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51화 (251/354)

251. 스스로의 다짐

-첫 홀부터 완벽한 샷을 보여 주네요!

-티샷도 세컨샷도 굉장히 잘 들어갔지만 오르막 라이에 백스핀이 걸리면서 버디는 어려울 것이라고 봤습니다. 하지만 여지가 없네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정확한 스트로크였습니다.

-앞서 나간 선두권 중에 1번 홀에서 버디를 잡은 선수가 없기 때문에 이제 2위와 14타 차가 된 건가요?

-아닙니다. 공동 2위 선수들이 나란히 타수를 잃으면서 타이거 우즈가 세웠던 15타 차와 동률이 되었습니다.

-어허! 그렇다면 그 어려운 기록도 20년 만에 결국 미스터 퍼펙트가 가져가게 될 확률이 높겠군요?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봐야 합니다. 비가 내려 플레이에 악영향을 미치지만 방금 보셨다시피 그는 지금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있습니다.

딱히 코스 세팅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젖은 잔디와 벙커는 샷에 어려움을 줬고 축축한 그린도 지난 3일과는 달리 스피드가 일정하지 않았다.

마치 동네 퍼블릭 코스처럼 굉장히 느린 부분도, 생각보다 빠른 부분도 있어 원하는 결과를 내어 주지 않는 퍼팅에 당황한 선수들의 플레이가 차츰 꼬여 갔다.

그런 느낌이 확연했기에 첫 홀에 버디를 잡은 필상은 홀마다 상황에 따른 안전한 공략으로 대처했다.

티샷도 드라이브를 대신해 유틸리티를 잡기도 했으며 가급적 벙커를 피하고 퍼팅이 용이한 방향으로 타구를 보냈다.

그러다 5번 홀에서 다시 필상의 묘기가 터졌다.

-와우! 유틸리티로 대체 얼마나 보낸 겁니까?

-18도 유틸리티로 보이는데, 공식 기록은 298야드입니다. 아무리 짧은 파 5홀이라지만 이렇게 공략해 버리면 버디는 너무 쉽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버디가 아니라 이글이겠죠!

472야드 롱 홀이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이 우드를 잡았다.

그래도 페어웨이를 지키는 선수가 많지 않았다. 물 반 잔디 반인 거대한 워터해저드도 위협적이고 호수와 맞닿아 길게 이어진 벙커도 페어웨이의 폭과 맞먹었다.

비에 젖지 않았다면 그나마 그린을 노릴 수 있는데, 오늘 벙커에 빠진 선수들은 하나같이 3온 작전을 구사했다.

하지만 필상은 10야드 폭의 페어웨이 정중앙을 꿰뚫었다. 자로 잰 듯 한가운데 보낸 것도 대단한데, 남들이 드라이브를 쳤을 때와 다르지 않은 비거리였기에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176야드에요.”

“그린의 앞뒤 길이가 33야드야. 뒤에서 6야드라니까 179야드를 봐야지.”

“네. 뭘 드릴까요?”

“7번 아이언.”

필상의 7번 아이언은 190야드에 맞춰져 있다.

컨트롤 샷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미 우승은 기정사실이지만 만약 이 홀에서 핀에 붙여 2타를 줄인다면 자신을 따라다니는 팬들에게 최소한의 서비스는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최다 타수 차 우승 기록도 부상처럼 따라올 것이다.

그런 생각이 짙어서인지 이미지 샷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보통 클럽을 선택하고 연습 스윙을 하면 파란 선이 나타나는데, 지금은 엉뚱한 곳에 떨어지는 붉은 선이 나타나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바람이 있나?’

하늘을 응시하는 순간, 저 멀리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느껴졌다. 짙은 먹구름도 동반한 걸 보면 한바탕 폭우가 쏟아질 것도 같았다.

그린 방향에 광활한 대서양이 위치하고 있지만 비만 좀 내릴 뿐, 강풍에 대한 예고는 전혀 없었는데 기이했다.

하지만 거대한 기운이 바다로부터 상륙한다는 것을 인지한 필상은 남은 홀이 많다는 것이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설마 허리케인인가?

그럴 가능성은 낮다. 플로리다는 허리케인의 피해가 잦은 지역이지만 대부분 가을에 몰아치고 3월에 태풍 소식은 없다.

아열대 기후라서 무더위가 길어지면 바람을 동반한 소형 태풍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일기예보에 한 마디 언급도 없었기에 필상은 잡념을 떨치고 6번 아이언으로 교체했다.

‘이제야 보이네!’

맞바람 때문에 190야드를 봐야 했다.

또한 탄도를 높일 경우 파란 선이 나타나지 않아 결국 펀치 샷을 구상할 수밖에 없었고 샷의 세기는 85%까지 올렸다.

