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세기의 대결
“그동안 일본 사업에 집중하느라 너무 오랫동안 투어를 쉰 점이 작용한 게 아닐까요?”
“같이 쉰 타이거는?”
진정시키려 끼어들었던 필상은 할 말을 잃었다.
사실은 객관적인 수치를 언급하면 아주 수월한 문제다. 타이거의 세계 랭킹은 아직 5위를 유지했고 미켈슨은 32위로 뚝 떨어졌으니 우승 가능성을 논할 순위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대놓고 그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찾지 못한 필상이 곤란함을 느낄 때, 구원의 손길을 뻗은 이는 뜻밖에도 서 팀장이었다.
“필. 보여 주면 되잖아요. 아직 짱짱하다는 것을!”
“물론 짱짱하지. 그런데 넌 누구지?”
“서 팀장이라고 부르시면 되요. 제가 인사가 늦었죠?”
“서 팀장?”
“이름은 서아영이고 앞으로 세워질 TPK 미국지사의 설립을 준비하기 위해 한국 본사에서 파견되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일어나 꾸벅 인사까지 하는 쾌활한 성격의 서 팀장에게 계속 화를 낼 수는 없었는지, 마지못해 인사를 받았다.
타이거와도 안면을 트자 슬그머니 필상이 나섰다.
얼마 전에 발스파 코퍼레이션의 고위 인사를 만난 일, 별 소득은 없었으나 관심을 가진 투자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음을 주지시켰고 이제 천천히 미국에서의 사업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는 의견을 냈다.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타이거였다.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닐까?”
“저도 서두를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대비는 미리미리 꼼꼼하게 할 필요가 있고 서 팀장이 이 대표를 대신해 제 미국 일정을 지원하는 역할도 수행할 겁니다.”
“아! 그런 거였군.”
타이거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당장 무언가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필상을 지원하는 것이 주된 임무라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미켈슨은 이번에도 헛다리를 짚었다.
“나도 케어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럼 이 참에 매니저를 바꾸시지요.”
“아!”
미켈슨은 TPK 사업의 동업자지만 소속은 다르다.
이 대표의 J&K 소속이 아닌 미켈슨의 케어는 그의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감당할 일이지, 여기서 할 말이 아닌 것이다.
본인도 멋쩍었는지, 아니면 오래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돌연 파격적인 말을 꺼냈다.
“어차피 계약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제 나도 라일리의 매니지먼트를 받아 볼까?”
“어머! 그럼 제가 바로 대표님에게 연락할게요.”
“그럼 나도 서 팀장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건가?”
“제가 두 분을 모실 역량은 되지 못하고 대신 더 예쁘고 깜찍한 직원이 담당할 수 있도록 건의할 게요.”
포인트를 잘못 짚은 거라면 괜히 어색해질 대응이다. 유부남인 미켈슨은 가정적인 남자로 유명하기 때문에.
하지만 싱긋 웃어 보이는 그의 표정을 보건데, 서 팀장은 정곡을 찌른 것이 분명했다. 이 대표와 통화하겠다며 조르르 달려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미켈슨에게 타이거의 한마디가 떨어졌다.
“필. 나이는 못 속이는 건가요?”
“뭐?”
“어린 동양 여자 취향을 가진 것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 친구가! 하하하.”
하기야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그가 겨울을 보낸 일본에서 미켈슨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보통 어딜 가든지 타이거가 더 높은 명성을 자랑하지만 묘하게도 일본 팬들은 미켈슨에게 열광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독특한 취향인 건지, 뿌리 깊은 백인에 대한 동경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에게 환호하는 수많은 여성 팬들의 존재는 필상도 놀라웠었다.
그 점을 알고 있기에 부정한 상상은 부질없는 것이라 보는 것이 합당했다. 하지만 미켈슨 스스로 오해를 살만한 묘한 언급을 보태기는 했다.
“난 딱 저런 스타일이 좋아.”
“하하하. 단아하고 아담한 여인을 선호하는군요.”
“응. 오해는 하지 말고.”
오해하지 말라는 말이 더 묘하게 들렸다.
하지만 개인의 취향까지 왈가왈부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그보다는 그가 돌연 이 대표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하겠다는 것이 더 중요한 사안이었다. 왜냐고 물을 필요는 없다.
사업을 함께 진행하며 자연스럽게 이 대표의 능력을 확인했고 개인적인 신뢰와 친분이 작용한 것이 분명했으니까.
“홀 매치 내기 어때?”
“콜!”
이틀간 샷을 점검한 TPK는 연습 라운드에 나섰다.
그런데 미켈슨이 먼저 내기를 제안했다. 아마도 베팅 업체의 배당이 은근히 신경 쓰인 게 아닌가 싶었는데, 타이거는 순순히 동의했지만 필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분이 하세요. 전 빠지겠습니다.”
“왜 이래? 재미없게.”
“1달러 내기 하실 거 아닙니까? 전 거부합니다.”
“왜?”
