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52화 (252/354)

252. 달빛 어린 나신

“축하합니다.”

“아. 네. 고맙습니다.”

여러 명의 동료들이 축하인사를 건넸지만 필상은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수많은 팬들과 기꺼이 손을 맞잡았다.

비가 와서 사인을 해 줄 형편은 되지 못했지만 스코어카드를 제출하러 가는 내내 팬들과의 다양한 스킨십을 즐겼다.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주먹을 부딪치기도 했으며 포옹을 원하는 팬들은 기꺼이 안아 주기도 했다.

인증 샷을 원하는 팬들과 포즈를 취해 주기도 했다.

-더 플레이어스 2연승. 정말 대박이군요!

-올 시즌 첫 출전에 우승한 것도 대단하지만 그가 작년과 달라진 점이 저는 무척 마음에 듭니다.

-스윙이 더 좋아진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물론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팬들과 함께 호흡하려는 적극성입니다. 작년에는 타인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완벽히 동화한 모습입니다. 자신의 위상을 보다 명확히 인지한 것 같아 기쁩니다.

-어쩔 수 없이 최고로 인정을 해 줄 수밖에 없는 거군요.

-어쩔 수 없다니요? 명백한 결과가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골프 황제라는 칭송을 듣던 타이거 우즈가 아직 현역에 머물지만 그의 뒤를 이을 수많은 별들이 떠올랐는데, 어땠습니까?

말이 필요 없었다.

로리 매킬로이, 조던 스피스, 더스틴 존슨이 물망에 올랐지만 그들은 최고의 자리를 고수하지 못했다.

오히려 타이거 우즈의 재기로 황제의 귀환이 더 조명을 받을 만큼 작금의 PGA는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

그 와중에 느닷없이 나타난 아마추어가 일본 투어 시드를 확보했고 72홀 최저타 기록을 갱신했다는 소식에 웃었다.

한 골프채널 좌담에서는 아시아 투어가 얼마나 허술하면 그런 일이 발생하느냐며 공개적으로 비웃기도 했다.

차곡차곡 연승행진을 한다고 할 때도 무시했다. 그런데 WGC에서 그를 멕시코에 초대했고 단번에 우승을 거머쥐었다.

[강한 커맨드에 타고난 재능을 지닌 새로운 강자의 출현!]

당시 언론도 필상의 우승을 심도 깊게 다뤘다.

하지만 워낙 많은 대회가 열리는 PGA라 간혹 특별한 우승이 나오는 실례 중에 하나일 거라고 봤다. 이후 경기를 중도에 포기한 일까지 발생하면서 아시아 선수들의 내구성을 의심하는 기사까지 떴다.

지난해 시드를 얻고도 KPGA투어에 전념하겠다는 의지를 밝히자 아직은 자신이 없어 겁을 낸다고 받아들인 미국 전문가들이 자신의 입을 쥐어박고 싶을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가끔 출몰하는데 나오는 대회마다 휩쓸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굵직굵직한 메이저 대회들, 일찍이 이런 강한 임팩트를 줬던 선수가 또 있나 돌아보게 만들 정도였다.

“불만은 확실히 잠재운 것 같아.”

“불만이요?”

“PGA 사무국만 볼멘소리를 했던 게 아니거든. 나이키를 비롯한 스폰서들이 왜 경기에 나서지 않느냐고 난리였어.”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좀 심하네요. 사람이 기계도 아니고 적당한 휴식과 충전은 필수 아닙니까?”

“투자한 것만 생각했던 거지. 하지만 한 방에 시원하게 날려 버렸으니까 당분간 그런 소리는 나오지 않을 거야.”

“대표님을 힘들게 하는 스폰서라면 교체하세요. 누가 아쉬운지 확실하게 주지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안 그래도 갑질은 내가 좀 하고 있지. 호호호!”

수익을 쫓는 기업의 생리를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 시즌 필상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넉넉히 남을 활약을 보여 줬다. 그로 인해 엄청난 광고 효과를 보고도 조바심을 내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어차피 후원을 원하는 기업은 줄을 섰고 계약만 된다면 위약금까지 지불하겠다는 스폰서들도 있다.

다행히 이 대표는 그들과의 줄다리기를 잘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 시즌이 끝나면 모두 갱신해야 할 계약이라서 확실한 한 방만 보여 줘도 아쉬운 건 그들이다.

만약 필상이 목표한 것을 이룬다면 그들은 투자한 것의 몇 배를 넘어 대박을 치게 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징징댄다면 거래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것이다.

“텍사스로 넘어가야죠?”

“발스파 챔피언십은 그냥 지나갈 거야? 멀지 않은 곳에서 열리는데.”

“뭡니까? 설마 출전 약속을 한 건 아니죠?”

“그럴 리가! 하지만 컨디션이 좋은 김에 하나 더 잡고 가도 될 것 같아서. 이건 정말 내 순수한 의견이야.”

