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56화 (256/354)

256. 너무들 하는군!

바쁜 시간을 쪼개서 왔다지만 그건 필상도 마찬가지다.

한 주 걸러 굵직한 대회를 앞둔 필상은 한시 바삐 텍사스로 이동해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을 만난 것은 이 대표의 추천 때문이다.

당장 미국 시장에 진출할 준비도, 여력도 충분치 않은 마당에 서두를 이유가 없다. 그가 자신 있게 내민 사업 계획서는 겉만 번지르르할 뿐, TPK로서는 실속이 없었다.

만에 하나 함께 사업을 한다고 해도 주체는 TPK이고 그들은 투자자여야 한다. 엄청난 부를 축적한 자산가라도 골프에 관한한 자신 앞에서 먼저 고개를 쳐들 수는 없듯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

“자꾸 헤드업을 하더군요. 골프를 좋아한다면서 고개를 쳐들면 안 된다는 것도 모르나?”

“호호호. 헤드업?”

중의적인 의미가 함축된 그 표현에 이 대표도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의미인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미팅 시간은 아주 짧았다. 그들이 주최한 대회에 참가하는 정성을 보여 줬지만 자신이 주도권을 쥔 듯, 거만한 태도부터 상당히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시로 이 대표를 곁눈질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느끼한 감정도 일절 반갑지가 않았다. 자신의 여자도 아니건만 수컷들의 영역 수호 본능은 어쩔 수 없는 듯.

“그자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죠?”

“무슨 관심? 지금 장난해?”

“자꾸 누나를 힐끔거리는 모습은 정말 불쾌했습니다.”

그 말을 던지고는 금방 후회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가끔 사용하곤 했던 누나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었고 단순히 피아 식별의 문제를 넘어 이성적 관심의 표현으로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녀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필상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서서히 번지는 입가의 미소가 달콤하게 느껴진 것은 착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괜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린 필상은 이후 그녀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마치 몰래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애처럼.

어색한 침묵이 길게 느껴질 무렵, 그녀의 결론이 나왔다.

“일단 발스파와의 논의는 보류할게.”

“네.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아쉬운 건 저들이지 우리가 아니죠. 그 점을 충분히 인지할 필요가 있고 조금 전과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면 만날 이유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전에 담당자와 논의했던 내용과는 너무 많이 달라서 나도 좀 당황스러웠어. 공 프로가 계획에 없던 대회에 출전한 것을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배려를 배려로 받아들이지 않고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했을 가능성에 대해 짚어 봤다. 본시 누릴 대로 누려 본 작자들, 태어나면서부터 갑이었던 자들은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다르다.

때로 본질을 꿰뚫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 자신이 좋을 대로 해석하고 밀어붙인다. 상대를 약자로 보는 것이다.

“어찌 됐든 결과가 나쁘지 않아 돈도 명예도 얻었으니 그건 고마운 일이죠. 하하하.”

“나도 그자의 묘한 시선이 거북하기는 했어. 하지만 공 프로가 곁에 있어서 그런지 별로 부담스럽지는 않더라고.”

마침내 그녀의 대답이 나왔다.

괜한 화제를 건드려 긁어 부스럼이 될까 우려했지만 역시 이 대표는 필상에게 힘을 실어 줬다. 정말 누이처럼 편했다.

“발스파와 관련된 문제는 일단 그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고. 앞으로 미국에서 벌일 사업은 바쁜 대표님이 직접 나서지 말고 적당한 사람을 포진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음…….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 누가 좋을까?”

상당히 중요한 자리여서 이 대표는 물론 필상도 잘 아는 인물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대표를 대신해 필상을 챙기는 역할도 겸해야 하기 때문에 신뢰는 기본이다.

“서 팀장 어때요?”

“아영이?”

“젊지만 똑똑하고 일도 잘해 팀장으로 승진했다면서요?”

“아! 아영이는 영어 구사도 거의 원어민 수준이고 무엇보다 믿을 수 있어서 괜찮을 거 같아.”

“그럼요. 일하는 데 나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죠.”

“들어가는 대로 미국지사로 발령을 낼 게.”

서아영은 초창기에 필상을 직접 챙기던 이 대표의 비서다.

지금도 한국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만 미국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반드시 공략해야 할 가장 큰 시장이다.

섣부르게 뛰어들 생각도 없고 성공할 가능성은 더욱 낮기 때문에 측근을 배치시키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본격적인 사업이 진행되면 골프클럽 운영은 전문가의 몫이다. 다만 오너의 생각과 판단을 정확히 구현할 수 있는 인사를 낙점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 대표도 적극 찬성했다.

