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49화 (249/354)

249. 흥행의 척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라고?”

“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상대적인 우열이 존재할 뿐, 형님은 타고난 우월함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겁니다.”

흑돈은 스스로 부족하다고 자평하는 필상의 의견에 펄쩍 뛰며 동의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치기에는 더 이상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연습을 진행하며 서서히 생각이 달라졌다.

필상의 기술적인 완성도가 자신이 생각하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직접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

“잠깐만!”

태국은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없지만 한국은 봄을 맞이할 준비가 한창인 3월 초, 드디어 가족들이 태국에 도착했다.

모모코와 수미, 엄마는 물론 누나들과 자형들, 그리고 조카들까지, 축구팀을 만들고도 남을 대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돈과 함께 수완나폼 공항에 마중을 나갔는데, 출국장을 가장 먼저 나선 모모코가 한껏 들뜬 표정으로 달려들었다.

평소 같으면 힘껏 포옹했을 텐데, 모모코의 뒤에 선 엄마의 품에 안긴 수미가 자신을 보고 방긋 웃는 걸 본 필상은 아무 생각 없이 모모코를 그냥 지나쳤다.

그로 인해 3월 내내 들볶인 걸 생각하면 천후의 한이다.

“오빠가 같이 간다고요?”

“응. 생각보다 훈련 진행이 빨랐거든.”

“그럼 저는요?”

“같이 가자. 일단 푸켓에서 3일 정도 가족들과 신나게 놀고 나랑 같이 돌아오면 되잖아.”

“저도 그러고 싶지만…….”

한국에서 놀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모모코는 연습에 목말라 있었다. 경쟁자들은 다들 전지훈련을 떠났는데 체력 훈련과 실내 연습이 고작이었으니 불안할 만도 했다.

때문에 한 달간 죽어라고 매달릴 생각이었고 당연히 필상이 전적으로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가족들과 함께 놀러 간다는 말에 당혹스러운 것 같았다.

“모모코. 걱정 말고 같이 가자. 무슨 수를 쓰든 간에 내가 확실하게 스윙을 잡아 줄게.”

“정말이죠?”

“그럼. 2주면 넉넉할 거야.”

“2주요?”

필상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찜찜한지 모모코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남편과 하룻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가족들과 함께 푸켓으로 향하는 모모코의 얼굴에는 근심 한 자락 비치지 않았다.

이번 전지훈련을 통해 겉으로 드러난 기술적 완성도보다 더 값진 소득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건 바로 랜덤하게 필상을 위협하던 내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빠. 이제 부작용은 다 털어 낸 건가요?”

“응. 완벽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내기를 컨트롤하는 것은 가능해진 것 같아. 불시에 위험해질 일은 없을 거야.”

“정말 잘됐어요. 이젠 떨어져 있다고 걱정할 일도 없어졌네요. 흐흐흐.”

“올해는 미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다행이지!”

그때 갑자기 모모코가 바짝 다가오더니 필상의 귀에 대고 소곤댔다. 무슨 긴한 얘긴가 했더니 야한 내용이었다.

“어젯밤에 너무 좋았어요.”

“그럼 전에는 만족하지 못했단 말이야?”

“아니요. 더 강력해졌다고요! 저 어제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크흐흐흐!”

여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은 다양하다. 하지만 밤일 잘하는 남자는 적어도 쫓겨날 일은 없다지 않은가!

부부의 애정에 금이 간 적도 없지만 그 어떤 것을 해 줬을 때보다 행복해하는 모모코를 보며 필상도 기분이 좋았다.

안 그래도 성능이 탁월했는데, 내력을 조절하게 되면서 남자의 상징이 더 강력해진 모양이다.

3일 간 푸켓에서 모처럼 편안한 휴식을 취한 필상은 가족들에게 투어 일정을 잡아 준 뒤, 아내와 카오야이로 복귀했다.

그리고 자신이 목표한 훈련을 완성함과 동시에 모모코의 스윙도 꼼꼼하게 가다듬어 줬다. 겨울 내내 착실히 체력단련을 해 온 터라 필상의 날카로운 코치가 정확히 먹혔다.

겨울 동안 다양한 선수들을 가르치면서 코칭 요령이 일취월장한 것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모코 스스로 자신감을 회복했다는 점이었다.

* * *

PGA 투어는 한국이나 일본 투어와 일정 다르다.

보통 아시아 투어는 4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되지만 PGA는 8월 말부터 10월 초까지만 쉬고 10월 중순이면 개막한다.

때문에 TPK 사단은 대략 서른 개 정도의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셈이다. 그 기간에 몇몇 굵직한 대회도 있었으나 일단 사업의 기틀부터 잡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타이거와 미켈슨, 세계 랭킹 1위이자 명실상부 현역 최강자로 인정받는 필상이 출전하지 않자, 흥행은 기대를 밑돌았다.

