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 골프의 정신
미켈슨이라면 납득이 된다.
오랜만에 나타나 조별 리그를 넘어 8강전에도 쾌승을 거뒀으니 평소 언론과 친숙한 그는 자랑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일찍 티오프를 한 타이거는 석패를 했기 때문에 기자들이 달려들어도 피할 판이다.
그런데 뜬금없는 인터뷰라니?
혹시 아쉽지만 대회는 마무리가 되었고 TPK에 대한 홍보라도 하려는 의도인가 싶었는데, 전혀 다른 것을 언급했다.
“저 때문이라니요?”
“오늘 되지도 않을 놈에게 창피를 당했다며?”
“창피라니요?”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지 감은 왔다.
어렵게 역전한 경기 내용이라면 말할 게 없다. 실력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질 수 있는 게 골프고, 다행히 이겼으니 그에 대해서는 굳이 타이거가 논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필상과 팬들에게 예의를 지키지 못한 리 하오통의 행동에 대한 지적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PGA는 선수 개인의 품성이나 자질에 대해 평가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규정을 어긴 선수에 대한 제재만 논의하기 때문에 하오통이 눈살을 찌푸리는 행동을 했어도 사무국이 나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R&A(영국골프협회)와 USGA(미국골프협회)가 공동으로 제정한 골프규칙의 1조 2항을 알아?”
“네?”
“사실 나도 오늘 처음 알았는데, 거기에는 골프를 치는 모든 플레이어가 지켜야 할 행동 기준이 명시되어 있더군.”
미켈슨의 입을 통해 듣지만 그 내용은 타이거가 언급한 것이다. 대회에 참가하는 프로들은 지켜야 할 세세한 규칙은 숙지하고 있지만 의외로 그 규정의 기반이 되는 골프의 정신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제재나 벌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켈슨을 통해 들은 내용은 필상도 반드시 재고해 봐야 할 것이었다.
“모든 플레이어는 성실하게 행동해야 하고, 타인을 배려해야 하며 코스를 보호해야 한다! 이처럼 행동하지 않는다고 페널티를 받지는 않지만 골프의 정신에 어긋나는 매우 부당한 행동을 한 경우, 그 플레이어를 경기에서 실격시킬 수 있다.”
“우! 숨을 쉬면서 말씀하세요. 호흡곤란이 올 것 같습니다.”
필상은 미켈슨이 그렇게 긴 문장을 줄줄이 얘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즉흥적이고 강렬한 표현을 즐기지만 논리적인 내용을 이렇게 진지하게 얘기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만큼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증거였다. 하나 덧붙이자면 필상에 대한 둘의 의리와 정도 깊이 느껴졌다.
“플레이어의 행동 기준이라는 게 있군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필상도 얼른 R&A와 USGA가 공동으로 제정한 골프 규칙이라는 책자를 검색해 스마트 폰에 띄웠다.
PGA는 물론 각국 골프협회 홈페이지에는 이것이 자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너무도 당연한 거지만 과연 그걸 세세하게 읽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하지만 타이거는 기자들을 만나 이것을 화두로 던졌단다.
“성실하게 경기에 임하지 않았고 특히 타인을 배려하지 못한 행동은 너무도 분명했잖아.”
“성실했는지 여부는 객관적 평가가 어렵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은 행위도 경쟁자이기 때문이라면 용납되지 않을까요?”
“타이거는 그러더군! 거기에 언급된 타인이란 경기를 같이 하는 동반자만이 아니라고.”
“타인의 범주에 갤러리들도 포함된다는 거군요!”
“그래. 역시 똑똑하군. 하하하.”
골프의 정신은 사실 두루뭉술하게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작정하고 걸자면 많은 것들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특히나 오늘 후반에 하오통이 보인 행동, 그리고 중국 팬들의 정도를 넘어선 역한 반응은 골프의 정신을 더럽혔다.
개인인 필상이 느낀 감정은 차지하더라도 팬들이 보낸 야유는 골프의 정신을 운운하기 이전에 프로 선수의 존재 가치를 망각한 행위였다.
팬들이 있음으로 대회가 성립하고 그로 인해 프로 선수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언론 또한 마찬가지다.
때문에 골프팬을 무시한 행위에서부터 비롯된 그의 무성의하고 매너 없는 행위는 포괄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타이거가 주장한 건 뭡니까?”
“패배가 아니라 실격 처리를 해야 한다더군!”
“하하하! 제가 졌더라면 큰일 날 뻔했군요.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기자들도 다들 열렬히 공감하더라고.”
