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54화 (254/354)

254. 아빠 미소

“저 소파에 기대 앉아 봐.”

“여기요?”

“그래. 편안하게.”

필상은 축축하게 젖은 벙커에서의 샷을 연습하기 위해 인근의 Hammock Dunes 골프클럽으로 가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안 프로가 다시 찾아오자 뜬금없이 그를 데리고 자신의 숙소로 들어왔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온 안 프로는 시키는 대로 거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앉았다.

필상의 시선이 자신의 팔꿈치에 머물고 있었기에 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하려고 머리를 굴렸으나 답은 찾을 수 없었다.

“내가 기 치료를 배운 적이 있어.”

“기 치료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필상이 자신을 위해 소중한 시간을 쓰고 있다는 현실이었다. 애당초 안 프로는 기 치료 같은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

하지만 존경해 마지않는 필상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왼팔을 주무르기 시작하자 그냥 눈을 꾹 감고 말았다. 장난 같으면서도 장난일 수 없는 이 상황이 너무 당혹스러웠기 때문이다.

‘허억!’

당황스러운 기분도 잠시, 갑자기 왼팔에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빼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걸 예상한 필상이 꽉 붙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뜨겁다는 느낌은 잠시, 마음이 편안해지며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안 프로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치료가 너무 확연하게 드러날 것 같아 재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의도가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확인한 필상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그려졌다.

치료에 자신감이 생겼던 것이다.

“기다렸다가 깨어나면 전해 줘.”

“뭐라고요?”

“형이 기껏 도와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치료 중에 곯아떨어지면 어떡하느냐며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더라고.”

“프로님이요?”

“응. 한숨 자고도 안 일어나면 깨워서 보내.”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귀찮게 해서 미안해. 미사키.”

“아니요. 근데 안 프로님은 치료가 된 건가요?”

“아니. 내가 무슨 재주로 파열된 근육을 치료해. 하하하.”

완치는 아니더라도 경기를 포기하고 짐을 싸야 할 만큼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삽시간에 그런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밝혀지면 그게 설사 신뢰하는 미사키라도 거리감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숙소를 나선 필상은 이 대표가 기다리는 클럽으로 향했고 비에 젖은 것처럼 물을 듬뿍 뿌린 벙커에서 다양한 샷을 연습했다.

구경하러 나온 골프장 관계자 몇몇이 찬사를 보낼 만큼 일관성을 갖춘 뒤에야 숙소로 돌아왔는데, 이미 어둑어둑해진 시간이었다.

“어? 자네 왜 아직도 안 갔어?”

“인사는 드리고 가야 할 것 같아서요.”

“무슨 인사?”

“내일 LA로 가서 치료를 받으려고요. 아무래도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든지.”

안 프로는 팔꿈치가 상당히 호전된 것을 알지 못했다. 하기야 무리하지 않으면 평소에는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대회에 참가해도 되는데, 그냥 가 버리면 아쉬울 것 같았으나 자신의 입으로 밝힐 수는 없어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미사키에게 배웅을 맡긴 필상이 샤워하러 움직이자 기이하게 여긴 이 대표가 따라붙었다.

“안 프로가 왜 우리 숙소에 와 있었던 거지?”

“저 씻을 건데, 같이 들어갈 거 아니면 좀 있다 얘기하죠?”

대답하기 곤란하게 만든 필상의 말은 그만 나가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농담도 상대를 가려야 한다는 걸 깜빡했다.

당황한 기색은커녕 묘한 미소를 지은 이 대표가 정말이냐며 눈을 껌뻑이는 바람에 필상은 호흡곤란을 느꼈다.

“하하하. 얼른 씻고 내려갈 게요.”

“이 인간이…….”

그냥 돌아 나가려던 이 대표가 홱 돌아서더니 갑자기 필상의 팔을 야무지게 꼬집었다.

참으려다 약이 올랐는지 사정없이 응징을 가한 것이다.

* * *

-미스터 퍼펙트 때문일까요? 발스파 챔피언십이 첫날부터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고 합니다.

-저도 상당히 놀랐습니다. 말이 쉬워 만 명이지,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거든요. 1인당 평균 60달러로 계산해도 대체 얼마입니까?

중계방송 초반부터 돈 얘기를 하는 것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계산할 수 있는 거금을 언급하자 시청자들의 집중력은 확 올라갔다.

또한 필상의 인지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로서 그보다 정확한 언급은 없을 것 같았다.

-좀처럼 작은 대회에는 출전하지 않던 그가 아닙니까?

-그렇죠. 한국 투어에 전념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는데,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입니다. 세계 랭킹 1위와 KPGA 흥행,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결과는 정말 놀랍습니다.

