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상대적 특수성
“이렇게 몰리다니!”
나름 진정하려고 노력했으나 정말 순식간에 전반이 끝났다. 3다운으로 몰리고 있는 현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감정의 굴곡에 휩쓸렸다. 너무 끔찍한 악몽이라 어서 헤어 나오고 싶은.
골프를 시작한 이래 이렇게 당황한 적이 또 있었나 싶을 만큼 경기의 주도권을 내준 채 질질 끌려 다녔다.
“음료수 한 잔 드릴까요?”
“물을 줘.”
미사키도 안절부절못했다. 늘 여유 만만한 필상이 평정심을 잃은 모습은 그녀에게는 너무 큰 충격이었다.
이대로 허무하게 무너질 수는 없다.
필상은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안 그래도 가끔 묘한 웃음을 흘리는 상대의 태도가 거슬렸는데, 슬그머니 다가와 한술 더 뜨는 행태를 서슴지 않았다.
“퍼펙트? 뭐가 퍼펙트죠?”
“그러게. 하하하!”
화가 난다고 그런 유치한 도발에 넘어갈 수는 없었다.
95년생인 그와의 나이 차이도 제법 나지만 골프계의 위상은 말할 것도 없다. 애당초 이런 도발을 허용한 것부터 씁쓸한 일이고, 똑같이 맞대응을 하는 것도 모양새가 빠졌다.
스스로 붙인 닉네임도 아니며 수많은 경기를 펼치다 보면 항상 최고의 결과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감행한 도발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언제든 본인도 기대 이하의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이것은 고도의 심리전이라고 봐야 했다. 기선을 잡은 지금, 상대를 흔들어 승리를 확정짓고 싶은 욕망의 표출이다.
“오늘은 제가 운이 더 좋은 것 같군요.”
“그 말을 뱉기 전까지는 그랬겠지.”
“…….”
“열심히 해 봐. 파이팅!”
필상은 오히려 격려했다.
하지만 그 전에 뱉은 말의 의미를 곱씹는 하오통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방정맞게 입 밖에 낸 것이 실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의 도발을 되짚어본 필상은 되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아직도 필상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흔들리고 있나 봐요.”
“하하.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거지.”
아너인 하오통이 먼저 드라이버 티샷을 하러 올라갔다.
하지만 좀처럼 샷 루틴을 진행하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그의 마음에 비로소 의심의 싹이 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프로의 자질이 의심되는 실수가 나왔다.
-우후! 저런 샷을 뭐라고 하죠?
-더프(Duff)라고 합니다. 볼을 정확히 맞추지 못하고 볼이 놓인 뒤쪽의 땅을 때리는 미스 샷인데, 드라이브 티샷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물죠. 너무 흥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미스터 퍼펙트를 이길 기회를 얻었으니 그럴 만도 하죠. 하하하!
티샷은 뒤땅을 때려도 웬만하면 타구가 전방을 향한다. 거리 손해를 보지만 그래도 OB나 해저드에 빠지는 것보다 낫다.
하지만 하오통의 타구는 덕 훅(Duck hook-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심하게 곡선을 그리는 낮은 샷)이 걸린 게 문제였다.
심하게 휘어 좌측 헤비 러프에 들어갔는데 하필이면 나무가 세컨샷 방향을 가로 막아 이중고를 이겨 내야 했다.
그 와중에 3번 아이언을 잡은 필상은 페어웨이 정중앙을 갈랐다. 비거리는 248야드, 편안해 보이는 스윙이었지만 장타자의 면모가 엿보이는 멋진 샷이었다.
그래도 레이 업을 선택한 하오통의 선택은 현명해 보였다. 122야드를 52도 웨지로 핀에 쩍 붙이기 전까지는.
“흐흐흐……. 괜히 떠들었다고 후회하는 것 같아요.”
“고마울 따름이지. 하하하.”
별 내용도 아닌 대화였지만 필상을 줄곧 의식하고 있던 하오통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듣지 못했음에도 자신을 흉본다고 느낀 것 같았다.
그러니 좋은 샷이 나올 리는 없었다. 그의 서드샷이 그린에 올라섰지만 파를 기대할 수 없는 거리, 그렇다면 먼저 버디 퍼팅을 할 수도 있건만 필상은 유유자적 기다렸다.
그가 파 퍼팅을 넣지 못하면 아무런 부담도 없이 이 홀을 가져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질 가능성이 높아도 너무 어림없는 퍼팅이군요.
-이미 이 홀은 졌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직 2UP인데, 이번 결과에 너무 신경 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본인을 위해서나 승부를 위해서나.