따악!

정조준을 마친 필상의 펀치 샷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굳이 그렇게 탄도가 낮은 샷을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가진 이들은 많았다.

또한 원하는 샷을 마쳤음에도 타구를 바라보는 필상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갔다. 분명히 적확한 샷을 했는데 타구의 궤적이 의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짧지 않나요?

-제가 보기에 너무 강한 샷이 아닌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맞바람이 강하게 부는 것 같습니다.

-우후!

캐스터 터너의 입에서 묘한 탄성이 터진 이유는 타구가 그린 앞의 벙커 턱을 때리며 크게 튀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 위치는 그린에서 24야드나 떨어진 지점이라 미스 샷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했다. 그런데 튀어 오른 타구는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더니 그린에 올라섰다.

마침 우측 핀이었던 터라 그냥 쭉 구르면 핀 방향이었다.

“고!”

미사키의 뾰족한 음성에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평소와 달리 연습 스윙을 하다 말고 클럽을 교체한 것도 불안했는데 샷의 탄도가 너무 낮아 탑핑이 난 줄 알았다.

그래도 쭉쭉 뻗어 나가던 공이 벙커 턱에 맞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다 못해 쪼그라들었다. 비에 젖은 벙커 턱에 공이 콱 박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이 보우하사 타구는 방향까지 교정된 채로 그린에 올라섰으니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듯.

그런데 그놈의 공이 머금은 힘은 모두의 상상을 추월하며 마구 굴러 홀컵을 지나치고 말았다.

-엄청나군요! 뭐 저런 미친 런이 다 있습니까? 마치 바퀴가 달인 스포츠카처럼 달리네요.

-확실히 미스터 퍼펙트는 타구에 힘을 싣는 요령이 탁월한 것 같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에 타구는 겨우 멈췄다. 에이프런에.

결과적으로 보면 벙커 턱에 맞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필상도 당혹스러웠다.

아까는 분명 정면이었던 바람이 그새 북동풍, 슬라이스 맞바람으로 바뀌어 타구의 진행을 막지 못한 결과였다.

그렇게 보자면 지금의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깜짝 놀랐어요!”

“나도.”

“바람이 강해졌어요. 갑자기.”

“그것 때문에 펀치 샷을 했는데 그새 바람의 방향이 바뀐 거야.”

“그 짧은 시간에요?”

“응. 아무래도 남은 홀은 쉽지 않겠어.”

그래도 최선을 다해 퍼팅을 했다.

정확한 라이를 읽고 그에 맞는 퍼팅만 이뤄진다면 지금도 이글을 할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잠시 후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더도 말고 반 바퀴만 더 구르면 홀컵에 떨어질 것 같은 아까운 결과 때문이다.

-기어코 버디는 작성하는군요.

-하하하. 그가 바로 미스터 퍼펙트이기 때문입니다. 막간을 이용해 잠시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드리자면 그가 남은 투어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소식입니다.

-아! 사무국에서 설득에 성공한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적어도 두세 경기에 한 번은 참석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또한 문제이기는 합니다. 어느 대회에 출전하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남은 대회의 주최 측으로서는 피 튀기는 전쟁을 벌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흥행 보증수표로 인증을 받는 거군요. 하지만 일개 선수의 출전에 대해 사무국까지 나서는 모양새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네요.

무의식중에 뱉은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말은 아무 생각 없이 나오지는 않는다.

이미 필상의 독주에 대해 염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알고 보면 미국과 유럽도 백인 우월주의의 뿌리가 깊은 사회다.

흑인은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던 골프계에 타이거 우즈가 등장하며 흑백의 차별은 사라진 듯 보이지만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다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선두권 선수 중에 언더파가 없는 와중에도 2타를 줄인 필상은 전략을 수정했다. 팬들이나 전문가는 어떨지 몰라도 자신마저 신기록을 의식하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드라이브.”

“드라이브요?”

“응.”

“페어웨이도 좁고 바람도 심한데 괜찮을까요?”

“16타 차인데도 소극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것은 너무 우스운 것 같아서.”

“그렇기는 하죠. 호호호.”

샷을 하기 전에 주변 상황을 면밀히 살폈다. 바람의 양이나 방향, 그리고 되도록 안전한 공략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조화는 인간의 초능력마저 무색케 만들었다. 믿기 힘든 멋진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만 갑자기 조화를 부려 워터 해저드에 타구를 빠뜨리기도 했다.

-정말 용감하네요. 전 홀에서 더블 보기를 기록하고도 미스터 퍼펙트는 다시 드라이브를 잡았습니다.

