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62화 (262/354)

262. 풋 웨지

-아까도 제가 비슷한 발언을 한 것 같은데……. 리 하오통, 절대 녹록한 선수가 아니군요.

-그렇습니다. 골프는 당일 컨디션이 중요하다지만 미스터 퍼펙트를 상대로 이 정도 팽팽한 경기력을 보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시아 선수들을 무시하던 시각도 이제는 달라져야 할 것 같아요. 아니,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봐야 하나요?

-진행형이라고 봐야겠지요. 오늘 이 16강 매치플레이도 그런 편견을 없앨 수 있는 좋은 예시가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중국 골프는 아직 개선될 여지가 많은 게 사실 아닌가요? 제가 고의적으로 중국 골프를 무시하고자 하는 발언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엄연한 현실이기에 연막까지 쳤지만 또 다시 댓글 창이 난리가 났다. 고작 세계 랭킹 100위 안에 리 하오통 1명뿐인데, 대체 뭘 믿고 욕설까지 퍼붓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덩치만 큰 어리석은 어떤 동물을 연상시켰지만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대회만 아니면 중국 선수를 소개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무지함을 세계 골프팬들이 고스란히 지켜봤다는 점이었다. 경제적으로 큰 성장을 이뤘어도 성숙되지 않은 시민 의식은 점잖게 타이르는 한국 팬들을 더 돋보이게 할 뿐이었다.

“허! 이제 승부를 걸어야 하나?”

13, 14, 15번 홀은 연이은 파 4홀로 그리 쉬운 홀은 아니었다. 하지만 버디, 파, 버디를 기록한 필상을 정확히 따라온 하오통은 끈질긴 우위를 이어 갔다.

그렇게 맞이한 16번 홀, 이제 승부를 걸어야 했다.

561야드의 긴 파 5홀이었기 때문이다.

드라이브를 들고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선 필상은 샷 루틴에 들어가기 전, 잠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혹자는 기도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실상은 외부의 모든 기운들을 차단하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감각을 개방하지 않았음에도 주변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2시 방향 슬라이스 바람!’

약간 당황스러웠다.

이런 특별한 감각까지 동원할 의향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습득된 정보를 버릴 이유는 없었다.

-아니 대체 어디를 에이밍 하는 거죠?

-이 홀은 보통 뒷바람이 붑니다. 풍향계도 그렇게 표시되고 있는데, 저렇게까지 좌측을 많이 보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좀 이상하군요.

-장타가 필요한 타이밍 아닙니까? 굳이 페이드 샷을 구사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장타가 터진다면 또 모르겠네요.

홀의 모양이 살짝 좌측으로 휘기는 했다.

하지만 좌측의 연못을 건너는 것은 320야드고 그 뒤의 러프까지 건너려면 족히 350야드는 날아야 한다. 순수 캐리만.

때문에 아무리 장타라도 그건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예측이 구구했지만 모처럼 터진 필상의 장타는 아무리 봐도 스트레이트 구질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파격적인 장타가 터지는 게 아닌지 쳐다봤지만 타구는 연못 초입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아! 슬라이스 바람인 거죠?

-그렇습니다. 페이드 샷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 정도 휘어서는 비치 벙커를 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마지막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호수와 페어웨이 사이에 폭 5야드 정도의 긴 벙커가 있었는데, 거기 떨어질 줄 알았던 타구의 비거리 계산이 틀렸다.

짧았다면 옳은 지적이었겠으나 좀 더 멀리 날아간 타구는 벙커를 넘어 퍼스트 컷에 떨어졌고 크게 튀더니 페어웨이를 타고 다시 구르기 시작했다.

캐리가 334야드나 나온 그 타구는 운도 좋아 잔디의 결을 타고 쭉쭉 구르더니 결국 367야드 지점에 멈췄다.

깜짝 놀랄 만큼 대단한 비거리는 아니었으나 남은 200야드는 필상이 6번 아이언으로 컨트롤하기 좋은 거리였다.

“나이스 샷!”

“괜찮았지?”

“물론이죠. 어떻게 정확히 200야드를 남기신 거예요?”

“난 205야드를 남기고 싶었어. 잔디의 결이 내 의도를 5야드나 벗어나게 만든 것이니까 그렇게 감탄할 필요 없다고.”

“에이. 진짜!”

사실 필상이 얼마나 집중했는지 미사키도 모르지 않는다.

남들이 볼 때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포커페이스였으나 그녀의 눈에는 필상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보였다.

엄한 좌측을 보기 때문에 완벽한 스트레이트 구질이 아니면 낭패를 본다는 생각에 정확한 스윙을 구사하려고 거리의 손실도 감수한 샷이었다.