-잘 알면서도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실전인가 봅니다. 붉어진 혈색을 보면 말이죠. 하하하!
-그래도 무명에 가까운 하오통 선수에게는 다시없을 기회입니다. 미스터 퍼펙트를 이긴다면 단숨에 지명도가 올라가 더 많은 기회가 부여될 겁니다.
-지명도는 곧 수입과 직결되죠? 시드가 없는 대회에 초청을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생각이 오히려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정확한 지적이었다.
어려운 상대와의 대결은 부담스럽지만 그만큼 얻는 결실도 풍성하다. 특히나 파격적인 연승을 이어 가는 필상의 발목을 잡는다면 단숨에 팬들의 뇌리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정정당당했어야 한다.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상대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당당히 실력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옳았다. 그렇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대가가 주워졌을 텐데, 아쉽게도 그의 배포는 거기까지였다.
“오늘은 201야드에요.”
“응. 맞바람이 제법 세네. 6번 아이언.”
11번 홀은 호수를 건너야하는 파 3홀이다. 그린이 물에 접해 있어 짧으면 여지없이 해저드에 빠진다.
늘 맞바람이 강하게 불어 길게 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호수에 공을 헌납하는 선수들이 많다. 생각보다 맞바람이 강하다는 것인데, 오늘은 유독 더 강했다.
쉬익!
6번 아이언을 잡은 필상의 샷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핀을 훌쩍 지나 그린 뒤쪽에 겨우 멈춰 섰다.
약간 좌측에 위치한 공과 홀컵과의 거리는 6.5야드, 버디를 잡기에는 부담스러운 거리라고 봐야했다.
“좋았어요.”
“하하. 나이스 샷은 아니라 이건가?”
“그건 아니고…….”
미사키는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필상이라면 그보다 더 정확한 샷을 구사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그건 착각이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이 홀의 환경은 생각보다 복잡해 그 결과는 실망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 시도에는 미끼도 섞여 있었다. 하오통이 걸려들지 두고 봐야겠지만 필상의 고갯짓을 따라 간 미사키가 본 장면은 좀 특이했다.
“6번 아이언을 잡은 것 같은데요?”
“응. 내가 그걸 요구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말한 건 아니고요?”
“그랬나?”
프로 선수의 승부기질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 근성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정글이 프로의 세계다. 필상이 비록 세계가 인정하는 장타자지만 그 역시 6번 아이언으로 200야드 정도는 넉넉히 보낼 기량을 갖췄다.
평상시 5번 아이언 거리지만 필상의 선택을 엿듣고 오기가 발동한 것은 필상의 샷이 길었던 것과도 무관치 않았다.
“따악!”
자신감이 넘친 하오통의 샷은 굉장히 힘찼다.
누가 봐도 넉넉하게 친 것 같았으나 타구의 궤적을 바라보던 갤러리들의 입에서 돌연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포물선의 궤적이 확 일그러지며 타구가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린에 올라가기는커녕 한참 못 미친 호수에 퐁당 떨어지고 말았다.
그걸 쳐다보던 미사키가 필상의 팔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둘만 알고 있는 낚시질에 걸려든 것이 너무 신기한 모양이다.
해저드에 빠진 공을 바라보던 하오통이 들고 있던 클럽을 신경질적으로 내던지는 모습은 보기 흉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켜보는 팬들의 동정심마저 쫓아내는 만행이었다.
그러다 돌연 고개를 홱 돌려 필상과 미사키를 째려봤다. 터무니없는 그 샷이 우연히 나오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잘하면 한 대 치겠어요.”
“하하하. 속은 상하겠지. 하지만 그걸 조절하지 못하면 남은 홀은 볼 것도 없어.”
“흐흐흐……. 중국인들의 오만한 태도는 어딜 가나 똑같은 것 같아요.”
“그런 얘기는 그만하지? 일본인들도 만만치 않잖아.”
“에이! 우린 적어도 저러지는 않는다고요.”
“앞에서는 환하게 웃고 머리 숙이는 걸 좋아하지. 뒤에서 비수를 꼽는 게 문제지만. 어느 게 더 나쁜 걸까?”
“알았어요. 그만!”
골프에 국적이나 민족을 들이대는 것은 필상도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기에 일본인인 미사키와의 대화에서는 관련된 언급을 자제해 왔다.
미사키도 그걸 잘 알고 있지만 하오통의 행동이 너무 얄미웠던 그녀는 급격히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적절치 않은 발언을 꺼냈다. 그냥 두면 평정심을 잃어 자신의 역할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해저드 티로 이동해 3번째 샷을 한 하오통은 또다시 집중력이 흩어진 모습을 보였다. 필상이 안전하게 홀컵에 붙여 파를 잡아낼 것이라는 것을 지레짐작한 그의 웨지 샷은 그린을 넘겨 벙커에 빠지고 말았다.
