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압승(壓勝)
세기의 대결을 펼쳐 압도적으로 이긴 것도 모자라 상금 기부 소식까지 보태지자 미국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거액을 벌어 기부하지만 필상은 미국 사람이 아닌 한국 국적을 가진 선수다. 또한 아직 번 돈보다는 벌 돈이 많으리라 예상되는 대형 스타다.
그런데 일부도 아닌 전액을 기부한다는 훈훈한 소식에 안 그래도 높은 인기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미 상당 금액을, 그것도 우승할 때마다 받은 상금의 3할을 항상 해당 국가에 기부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실이야?”
“뭐가요?”
“3할 기부한 거?”
“에이! 이제 하지 말까보다. 비밀을 지켜 주겠다고 단단히 약속을 해 놓고 도대체 왜 그러지?”
10만 불 기부는 혼자 꿀꺽 하는 것이 낯간지러워 그랬다. 이미 기대했던 홍보 효과는 충분히 봤기에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질 3할 기부가 드러나는 것은 원지 않았다. 어디서 흘러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번 터지자 필상의 사회 공헌 내용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승 상금만 기부한 것이 아니다. 한국은 물론 일본, 미국에서 광고 촬영을 할 때마다 같은 비율로 선행을 베풀었다.
“공제 한도를 넘기면 너무 아깝지 않아?”
“왜 돈이 아깝지 않겠습니까! 아까워 죽겠습니다.”
“그런데 왜 매번 그렇게 아까운 짓을 해?”
“예전에 결심한 게 있거든요.”
“결심?”
없이 살 때, 가진 자들의 돈을 둘러싼 추악한 행태를 보면서 치를 떨었다. 만약 자신이 부자가 된다면 절대 저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설마 이렇게 빨리 부자가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뱉은 말은 꼭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비난하던 자들과 똑같아진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다.
다행이라면 모모코가 그걸 용납할 뿐만 아니라 따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곳간이 비기는커녕 날로 가득 채워지고 있으니 착하게 살아 복을 받는다는 생각을 했다.
“워낙 많이 버니까 상관은 없겠지.”
“더 벌기 위해서 비우는 겁니다. 그런데 잘 비워지지가 않더라고요.”
“단기간에 자네처럼 많이 번 선수도 없을 걸? 프로 데뷔 이후에 대체 얼마나 번 거야?”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하하하.”
계산에 밝은 필상도 그건 알지 못했다.
알면 의식하게 되고 인간의 과한 욕심은 결국 기반을 흔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렴풋이 짐작은 된다.
그런데도 애써 뇌리에서 지웠다. 이미 차고 넘쳐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미켈슨은 돈에 민감했지만 타이거는 다른 것을 언급했다.
“공. WGC에서는 아무 말도 없어?”
“저보다는 두 분께 연락이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면 그냥 넘어간다는 의미일 겁니다.”
“사익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괜히 건드려 봐야 팬들에게 좋은 소리가 나올 것 같지 않다는 걸 인지한 거죠.”
스카이스포츠는 대대적인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해 대회 개막 전날까지 모든 골프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WGC나 대회 주최 측에서는 자신들을 향해야 할 관심이 흩어지는 것이 무척 신경 쓰였을 것이다.
세기의 대결이라는 이름으로 편성된 그 이벤트는 이 대회 연습 라운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전에 아무 협의도 없이 진행한 것이라서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TPK의 위상과 영향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었다.
* * *
[수요일 오전 공필상 vs 브랜든 그레이스 - 6&5 승리]
[수요일 오후 공필상 vs 마쓰야마 히데키 - 7&6 압승]
13개 홀 만에 6UP으로 끝낸 필상의 승리 소식에 처음에는 ‘압승’이라는 표현이 붙었다. 하지만 오전에 리비를 누르고 기세 좋게 올라온 히데키를 12번 홀에서 쫓아 버리자 오전에 썼던 ‘압승’이라는 표현이 ‘승리’로 바뀌었다.
오후 경기 결과에 압승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기 때문이다. 필상은 장타와 정교함의 완벽한 조화라는 찬사를 받은 플레이로 상대에게 한 번도 우위를 내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상대는 백 나인에 들어설 때 이미 그로기 상태였다.
-1조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군요.
-그렇습니다. 리비가 2패를 당하는 바람에 히데키나 그레이스의 내일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미스터 퍼펙트는 16강 진출이 확정되었습니다.
-말이 필요 없는 월등한 기량이더군요.
-작년보다 더 탄탄해졌습니다. 이틀 동안 타이거, 미켈슨과 연습 라운드를 하면서 매치플레이에 대한 대비도 한결 완벽해진 것 같습니다.
-반드시 퍼펙트만 도움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아요. 동업자들이 모두 2승을 거두며 16강행 열차표를 끊었으니까요.
