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고도의 심리전
거리가 짧은 17번 홀은 비교적 쉬운 파 3홀이다. 하지만 승부가 팽팽한 순간에도 쉽게 느껴지는 홀은 아니다.
티잉 그라운드에서 그린까지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벼랑이 위치했고 그나마 우측에 좁은 공간이 있는데, 거친 러프였고 기다란 벙커도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하지만 146야드 파 3홀을 잘라 갈 위인은 없다.
지금처럼 좌측 끝에 핀이 꽂힌 경우에는 극히 위험하다. 짧아도, 감겨도 모두 벼랑 아래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필상은 과감하게 핀을 직접 공략해 4야드 버디 기회를 만들었다. 기가 막힌 샷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뒤에 샷을 해야 하는 하오통으로서는 후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딱!
그 와중에도 임팩트는 좋았다.
아무리 떨려도 몸에 익은 스윙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핀을 향하던 타구의 궤적이 돌연 우측으로 휘었다.
“페이드 샷을 구사했나 봐요.”
“벼랑이 무서웠나 보지.”
“그럼 자동으로 페이드가 걸린 건가요?”
“응. 혹시 당겨질까 두려웠는지 스윙 궤적이 평소보다 업라이트 하더라고.”
당사자는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스윙을 유심히 바라보던 필상은 그의 심리까지 고려하고 있었기에 미세한 변화도 감지할 수 있었다.
-우후! 저게 벙커로 기어 들어가는군요!
-안전한 공략을 할지, 정확하게 핀을 공략할지 확신이 없는 상태로 샷을 한 것 같습니다.
-아! 차라리 안전하게 온 그린을 노렸다면 저렇게 긴 타구는 나올 수가 없었겠군요.
-그렇습니다. 일단은 좌측 끝에 박힌 핀까지 보낼 요량으로 샷을 했는데, 아무래도 해저드가 자꾸 눈에 밟혔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 보니 엉겁결에 페이드가 걸린 거고요.
-승부가 갈리는 굉장히 중요한 순간에 자신감이 확 떨어진 모습, 역시 지명도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나 봅니다. 전반 나인 홀에서는 이 정도 거리를 쩍쩍 붙였잖습니까!
-미스터 퍼펙트! 그에게서 풍기는 강렬한 포스를 감당하기에는 아직 설익은 것 같습니다. 하하하!
“도미(Dormy-매치플레이에서 이긴 홀수와 남은 홀수가 같아 비기기만 해도 이기는 상황)가 되겠네요?”
“응.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지.”
섣부른 장담은 금물이다. 그걸 모르지 않지만 벙커에 빠진 공을 쳐 내야 하는 하오통에게 주어진 상황은 너무 가혹했다.
벙커 턱은 그리 높지 않지만 핀을 바라보는 방향에 벼랑이 존재한다. 게다가 쭉 내리막 경사라서 조금만 길게 쳐도 이 홀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다.
그러니 마음껏 휘두를 수도 없다. 만약 벼랑이 없다면 내리막일지언정 핀에 붙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해저드의 존재는 뇌리에서 지우고 오로지 지금의 샷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패배’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것 같았다.
-어?
-공이 구르지 않도록 세워야 하기 때문에 강한 스핀을 걸려고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클럽페이스와 공 사이에 저렇게 많은 모래가 들어가면 세울 수도 없을뿐더러 비거리가 확 줄어듭니다.
-좀 더 가볍게 떠냈어야 하는군요.
-네. 너무 깊이 들어가 타구가 날아가지 않은 겁니다.
-이쯤 되면 기세가 꺾였다고 보는 것이 맞겠군요.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만 리 하오통 선수로서는 아주 아쉬운 한판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져도 잃은 게 없었던 대결이기는 합니다. 이 경기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 골프팬들에게 각인시킨 것은 분명하니까요.
냉정한 평가였으나 아직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대체 무슨 말이냐며 핏대를 높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댓글을 다는 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나라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이들이었다.
중국(中國). 나라의 이름부터 가운데 중(中)을 사용한다.
물론 인구나 국토만 놓고 본다면 세계 1위의 나라가 맞다. 또한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도 눈부신 경제 성장을 거듭해 감히 대적하기 힘든 위력을 떨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파른 경제 성장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들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인권이니, 시민 의식이니, 굳이 거창한 것을 따질 필요도 없다.
극심한 빈부 격차로 생성된 수많은 졸부들은 세계 곳곳에서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들을 일삼는다. 공공의 질서나 남에 대한 배려 따위는 애당초 염두에 없는 작자들.
‘세계 최고가 되기 전에 분열될 거다!’
샐러리맨 시절, 중국 영업망을 뚫기 위해 중국인들을 여러 번 접해 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겸손한 자는 본 적이 없다.
어찌 그리도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건방진지, 이대로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사실 중국은 단일 민족도, 하나의 체제도 아니다. 독립을 원하는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존재하고 그들을 하나로 묶는 일당 독재는 영원할 수 없다는 게 중론이다.