“하하하. 순수한 의견이라고요?”

뭔가 있는 것 같았으나 꼬치꼬치 묻지 않고 일단 동의했다.

이 대표가 사적 이득이나 감정을 개입할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답이 나오자 그녀도 순순히 털어놨다.

발스파 코퍼레이션은 페인트와 도료를 생산하는 세계적인 기업이다. 사실 골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회사인데, 그들이 PGA 대회를 주최한다는 것부터 특이했다.

“골프 관련 사업에 손을 대고 싶어 해.”

“그들이 보기엔 별로 수익성이 높은 사업이 아닐 텐데요?”

“그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지.”

“우리 TPK의 미국 진출 사업 파트너라도 하겠다는 포부를 가졌나 보군요.”

“맞아. 아직은 이르지만 머잖아 골프의 중심지인 미국 진출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고 그때를 대비해 손을 잡고 싶은 기업은 많지. 하지만 발스파처럼 모든 것을 믿고 낮은 자세로 임하는 회사는 없거든.”

“그건 우리의 가능성을 보다 높게 평가한다는 의미군요.”

“그렇지. 손도 안 대고 코를 풀고 싶어 하는 작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막상 만나 보면 한결같이 도둑놈 심보들이거든.”

“알겠습니다. 일단 저는 대회에 집중하겠습니다.”

발스파 챔피언십이 열리는 팜 하버 골프클럽은 TPC 사우그라스에서 55마일, 겨우 1시간 거리였다.

더 마스터즈 참가 이전에, 지난해 잘나가다가 충격적인 결과를 낳았던 WGC 델 테크놀로지 매치플레이에 참가해 추락한 위신을 바로잡고자 했다.

이 대표 입장에서는 필상이 2주를 그냥 쉬는 것이 너무 아깝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막상 팜 하버 골프클럽에 도착해 보니 그녀의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에는 모처럼 PGA투어에 나선 터라 플로리다의 아름다운 3월을 만끽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첫 단추를 잘 꿰고 나자 여유가 생겨 비로소 이곳이 세계적인 휴양지라는 사실이 눈에 띈 것이다.

“코스 정말 멋지네요.”

“그렇지? 코스도 아름답지만 숙소에 가 보면 더 놀랄 걸?”

실제 라운드는 어떨지 몰라도 코스 레이아웃과 주변 조경은 정말 이국적이며 아름다웠다. 가 봤던 그 어느 코스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명품을 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대표가 놀랄 것이라고 장담했던 숙소에 도착한 필상은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북대서양이 전면 가득 펼쳐진 플로리다 해변 중에도 폼 나는 강을 낀 지역이 있는데, 그녀가 예약한 최고급 콘도는 강과 바다 사이를 양쪽에 낀 빌리지 형태의 독립가옥이었다.

2층 구조에 침실이 무려 5개, 거실 문을 열면 바로 바다가 시야 가득 펼쳐지고 럭셔리한 실내 수영장도 갖춰져 휴양에 더없이 최적화된 공간이었다.

“엄청 비싸겠네요.”

돈이라면 평생 펑펑 써도 남을 만큼 벌고 있는데도 이런 멋진 곳에 오면 그런 말부터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랜 근검절약이 몸에 익었기 때문인데,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후대는 적어도 궁핍한 삶은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대표는 방긋 웃으며 공짜라고 말했다.

“후원입니까?”

“응. 바람직한 선례를 남기는 중이야. 설사 미국 국내 경기에 나서도 이젠 기본 경비를 주최 측이 부담하게 될 거거든.”

“하하하. 그건 하더라도 표 나지 않게 해야 할 것 같네요. 공평하지 않다고 비판할 여지를 줄 필요는 없잖아요.”

“당연하지.”

전성기의 타이거는 외국 대회에 초청을 받거나 계획에 없는 대회에 나갈 때면 언제나 초특급 대우를 받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승자의 상금보다 많은 초청료를 챙기기도 해 말이 많았다. 하지만 주최 측은 그 이상의 효과를 얻기 때문에 기꺼이 지불했던 것이다.

그것을 평등과 차별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약자임을 고백하는 것임에도 대놓고 비난한 자들이 있었다.

물론 부럽다 못해 시기하는 행위라는 것을 팬들이 다 알고 있기에 처음에만 요란했었지 이후에는 점차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앞으로 필상이 그런 대우를 받게 된 것이 밝혀지면 또 한 번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 것이 불을 보듯 훤했다. 그래서 가급적 티를 내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했다.

“굿 나잇!”

“네. 대표님도 푹 쉬세요.”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자 이미 껌껌한 밤이 되었다.