플로리다를 떠나며 한국을 오래 비운 이 대표를 대신해 서 팀장이 건너와 필상을 챙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문제점이 있는데, 이 대표는 여러 번 말할 기회를 찾으려 망설였지만 결국은 언급하지 못했다.

* * *

이 대표가 한국으로 날아가는 사이, 필상과 미사키는 오스틴에 도착했다. 이젠 어딜 가나 필상을 알아보는 팬들 때문에 다니기가 번거로웠지만 필상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친필 사인도 해 주고 인증 샷을 같이 찍는 것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적극적으로 함께했다. 그로 인해 공항을 빠져나오는 데 무려 2시간이 소요되었다.

잔뜩 볼멘소리를 하는 미사키, 꽤나 힘들었나 보다.

“미국 사람들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잘 지켜 준다고 하던데, 다 거짓말이었어요!”

“하하하. 다 소중한 내 팬이잖아. 귀찮아도 어쩔 수 없어. 그들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그래도 너무들 하는 것 같아요. 이래서야 어디 마음 편하게 다닐 수나 있겠어요?”

“즐기자고. 그리고 아무리 불편해도 인상은 쓰지 말고.”

“네.”

그녀도 힘들지만 필상이 더 피곤하다는 것을 알기에 투정은 거기에서 그쳤다. 하지만 캐디인 그녀가 필상을 홀로 챙기는 것이 무리라는 것이 증명된 상황이기도 했다.

그냥 한두 주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 일정을 살피고 지원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 대표를 대신해 곧 적임자가 올 것이라는 말에 그제야 미사키의 표정이 밝아졌다. 자신의 역할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하는 모습에 비로소 필상도 안도했다.

다시 찾은 오스틴 골프클럽에 들어서자 감회가 새로웠다.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결국 기권하고 돌아서야만 했던 작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클럽하우스에 들어서자 운영진이 직접 마중을 나와 반겼다. 작년과는 확연히 달라진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저 연이은 행운을 거머쥔 루키로 취급을 받았으나 이젠 어엿한 세계 랭킹 1위의 절대자로 인식되었다.

그 증거는 주최 측에서 특별히 마련해 준 프라이빗 숙소다. 코스와 인접해 있으며 최고급 시설을 갖춘 대형 별장으로 타이거와 미켈슨이 함께 머물 공간으로 최적임은 분명했다.

공평치 못한 대우로 볼 수도 있지만 시장주의 논리는 부정할 수 없다. 흥행의 블루칩인 TPK를 특별히 대우하는 것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약자의 변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엄연한 현실이 그러했고.

“코스를 한 번 둘러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이죠. 대회 개최를 위해 나름 정성껏 관리했는데 한 번 둘러보시고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적극적으로 참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골프클럽 대표는 아니라는데, 현장 최고위직으로 보이는 관리자가 직접 나서 흔쾌히 허락했다. 곧바로 코스를 구경하러 나가는 필상 일행을 대신해 가져온 짐을 먼저 숙소로 보내 주는 서비스도 잊지 않았다.

카트를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사양한 필상은 미사키와 함께 노을이 기울고 있는 코스를 함께 걸었다.

“와! 너무 좋아요.”

“그렇지? 난 행운아인 것 같아.”

진심이었다.

푹신푹신한 잔디를 밟으며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자신이 너무도 대견하게 느껴졌다. 또한 행복했다.

자신을 도구로 취급하고 억울한 누명까지 씌워 내친 과거의 못된 갑이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로 인해 약혼자가 떠나갔고 삶을 포기할 생각도 했지만 그렇게 밑바닥을 찍은 순간, 새로운 삶이 다가왔다.

하늘이 도운 것도 사실이지만 모든 것이 운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번에는 절대 놓칠 수 없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해 달려왔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결과다.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지만 행복해. 내가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저도요!”

“하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 노력해도 성취할 수 없는 사람이 많잖아. 그걸 알면서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렇지가 않다. 과거에 비해 많은 것을 얻었다고 현실에 안주한다면 절대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현재 자신이 가고 있는 여정의 곁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이들이 호시탐탐 최고의 자리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좀 천천히 가세요. 너무 힘들어 보여요.”

“하하. 그런가?”

미사키가 보기에 너무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든 경기를 직접 함께 뛰는 그녀는 필상이 얼마나 힘든 과정을 겪는지 알고 있다.

