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내기 골프
“관리 상태가 엉망이네요.”
“운이 없었던 거지.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이런 작은 돌멩이까지 찾을 수는 없거든.”
“프로님도 이제 업자다 이건가요?”
“업자?”
무슨 말인가 했더니 선수임과 동시에 골프장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의 폭이 넓어진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물론 균일하지 못한 그린 상태는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최선을 다한 플레이가 불운 때문에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건 스포츠의 기본 전제인 공정한 경쟁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행운이나 불운이 나타날 확률은 누구나 비슷하잖아.”
“거기엔 동의하기 어려워요. 자꾸 불운이 겹쳐서 징크스처럼 굳어진 선수는 골프를 포기할 수도 있거든요.”
그냥 가볍게 넘길 수도 있는 화제라고 생각했는데, 미사키는 의외로 집요하게 따졌다. 지금이 정식 경기는 아니라서 굳이 지적할 내용은 아니지만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미사키도 선수 출신이라는 것이다.
작고 가녀린 체구를 탓할 수도 있으나 그녀보다 작은 선수들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을 보면 체격 조건이 만사를 결정짓는 열쇠는 아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좋지 못한 조건인데, 자꾸 불운까지 겹치면 선수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미세한 변화 하나에도 영향을 받는 게 골프인데, 그런 불안한 심리 상태로는 절대 좋은 플레이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불운이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기도 하잖아. 나도 그랬거든.”
“물론 저도 그래요. 스스로 결단하지 못했다면 프로님의 캐디가 되어 이런 호사를 누릴 수는 없었겠죠.”
“하하하. 무슨 호사씩이나!”
“아니에요. 프로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캐디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느껴요. 프로님도 그러셨다면서요.”
“그랬지. 남자 캐디, 그거 한국에서는 보통 마음가짐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거든.”
선수가 캐디를 하는 것이나, 남자가 캐디를 직업으로 삼는 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필상은 그 일을 하면서 큰 보람을 느꼈고 선수로 도전할 수 있는 동기를 얻었다.
미사키가 필상을 보필하는 자신의 일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필상을 흐뭇하게 했다. 경제적인 풍요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만족감을 피력하는 그녀에게서 함께 목표를 성취해 나가고 동질감을 느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당장 닥친 100달러 내기부터 확실하게 이기고 다시 얘기하자고.”
“어머! 죄송해요.”
흥미로운 점은 미켈슨도 버디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200달러를 손에 쥔 필상은 마음이 푸근할 만도 하건만 더욱 고삐를 바짝 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세계 골프계를 주름잡던 강자들이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방심하면 언제 비수가 꽂힐지 알 수 없다. 때문에 2번 홀 티 박스에 올라선 필상은 또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470야드에요. 내리막은 랜딩 지점에 따라 다르지만 300야드 페어웨이 기준으로 26야드가 낮아요.”
“22도 유틸리티.”
“22도요?”
“응.”
412야드 파 4홀은 1온을 노리더니 더 긴 파 4홀에서는 오히려 유틸리티를 잡았다. 그 이유는 아무리 내리막이 많아도 절대 1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로 질러갔을 때 그린 앞에 여유가 있어야 굴리기라도 할 텐데, 돌담을 쌓아 놓은 절벽 면이 그린에 맞닿아 있었다.
설사 그린에 떨어뜨려도 크게 바운드가 된 공은 반대편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물이 아닌 절벽으로 둘러싸인 아일랜드 홀인 것이다.
때문에 티샷 온 그린은 애당초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도 우드는 잡아 줘야 하는데, 필상은 정확한 샷을 선택했다.
타앙!
아예 스리쿼터 스윙이었다.
내리막이 심해도 티 박스 아래 우거진 숲을 건너려면 캐리가 220야드는 넘어야 한다. 그런데 22도 유틸리티를 잡고서 풀스윙도 아닌 스리쿼터로 펀치 샷을 날렸다.
낮은 공의 궤적이 숲을 이룬 나무들의 꼭대기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장면에서는 다들 미스 샷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구는 무사히 숲을 건넜고 페어웨이에 떨어진 뒤에는 미친 듯이 구르기 시작했다. 마치 잔디에 기름이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쭉쭉 미끄러진 공이 멈춘 지점은 놀랍게도 299야드였다.
“타이거. 저 친구가 대체 왜 저런 샷을 한 거지?”
“거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컨샷 방향이 어떤지 보세요!”
“아!”
티샷한 공이 어디에 서느냐에 따라 그린을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 티 박스에서 볼 때는 좌측 사선으로 길게 늘어졌고 폭은 좁은 기이한 형태다.
티샷이 당겨지면 그린은 거의 가로로 놓인 일(一)자처럼 보일 것이다. 너무 밀리면 러프에서 샷 컨트롤이 어려울 것이고.
