이거 우즈의 뒤를 이을 차세대 황제라는 칭송을 받던 천부적 재능을 지닌 골퍼입니다.
-2017년 디 오픈 우승을 할 당시, 만 24세가 되지 않은 그가 메이저 대회를 3개나 거머쥔 놀라운 페이스는 타이거 우즈를 금방이라도 능가할 듯 보였지요?
-네.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러던 선수가 그 뒤로 3년간 우승이 없었으니 그를 좋아하던 팬들의 심정은 참으로 답답했을 겁니다. 그런데 올 시즌 거짓말처럼 살아났습니다.
현역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 그의 나이는 아직도 27살에 불과하다. 정확한 샷과 퍼팅 기술이 빼어나고 대인 관계도 좋아 그의 재기를 반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지난해 혜성처럼 나타나 순식간에 연승을 거두며 세계 랭킹 1위를 잠식한 필상의 등장에 미국 팬들은 경쟁자를 찾았다.
안방에서 타국 선수에게 모든 영광을 내주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이들이 학수고대하던 선수가 바로 조던 스피스였다.
그런데 팬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살아난 그가 우승을 신고했고 고른 기량으로 안정된 성적들을 쌓았다.
그리고 드라마틱하게도 매치플레이의 정상에서 필상의 상대로 등장한 것이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퍼펙트.”
“오랜만이군요.”
“필의 부상은 어떤가요?”
“워낙 건강한 분이시니 곧 툭툭 털고 일어날 겁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하하. 형제처럼 지낸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 보군요.”
사실을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필상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고마워하는 필상의 태도가 그에게는 좀 이상하게 비쳤던 모양이다.
그 느낌이 아주 묘했지만 그냥 무심코 넘겼다. 상대를 의식하면 득이 될 게 없다는 것을 여실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서는 필상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스피스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다. 정확한 해석은 불가했으나 전의에 불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우후! 용호상박이라고 해야 하나요? 어제 공 프로의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보면 정말 아무도 말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역시 골프는 오묘한 운동인 것 같습니다.
-상대성이 강한 매치플레이라서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승이니만큼 중압감은 가중될 테고, 그래서 더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결승전의 양상은 서로 한 홀씩 주고받으며 마치 핑퐁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 홀을 앞선 선수는 안정된 공략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앞서 나간 필상이 안전한 공략을 하면 스피스가 공격적인 공략을 하며 추격하는데, 그게 다 적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