특히 디펜딩 챔피언이 출전하지 않은 WGC 멕시코 챔피언십의 경우는 상금 규모 대비 최악의 흥행 기록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나만 먼저 가게 되서 좀 그러네.”

“치! 돈 벌러 가는 남편을 구박하는 아내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하하하. 돈 벌러 가는 남편이라고?”

“그럼 아니에요?”

“알았어. 내가 왕창 벌어다 줄게. 하하하.”

필상은 4월에 미국으로 건너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연이어 흥행에 빨간불이 켜진 PGA 투어를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다. 타이거나 미켈슨에게 대충 정리하고 미국으로 건너가라고 요청했지만 되레 핀잔만 들었다.

필상이 착실하게 연습에 매진한 반면 그 두 사람은 겨울 내내 자신이 맡은 사업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더 플레이어스에 출전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3월 셋째 주에 태국에서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고 가족들에게는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 * *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는데, 한 번쯤 얼굴을 비추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좋은 소리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차라리 예선전을 마치고 하죠.”

“금요일 저녁에 한단 말이야?”

경기 전에 하지 않을 것 같으면 우승을 하고 마지막 날 하는 것이 보통이다. 때문에 금요일에 하자는 필상의 뜻을 이 대표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필상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금요일을 특정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장 목요일부터 1라운드가 시작하는데, 화요일에 플로리다에 도착한 것도 사실은 너무 급박한 일정이었다.

이틀 정도 먼저 건너가자고 권했지만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원했는지 필상은 월요일 오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냥 참가에 의미를 두는 건 아니지?”

“하하하. 올림픽이 아니잖습니까!”

이 대표는 필상이 전지훈련을 통해 얼마나 준비가 잘되었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것은 좋은데, 본격적인 PGA 사냥에 나서는 입장이라면 너무 안일한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연습 라운드를 하고도 필상은 첫날 단독 선두에 나섰다. 눈에 확 띄는 화려한 플레이는 없었다.

특유의 장타가 보이지 않아 실망한 팬들도 많았지만 정확한 아이언 샷으로 핀을 공략해 버디를 낚는 것이 필상에게는 너무도 쉬워 보였다.

-이글 하나, 버디 6개, 8언더. 나무랄 데가 없죠?

-그렇습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미스터 퍼펙트는 핸디캡이 낮은 홀들은 여지없이 공격적인 플레이로 타수를 줄였습니다.

-그렇다면 실수는 하나뿐이로군요?

-네. 핸디캡 13번인 6번 홀에서 그린 앞 러프에 떨어진 공이 이상하게 튀어 벙커로 들어가는 바람에 파를 기록한 걸 빼면 정확히 핸디캡이 낮은 9개 홀을 공략했습니다.

-장타가 나오지 않은 것은 좀 아쉽죠?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의 오늘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는 327야드였습니다. 그보다 멀리 친 선수는 단 2명뿐인데, 더 중요한 것은 페어웨이 적중률입니다.

-아! 딱 1개 놓쳤군요.

필상의 기록은 살펴보면 볼수록 대단했다.

페어웨이가 좁아 14번의 티샷 중에 10번 이상 페어웨이를 공략한 선수는 144명 중에 23명에 불과했다. 물론 필상처럼 13번을 페어웨이에 떨어뜨린 선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린 적중률도 83.3%로 공동 1위였는데, 거기에 보태 1퍼팅이 8번이었다. 핀에 잘 붙이기도 했지만 꼭 잡아야 하는 퍼팅은 놓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둘째 날은 더 대단했다.

첫날 비교적 타수가 좋게 나와 코스 세팅이 어제보다 난해했음에도 필상은 이글 2개에 버디 6개를 낚아 다시 -8을 기록했던 것이다.

“작정을 했네!”

“작정한 게 아니고 너무도 뻔한 예측이었던 겁니다.”

“스윙이 더 깔끔해진 것 같기는 한데, 대체 뭐가 달라진 거지?”

“샷의 완성도가 높아진 겁니다. 거리나 방향성, 마음먹은 대로 떨어뜨릴 수 있거든요.”

“정말이라면 질린다, 질려!”

“대체 그 반응은 뭡니까?”

“참가하는 대회마다 전승을 하려고?”

“못할 것도 없죠. 그래서 쉬엄쉬엄 가려고요.”

능청스러운 필상의 태도가 거슬리는 것 같았으나 반박할 건더기가 없었다. 실제 자신이 말한 대로 정확한 샷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인터뷰하러 가자고.”