-오래 쉰 것을 고려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하하하! 하기야 작금의 PGA 최강자는 누가 뭐래도 퍼펙트니까요.
아무리 심플한 일대일 매치라도 오전 오후에 걸쳐 36홀 플레이를 끝낸 선수들은 지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필상은 쌩쌩했다.
남들보다 훨씬 적은 25개 홀만 치르고 일찌감치 휴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필상은 서 팀장에게 붙들렸다.
“됐다니까!”
“아니에요. 전 이 대표님에게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꼭 해야 해요.”
“정말 괜찮다니까. 마사지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야. 근육이나 혈을 잘못 건드리면 오히려 안 좋을 수도 있어.”
서 팀장은 기를 쓰고 필상에게 마사지를 하려고 했다.
이 대표가 무슨 의도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지만 서 팀장마저 비밀의 내부자로 만들 수는 없었다.
게다가 과연 얼마나 효용이 있을지 장담하기도 어려워 정색하고 거부했다. 그러자 그녀는 뜬금없이 뭔가를 내밀었다.
스포츠마사지 자격증, 그건 흔한 편인데 설마 경락마사지 자격증까지 취득한 줄은 미처 몰랐다.
“이래도 안 되나요?”
“응. 인간의 몸을 다루는 일이라는 게 자격증을 땄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그럼 딱 5분만 받아 보세요. 제가 그냥 겉멋으로 딴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드려도 싫다고 하시면 포기할게요.”
딱 5분만 버티면 된다는 말에 서 팀장이 시키는 대로 소파를 넓게 펴고 그 위에 엎드렸다. 상당히 어색한 기분에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것 같았는데, 돌연 그녀의 손길이 닿은 부분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현상이 나타났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서로의 기운이 오가지 않았는데도 근육이 이완되고 혈도가 개방되며 내력의 순환이 이뤄졌다.
토납을 하지 않고도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이 신기해 5분이 지났음을 알면서도 그대로 놔뒀다. 우려하던 그 어떤 야한 감정도 일지 않아 불편함도 덜었다.
‘으음……. 운기가 저절로 되다니!’
엄밀하게 말하면 그녀의 마사지에 효과를 더하기 위해 약하나마 내력을 운용한 결과다. 너무도 익숙한 터라 자연스럽게 운용되는 것을 내버려뒀을 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직접 토납을 하는 것보다 훨씬 편안하고 수월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편안하게 서 팀장의 마사지에 몸을 맡겼다.
혹시 뒤늦게 단점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핑계를 대며.
서서히 잠이 들고 있다는 것도 망각한 채.
“공! 공 프로. 밥 먹으러 가자.”
괄괄한 미켈슨의 음성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막 들어왔는지 타이거와 미켈슨이 문가에 서 있었고 서 팀장은 보이지 않았다. 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미사키!”
“서 팀장!”
필상은 두 보좌진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는데 전신에 힘이 넘쳤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아찔한 만족감이라고나 할까?
“저희 부르셨어요?”
“응. 너 샤워는 아까 하지 않았어?”
“여자들이 씻고 말고는 신경 쓰지 마시죠?”
“허 참. 알았으니까 밥이나 먹으로 가자고.”
퉁명스러운 대답은 미사키의 몫이었고 가만히 살펴보니 샤워는 그녀의 뒤를 따라 내려온 서 팀장이 한 것 같았다.
마사지를 하느라 힘들었던 것일까?
시선이 마주치자 상큼한 미소를 보인 서 팀장에게서 전에 없던 친근감이 느껴졌고 무척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필상도 덩달아 씩 웃어 줬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 의미는 서로 통한 것 같았다. 마사지가 너무 좋았으며 거부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도 깃들어 있었다.
[목요일 오전 공필상 vs 체즈 리비 - 무승부]
2승 1무로 승점 5점을 획득한 필상은 16강에 진출했다.
브랜든 그레이스도 히데키를 제치고 1조에게 허락된 16강의 남은 한 자리를 차지했다.
-오늘 Mr. 퍼펙트의 플레이는 좀 이상하지 않았나요?
-장담할 수는 없지만 오늘은 이 한 경기뿐이고 져도 3라운드 진출은 확정된 상황이기 때문에 코스 점검도 할 겸, 연습도 할 겸 조절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냥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하죠. 최선을 다한 상대 선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요.
차라리 꺼내지나 말지, 예의를 운운한 그 말 때문에 리비는 의문의 죽음을 한 번 더 당하고 말았다.
16강 진출에 실패한 것도 약이 오를 텐데, 중계진이 그 상처를 헤집는 건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라운드를 마친 뒤 필상과 포옹까지 나눴다. 그도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은 떨어질 것이고 필상은 16강에 진출할 것임을.
“수고가 많았는데 그냥 돌아가게 돼서 아쉽군요.”