-홀에 바로 집어넣는 것이 어렵기는 하죠. 하지만 어찌되었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중요한데, 좀 실망스럽군요.
-매치플레이의 아쉬운 부분입니다. 승부가 결정되면 의욕이 확 떨어지기 때문에 저런 샷이 나오는 겁니다. 하지만 팬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죠. 프로는 팬들의 사랑과 관심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지요. 하하하!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해설이었지만 갑자기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실시간 댓글 창이 돌연 난리가 난 것이다.
편파적이니,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함부로 하냐느니, 하오통을 옹호하는 자들의 불만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닉네임을 통해 추론하건데, 대다수는 중국인이거나 중국계였다.
-와우! 14억의 위력인가요?
-시청자들께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시는 것은 좋은데, 욕설까지 서슴지 않는 것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도 너무하는군요!
요즘은 방송 중계 중에도 실시간으로 시청자들의 반응을 체크한다. 세상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실시간 반응은 중계를 지휘하는 PD에게는 중요한 지표다.
전문적인 견해보다도 때로는 팬들의 입장이나 시각, 감정이 더 의미가 있을 수도 있어서 도를 넘어선 반응을 보고도 일단 책임자는 중계진을 먼저 자제시켰다.
아무리 정당하고 합리적인 논리라도 심각한 감정적 대립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걸 알지만 중계진의 표정은 곱지 못했다. 불의에 굴복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 남았어요.”
“3업에서 1업으로 바뀐 순간, 이미 하오통은 역전당한 기분일 거야.”
“그렇겠네요.”
“22도 유틸리티 줘.”
“3온 작전인가요?”
“응. 이젠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아서.”
분위기를 자신에게로 확 끌어온 필상의 겉모습은 전반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하오통의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22도 유틸리티를 들고 나가는 필상을 보며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는데, 그게 본인에게 독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필상이 씩 웃어 보이자, 몸을 움찔거렸다. 적개심을 넘어서는 강한 필상의 기세에 절로 움츠러들었는데, 살기라고 느껴진 것은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까앙!
정확히 스위트 스팟에 맞은 타구가 만들어 낸 청량한 소리에 속이 다 후련했다. 오늘은 정말 편안하게 라운드에 임했는데, 왜 전반 내내 고생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필상의 분석은 간단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를 가볍게 봤던 교만함이 문제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홀에서 티샷 미스를 한 뒤에도 자신의 플레이를 돌아보지 않고 상대의 행운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그걸 깨닫고 마음을 다잡으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절묘하게도 상대가 반응했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승리가 눈앞에 어른거리자 하오통이 먼저 흔들린 것이다. 그가 만약 담담하게 플레이를 이어 갔다면 그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뒤집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말 깔끔하군요!
-287야드. 드라이브를 잡았다면 더 보낼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22도 유틸리티로 정확히 페어웨이를 공략할 것 같으면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결과입니다.
-340야드까지 페어웨이가 이어지는데 좀 더 보내 2온도 노릴 수도 있지 않았나요? 미스터 퍼펙트의 티샷 정확도는 비교 불가 아닙니까!
-아무리 정확한 샷을 날리는 선수라도 매일 좋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첫 홀에서 장타를 날리다 홀을 잃었기 때문에 자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페이스를 잃은 상대의 실수를 기대하는 건 아닌가요?
-하하하! 그럴 수도 있지만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홀을 승부처라고 본 것 같습니다. 만약 여기서 진다면 남은 6개 홀에서 승부를 뒤집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정확한 진단이었다.
기세를 타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너인 필상의 티샷 미스가 나온다면 하오통은 여지없이 빈틈을 파고들 것이다.
매치플레이만이 가지는 상대적 특수성인데, 장타를 날리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전세가 역전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필상이 장타를 때리지 못한 것을 하오통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가 관건인데, 그는 역시 드라이브를 잡았다. 하지만 그도 이 샷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지 신중한 스윙을 했다.
결국 3온 1퍼팅으로 버디를 잡은 둘은 11번 홀을 비겼다. 그가 공격적인 성향을 포기하고 정확한 아이언 공략을 한 것은 필상으로서도 의외였다.
무리하다가 스스로 무너질 것을 기대했지만 냉정을 되찾은 하오통은 필상의 정확한 샷에 뒤지지 않는 질긴 근성을 보이며 아슬아슬한 리드를 이어 갔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