구조적인 문제점을 보완할 국가적 역량이 충분한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역사지만 지금처럼 눈꼴 신 행태를 보인다면 미국을 위시한 서구 열강은 중국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저, 저?”
미사키가 돌연 어이없다는 탄식을 터트린 이유는 벙커샷이 터무니없이 짧았기 때문은 아니다. 겨우 턱을 넘어 에이프런에 멈춰선 공을 쳐다보던 하오통이 벙커에서 나오면서 취한 행동 때문이었다.
클럽을 지팡이처럼 사용해 벙커에서 벗어난 그가 샌드웨지를 휙 집어 던졌던 것이다. 자신의 캐디가 있는 방향이기는 했으나 그걸 다시 주워야 하는 파트너의 심정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은 어처구니없는 비매너를 몸소 보인 것이다.
팬들의 야유가 봇물처럼 그를 덮쳤다. 하지만 콧김을 풀풀 날리던 그는 아까와는 달리 조용히 퍼팅을 했다.
“우이씨! 들어가는 줄 알았어요.”
“내가 설마 저 거리에서 3퍼팅을 할까!”
“아! 그러네요. 호호호.”
“그 여성스러운 웃음은 뭐지?”
“여자니까요.”
“아! 여자였구나!”
“뭐에요?”
여자는 맞지만 여자라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다.
물론 미사키를 다시없을 최고의 여자로 보는 남자도 있다. 곧 개막할 KPGA의 신참 프로, 흑돈이다.
아직 터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둘이 짬이 날 때마다 깨가 쏟아지는 통화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릴 이유도 없으며 같은 일에 종사하기 때문에 서로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만약 결혼하게 된다면 더없이 잘된 일이라서 큰 선물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부담은 있다.
“와아아아!”
“미스터 퍼펙트! 미스터 퍼펙트!”
거리도 부담스럽지만 라이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하지만 필상의 퍼팅은 정확한 라인을 따라 구르더니 홀컵에 쑥 빨려 들어갔다. 멋진 퍼팅은 분명했으나 이렇게까지 난리가 날 상황은 아닌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방금 전에 하오통은 더블보기로 홀 아웃을 했다. 그런데 버디 퍼팅을 남긴 필상에게 컨시드를 주지 않았다.
4.5야드를 4번에 잘라 갈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면 오케이를 부르지 않은 이유는 그냥 심술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그게 규정을 벗어난 행위는 아니었기에 당황스러웠으나 야유를 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필상의 버디 성공에 더 열광적인 응원을 보냄으로써 하오통의 어이없는 행동을 꾸짖었다.
-끝까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네요.
-선수는 오로지 결과로 평가받지만 팬들은 결과에만 집착하지 않습니다. 어떤 실력을 갖췄는지, 또 경기 외적인 부분은 어떤지, 숫자보다는 감동을 주는 선수를 좋아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하오통은 전반에 기껏 벌어 놓은 점수를 스스로 깎아 먹은 셈이 됩니다. 안타깝네요.
-경기 성적과 비례하는군요. 하하하. 하기야 당장 저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 팬들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네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팬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면 프로 선수로 성공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오늘 치러진 8개의 매치 중에 가장 주목을 받았다.
필상의 연승, 기권한 지난해 결과, 비교가 불가한 탁월한 실력, 매치플레이에 약한 이미지,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필상의 경기는 상대적으로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미국은 물론 유럽 여러 나라와 한국, 중국, 일본까지 중계되면서 리 하오통이라는 이름이 팬들의 뇌리에 새겨졌다.
그런데 한 번 꼬이기 시작하면서 경기 내용만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 아니다. 주목을 받았던 만큼 큰 비난이 쏟아졌다.
중국 팬들이 열심히 방어했지만 하나하나 지적한 내용마다 워낙 치명적이라 프로로서의 생명까지 염려될 지경이었다.
“굿 샷!”
18번 홀은 357야드 파 4홀로 거리는 짧지만 오르막이 상당하다. 좌측은 울창한 숲, 우측에는 벙커들이 줄을 지어 대부분의 선수들은 안전한 공략을 선택했다.
필상은 연습 라운드를 통해 2번 겪어 봤으나 예선 1, 2차전에서는 이 근처에 와 보지도 못했다. 그나마 3차전에서 마지막 홀까지 쳐 보면서 확인한 바, 장타를 날릴 수 있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레이아웃이었다.
320야드를 넘기면 좌우의 위협이 확연히 사라지고 가장 넓은 페어웨이가 나오기 때문이다. 어차피 도미 상황, 진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기에 과감한 드라이브 티샷을 때렸다.
-우우우! 오르막이 극심한 이 홀에서 346야드라니요! 이게 말이 됩니까?
-하하! 미스터 퍼펙트의 장타력을 잘 알면서 왜 그런 말씀을 하는 거죠?
-너무 속이 후련한 샷이어서 그럽니다. 사실 도미 상황이기 때문에 굳이 저런 장타를 날릴 이유도 없지 않나요?