“그 대신 오늘 한 수 제대로 배웠잖습니까!”
“하하하. 우리가 한두 해 여기 머물 것도 아니고 열심히 준비하고 기다리다 보면 기회는 또 올 겁니다. 그렇죠?”
“물론입니다. 혹시 다음에 만나면 그때는 조심하십시오. 아주 당당하게 맞설 테니 각오 단단히 하세요. 하하하.”
“네. 그러죠. 하하하.”
투어프로는 대회에 출전해 중도에 컷 오프를 당하는 것만큼 쓰라린 아픔도 없다. 상금도 적지만 실패를 자꾸 거듭하다 보면 결국 경쟁에서 밀려 퇴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비는 오늘 현존하는 최고의 선수와 겨루면서 적지 않은 배움을 얻었다. 기술적인 부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멘탈이라는 것도 새삼 확인한 경기였다.
5조에 속한 타이거는 3승, 11조에 속한 미켈슨도 2승 1패로 16강에 올랐기 때문에 저녁 만찬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그래도 역시 가장 중요한 화젯거리는 다음 라운드, 8강전에 대한 분석과 조언이었다. 그중에서도 필상의 상대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선수라는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하오통 리?”
“네. 세계 랭킹 100위 안에 든 유일한 중국 선수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타이거는 아는 게 좀 있습니까?”
“주로 EUR에서 활약할 거야. 전에 두바이 클래식에서 매킬로이를 1타 차로 누르고 우승한 선수가 바로 그 친구일 걸?”
아무리 무명에 가까운 선수라지만 상대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다소 길어졌던 저녁 식사가 끝나자 필상은 연습장이 아닌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노트북을 켜자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이 대표는 의외의 선수와 맞붙을 필상의 상황을 알고 서둘러 하오통에 대한 자료를 취합해 보낸 것이다.
“95년생이라……. 왕정훈이랑 또래야?”
17세 4개월의 나이로 아시안 투어 최연소 퀄리파잉을 통과한 왕정훈은 골프 천재 소리를 듣던 선수다. 어릴 적 하오통은 왕 프로의 벽을 넘지 못해 우물 안 개구리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2014년 2승을 거두며 아직은 골프 불모지라고 할 수밖에 없는 중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183cm, 75kg의 최적 조건을 갖춘 그는 중국 골프 선수 중에 가장 촉망받는 선수였고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선수였다.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는 306야드로 상위권이었으나 정확성은 56%로 확연히 떨어지는 단점을 지녔다. 게다가 그린 적중률, 평균 퍼팅 수도 하위권을 맴돌았다.
“그런데도 세계 랭킹이 46위라는 게 신기하군!”
데뷔한 지 9년 차지만 데이터만 보면 컨디션 기복이 심해 잘 맞는 날과 안 맞는 날이 확연히 구분되는 선수였다.
때문에 기선 제압이 관건이었다.
절대 기가 살게 놔두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지만 막상 8강전에서 만난 하오통은 오늘 신 내림을 받은 무당 같았다.
때리는 족족 의도한 지점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미사키의 표정에도 걱정이 잔뜩 담겼다. 그 빌미를 필상이 스스로 제공한 것이 쓰라렸다.
이미 1온에 성공해 본 적이 있는 1번 홀 티샷인데, 확 감기면서 2온에 실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잘 붙인 뒤, 파 퍼팅까지 홀컵을 외면하면서 기를 살려 준 것이 악재였다.
-만만치가 않은 선수로군요. 하오통 리.
-랭킹 1위와 맞붙어도 상관없다는 기백, 저러기가 참 쉽지 않은데 참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과도한 자신감을 표출하는 태도는 중국인들의 대체적인 경향이 아닐까요?
-공감 가는 바가 없지 않지만 오늘은 작은 빈틈도 보이지 않아 미스터 퍼펙트로서도 난감할 것 같습니다. 공 프로가 이렇게 끌려 다니는 경기는 또 처음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팬들로서는 더 흥미진진하지 않을까요?
-하기야 중국 선수들이 경쟁에 뛰어들어 성공하면서 아마추어 골퍼들도 골프의 맛을 알게 된다면 세계 곳곳에 위치한 클럽들의 운영은 한결 편안해질 것 같기는 합니다.
“나이스 샷!”
3번 홀까지 2타운으로 몰리던 필상은 급기야 4번 홀에서 첫 버디를 잡아 승부의 균형을 맞추는 듯했다.
하지만 이후 격차는 다시 벌어졌다. 뭔가 허전한 스윙을 하는데도 치는 족족 핀에 바짝 붙이는 통에 혼란스러웠다.
그나마 업 다운을 반복하며 전반을 3타 차로 마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버거운 대결이었다.
필상의 우승에 배팅한 팬들도 애가 탔다. 설마 3연승을 노리는 필상이 무명에 가까운 중국 선수에게 밀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