“밥값도 나오지 않는 내기를 제가 왜 합니까? 나만 손해를 볼 텐데.”
매홀 자신보다 잘 친 선수에게 1달러씩 주는 매치플레이다. 비기는 홀이 많고 기껏 이겨도 10달러를 손에 쥐기 힘들다.
하지만 이긴 사람은 밥을 사야 하기 때문에 가장 많이 딴 사람은 실상 손해인 셈이 된다.
“어허! 지금 자네가 꼭 이길 거라고 장담하는 거야?”
“그럼요. 이기고도 손해 볼 장사는 안 하는 성격이라서요.”
“좋아! 그럼 얼마로 할까?”
돈의 부족함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홀 당 1,000달러, 10,000달러를 걸어도 부담은 없다. 물론 필상도 그런 도박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딴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과도한 내기는 서로에게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홀당 100달러 하죠. 그래야 밥값이라도 나오죠.”
“너무 많지 않아?”
많다고 말한 사람은 의외로 타이거였다. 돈이 아깝다기보다는 과도한 금액은 친선이라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우리 셋만 생각하면 안 되죠. 딸린 식구가 몇인데!”
“좋아. 좋아! 타이거는 빠지든지.”
“아닙니다. 한 번 대차게 붙어 보죠. 하하하.”
그렇게 졸지에 세기의 대결이 맺어졌다. 모르긴 몰라도 이 매치플레이는 어느 방송사에 연락을 하든지 천문학적인 중계료를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을 빅 매치일 것이다.
타이거와 미켈슨, 그리고 필상이 맞붙기 때문이다.
“홀당 100달러라는 거죠?”
미사키는 물론 각 캐디들도 눈에 불을 켰다.
몇백만 달러가 걸린 대회보다도 이 내기에 더 관심을 보인 까닭은 그들도 선수와 한마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금액보다는 자존심이 걸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 설렁설렁 치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왜 금액을 올리셨어요. 어차피 소요 경비는 주최 측에서 다 지불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 단체 회식 비용까지 청구할 수는 없잖아.”
“아! 회식이요?”
“고기 먹으러 가자고. 오스틴에도 한국 갈비를 파는 곳이 있더라고.”
“갈비요? 흐흐흐.”
어쩌면 이번 대회의 결승전보다도 더 많은 팬들의 관심을 불러올 매치플레이가 그렇게 뜬금없이 시작되었다.
매치플레이에는 유독 자신 있는 필상이지만 타이거나 미켈슨의 축적된 노하우를 경험하는 것은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래도 내심 공격적인 플레이를 염두에 뒀다.
어차피 매 홀 승부를 가리는 경기 방식이기 때문에 모 아니면 도가 통할 것이고 그 시작은 1번 홀부터였다.
“드라이버.”
“장타를 날릴 거죠?”
“응. 한 번 시원하게 때려 보려고.”
시원하게 때린다는 말을 들었지만 설마 이 긴 홀에서 온 그린을 노릴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않았다.
첫 홀이며 좌측으로 부드럽게 휜 도그렉 파 4홀, 그 전장은 412야드였고 그린까지의 직선거리도 389야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너로 나선 필상의 연습 스윙이 바람을 가르는 굉음을 쏟아 내는 순간, 이건 정말 장난이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동반자들은 물론 그들의 캐디들 표정까지 덩달아 심각해졌다. 아니, 어쩌면 기대가 잔뜩 묻은 표정일지도 모르겠다.
필상은 모든 골프팬들이 인정하는 최장타자다. 하지만 웬만해서는 그 멋짐을 보여 주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 아니면 확실한 팬 서비스의 경우에만 몇 차례 보였을 뿐이다.
죽어라고 때려도 350야드를 보낼 수 없는 선수도 많지만 웬만한 장타자들은 그런 타구를 자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 정도를 보낼 것 같으면 무리할 이유가 없는 거리였다.
“기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네!”
“……그런 것 같습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미켈슨과 타이거도 필상이 루틴에 따라 어드레스를 취하는 순간, 숨을 죽이고 쳐다봤다.
과연 예측한 대로 장타를 날릴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까앙!
얼핏 봐서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느릿한 템포다. 하지만 잔뜩 짓눌린 스프링이 팍 튕기듯 완벽한 어깨 회전이 이뤄졌고 리드미컬한 체중 이동도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소름이 돋을 만큼 강렬하고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돌아간 여러 시선이 까마득히 치솟은 타구를 쫓았다.
얼마나 힘차게 날아가는지 그냥 하늘을 뚫어 버릴 기세였고 절대 하강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만 타구의 방향이 그린과는 동떨어진 정면을 향하는 바람에 막창이 날 것처럼 보였다.
“우우우! 드로우!”
“얼마나 강력한 힘이 가해졌는지 저렇게 늦게 돌아가는 드로우 샷은 본 적도 없습니다.”
