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필드의 절대자
“굉장히 쑥스럽군!”
“프로님이 일부러 박은 것은 아니군요.”
“당연하지. 아무리 비가 많이 와 그린이 소프트해도 그렇지, 그린에 공이 박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폭우가 쏟아진 것도 아닌데 코스 듬성듬성 공이 땅에 박히는 바람에 프리퍼드 라이 룰(Preferred Lies-공이 놓인 위치가 젖어 더 나은 위치로 볼을 옮길 수 있도록 허락되는 규정)이 적용되었다.
그나마 페어웨이는 구제를 받지만 러프는 볼을 칠 수도 없는데, 건드리지 못하는 규정 때문에 순식간에 무너지는 선수들이 나오고 있었다.
“일단 공은 꺼내고 라이를 정상화시켜야 하는 거죠?”
“당연하지. 라이가 어떨지 모르겠네.”
파 4홀 1온은 자주 나오는 상황이 아니다.
이번 대회 들어 내내 안전한 공략을 고집하던 필상도 사실은 답답했다. 코스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팬들의 바람에 역행하는 안전한 공략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시원한 샷을 한다고 결과가 반드시 나쁘게 나오라는 법이 없을 것 같은 유혹이 시도 때도 없이 솟구쳤다. 하지만 그 모든 울화가 이 한 방에 모두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우후! 좀 아깝네요.
-물기가 얼마나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대다수의 선수들이 거리 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도 버디를 잡았으니 이만하면 아주 훌륭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말 역전이 되었네요. 단독 선두였던 폴 케이시가 8번 홀에서 보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8야드 거리에 올리고도 3퍼팅, 승부가 점점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군요.
-하하! 세계 랭킹 1위인 미스터 퍼펙트가 단독 선두로 나선 상황에 그런 평가는 너무 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악천후 경기에 무척 강합니다.
-저도 제 눈으로 직접 중계방송을 했기 때문에 잘 압니다. 하지만 내일은 비가 더 많이 오고 바람도 분다는 예보가 있어 우승의 향방을 함부로 예측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필상의 위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었다.
물론 공평한 중계가 기본이지만 두루두루 덕담을 해 주는 것이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걸 알면서 유독 필상에게만 엄정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10번 홀까지 4타를 줄이며 -9로 올라섰지만 이후 8개 홀에서는 버디와 보기를 맞바꿨다. 점차 빗줄기가 굵어진 것도 문제였지만 코스 상태가 너무 안 좋아 타구가 의도한 대로 가질 않아 어쩔 수 없었다.
“수고 많았어요.”
“무슨 놈의 비가 이렇게 지겹게 오죠?”
뽀송뽀송한 수건을 들고 기다린 이 대표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그 이유가 곧 밝혀졌는데, 필상도 의식한 바였다.
“그래서 말인데, 아마도 내일은 경기가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아. 일기예보도 그렇고.”
“그럼 오늘 성적이 중요하잖습니까!”
“호호호.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 챔피언 조가 2홀을 남긴 지금 공동 2위는 -7에 불과하거든.”
“그래요? 좀 찜찜하겠지만 하루 더 쉴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네요.”
필상과 이 대표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다.
3라운드 결과를 실은 대부분의 매체에서도 같은 의견을 달았다. 미국에 건너오자마자 곧바로 2연승을 거둘 가능성이 높아진 필상에 대한 다양한 분석도 함께 다뤘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띠는 기사는 이거였다.
[격이 다르다. 이제껏 영웅이라 칭송받은 그 어떤 선수와 비교해도 탁월하다. 마치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스포츠를 통해 끊임없이 한계에 도전해 왔다.
한때는 100마일이 파이어볼러의 상징이었지만 지금 메이저리그에는 그런 선수가 수두룩하지 않던가!
골프도 다르지 않다. 과거 나무로 만든 클럽을 사용할 때와 비교하면 현격한 성장을 거듭해 왔다. 선수들 간의 경쟁이 더 심화된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과거와 같은 영웅의 탄생은 타이거 우즈를 마지막으로 더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괴물이 탄생한 것이다.
[골프 역사를 바꿀 필드의 절대자!]
아직은 영웅들과 비교하기에는 여러 모로 부족하다.
통산 승수나 메이저 대회 우승 횟수는 까마득하다. 그래서 너무 섣부른 예견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지만 기자는 그것을 부술 통계들을 꼼꼼하게 제시했다.
한국을 비롯한 외국 투어의 성적도 눈부시지만 그걸 모두 제외하고 1년 남짓한 기간에 PGA에서 이룬 성적만으로도 최강임이 입증되었다.
1년 새에 메이저 대회 3개를 거머쥔 선수는 없다. 거기에 보태 구체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더 할 말이 없다.
