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발스파 챔피언십
대답 대신 코고는 소리만 더 커진 필상의 반응.
이 대표는 잠시 고심하더니 작은 의자 하나를 끌고 와 필상의 침대 맡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필상의 손목을 잡았다.
순간 강한 전류가 흐르는 걸 느낀 그녀는 깜짝 놀라 필상의 손을 놓쳤다. 하지만 이내 다시 필상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은 이보영은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필상을 마사지해 준 적이 있기에 지금의 행동은 낯설지가 않았다. 살포시 떨리기는 했지만 손에서 팔, 어깨로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기운을 나누었다.
덮었던 이불이 흘러내리기 전까지.
‘어머!’
이불 아래 감춰졌던 우람한 그 무엇인가를 보는 순간, 그녀는 벌떡 일어나 황급히 그 방을 벗어났다.
어제 일도 찜찜한 마당에 혹시 그것 때문에 곤란을 겪나 싶어 달려왔는데,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야 말았다.
‘에베레스트!’
등산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떠오르는 단어는 그것뿐이었다. 하늘을 향해 위풍당당하게 텐트를 친 위대한 귀물(貴物)의 영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붉어진 낯빛을 감추기 어려웠다.
같은 경험을 한 미사키가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헤아리지 못하고 그만 거실로 달려 나오고 말았다.
“대표님?”
“으응. 아무 일도 없었어.”
“흐흐흐……. 그럼요. 우린 못 봤죠.”
“나 시원한 주스 한 잔만 줄래?”
“네. 갈증이 날 만하죠. 호호호.”
동병상련이기 때문인지 부끄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 굉장히 아쉬웠다. 남의 것이기 때문일까?
평생 그렇게 용맹무쌍한 물건은 본 적이 없다. 어릴 때 봤던 묘한 영상에서나 나옴직한 대상을 직접 눈으로 본 심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여기요.”
“응. 고마워.”
일단 필상에게 별다른 이상이 없음은 확인했다.
뭔가 불편한 진실이 있는 것 같았으나 지금으로서는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아직 대회는 이틀이나 남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마당에 그냥 푹 쉬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봤다.
하지만 그 시간 필상은 깨어났다. 이 대표의 신선한 기운이 피부를 통해 전신에 퍼질 무렵 정신을 차렸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당시 상황이 애매하기도 했지만 그녀에게서 흘러들어 오는 기운이 너무도 편안하고 좋았기 때문이다.
“에이 씨. 옷이나 입고 잘 걸!”
그 전에 미사키가 다녀간 것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밤새 답답했던 심신이 맑아지는 이유가 이 대표에게서 흘러들어 오는 음의 기운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 특유의 체향을 온전히 느꼈기 때문이다. 너무도 행복한 포만감이 전신을 휘감았는데, 문득 자신이 거의 알몸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코를 곯지 않을 수 없었다.
걱정한 대로 원지 않는 상황이 벌어져 행복한 시간은 날아가 버렸고 필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좌정하고 토납을 시작했다.
‘확실히 효과가 있어!’
잠시였건만 오랜만에 접해서인지 이 대표의 기운은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이 대표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고 싶지만 그게 과연 성립할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납에 집중해도 어젯밤 한순간에 무너진 내력의 균형은 좀처럼 잡기 어려웠다.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필상은 자세를 풀고 도움을 청했다.
-대표님. 저 좀 도와주시죠?
답신은 한참 뒤에 돌아왔다.
아주 짧았지만 임팩트는 강렬했다.
-옷은 입었죠?
최근 이 대표는 필상에게 편한 어투를 사용했다.
누나처럼 친숙했기에 너무 편했는데, 갑자기 말을 높였다.
심경의 변화가 있음을 자인한 셈이다. 의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론입니다.
-그럼 내려와 밥부터 먹죠?
-네.
이 대표의 마사지는 모든 것을 충족시켰다.
태국을 떠나온 뒤로 대회에 참가하느라 많은 심력을 소모한 탓이리라. 하지만 그건 예상을 벗어난 현상이었다.
적어도 한 달 이상은 음기를 취하지 않아도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발 상황에 너무도 취약한 자신의 상태를 장담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물론 이 대표가 그것까지 감안해 미국에 같이 온 것은 아니었는데, 이젠 붙들어야 할 판이다.
“괜찮죠?”
“네. 대표님은요?”
“나도 십 년은 젊어진 것 같아요.”
“하하하. 십 년이나요?”