아주 쉽게 우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남다른 능력이 있지만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행위는 스스로 자제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이점은 없다.

오로지 노력하고 집중하는 만큼 주어지는 결과일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자신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조언하는 미사키와 같은 존재가 곁에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힘이 났다.

* * *

“프로님!”

“어?”

“보고 싶었어요.”

연습장에 갑자기 서 팀장이 나타났다. 온다는 연락이 있었어도 공항에 마중을 나갈 형편은 되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갑작스러운 등장에 반가운 마음과 미안함이 엇갈렸다.

그러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보고 싶었다는 말을 건네는 그녀를 보자 꼭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겨우 건넨 말이라고는 역시 한국식 인사였다.

“밥은 먹었어?”

“네.”

“기내식?”

거짓말은 할 수 없었던지 배시시 웃으며 넘기려는 서 팀장, 물론 필상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다 잘 먹고 잘살자고 하는 일이 아니던가!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서둘러 자리를 정리한 필상은 두 여인을 대동하고 오스틴 시내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하지만 좋은 음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프로 데뷔 초창기에 필상이 겪었던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 나누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와인까지 곁들이게 되었다.

지나온 길을 정확히 되짚고 돌아보는 것은 더 나은 미래로 나가는 밑거름이라고 여겼기에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 * *

[공필상 / 브랜든 그레이스 / 마쓰야마 히데키 / 체즈 리비]

64명을 16개 조로 나눈 최종 조 편성이 발표되었다.

마지막까지 출전 여부가 확실치 않았던 몇몇 선수들 때문에 발표가 다소 늦어졌지만 조 편성이 발표되자 시끄러웠다.

일대일 매치플레이의 특성상 상대적 우열이 존재하고 누구랑 누가 붙느냐에 따라 여러 구설을 낳았기 때문이다.

필상이 속한 1조는 다른 조에 비해 평이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그 기준이 이 대회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필상의 16강 진출에 맞춰진 점이 특이했지만, 3연승 가능 여부도 함께 다뤄졌다.

-1조에서 우리 공 프로 다음으로 순위가 높은 선수가 마쓰야마 히데키 선수더군요. 이건 좀 의외죠?

-세계 랭킹에 의해 정확히 배정된 것이니 그런 발언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24위인 히데키가 전혀 위협적이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미 수차례 겨뤄 봤지만 매번 공 프로의 압도적인 경기력에 밀려 제대로 힘을 써 본 적이 없습니다.

-55위인 리비도 특별한 경쟁력을 갖춘 선수는 아니죠?

-그렇습니다. 거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죠. 다만 공 프로가 기권했던 지난해에 이 대회 준우승을 거둔 브랜든 그레이스의 랭킹이 40위인 것은 좀 이채로운 부분입니다.

-다른 대회 성적은 별게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일대일 매치에 강하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나마 흥미로운 대결이 될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 주목할 부분은 역시 공 프로의 3연승 같은데, 전문가들의 평가나 베팅 업체의 배당은 어떤가요?

대회를 앞두고 한국의 한 골프 채널에서 이와 관련된 토론을 진행했다. 흥미로운 점은 전문가들의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베팅 업체가 내놓은 필상의 우승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1/3. 역대 이런 배당은 나온 적이 없다.

무려 64명이 출전한 대회다. 산술적인 평균은 1/64이며 필상 다음으로 높은 배당이 나온 선수가 고작 1/9에 불과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4명으로 타이거 우즈와 로리 매킬로이, 브룩스 코엡카, 더스틴 존슨이 다음 순위를 차지했다.

내로라하는 선수들보다 무려 3배나 우승 가능성이 높게 평가된 것에 많은 골프팬은 물론 전문가들도 할 말을 잃었다.

“너무들 하는군!”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러십니까!”

“난 뭐냐고? 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불만을 토하는 이는 오늘 정오 무렵, 오스틴에 도착한 미켈슨이다. 아침에 도착한 타이거와 함께 늦은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는 화기애애하게 출발했다.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에 각자 맡은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다들 흐뭇한 분위기였다. 태국이나 일본이나 모두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타이거가 아주 흥미롭다며 배당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미처 모르고 있던 미켈슨이 얼른 기사를 확인한 뒤에 나타낸 반응이다.

본인의 기대와는 너무 달랐는지, 그의 이름은 물론 배당까지 일체 언급조차 되지 않은 게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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