쭉쭉 뻗어 나가던 타구는 스트레이트 구질로 보였다. 하지만 자의적인 모든 상상은 허무하게 빗나갔다. 타구가 하강하면서 드로우가 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설마 그린까지 갈까?”
“갈 겁니다.”
“이거, 이거 어째 우리가 저 친구 수작에 걸린 것 같은데?”
“그러게 왜 100달러에 동의하냐고요!”
“어디 이럴 줄 알았냐고!”
저 홀로 장타 대회에 나온 선수처럼 인정사정없이 갈긴 타구는 결국 그린 앞 페어웨이에 정확히 떨어졌다. 크게 한 번 바운드가 된 공은 그린에 가볍게 올라섰다.
보고 있으면서도 절로 고개가 저어지는 실로 무시무시한 장타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핀을 향해 곧장 굴러갔다.
우측으로 기운 라이 때문에 방향은 엇나갔지만 힘 조절은 나무랄 데가 없어 홀컵 우측 5야드 지점에 멈춰 섰다.
필상의 클럽을 받으러 쫓아 나간 미사키는 발을 동동 구르다, 손뼉을 치다, 결국 만세까지 불렀다.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하마터면 확 끌어안을 뻔했다.
“나이스 샷! 나이스 샷!”
“내가 봐도 좀 멋지네. 하하하!”
티 박스를 내려온 필상은 타이거, 미켈슨과도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아무리 내기라도 상대의 훌륭한 샷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입이 근질거렸던 미켈슨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기 골프야. 이건.”
“필 미켈슨이라는 분이 그런 말을 하실 수 있나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사기야!”
“그럼 지금이라도 물릴까요?”
“노! 골프는 장갑을 벗 어봐야 안다는 거 몰라?”
“어련하시려고요. 하하하.”
호전적인 성격은 따라갈 사람이 없는 그였다.
다행이라면 두 번째 순서가 타이거라는 것이었다.
성격이 불같은 미켈슨이라면 필상의 장타를 도발이라 규정하고 장타를 날렸을 것이다. 최근 연습이 충분치 않은 그로서는 페어웨이를 지킬 가능성이 아주 낮다.
그에 반해 늘 자신만의 플레이를 할 줄 알았던 타이거가 필상의 올무에 먼저 빠지고 말았다. 장타를 때리려고 하지는 않은 것 같았으나 생각과는 달리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결과는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악성 슬라이스. 체중 이동이 너무 빨라 미처 클럽 헤드가 따라오지 못하는 초보적인 미스를 범한 것이다.
“어라?”
“그래도 나가지는 않았네요.”
“그러게. 보험 처리라도 해야 하나?”
어차피 2등만 해도 된다.
받아서 주면 본전이니까.
그래도 미켈슨의 성격상 잘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는 괜히 먹은 것이 아니었다.
노련한 그는 더도 말고 290야드만 공략했다.
페어웨이 정중앙에 보낼 수만 있다면 세컨샷은 125야드밖에 남지 않아 얼마든지 버디를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 또한 의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타이거 파이팅!”
“하하하. 약 올리다 되치기 당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타이거는 좀 알지. 두고 보라고.”
무수히 많은 대회에서 맞부딪쳤지만 묘하게도 둘은 플레이오프와 같은 결정적인 순간에 만난 적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수처럼 인식된 이유는 타이거의 전성시대에 가장 많은 승수를 쌓은 경쟁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을 위해 마련한 [The Match: Tiger vs Phil]이라는 이벤트 대회에서는 미켈슨이 완승을 거뒀다.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를 받는 두 거장의 현재 실력은 차이가 난다기보다는 당일의 컨디션이 더 크게 좌우한다는 의미다.
“어허!”
“거 봐. 한 번 꼬이면 천하의 타이거도 어쩔 수 없다니까!”
아무리 러프가 깊고 질겨도 158야드 거리라면 타이거는 최소한 그린 근처까지는 보낼 능력이 된다.
하지만 붕 뜬 타구는 거리도 방향도 맞지 않았다.
그에 반해 미켈슨의 세컨샷은 그린에 올라왔을 뿐더러 필상보다 짧은 4야드를 남겼다.
연거푸 실수를 범한 타이거는 35야드 칩샷마저도 핀에 붙이지 못했다. 3온 2퍼팅, 보기를 범한 것이다.
문제는 필상의 이글 퍼팅인데, 묘한 것이 이걸 넣지 못하면 미켈슨과 비길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기껏 1온을 하고 비긴다면 오히려 플레이가 꼬일 수도 있다.
때문에 필상은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홀 인!”
타구가 움직이는 순간, 미사키의 응원이 터졌다.
필상으로서는 과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집중한 보람이 있는지 원하는 라인을 타고 구를 때만 해도 필상은 이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홀 컵 바로 앞에서 살짝 튄 공은 홀컵 우측을 타고 돌더니 뻔뻔한 자태를 드러내고 말았다.
탭인 버디는 성공했지만 썩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뭔가 이상해 살펴봤더니 어이없게도 자그마한 돌이 공의 방향을 바꿨던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