“미운 털이 박힌 중국에 대한 사적 감정이 개입되는 건 그다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자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오늘 중계방송 중에 아주 웃기는 일이 벌어졌다고 하더라고.”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실시간 댓글이 폭주했는데, 중계진은 물론 자네까지 아주 인간쓰레기처럼 매도하고 욕설까지 퍼부어 난리가 아니었대.”
중국인들의 오만한 태도는 곳곳에서 질타의 대상이다.
하지만 골프계는 그들과 동떨어진 세계였다. 아직 골프를 즐기는 인구가 턱없이 적고 특출한 선수도 배출하지 못한 골프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오통이 이번 대회 예선을 통과하자 난리가 났다. 아직 몇몇 스포츠 종목에서는 수준이 낮아 국민적 관심이 없는데, 그들에게는 고급 스포츠로 느껴진 골프에서 쾌거가 들려서인지 생중계를 했고 엄청나게 많은 중국인들이 지켜봤다.
그 중에는 골프의 룰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지상 목표로 받아들여진 그들에게 미스터 퍼펙트라는 대상은 쉬워 보였다.
자신들이 소국이라고 칭하는 한국 선수였기 때문에 세계 랭킹 1위라는 것도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저 하오통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말이 나오면 일단 마구 지껄였다.
그런 모습은 미국 팬은 물론 기자들에게도 반감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죠. 타이거가 떠나기 전에.”
“아! 그러자고.”
필상도 그 내용에 공감하지만 기사가 어떻게 나올지는 일단 두고 봐야 한다. 정말 심각하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라면 주최 측과 PGA사무국은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냥 해프닝으로 끝난다면 문제를 제기한 타이거만 멋쩍은 상황에 몰릴 수도 있다. 다행히 골프계에 중국의 입김이 미약하기에 타이거의 주장대로 될 가능성이 꽤 높다.
여하튼 8강에 오르지 못한 그가 기자들 앞에 서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텐데, 그걸 무릅쓰고 인터뷰까지 자청한 것을 보면 이건 단지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경쟁이 극화되면서 기본조차 무시하는 행태가 자주 목격되는 필드의 상황,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인 것이다.
“내일 경기를 대비하지 않고 숙소에는 왜 들어와?”
“형님 보러 왔죠.”
“위로라도 하려고?”
“그것도 그거고 인터뷰는 왜 하신 겁니까?”
금방 대답이 나올 줄 알았으나 타이거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마치 꺼내기 힘든 말을 강요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괜히 서먹해지려는 순간, 그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나왔다.
“이제 그만 쉬고 싶어서.”
“쉬다니요?”
놀란 사람은 필상만이 아니었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캔 맥주를 하나 꺼내 마시려던 미켈슨은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은퇴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냥 당분간은 다른 일에 집중하고 싶어서.”
“우리 사업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기로 했잖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그게 아니고 오래 전부터 미뤄 왔던 코스 설계를 본격적으로 해 보려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굳이 지금일 필요가 있나요?”
“응. 수시로 떠오르는 영감을 놓치고 싶지 않거든.”
이어진 그의 말을 들어보니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 필상은 아직 그가 필드를 떠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타이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줄곧 한 길만 걸어왔다.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이 많았지만 골프 황제라는 칭송을 받은 그의 어깨에 걸린 책임을 함부로 내려놓을 수 없어 일로정진 했단다.
“내 탓이 크긴 하지. 한눈을 팔아 천하에 다시없을 한량이 되는 바람에 그걸 만회하느라 너무 힘든 길을 돌아왔어.”
“절대자의 고독이 느껴지네요. 하하하.”
“그렇게 봐주면 고맙고. 마침 그 자리를 메워 줄 새로운 황제, 자네가 있으니 나는 한결 편안하게 물러설 수 있지.”
“그럴싸한 핑계지만 팬들은 받아들이기 힘들 겁니다.”
“그런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지금 나는 내 긍정적인 에너지가 필드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걸 느껴. 공을 치는 것보다 멋진 코스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더 큰 걸 어쩌겠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골퍼들은 대부분 느지막이 은퇴했다. 그 어느 곳보다 자신의 존재감이 빛나는 곳이 필드이기 때문이다.
은퇴한 프로들의 노후는 각양각색이다. 후진 양성에 힘을 쏟는 이도 있고 골프 사업에 뛰어든 이도 있으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편안히 쉬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일 하지 않고 쉬는 선수는 극히 일부다. 현역 시절 웬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면 일단 밥벌이부터 해야 하니까.
그러나 은퇴 후에도 골프계에 자신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는 이들이 있는데, 그건 바로 잭 니클라우스처럼 코스를 설계한 이들이다.
타이거 또한 그럴 능력과 명성을 지녔기에 가능하다.
* * *
타이거는 먼저 떠났다.