-상금 규모도 작은 이 대회에 출전한 걸 보면 염려와는 달리 이번 시즌에는 투어에 성실히 참가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골프팬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요. 하지만 2주 후에 WGC 매치플레이가 열립니다.

-아! 미스터 퍼펙트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대회일 텐데, 2주 연속 출전? 너무 일정이 버겁지 않을까요?

-지금의 좋은 컨디션을 이어 가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 해설은 적절치 않았다.

사람의 체력과 집중력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컨디션이 좋아도 2주 연속 출전은 심신을 지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물론 한 주간의 여유가 있지만 그 대회 이후에 또 다시 한 주를 건너면 시즌 첫 메이저 대회인 ‘더 마스터즈’가 열린다.

이미 캘린더 그랜드슬램 도전을 선언한 필상이기에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적절한 일정의 조정이 필요해 보였다.

이전까지는 PGA 투어 출전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기에 발스파 챔피언십에 나선 필상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정답은 오로지 당사자만 아는데, 너무 무리한다는 의견과 무조건 반기는 이들 사이에 애매한 논쟁까지 벌어졌다.

사실은 이 대표의 제안에 따른 것뿐이고 이동 거리가 짧아서 큰 부담도 없었던 선택인데, 소모적인 논쟁이 길어지면서 오히려 필상의 위상은 더 높아지는 셈이 되었다.

[1라운드 버디 4개, 보기 2개: -2. 공동 9위]

코스에 적응할 여유가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기록이다. 하지만 좀처럼 보기도 기록하지 않는 완벽한 이미지를 가진 필상이기에 공동 9위라는 성적에 말이 많았다.

이제 겨우 1라운드를 치렀을 뿐인데, 톱 10에 들고도 팬들의 이런 엉뚱한 반응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파격이었다.

하지만 실제 경기를 치러 본 필상은 이 코스의 경우는 실전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무리 야디지 북이 있고 사전에 코스를 꼼꼼하게 체크했어도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 공략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

“마운틴 브레이크와 잔디의 결이 의외로 까다롭더군요.”

“공 프로가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심각한 거네.”

“물론 차차 나아질 겁니다. 그나저나 제 성적에 대한 말들이 많다면서요?”

“미주알고주알 시끄럽게 떠들어대지만 그래도 연승할 것이라는 의견이 더 지배적이야.”

“으음……. 바람직하네요. 하하하.”

농담처럼 웃어 넘겼지만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일본 투어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지만 PGA투어는 정성을 쏟아야만 한다. 어찌 되었든 가장 큰 무대이며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게 다 돈이기에.

[2라운드 버디 5개, 더블 보기 1개: 최종 -5. 공동 6위]

느낌은 아주 좋았다.

스윙도 깔끔했으며 어떻게 공략을 해야 할지 감도 왔다.

하지만 느낌과 결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오후 티오프였는데, 후반 들어 갑자기 비가 흩뿌렸다.

그래도 플레이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쉬운 미스 샷이 하나 터졌다. 디봇에 빠진 세컨샷을 너무 쉽게 봤다가 생크가 났는데, 요놈의 공이 임팩트 직전에 움직인 탓이다.

물론 인위적인 변화를 가한 적이 없어 벌타는 아니었으나 치명적인 더블 보기로 이어지고 말았다. 파 4홀의 4온 2퍼팅,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엄지를 치켜세운 팬들도 있었다.

어이없지만 나온 결과를 뒤바꿀 수는 없어 웃고 말았다.

‘너무 설렁설렁 치는 거 아니야?’

“하하하! 그럴 리가!”

‘수미가 아빠 나왔다고 얼마나 좋아하는데, 잘 좀 해 봐.’

“수미가?”

모모코는 아직 태국 전지훈련 중이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엄마가 수미를 돌봤다. 누나들까지 적극적으로 돕기 때문에 아이를 보는 것이 어렵지는 않단다.

안 그래도 시시때때로 딸내미가 보고 싶었는데, 마침 큰누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중계방송이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에 끝나기 때문에 기대하지 않았던 전화에 수미 얘기가 나오자 흐뭇한 아빠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네 얼굴이 TV 화면에 클로즈업이 되기 전부터 널 알아보고는 자꾸 TV앞으로 다가가는 통에 애를 먹었어.’

“음……. 우리 공주가 보고 있다면 잘 쳐야지. 그럼!”

필상은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다. 때문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회임에도 전 라운드를 생중계하고 있었다.

워낙 우승을 밥 먹듯이 하고 새벽에 시작하는 일정이라서 가족들이 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수미까지 일어나 아빠를 응원한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선을 끝낸 현재 선두와는 3타 차, 충분히 역전이 가능한 순위지만 3라운드에 임한 필상은 조심스러운 경기를 펼쳤다.