웃어 넘겼지만 그녀의 표현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굳이 자신의 도움을 거부하지 말라는 의미다.
서로의 기운을 나누는 것이 필상은 물론 자신에게도 굉장히 유익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그 행위에 대한 거부감을 버리라는 조용한 요청이었다.
사건의 발단이 좀 묘했고 그로 인해 깜짝 놀랐지만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필상은 더욱 정순한 기운을 품을 수 있었다.
서로 부담만 가지지 않는다면 이보다 좋은 휴식과 재충전은 없다는 결론에 이른 필상은 기꺼이 그러겠노라 답했다.
환하게 웃는 이 대표의 얼굴을 마주하노라니 자신의 수양이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어? 안 프로 아냐.”
“더 플레이어스 2연승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그런데 왜 자네 혼자야?”
“이번 주 한국 선수들은 대부분 하루 이틀 쉬고 푸에르토리코로 넘어간다고 합니다.”
“아!”
연습장에서 안병훈 프로를 만났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던진 필상은 좀 쑥스러웠다.
다음 주에 열리는 WGC 델 테크놀로지 매치플레이는 상위 랭킹 64명만 출전하고 한국 선수로는 필상과 안병훈, 임성재만 출전을 보장받았다.
“상금 규모가 3분의 1도 되지 않더라고요.”
“멀어서 비용도 꽤 들어갈 텐데…….”
큰 대회에 참가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선수들은 같은 기간 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리는 코랄레스 푼타카나 R&C 챔피언십에 출전한다.
약자의 설움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강자들이 빠진 대회이기 때문에 상금 순위를 올릴 필요가 있는 선수들에게는 아주 절실한 대회이기도 하다.
시드 걱정은커녕 매 대회마다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필상으로서는 괜히 미안한 화제를 꺼낸 셈이었다.
“성재는 미리 텍사스로 건너가 연습한다고 합니다.”
“작년에 그 친구가 4강에 들었었지?”
“네. 프로님이 중도에 포기하시는 바람에…….”
“하하하. 그 얘기는 그만하고 네 스윙 좀 볼까?”
“좋죠. 하하하.”
환한 표정만 봐도 필상의 코칭에 대한 기대가 큰 걸 알 수 있었다. 개인적인 친분을 고려하면 태국 전지훈련에 몇몇 한국 선수들을 초청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필상은 PGA 선수들도 포함시키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타이거나 미켈슨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경쟁자들까지 배려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마음은 있었지만 초대하지 못했던 미안함에 원 포인트 레슨이라도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어허! 요즘 좀 무리했나?”
“부지런히 쫓아다녔거든요.”
상위 랭커가 아니면 출전 기회는 제한된다.
매주 월요예선을 통해 출전권을 얻는 선수도 셀 수 없이 많지만 세계 랭킹 55위인 안 프로는 대부분의 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갖췄기 때문에 겨울 내내 투어를 뛰었다.
성적은 본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나 톱 10에 2번 들면서 시드를 지키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은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안 프로의 스윙을 본 필상은 고개를 연신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주저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지적했다.
“스윙 궤적이 칠 때마다 달라.”
“저도 알고는 있는데 집중을 해도 잘 안 됩니다.”
“정말 왜 그런지 몰라?”
“네?”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되묻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안 프로였다. 하기야 문제점을 안다면 당연히 교정했을 테지만 그런 것 같지 않아 필상은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 줬다.
성큼 다가서 오른팔 팔꿈치를 꾹 잡아가는데, 안 프로는 기겁하며 몸을 뺐다. 닥친 엄청난 통증을 참기 힘든 듯.
“어어어어! 형님!”
“병원에서는 뭐래?”
갑작스러운 행동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실 그는 지금 오른팔이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스윙은 왼팔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에 병원에 가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 중에 병원에 가면 오히려 병을 키운다는 편견을 가진 이는 드문데, 그 케이스였다.
가끔 통증이 오지만 참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운동선수는 부상을 달고 사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필상이 슬쩍 잡아 누르기만 했는데도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확 구겨진 인상에 필상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너 이 상태인데도 정밀 진단을 안 받은 거야?”
“겨울에 받았죠. 작년 연말에.”
“연말에? 대체 왜 그래? 운동선수는 몸이 재산인 거 몰라?”
“잘 알지만 그게 스윙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지금 네 샷이 들쑥날쑥한 건 다 그것 때문이야. 밸런스가 자꾸 무너지잖아. 얼른 연습 접고 병원부터 다녀와.”