-자신이 있었던 겁니다. 1번 홀 티샷 미스가 나온 뒤에 장타를 최대한 자제했지만 이제는 확실히 감을 잡은 겁니다.
-아! 상대를 의식한 샷은 아니었던 거군요. 하하하!
속이 후련했다는 표현, 괜히 꺼낸 말이 아니다.
중국 팬들의 험악한 댓글에 시달리면서도 일체 대응하지 말라는 PD의 지시에 입으로 먹고사는 프랭크는 답답했다.
과연 골프의 룰이나 제대로 아는 것인지, 되지도 않을 억지를 부리는 것을 알면서도 꾹 참았으나 그 결말이 보이자 소심한 복수를 감행하는 중이었다.
“어이고!”
“내 저럴 줄 알았어요. 이미 의욕을 상실했거든요.”
“이번 홀에서 이기면 연장전인데?”
“프로님의 장타를 보기 전까지는 희망을 가졌겠지요. 하지만 어마어마한 장타가 페어웨이를 가르는 순간, 맥이 빠졌을 거예요. 이기려면 이글이 필요한 거잖아요, 샷 이글!”
“그렇다고 저런 악성 슬라이스 티샷을 하냐고! 프로 선수 망신은 쟤가 다 떠는 거잖아.”
기복이 심하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초반부터 묘기에 가까운 샷을 하면서 필상을 혼절 직전까지 몰고 간 실력은 어디 소풍이라도 간 것인지, 아마추어들도 범하지 않는 악성 슬라이스 구질이 나타났다.
* * *
“2UP?”
“네.”
샤워를 하러 들어가던 필상은 미켈슨과 마주쳤다.
그는 이미 20분 전에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4&3의 압승.
그가 경기 중에 확인한 결과는 전반에 세 홀을 내준 필상의 8강 진출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충격이었지만 뒤집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했고 자신의 경기에 집중하느라 미처 이후의 결과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 우연히 마주친 필상의 표정이 너무 밝았다. 도무지 패한 선수 같지는 않아 조심스럽게 물었고 뜻밖에도 2다운이 아니라 2업이라는 대답에 다시 확인했다.
“그걸 뒤집었단 말이야?”
“일단 좀 씻고 나올 게요. 얘기하자면 깁니다. 하하하.”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하오통은 후반 들어 제풀에 나가떨어졌다. 매치플레이에서 심리 상태가 얼마나 중요한지 적나라하게 보여 준 경기였다.
마지막 홀에서 티샷 미스를 한 그는 3온에 실패하고도 3야드 버디 기회를 잡은 필상을 기다리게 만드는 추태를 부렸다.
게다가 패배가 확정된 뒤에는 필상과 인사도 나누지 않고 먼저 떠났다. 그의 뒤통수에 갤러리들의 야유와 비난이 쏟아졌지만 되레 화를 내며 총총 사라졌다.
여하튼 기분 좋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필상은 미사키에게서 믿기 힘든 말을 전해 들었다.
“뭐라고?”
“타이거가 졌어요. 연장까지 가서 패했대요.”
“상대가 누구였지?”
“안 프로요.”
“안병훈 프로?”
“네. 앞서 가다가 후반에 따라잡히고 연장전에서 졌기 때문에 프로님이 위로를 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지금 어디 있지?”
안 프로에게는 축하할 일이지만 타이거의 패배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절대 오지랖이 넓은 게 아니다.
필상은 겨울 전지훈련을 충실히 했고 한 달여 전에 미국에 상륙해 모두가 부러워할 연승을 거뒀다. 하지만 미켈슨과 타이거는 각자 맡은 일을 하느라 연습을 거의 하지 못했다.
“기자들과 인터뷰를 한다고 했어요.”
“인터뷰? 일단 거기부터 가 보자.”
“네.”
신기하게도 미켈슨은 손쉽게 8강에 진출했지만 고배를 마신 타이거의 패배는 필상으로서도 매우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일찌감치 시작한 TPK 한국 사업은 굳이 필상이 손을 대지 않아도 될 만큼 빠르게 제 궤도에 올랐고 이 대표가 척척 알아서 하기 때문에 고생을 자처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뒤늦게 미국으로 건너온 타이거와 미켈슨은 연습 부족 때문에 샷의 일관성이 흔들렸다. 그걸 알기 때문에 며칠 바짝 노력하는 그들의 샷을 점검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충분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 인터뷰 하신다더니 벌써 끝났습니까?”
“응. 8강 진출 축하해.”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타이거는 쓸쓸히 퇴장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할 사람은 자신인데, 오히려 축하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를 피하는 그를 뒤따라가기도 멋쩍었다.
그런데 어찌 할 바를 모를 그때, 인터뷰 룸에서 미켈슨이 걸어 나왔다. 그도 타이거와도 함께 기자들 앞에 섰던 것이다.
“타이거가 왜 인터뷰를 한 거죠? 평소 꼭 필요하지 않으면 기자들과 만나는 걸 꺼지는 사람이잖아요.”
“바로 당신 때문인데, 전혀 못 들었나 보군.”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