샤워를 마친 필상은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는 오랜만에 토납에 정성을 쏟았다. 그냥 자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참 무아지경에 빠졌을 무렵, 찰랑거리는 물소리에 잠시 명상이 깨졌다. 이상야릇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데, 눈을 뜨지 않아도 전방에 펼쳐진 상황이 확연히 느껴졌다.

한 여인이 수영장에 나와 밤 수영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독특한 기운을 통해 그녀가 이 대표라는 것도 직감했다.

“잘 자라더니…….”

그냥 무시하고 명상을 했어야 하는데, 반가운 마음에 눈을 살포시 뜬 것이 실수였다. 눈앞에는 잔잔한 조명이 켜진 수영장의 물을 가르고 있는 여인의 아찔한 나신이 보였다.

어쩌자고 홀딱 벗은 나신(裸身)인 건지?

하기야 이 넓고 보안이 잘 된 빌리지에는 필상과 미사키, 그리고 이보영 대표뿐이다. 우중에 대회를 치르느라 피곤했을 필상이 곯아떨어졌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쌀쌀한 밤에 왜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수영을 즐기는 것인지, 별의별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남자의 본능이 작동한 것인데, 그 생각이 드는 순간 필상은 주체하기 힘든 마가 침범했다.

‘이런!’

필상은 즉시 자세를 바로 잡고 내기 조절에 돌입했다.

눈을 감아도 지워지지 않는 매혹적이고 풍만한 이 대표의 잔상 때문에 좀처럼 컨트롤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 크게 폭주하지는 않았으나 잡념이 집요하게 흔들기 때문인지 상당히 고된 싸움이 길게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고 그제야 필상의 침실 테라스에 누군가 있음을 감지한 이 대표가 화들짝 놀라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건 다행이었으나 욕망의 사슬에 묶인 필상은 아직도 그런 욕망조차 조절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무척 실망했다.

‘내 수양이 겨우 이 정도였단 말인가?’

이제 부작용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자극적인 장면을 마주하자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실감이 났다. 하지만 그게 온전히 필상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명상을 방해했다.

적잖은 나이에 남자를 모르는 것도 아닌 그녀로서는 비가 그친 밤, 구름 사이로 비친 달빛이 하염없이 외로움을 가중시켰을지도 모른다.

싸늘한 밤기운, 차갑게 식은 수영장의 물마저도 그녀의 달아오른 몸을 식혀 주지 못할 만큼 버거운 밤을 보낸다는 생각을 하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 것도 명상의 장애물이었다.

* * *

“프로님!”

“…….”

몇 번을 불러도 반응이 없자 미사키는 슬그머니 손잡이를 돌려봤다. 혹시 문을 걸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이 그냥 열렸다.

“공 프로님. 미사키에요. 저 들어갈게요.”

작은 목소리가 아닌데도 반응이 없자 불안에 휩싸인 그녀는 서둘러 방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그리고는 침대에 널브러진 필상을 보고는 얼른 다가갔다.

그런데 침대에 이른 그녀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피어났다.

“드르릉! 드르르르릉!”

필상의 코고는 소리가 침대를 흔드는 것 같았다.

깨워야 할지, 그냥 더 자게 둬야 할지 난감한 미사키는 결국 이불을 잡아당겨 필상의 몸을 덮어 주고는 얼른 돌아 나왔다.

그녀의 볼이 발갛게 물든 이유는 자신의 시선이 자꾸 필상의 근육질 몸매와 그 아래 중심을 가리고 있는 작은 천 쪼가리에 쏠렸기 때문이다.

‘미쳤어! 미쳤어!’

자꾸 그 말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작은 팬티를 찢을 듯이 치솟은 남자의 상징을 봤기 때문이다. 새벽이면 힘을 얻는다는 말은 들어 알고 있지만 이렇게 우람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던 것이다.

“왜 그냥 와?”

“저 그게…….”

“어라? 얼굴은 왜 그렇게 벌겋고?”

“아니에요. 전 공 프로님이 하도 대답이 없어서 깨우려고 들어갔던 것뿐이에요.”

“호호호! 아직 잔다고?”

“네. 아무래도 대표님이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알았으니까 나갈 채비나 해.”

자신에게 넘겼고 대답을 해 놓고도 이 대표는 선뜻 일어서지 못했다. 어젯밤의 일이 창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벌떡 일어나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또박또박 걸어 올라갔다. 다행히 필상의 침실 문은 열려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침실 앞에 멈춰선 그녀는 노크부터 했다.

똑! 똑! 똑!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곯아떨어진 필상이 대답할 리 만무했다. 그래도 노크는 몇 번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대표는 그냥 성큼성큼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도 필상의 코고는 소리를 이미 들었기에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정신없이 자는 것이 자신과 연관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 가득 긴장감이 묻어났다.

“공 프로. 일어나!”

“드르르릉! 푸후후후! 드르르릉! 푸후후후…….”

“대체 얼마나 잔 건데? 밤을 꼴딱 샌 건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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