“네. 적당히 잘라 주세요.”

“연습해야 하니까 더도 말고 딱 1시간만 어때?”

“20분. 그리고 질문을 받을 기자들을 미리 정해 두세요.”

“알았어.”

-16 단독 선두에 나선 필상의 밑으로 공동 2위는 -9로 무려 4명이었고 그 밑으로 다닥다닥 붙었다. 무려 7타 차로 벌어진 상황 때문인지 분위기는 거의 우승 인터뷰 같았다.

이 대표와 필상이 나타나자 박수가 쏟아졌다.

-오랜만에 투어에 나섰는데, 부담스럽지는 않았나요?

“전혀. 저는 이 대회를 즐기고 있습니다.”

당당하다 못해 거만하게 비치는 모습인데도 그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감히 교만하다고 말하는 이도 없었다.

작년에 이룬 위업도 대단하지만 어제 오늘 보여 준 성적은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은 있었다.

-올해는 본격적으로 PGA에서 활동한다고 하셨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너무 합류가 늦은 것은 아닌가요?

“아시다시피 KPGA 일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평생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겨울에는 가족과 함께, 혹은 제 자신을 가다듬는 시간으로 사용할 생각입니다. 그게 문제가 될 수는 없죠.”

-무, 물론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쭉 겨울에는 투어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해당 시기에 개최되는 대회는 흥행이 반 토막이 나겠네요.

그 질문을 던진 배경은 필상의 고른 출전을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필상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인정한 꼴이 되고 말았다.

반 토막이 난다는 표현까지 등장하면서 겨울에 치러지는 대회들은 추후 개최 시기를 조정하고자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짧은 오프시즌을 제외하면 거의 매주 대회가 펼쳐지는데, PGA 사무국은 일정을 조정하기 위해 애를 먹는다. 어느 스폰서든 가장 좋은 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처럼 TPK 사단이 앞으로도 겨울 시즌에 훈련에 집중하거나 개인적인 용무로 인해 대회를 불참한다면, 그건 보이콧이 아니더라도 대회 주최 측은 회피하고 싶을 것이다.

-올 시즌 목표가 있으신가요?

“물론 있습니다. 그랜드슬램을 완성하고 싶습니다.”

-아! 그러면 더 마스터즈에 집중한다는 말씀이군요.

“그 정도라면 목표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의미하는 겁니다.”

물론 목표는 얼마든지 높게, 또는 황당하게 세울 수 있다.

작년에 PGA 챔피언십에 이어 US오픈, 디 오픈을 우승하며 남은 한쪽은 더 마스터즈뿐이었다. 때문에 필상이 그거 하나 정도 우승하는 것은 기자들도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올해 4개의 메이저 대회를 모두 휩쓸겠다는 포부는 듣는 이로 하여금 환청인가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골프 역사상 캘린더 그랜드슬램이 없었던 것은 아니죠. 하지만 그 당시는 지금처럼 경쟁이 뜨겁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미스터 퍼펙트의 실력이 남다르다는 것은 알지만 너무 무리한 포부 아닌가요?

이렇게 말하면 씩 웃으며 겸손 모드로 돌아올 줄 알았다.

평소 그런 태도를 견지했고 과도하게 장담하다 이루지 못하면 망신이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강요한 질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필상은 질문을 던진 기자를 똑바로 응시하더니 검지를 들어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그 의미는 곧바로 언어로 표출되었다.

“전례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존경하는 보비 존스가 이룬 그 기록에 저도 도전할 것이며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하신다면 함께 지켜보시죠.”

장내가 잠시 술렁였다.

기회를 줬음에도 전혀 굽히지 않는 필상의 모습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목표를 수정하지 않는 태도를 높게 평가하는 이들도 많았다.

왜냐면 그건 큰 흥행의 요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할 기록들을 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올해도 여러 번 우승하는 것이 새로울 게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염두에 두게 된다면 지켜보는 재미가 훨씬 더하지 않겠나!

-TPK의 사업이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지 여부와 그 비결을 묻고 싶습니다.

“아! 어느 언론사의 기자 분이시죠?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꼭 하고 싶은 말을 건드려 주셨네요. 하하하!”

인터뷰를 통해 광고할 기회를 준 것에 과장된 반응을 보이는 필상 때문에 다들 한바탕 웃었다.

기자들이 항상 밉상인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가려운 부분을 긁어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언론 친화적인 태도는 프로가 갖추어야 할 기본에 속한다.

실제 자신의 소속과 이름까지 밝힌 기자의 이력을 이 대표에게 체크하라고 말하는 것을 모두가 봤다. 이것은 그를 각별히 신경 써 주겠다는 의미기에 앞으로 이런 일은 더욱 자주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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