-역시 퍼펙트한 장타가 터졌습니다. 후반 들어 서서히 제 컨디션을 회복하더니 급기야 티샷도 안정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공은 하오통에게로 넘어갔군요. 상당히 떨릴 텐데 챔블리는 현역 선수 시절에 어땠습니까?

-생각하기도 싫지만 굳이 떠올려 보면 전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두 자리 승수를 기록하지 못한 거죠. 하하하!

자학적인 웃음으로 넘겼지만 그 말의 의미는 시청자들에게 정확히 전달되었다. 사람마다 다르다지만 승부처에 도달하면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처한 상황, 경쟁자의 실력, 주변의 시각, 자신의 샷 감각, 그 어느 하나 걱정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다.

“떨고 있어요.”

“그게 보여?”

“네. 그의 팔딱거리는 심장 소리도 들려요.”

“하하하. 뛰지 않는 심장은 없다고 마구 들이대는군!”

“이번 샷까지 용감하게 잘 친다면 정말 위험하기는 하겠네요.”

그 말을 하는 순간, 루틴을 차분하게 밟은 하오통이 어드레스에 들어섰다. 그런데 그 중요한 순간, 조용해야 할 갤러리들 사이에서 힘찬 응원 소리가 터졌다.

“하오통 파이팅!”

“날려 버려!”

중국어였다.

대다수의 미국 팬들은 그 내용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충 짐작은 가능했다. 물론 중국 출장이 잦았던 필상은 정확히 알아들었고.

하지만 샷 루틴에 영향을 받은 하오통은 어드레스를 풀었다. 기본적인 매너조차 갖추지 못한 조국의 팬들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래도 참아야 하는 게 프로 선수의 미덕이건만 뒤돌아선 그는 소리가 났던 방향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누구야! 대체 어떤 무식한 인간이냐고!”

“우우우우!”

아무리 화가 나도 불특정 팬들에게 그러면 안 된다.

당사자는 어떨지 몰라도 그의 샷을 기다리던 대다수의 팬들은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했음에도 야유를 아끼지 않았다.

필상의 팬이 더 많지만 상대적인 약자를 응원했던 팬들의 마음조차 완벽히 식게 만들어 버린 자충수였다.

“갔네요.”

“뭐가?”

“맛이 갔다고요.”

“하하하. 그래도 그렇게 비난하면 안 되지. 얼마나 긴장했으면 저러겠냐고. 하하하.”

“프로님의 그 웃음소리가 더하거든요.”

“윽!”

팬들의 무지도 문제지만 프로 선수인 하오통의 반응이 설마 저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유러피언투어 시드를 보유한 하오통은 적잖은 기간 동안 외국 투어를 뛰었다.

원래 못된 인간이라는 추측도 들지만 오히려 유럽 팬들이 더 유난스럽다고 들었는데 그동안 겪고 느끼고 배운 것을 까맣게 잊을 정도로 극심한 긴장 상태라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성난 야유가 쏟아지자 그도 놀랐는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급기야 재빨리 샷 루틴을 밟아 나갔다. 하지만 이미 김이 샌 그의 스윙이 정상일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타앙!

소리부터 해괴했다.

스위트 스팟에 맞지 않은 타구는 일단 높게 치솟기는 했으나 가야 할 방향을 잃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심하게 흔들리더니 급격히 좌측으로 휘면서 급전 낙하하고 말았다.

“볼! 보올!”

사람들의 외침이 터진 이유는 하필이면 그 공이 170야드 지점 좌측에 만들어 놓은 관중 스탠드를 향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사람을 맞추지는 않았으나 스탠드 벽면을 때린 공은 절묘하게도 포장도로를 맞고 통통 튀더니 진행요원들이 타고 다니는 카트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으흐! 큰일 날 뻔했네요.

-사람이 다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정말 희귀한 미스 샷이 나왔네요. 공의 밑동을 때린 것 같은데, 타구의 궤적이 아주 희한하군요. 제가 볼 때는 아까 갤러리들 때문에 샷 루틴이 꼬인 것이 원인 같은데, 그렇죠?

-현장에서 방금 알려 온 바에 의하면 하오통 선수가 팬들과 약간의 충돌이 있었답니다. 샷을 하는 순간에 괴성을 지른 분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에이, 설마 그랬을 리가요?

분위기를 보건데 캐스터인 프랭크도 이미 그 사실을 전해들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시치미를 뚝 뗀 이유는 중국 팬들의 도를 넘은 행동과 무관지 않았다.

-나중에 확인해 보면 밝혀지겠지만 골프는 선수와 갤러리들이 모두 예의를 지켜 주는 것이 기본입니다. 야구나 축구와 같은 운동과는 달리 굉장히 민감한 종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심판이 없는 유일한 스포츠 아닙니까!