당연한 말인 것은 알지만 안 프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가 얼마든지 이겨 낼 수 있는 하찮은 고난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필상이 정확히 짚어 내자 마음의 동요가 일었다. 작은 부상이 더 큰 부상을 부채질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어허! 안 갈 거야?”
“아니요. 가 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자신이야. 가족도 친구도 아니고.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이해하지만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는 사람에게 어떻게 최고의 샷을 기대할 수 있냐고!”
“네. 다녀와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웬만해서는 자신의 손으로 치료하고 싶지만 그것으로는 감당할 정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정확한 진단도 없이 괜히 어설프게 나섰다가 행여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건 돌이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가 떠나기 조금 전에 도착한 이 대표도 대충 눈치를 챘는지 걱정을 보탰다.
“운동을 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 몸 관리는 철저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봐?”
“지나치게 용감한 거죠. 아마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대체 어떤 상태인데?”
“그야 저도 모르죠. 오른팔이 스윙에 방해가 된다는 것, 그게 팔꿈치 부상 때문인 것은 분명합니다. 만져 본 순간, 탁한 기운이 확연히 느껴졌으니까요.”
이 대표도 필상의 각별한 능력을 안다.
이미 서로의 기운을 나눠 본 적이 있기 때문에 현대 의학으로 설명하기 힘든 초월적 능력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치유 능력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선수들의 장단점을 한눈에 파악해 가르치는 것에 이어 부상도 찾아내는 것에 그저 약간 놀랐을 뿐이다.
“연습 라운드 나갈 거지?”
“네. 만만한 코스가 아니라서 필히 확인해 봐야 할 게 많은 것 같아요.”
“내일부터 다시 흐리고 비가 온다니까 그것도 염두에 둬야 할 거야.”
“유념하죠.”
필상은 자신의 경기보다 안 프로의 부상이 더 염려스러웠다. 자신이 인지한 바로는 쉽게 치료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연습 라운드가 시작되자 딴 생각을 할 겨를은 없었다. 예상보다 훨씬 난해한 코스였기 때문이다.
“뭐 이런 코스가 다 있지?”
“그러게요. 벙커가 너무 많아요. 사막도 아니고.”
“하하하! 벙커샷 연습을 많이 해 둬야 할 것 같아. 특히나 젖은 모래가 필요할 것 같은데, 주최 측이 허용할까?”
“제가 대표님에게 연락해 볼 게요.”
아무리 코스를 살피기 위한 연습 라운드였다고 하더라도 3오버는 좀 심한 스코어였다. 미사키가 잔뜩 걱정하는 것과는 달리 필상은 라운드 내내 담담했다.
생각할 것이 너무 많은 코스였기 때문이다.
“일단 내일은 철저히 잘라 가 보자고.”
“네. 그러는 게 좋겠어요.”
벙커나 워터해저드의 위치가 아주 절묘했다,
그로 인해 지난해 이 코스에서 펼쳐진 발스파 챔피언십 우승자인 폴 케이시의 성적은 겨우 -8에 불과했다.
연습이 부족하거나 컨디션이 나쁘지 않지만 코스에 적응하려면 꽤나 애를 먹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라운드를 마치고 들어오면서 대기하고 있던 이 대표와 마주쳤다.
일부러 필상을 기다린 것 같은데, 우천 상황을 고려해 벙커샷을 연습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는지 알아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가져온 것 같았다.
“여긴 안 되고 그 대신 원하는 세팅이 가능한 주변 코스를 소개해 주더라고.”
“아! 이럴 때는 주변에 골프장이 많은 게 다행이군요.”
“일단 가서 직접 확인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밥은요?”
“아!”
“미사키랑 간단하게 먹고 갈 테니까 먼저 가서 조르기를 좀 해 주세요. 하하하.”
“오케이!”
식사하던 필상과 미사키는 안 프로의 심각한 얼굴을 다시 보게 되었다. 연습 라운드도 하지 못한 채, 낮 시간 내내 여러 병원을 찾아 다녔지만 똑같은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뼈에 이상이 없다니 다행이네.”
“그렇지만 무조건 한 달은 무리하지 말고 푹 쉬랍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근육 파열 때문에 짐을 싸야 하다니 어이가 없네요.”
그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부상에 대한 경고를 듣고도 그냥 대회 출전을 강행할 수는 없다. 소탐대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침통한 표정을 보자 필상은 돕기로 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