곧 열리게 될 더 마스터즈에도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의 잠정 은퇴 소식이 알려지면 골프계가 충격에 휩싸일 것 같았다.
하지만 시대는 흐르고 그 시대를 주도하는 사람도 바뀌는 것은 자연의 섭리, 다소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물러날 때를 아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자라는 생각을 했다.
다음 날 아침, PGA 사무국의 파격적인 결정이 발표되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내용은 어제 필상에게 패한 리 하오통이 실격 처리된 것이다.
어차피 달라진 것은 없다. 8강전에서 패했으니까. 하지만 팬들을 배려하지 않은 그의 거친 행동은 제재 사유에 해당되고 불성실한 경기 운영, 동반자에 대한 비 매너도 지적받았다.
“중국의 반응이 뜨거울 텐데?”
“안 그래도 시끄러운가 봐요. 하지만 그럴수록 선수에게 더 해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시도 때도 없이 소리를 지른 거겠죠.”
“어찌 되었든 안타까운 일이야. 중국 시장이 아직은 볼품없지만 추후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거든.”
굳이 사업의 영역까지 염두에 둬야하는 것이 씁쓸했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런 필상의 마음을 헤아린 이가 있었다.
연습장으로 향하던 길목에서 만난 스카이스포츠 기자 마이클, 우연을 가장했지만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와우! 이게 누군가요? 아침 일찍 미스터 퍼펙트를 여기에 만나다니 오늘 제 일진이 좋은 것 같습니다.
“하하. 마이클. 당신의 후각은 거의 개코 수준인가 봅니다.”
“네?”
“기삿거리 냄새 맡는 감각이 아주 탁월하다는 말입니다.”
“칭찬이었군요. 하하하. 전 실례를 저지르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기삿거리를 주신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필상은 그와의 짧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실전에 임한 선수가 느끼는 극심한 압박감에 대한 얘기를 꺼냈는데, 리 하오통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선수를 대하는 데 있어 국적이나 인종을 개입하는 것이야말로 더 큰 잘못이라는 입장도 밝혔다.
“아침부터 크게 한 건 했던데?”
느지막이 연습장에 나타난 미켈슨은 필상이 하오통을 옹호하는 인터뷰를 한 것에 불만을 표출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상의 이어진 말에 그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특히나 미국 국적을 가진 백인 선수라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건 차별이라는 것을 겪어 보지 못했을 테니까요!”
비록 자신에게도 예의를 차리지 못했으나 필상은 그를 대하는 언론의 태도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팬들의 무지함까지 그에게 덧씌우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아직 프로 골퍼로서 가야 할 길이 구만리인 선수를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매도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닌 것이다.
[8강 공필상 vs 세르히오 가르시아. 4&3 승리]
1980년생인 가르시아는 스페인 태상의 미국 국적 골퍼다.
한때 타이거우즈의 뒤를 이을 골프 신동으로 평가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해 PGA 통산 8승을 거뒀으나 기대만큼 위대한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번에도 세계 랭킹 26위로 8강에 올랐으나 맞상대가 필상으로 정해진 것이 그의 불행이라고 예측한 언론도 있었다.
그런데 경기 결과도 예측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시종일관 끌려 다니며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한 반면 필상은 마치 연습 라운드라도 나온 선수처럼 자신의 경기에 집중하며 코스를 넓게 사용하는 여유를 보였던 것이다.
“오후에 열리는 준결승전 상대가 결정되었어요.”
“알아.”
“어? 미켈슨이 이길 줄 알았다고요?”
“필 형이 이겼어?”
필 미켈슨과 8강에서 맞붙은 상대는 이탈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코 몰리나리다. 세계 랭킹 7위로 최근 컨디션이 좋고 아침에 연습장에서 확인한 그의 스윙은 굉장히 좋아 보였다.
그에 반해 연습이 부족했던 미켈슨은 스윙이 완전하지 못할뿐더러 체력적인 한계도 느껴졌다. 그런 이유로 아쉬워도 미켈슨의 경기는 8강까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필상의 판단을 뛰어넘는 그 무엇인가가 작용한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인지는 맞상대를 해봐야 알겠지만 이변이 일어난 것은 분명했다.
“경기 하이라이트 좀 구해 봐.”
“네.”
확인한 결과, 미켈슨은 그야말로 역전을 용사였다.
티샷부터 아이언까지 실수가 잦았지만,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실수를 곧바로 리커버리 하는 절묘한 샷을 터트려 상대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선수가 꾸역꾸역 따라오면서 예상을 벗어난 묘기를 부릴 때마다 몰리나리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 갔다.
게다가 특유의 넉살을 부리며 심리전까지 동원한 미켈슨은 매치플레이의 특성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하며 상대를 야금야금 무너뜨리고야 말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