-우승이 걱정되지 않는 상황이라서 팬들을 위해 다양한 것을 보여 주려는 것 같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트러블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는 것이 좋은지, 지금 미스터 퍼펙트의 절묘한 플레이를 보면서 배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신기하기는 하네요. 세계 최고의 스윙을 가지고도 페어웨이를 지키지 못하는 것도, 해저드에 빠뜨리는 것도 아마추어들의 눈에 골프가 얼마나 어려운 운동인지, 또 얼마나 진지하게 다가서야 하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6번 홀에서 더블 보기를 기록한 필상이 다시 7번 홀에서 보기를 적었다. 앞선 경쟁자들이 같이 해매는 바람에 그나마 나았지만 14타 차로 줄어든 타수 차 때문에 마음을 졸이는 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진 8번 홀, 195야드 파 3홀에서 필상은 거의 홀인원에 가까운 환상적인 샷을 터트렸다. 깃대를 맞고 옆으로 빗나간 공 때문에 머리를 감싸 쥔 팬들도 보였다.

맞바람 때문에 4번 아이언으로 낮게 깔린 기가 막힌 샷을 했는데 구르고 굴러 깃대를 맞추는 광경은 궂은 날씨를 버티며 따라다닌 팬들의 고생을 위로하는 것만 같았다.

버디로 마무리한 필상이 자신을 향해 환호라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줬고 이동하는 길가에 손을 내민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눈 것도 팬들과 호흡하고자 하는 마음의 발로였다.

-정말 멋진 모습입니다! 선수는 팬들을 위해 최선의 샷을 하고 멋진 결과가 나오면 함께 기뻐하는 모습, 너무 보기 좋지 않습니까?

-탁월한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장담한 것은 너무 과한 욕심 아닌가요?

해설자 챔블리는 잠시 그 말을 던진 프랭크를 쳐다봤다. 전에는 이런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필상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대체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는지 그 원인을 잠시 고심하는 것 같았다. 혹시 필상으로 인해 손해를 본 사람과 연관이 있는 걸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바로 돌린 그는 확언하듯 말했다.

-높은 목표를 세운 그를 존중합니다. 필드에 투신한 어느 선수든 그런 상상을 할 권리는 있으며 지금까지 그가 보여 준 탁월한 실력은 그 자격이 충분함을 증명하고 남습니다.

-그야 그렇죠. 지난 시즌 그는 3개의 메이저 대회를 연속해서 거머쥐었으니까요. 하지만 말을 뱉는 것과 현실은 좀 다르지 않을까요?

-부담을 느낀다면 아예 말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높은 목표를 언급한 것은 스스로의 다짐일 겁니다. 설사 그것을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팬들은 그의 도전을 아름답게 여길 것이며 응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골프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를 열렬히 응원할 것입니다.

-곧 마스터즈가 열릴 테니 두고 보면 되겠네요.

캐스터 프랭크의 입장이 바뀐 것은 사실 사적인 이익과 연관되어 있다. 그가 투자한 회사가 주최한 대회가 2월에 열렸는데, 흥행에 실패해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것이다.

그게 필상의 불참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오판이다.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필상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특히나 그런 감정 때문에 중계방송을 하는 자신의 태도와 입장이 바뀐 것은 직업 정신에도 어긋난 것이다.

그런 미묘한 변화를 읽은 팬들의 실시간 댓글이 쭉 달렸는데, 중립적인 팬들도 필상을 옹호하는 추세였다. 그래야 PGA가 더 활성화된다는 대세를 따랐기 때문이다.

“굿 샷!”

사실 이런 상황에서 경기를 속행하는 것이 옳은지 묻게 될 만큼 날씨가 변덕을 부렸다.

잘 치고도 엄하게 날아가는 타구를 보며 망연자실한 선수들이 부지기수였다. 필상의 샷도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안전한 요령을 강구해도 골프는 기본적으로 그린을 향해 공간을 뚫고 타구를 날려 보내야만 하는 운동이다.

젖은 잔디와 수시로 바뀌는 강풍 때문에 불확실성이 점점 더 높아진 환경은 선수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 와중에도 필상을 따르는 팬들은 연신 환호성을 터트렸다. 때때로 엉뚱하게 날아갔지만 그 자체를 선수도, 팬들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즐기자. 스코어는 신경 쓰지 말고!’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환경이다.

최선을 다한다면 남들에게 뒤질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필상은 과감한 공략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결과 +5라는 역대 최악의 결과로 최종 라운드를 끝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기록은 일찍 경기를 끝낸 선수들을 제외한 선두권에서 최고 좋은 성적이었다.

2위인 키건 브래들리의 성적은 고작 -3였기 때문에 최종 -20를 기록한 필상과는 무려 17타나 벌어졌다.

또 다시 새로운 기록의 지평을 연 것이다.

하지만 필상이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험한 날씨 속에서도 챔피언 조를 따라다닌 팬들의 마음을 온전히 얻은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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