-미스터 퍼펙트의 이번 대회 경기 내용은 어째 시원시원하지가 않군요!

-프랭크. 전반에 착실히 3타를 줄여 1타차 공동 2위로 올라섰는데, 더 이상 뭘 더 해야 합니까?

-세계 최고의 테크니션이라고 불리는 선수라면, 또 이전 대회의 양상을 고려하면 확연히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죠. 챔블리. 이번에도 그가 정말 우승을 할 수 있을까요?

미스터 퍼펙트라는 별명과 동떨어진 경기력을 보인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우승을 바라지 않는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더 플레이어스에서도 엉뚱한 발언을 하는 바람에 시청자들의 항의가 빗발쳐 사내 내부 경고를 받은 상황인데도 기회가 오자 또다시 프랭크는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필상이 우승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날카로운 지적이라는 칭찬은 받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게다가 역전 우승이라도 거둔다면 이번 발언도 팬들의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인코스에 접어든 필상은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365야드 파 4, 우측 도그렉인 10번 홀에서 1온을 시도한 것이 급격한 변화의 시작점이었다.

-어허! 지금 그린을 바로 공략하려는 건가요?

-네. 우측 나무를 넘기려는 에임을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직선으로 보낼 경우에는 338야드에 불과하니까 얼마든지 가능한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드라이브로 그렇게 높은 궤적을 만드는 게 가능한가요? 가능하더라도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데, 갑자기 왜 저러죠?

-코스에 적응을 끝내고 자신감을 얻은 것 같습니다. 이 코스가 낯선 이들에게 쉽게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한 그가 드디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죠!

-갑자기 경기 도중에 전략을 수정하는 것이 그다지 좋은 결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일단 결과를 보고 얘기 나누시죠.

-그러시죠. 하하하!

중계하는 두 사람의 상반된 입장이 그들의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전문가인 챔블리는 상당히 기대 어린 기색이었으나 프랭크의 이마에는 주름이 잔뜩 잡혔다.

누가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캐스터의 애매한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실시간 댓글이 줄을 지어 올라가는 이유였다.

까앙!

기껏 1타 차까지 추격한 마당에 무리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누구보다 안정된 기량을 보여 왔고 추격하는 입장이라서 가만히 놔둬도 경쟁자들이 더 조급해질 확률이 높다.

하지만 10번 홀에 들어선 필상은 지난 이틀과는 달리 미사키에게 드라이브를 요구했다. 그리고는 가슴이 뻥 뚫리는 굉장히 힘찬 티샷을 선보였다.

타구의 궤적 또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나뭇가지들을 넘긴 타구는 떨어지는 빗방울을 꿰뚫고 그린을 향해 멋들어진 포물선을 그려냈다.

“인 더 홀!”

듣는 필상도 헛웃음이 나올 엄한 응원 소리가 빗발치는 가운데, 타구가 그린을 곧바로 직격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평소 같으면 그린을 오버해 그린 뒤의 화단까지 들어갈 강한 타구로 보였지만, 크게 튈 것이라고 예상했던 공이 돌연 시야에서 사라지는 기이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뭐죠? 공이 대체 어딜 간 겁니까?

-공이 그린에 콱 박혀 버렸습니다.

-네? 이런 경우도 있나요?

-강우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요 며칠 꾸준히 내린 비가 페어웨이는 물론 그린까지 최악의 상태로 몰고 간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경우는 저도 난생 처음 봅니다.

가끔 탄도가 높은 샷을 구사하면 그린에 큰 자국을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박히는 현상은 배수가 잘 되지 않는 페어웨이나 러프에서나 벌어지지 그린에서는 볼 수 없다.

그린 스피드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장비를 동원해 꾹꾹 눌러 주기 때문에 그린은 보기보다 훨씬 딱딱하다.

그런데도 믿기 힘든 상황을 마주한 팬들은 탄성부터 터트렸다. 얼마나 강한 힘을 머금었으면 그린에 박혀 버린단 말인가!

그린의 상황이 정확히 보이지 않은 티 박스에 위치한 필상도 팬들의 이상한 반응을 대하자 샷 결과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지?”

“공이 박힌 것 같아요.”

“짧았나? 그럴 리가 없는데!”

“아니오. 페어웨이가 아니라 그린에 박힌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남들의 눈에는 다시없을 멋진 티샷처럼 보였을지 모르나 사실은 힘 조절에 실패한 필상은 굉장히 아쉬워하던 차였다.

갑작스럽게 강한 스윙을 하다 보니, 날씨까지 제법 쌀쌀해 의도했던 것보다 강하게 휘두른 스윙이 크게 아쉬웠지만 그래도 2온 1퍼팅, 버디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위했었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치 못한 행운을 마주하자 어리둥절하고 쑥스러울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린을 향해 이동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환호성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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