그 와중에 필상은 페어웨이 우측 끝에 정확히 보냄으로써 가장 편하고 안전한 방향을 확보한 셈이었다. 타이거가 그 점을 지적하자 드라이브를 들고 있던 미켈슨은 클럽을 바꿨다.
5번 우드로.
“너무 뜬 것 같아요!”
“우측으로 밀릴 거야.”
“공중에 바람이 부나요?”
필상은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높이 치솟은 미켈슨의 타구가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 헤비 러프로 향했기 때문이다. 부드럽게 치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필상처럼 낮은 탄도로 숲을 통과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한 듯 보였다. 런이 적은 높은 탄도를 의도했기에 더 멀리 보내려고 강하게 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티 박스에서도 느껴지는 바람이 필상의 타구에서는 전혀 작용하지 않았기에 바람을 간과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얼굴이 붉어진 미켈슨은 내려오자마자 따지듯 필상에게 물었다.
“바람 때문에 낮게 때렸던 거야?”
“네.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가니 바람이 느껴지던데, 왜 그냥 때린 겁니까?”
“저, 저렇게 강할 줄은 몰랐지.”
차마 필상의 타구 궤적을 보고 오판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는지, 공격적이던 표정이 금방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뭔가 더 말을 하려던 그의 표정은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타이거 때문이다. 유틸리티 우드를 들고 티잉 그라운드로 향하는 모습이 당혹스러웠던 듯. 다만 22도가 아닌 한 클럽 더 긴 19도 유틸리티로 보였는데, 타이거의 스윙까지 확인한 미켈슨은 바짝 약이 오른 것 같았다.
필상이 구사한 샷을 거의 똑같이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거 지금 뭐 하는 거지?”
“멋진 공략을 따라 하는 것은 흔하고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아주 제 얼굴에 금칠을 하는군!”
“금칠이요? 전 그럴 필요 못 느끼는데요. 안 그래도 식을 줄 모르는 이놈의 인기 때문에 어딜 가나 움직이기도 힘든데, 그런 제가 굳이 금칠까지 할 필요는 없죠. 하하하!”
“헐!”
2번 홀에서 필상은 100달러를 딴 것에 만족해야 했다.
판에 박은 듯 필상과 타이거는 나란히 2온 2퍼팅으로 파를 기록했지만 2온에 실패한 미켈슨은 보기를 범했기 때문이다.
당장은 돈을 잃어 화가 나겠지만 이건 결코 그에게도 손해가 아니다. 이 소중한 경험들은 실전 라운드에서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린이 좀 아쉽네요.”
“그러게. 정기적으로 관리를 할 거고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대대적인 정비도 했을 텐데, 왜 이러지?”
셋의 의견이 일치했다.
너무 입자가 굵은 모래를 뿌린 것이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의도치는 않았을 것이나 작은 실수가 대회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주최 측에 통보하기로 했다.
다행히 아직 개막까지는 시간은 있기 때문에 정성을 들인 노력이 더해진다면 조정은 가능할 것이라는 결론도 얻었다.
코스를 평가하는 것과는 별개로 느닷없이 벌어진 세기의 대결은 홀을 거듭할수록 더욱 뜨거운 경쟁 구도로 돌입했다.
분명 초반 분위기는 필상의 일방적인 승리로 보였지만 경쟁자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 빌미를 제공한 사람이 필상, 자신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뿐.
[5번 홀 352야드 파4. 핸디캡 17]
1번 홀에 비하면 거리도 짧고 제반 환경도 수월했다.
다만 귀찮을 정도로 작은 벙커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데, 장타 1온을 노리는 필상으로서는 우측에 돌출된 나무로 인해 살짝 페이드를 구사하는 것 이외에는 걸림돌이 없었다.
빈 스윙을 통해 적절한 힘 조절과 에임을 결정한 필상은 의도한 샷을 만들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조금 더 휜 타구는 그린 앞에 떨어진 뒤 더 많이 꺾이면서 우측의 깊은 가드 벙커로 기어 들어가고 말았다.
이미 그 벙커의 모양과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필상의 이마에는 절로 주름이 잡혔다.
“하하하. 그럼 그렇지!”
“뭐가요?”
“인간이 어떻게 매번 완벽할 수가 있겠어.”
“전에는 저더러 괴물이라더니 이제 드디어 같은 종족으로 봐 주시는 겁니까? 실수하니까?”
“응.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안 한다는 거 알지?”
“으흐!”
완벽할 수는 없지만 완벽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이번 티샷도 살짝 더 휘기는 했지만 정상적인 방향으로 튀었다면 그린에 올라갈 좋은 샷이었다. 다만 기이하게 꺾일 것까지 대비하지 못한 불운을 실수라고 치부하는 것이 화날 뿐.