-과거에 비해 경쟁이 심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지나치게 승부에 집착한 나머지 골프의 기본조차 지키지 않는 선수들이 많아진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 통계에 따르면 PGA프로들의 44%가 동료의 규정 위반을 목격했다고 하더군요. 아는 처지에 눈을 감았지만 다시는 그 선수와 라운드를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네요.

-물질 만능주의, 이기적인 양심이 낳은 추태입니다. 때문에 기본을 지키지 않는 선수에 대한 처벌은 한층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공을 건드리는 행위가 워낙 많아 전문용어까지 생겼다. ‘풋 웨지’라는 표현은 발로 공을 툭 차서 위치를 변경하는 비신사적인 행위를 지칭한다.

아마추어들은 물론 프로들도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동료의 규정 위반을 본 비율이 44%나 되는 PGA 프로들도 자신이 그런 적이 있냐는 질문에는 100% 그런 적이 없다고 답을 했다.

늦장 플레이 때문에 경기력에 영향을 받았다는 대답은 78%였으나 자신의 경기 속도에는 문제가 있다고 답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리 하오통은 프로답지 못한 플레이를 한 것보다 더 심각한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저긴 드롭을 해도 주변에 좋은 잔디는 없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다 밟아 놔서 적당한 라이가 있을지도 몰라.”

“에이. 이미 혼수상태인데 어디든 상관있겠어요.”

“그런가?”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그의 잘못은 아니다.

골프 매너조차 지키지 않은 중국 팬이 없었다면 그의 분노조절 장애로 보이는 괴상한 행동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잘못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일순간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냥 터트린 하오통은 자신의 실수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통제를 벗어난 치명적인 실수가 나온 것이고.

“퐁!”

관중 스탠드는 인공 건축물인 까닭에 예상보다 훨씬 좋은 드롭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얼마나 뒤땅을 심하게 때렸는지 피니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낮게 뜬 공이 좌측으로 감기며 원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굴렀고 급기야 호수로 굴러 들어가고 말았다.

쥐고 있던 클럽을 바닥에 떨어뜨린 하오통이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팬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스스로의 감정조차 조절하지 못하는 프로 선수에게 더 이상 언더독 효과는 유효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 포기했나 봐요.”

“포기?”

“호수 뒤에서 드롭 해야 하는데, 그냥 걸어오잖아요.”

“하기야 4온도 불가능하니까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팬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지는 않은데…….”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다.

오히려 상대가 무너지면 덩달아 해매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는 다르지만 아무리 그래도 중도에 포기하는 모습은 경기에 임하는 자세가 불량하다고 인식될 수 있어 마음은 굴뚝같아도 참아야 한다.

그런데 따가운 팬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는지 그는 한 줌의 미련도 없이 이번 홀 포기를 선언했다.

-올 스퀘어가 되었습니다.

-단 7개 홀에서 3타를 모두 만회했네요. 그런데 누차 제가 칭찬했던 하오통 선수에 대한 평가는 미뤄 둬야 할 것 같아요.

-기복이 굉장히 심한 선수 같습니다. 교과서에 나옴직한 미스터 퍼펙트의 정교한 스윙에 버금가는 정확도를 자랑할 때만 해도 굉장했는데, 그게 오래 유지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말씀에 동의할 수밖에 없네요. 어찌 보면 스스로 무덤을 판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아! 팬들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대목을 지적하시는 거군요. 저도 공감합니다. 아직은 좀 더 여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146야드에요.”

“피칭.”

올 스퀘어였지만 역전한 것보다 더 흥분되었다. 어렵다고 생각했던 일이 버젓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침착하게 평소보다 더 느린 스윙 루틴을 진행했다. 상대가 무너질 가능성이 높지만 그건 아너인 필상의 샷이 평균 이상일 때에만 적용된다.

혹시 큰 미스를 저지른다면 오히려 나중에 나서는 하오통은 더 힘을 낼 것이다. 때문에 가장 자신 있는 피칭을 들고도 정확한 스윙을 구사하려고 집중했다.

결과 또한 아주 만족스러웠다.

-어허! 전 홀인원이 나오는 줄 알았어요!

-행운이 좀 따랐다면 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거리와 방향은 더없이 정확했으니까요.

-그린의 라이까지 고려하지 못한 점은 좀 아쉽네요. 그러나 일단은 버디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하오통으로서는 큰 부담을 느낄 것 같습니다.

-일단 좀 지켜보시죠.

-아, 네.

더 적나라한 해설을 보태고 싶지만 논란의 소지를 없애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PD는 중계진에게 말을 아끼라고 전했다.

다들 하오통의 샷을 묵묵히 바라봤지만 필상은 씩 웃었다. 그의 다리가 눈에 띨 만큼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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