평균 타수, 티샷 평균 비거리, 페어웨이 안착률, 평균 퍼팅 수를 비롯해 통계가 잡히는 대부분의 수치들이 1위였다.
최상위권을 벗어난 것을 찾고 싶어도 불가능했다고 적었다.
“오늘은 그냥 좀 쉬지 그래요?”
“놀면 뭐 합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날씨에 비 맞으면서 야외훈련을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이런 날씨는 인위적으로 만들 수가 없거든요. 아마추어라면 부킹을 취소하면 그만이지만 전 이게 밥벌이 아닙니까.”
“그러면 적당히 하고 들어와요.”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필상이 다시 연습하러 보조 필드로 나간다는 말에 이 대표는 아연실색했다. 내일 경기가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대화를 나눈 이유가 지난 3일 동안 너무 지친 것 같아 좀 쉬라는 의미였다.
필상을 돕느라 힘들었을 미사키도 휴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 샤워를 끝내지 않은 미사키가 나오기 전에 하프백에 따로 클럽 몇 개만 챙긴 필상은 비가 솟아지는 필드로 향했다.
“프리퍼드 라이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를 대비하기에 오늘처럼 좋은 날은 없거든!”
보통 라운드를 통해 비에 흠뻑 젖으면 아무리 건강한 프로 선수들이라도 감기 몸살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필상은 전혀 컨디션 하락을 느끼지 못했다. 필요하다면 토납을 해서라도 어렵게 만들어진 연습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물에 거의 잠긴 공을 때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물의 저항이 어떤지, 잔디는 어떻게 샷을 방해하는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연습하는 것은 의외로 즐거웠다.
앞으로 실전에서 얼마나 이런 상황을 자주 겪게 될지는 모르지만 트러블 샷에 대한 연습과 고민은 추후 큰 자산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도 알아야 하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미사키 너는 오늘 너무 많이 젖었어.”
“괜찮다니까요.”
“지금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때는 아니야. 네가 든든하게 곁을 지켜야 나도 좋은 경기를 할 수 있는 거니까 일단 들어가서 푹 쉬어.”
필상이 혼자 연습하는 것이 안 되어 보였는지 미사키는 곁을 지키겠노라 고집했다.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필상이 보기에는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정색을 한 뒤에야 마지못해 물러났지만 비를 피할 수 있는 멀찍한 장소에 서서 필상의 연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 * *
“미사키는요?”
“병원에 보냈어.”
“그러게 들어가 쉬라고 했는데도 똥고집을 부리더니 결국 몸살이 나고 말았군요.”
“얼른 다녀와서 제 일을 하겠다는데, 어려울 것 같아.”
“그럼 오늘 제 캐디는 누가 보죠?”
“나!”
미사키가 아파 병원에 갔는데도 그녀의 표정이 어둡지 않은 이유가 밝혀졌다. 이 대표는 필상의 캐디를 보는 것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와는 입장이 바뀐 셈이다.
“그래서 이렇게 차려입은 거군요.”
“응. 캐디 복장을 걸치면 소용이 없겠지만 그래도 우린 항상 폼생폼사 아니겠어!”
“밥이나 먹으러 가죠.”
“좋아! 우리 뭘 먹을까?”
“애가 아프다는데 혼자 너무 신난 거 아닙니까?”
“에이. 그냥 감기 몸살인데 뭘. 캐디를 보려면 든든해야 하니까 난 스테이크 먹을래.”
“아침부터 스테이크요? 나도 콜!”
“경기를 할 선수가 너무 부담되는 음식 아닐까?”
“난 안 되고 대표님은 되나요? 나야 운동이라도 하지만.”
“그런가? 그럼 나도 운동하면 되지.”
일기예보는 오늘도 빗나간 것 같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지만 경기를 취소할 수준은 아니었다. 코스가 엉망이라 직원들이 정비하느라 분주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어제부터 정상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한 지경이라서 차라리 우천 취소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느긋하실까?”
“바쁠 게 없을 것 같아서요.”
“설마 이 정도 비에 마지막 라운드가 취소될까?”
“그럴 것 같습니다.”
언제나 시계처럼 정확히 움직이던 필상이 식사를 마치고도 창밖을 내다보며 한가롭게 차를 즐기는 모습이 생경했을까?
오늘 하루 필상의 캐디를 한다는 설렘에 가득 찬 이보영은 다 마시지도 않은 커피를 들고는 연습장으로 가자며 보챘다.
업무를 볼 때와는 달리 덜렁대는 모습이 하도 귀엽게 느껴져 짓궂게 놀려대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연습장으로 이동하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심상치가 않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대로 경기가 종료되면 필상이 우승을 하는데도, 이 대표의 표정은 심술궂은 아이처럼 뾰로통했다.