“다들 안전 모드네요.”
“안전 모드? 한계 모드겠지.”
“네?”
“그린에 올리고 싶어도 올릴 수 없는 단타자의 한계!”
“흐흐흐…….”
이동 중이었기에 필상과 미사키의 대화는 모두에게 들렸다. 실전에서는 던질 수 없는 도발을 먼저 한 사람은 상대다.
미켈슨이 나섰고 못이기는 척 방조하는 타이거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에게 입힌 타격은 비교가 불가했다.
최선을 다한 샷을 비하하는 발언에 장타를 날리지 못하는 둘의 체력적 한계로 맞선 것은 저물어 가는 젊음에 대한 치명적 지적이었다.
그런데 그 화려한 공격은 실패로 돌아왔다.
“와우! 적이지만 두 분 다 너무 멋지네요.”
“내가 부메랑을 던진 건가?”
미켈슨에 이어 타이거도 기가 막힌 아이언 샷을 터트려 버디를 예약했던 것이다. 오히려 독을 쓰게 만든 셈이다.
그에 반해 벙커에 빠진 필상의 공은 최악의 상태였다.
에그 프라이. 벙커 턱도 제법 높아 거리까지 조절하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홀 매치는 몇 타 차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이기고 지는 것만 있을 뿐.
때문에 거리까지 조절하려고 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턱을 넘지 못한 타구가 다시 벙커 아래로 굴러 내려왔기 때문이다.
맥이 빠진 3번째 샷도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클럽과 옷에 묻은 모래를 터는 동안 먼저 퍼팅을 한 타이거와 미켈슨, 다 버디를 잡았다. 이미 졌기에 마크를 잡아 건네는 미켈슨의 얄궂은 미소에 약이 오를 뿐.
“아! 난 300달러나 나갔어. 타이거 넌?”
“전 본전입니다.”
“으! 내 돈 300달러!”
프론트 나인이 끝나 잠시 그늘 집에 들렀다.
한때 1,100달러까지 들어왔던 돈이 300달러로 줄어든 필상은 제법 심각했다. 들어온 돈이 나가서가 아니라 둘과의 대결을 곰곰이 복기하는 중이었다.
기선 제압까지는 좋았으나 정상적인 매치플레이와는 다른 경기 방식이 과욕을 불렀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대일 매치에서 4번 홀까지 3, 4업 상태라면 굳이 5번 홀에서 1온을 노리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일정한 간격을 계속 유지하면 초조한 상대가 먼저 자멸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조건 18번 홀까지 도는 방식이라서 최대한 많이 따려고 했던 것이 무리수를 불러온 것이다.
“다들 안녕하십니까?”
“어? 당신은?”
타이거나 미켈슨은 갑자기 나타난 기자의 인사를 받았지만 이내 관심을 돌렸다. 이런 상황을 수없이 겪은 그 두 선수는 대회 개막을 앞둔 지금은 기자들을 상대할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그와 좋은 기억이 생각났다.
일전에 인터뷰를 할 때, 교묘하게 TPK를 홍보할 기회를 줘서 이 대표더러 인적 사항을 적어 두라고 했던 스카이스포츠 소속 기자, 그 이름도 흔한 마이클이었다.
그가 왜 그늘 집에 있었는지는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오늘은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연습 라운드가 잡혀 있어서 이곳에 잠복하다가 기삿거리라도 잡을 요량인 것이다.
그런데 필상이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라고 손짓을 하자 신이 난 마이클은 곧바로 달려왔지만 동반자들은 우려의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오랜만입니다. 마이클.”
“이름까지 기억해 주시고 영광입니다.”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데 그런 말씀 마시고 다리 아플 텐데 이리와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미스터 퍼펙트.”
대접받아 기분 나쁜 사람은 없다.
골프계에 종사하는 일원으로 최고의 선수인 필상의 그런 배려는 기분을 넘어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필상이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미켈슨과 타이거는 불안한 기색마저 보였다.
지금은 기자를 상대해 얻을 것보다 잃을 게 많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우려했던 것보다 더 강한 화제를 툭 내밀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네?”
필상이 주머니에서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은 100달러 지폐 3장을 바라보는 마이클의 표정이 아주 오묘했다.
돈이라는 것이 본시 그렇게 요상한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 수많은 상상이 그의 뇌리를 스쳐 갔을 것이다.
잠시 뜸을 들이며 타이거와 미켈슨의 긴장한 표정을 살핀 필상은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 회식을 할 건데, 그 비용을 걷은 겁니다.”
“더치페이를 굳이 미리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역시 기자의 눈은 날카롭군요. 하하하.”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