“아줌마. 혹시 제 매니저 아니십니까?”
“오늘은 캐디야. 그리고 아줌마라니? 어딜 봐서?”
“좀 아깝기는 하죠. 이래서 여자는 너무 똑똑하고 잘나면 안 되나 봅니다.”
“어? 그저 성차별적인 발언인데?”
“큭! 취소!”
세상이 참으로 무섭게 변하고 있다.
페미니즘을 거부하지 않지만 오랫동안 습관처럼 굳어진 남녀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쉽게 변하기 어렵다. 딱히 여성을 무시하거나 차별할 의사는 없지만 도를 넘은 페미니즘이 대화를 가로막고 사회를 양분하는 현상은 두렵기까지 하다.
어디 무서워서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에이! 괜히 들떴나 봐.”
“캐디를 할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드릴게요. 그러니 아침 먹은 것 소화하려면 연습 좀 하죠?”
“그래야겠네.”
연습장에 있던 선수들도 점점 더 거세지는 빗줄기에 클럽을 놓고 망중한을 즐겼다. 오늘 더 높은 순위를 상상하던 이들에게는 진한 아쉬움이 남겠지만 홀가분한 표정들이었다.
그 와중에 필상은 이 대표와 나란히 연습을 시작했다. 하필 이 대표가 필상의 앞에 서는 바람에 자꾸 시선이 흩어졌다.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는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필상의 집중력을 흩어 놓았기 때문이다.
“프로님. 우승 축하드립니다.”
“어? 안 프로.”
“이번 대회는 여기서 끝날 것 같아서 가기 전에 인사도 드릴 겸 왔습니다.”
“부상은 괜찮고?”
“네. 많이 좋아진 것 같아서 일단 출전했는데, 괜찮더라고요. 돌팔이 같은 놈들이 돈 벌려고 오진을 한 모양입니다.”
“아! 그렇다면 다행이네.”
필상이 도왔다는 것을 안 프로는 꿈에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다행이지만 왠지 서운한 감정도 들었다.
그때 마침 미사키가 나타났고 아프다던 그녀가 손을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취소되었어요! 낙뢰 경보가 내렸대요.”
“아이고! 아프다는 인간이.”
“히히히. 저 주사 맞고 누워 있었더니 금방 좋아졌어요.”
“좋아지기는! 아직도 얼굴이 벌건데.”
미사키와 이 대표, 안 프로와 우승을 자축하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동료 프로들이 다가와 우승 축하 인사를 건넸다.
확실히 작년과는 달라진 태도 변화에 기분이 좋아진 필상은 다가온 선수들마다 악수하며 안면을 익혔다.
경쟁자이면서도 같은 길을 걷는 동반자들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시상식이 일찍 진행되었고 간단한 인터뷰까지 끝낸 필상은 저녁이 되기 전에 숙소로 돌아와 벼르고 벼르던 수영을 한가롭게 즐길 수 있었다.
* * *
플로리다를 떠나기 전, 필상은 이 대표의 소개로 발스파 코퍼레이션 관계자를 만났다. 마흔이나 됨직한 젊은 사람이 나왔는데, 이 대표는 그를 발스파의 최대 주주라고 소개했다.
골프를 좋아하고 필상의 열성팬이라는 그는 먼저 자신들이 주최한 대회에 참가해 빛내 준 것에 감사를 표했고 우승 축하 인사도 전했다.
하지만 그건 본론을 위한 요식행위일 뿐, 구체적인 사업 이야기가 나오자 미리 준비한 자료부터 건넸다.
이 대표와 이미 상당 부분 논의가 진척되었는지 구체적인 계획과 예산까지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어떻습니까?”
“잘 봤습니다. 브라이언.”
그는 필상이 잘 준비된 사업 계획서를 보고 감탄이라도 터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짧은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것도 가진 자의 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어진 필상의 말은 그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동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 서방이 챙긴다!’”
익숙하지 않은 표현에 잠시 그 의미를 곱씹은 브라이언의 표정은 이번에도 솔직했다. 너무 직설적인 도발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그는 역시 사업가임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행동을 취했다.
“하하하! 수완이 좋다는 말은 거듭 들었지만 이렇게 배포까지 클 줄은 미처 몰랐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도 있지요.”
“김칫국?”
“거창한 계획에 홀려 동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상호 신뢰 구축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저희는 아직 미국 진출에 대한 의지도, 확신도 없습니다.”
“그야 우리가 차차 논의하면 될 것이고 상호 신뢰는 몇 마디 말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지 않소이까?”
“그렇지요. 일단 오늘 안면을 텄으니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천천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