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46화 (246/354)

246. 국경을 초월한 사랑

“나이스 샷!”

“치! 대체 무슨 말을 나누고 온 거에요.”

“누구? 나랑 에리카?”

“네. 레슨을 해 주고 온 건 아니죠?”

“다 봐 놓고 왜 그래?”

에리카를 진정시키는 동안 클럽하우스 창가에 앉아 바라보던 모모코의 모습을 봤다. 이성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심정적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자신보다 이 사안에 대해 더 분노해야 할 사람은 필상인데, 너무도 태연하게 제 역할을 하는 것이 얄미웠던 모양이다.

“그래도 오빠가 쟤를 칭찬하는 건 싫어요.”

“하하하. 알았어.”

“그리고 두고 볼 거예요.”

“뭘?”

“일본 투어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변화?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할 내용은 없는데?”

격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기대하는 것 같았다. 지금처럼 폐쇄적이지 않은 보다 성장한 일본 투어의 모습을.

하지만 필상의 구상은 그렇게 멀리까지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 그 말을 들은 뒤에는 생각이 더 많아졌다.

모모코의 바람대로 일본 투어의 체질을 개선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습성은 정치인들에게서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았던가!

-정말 팽팽하군요.

-이벤트 대회지만 자존심이 걸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프로 선수는 승부에 임하는 순간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그래도 이벤트 대회라는 성격을 고려하면 과열 양상은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아요.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를 응원하는 것은 좋지만 국적 때문에 특정 선수를 비난하는 것은 스포츠 정신에 부합되지 않거든요.

-네. 그 문제는 차차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투어가 보다 성장하려면 시장을 더 넓게 개방하고 열린 마음으로 지켜볼 필요는 분명히 있습니다.

-아! 그렇죠. 하하하.

이런 의견이 중계방송 중에 언급된 것은 이색적인 현상이다. 언제나 자국 위주의 시각을 드러냈고 그걸 당연시했는데 해설 위원이 바뀌면서 사전에 의견 교환이 있었던 듯.

그만큼 현 일본 골프 투어의 문제점은 심각했다.

이성적인 사고를 지닌 이들이 감히 말을 꺼내기 어려울 만큼 보수적인 성향이 짙은데, 그걸 염려하는 이들도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와 별개로 결승전의 양상은 뜨겁게 불이 붙었다.

버디가 아닌 파를 기록하면 영락없이 그 홀은 패할 정도로 살벌한 샷을 이어 갔다.

그렇게 올 스퀘어로 쭉 흘러가던 경기는 포섬 매치인 6번 홀에서부터 서서히 승부의 향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허! 저건 아니지.”

“쟤가 저렇게 못됐다니까요!”

히데키의 드라이브 티샷이 확 당겨지면서 타구가 헤비 러프에 빠졌다. 530야드의 파 5홀이라서 남자인 그가 최대한 멀리 보내려는 의도를 가진 샷인데, 안타깝게도 당겨진 것이다.

그래도 3온 1퍼팅 작전을 생각하면 문제가 되지는 않는데, 미켈슨의 티샷이 페어웨이 정중앙을 가르자 에리카가 먼저 휑하니 움직인 것이다.

동반자와 다음 샷 공략에 대해 논의하지는 않더라도 나란히 걸으며 얘기라도 나누는 것이 보통인데, 동료의 실수를 감싸기는커녕 탓하는 태도로 비쳤다.

아니나 다를까 본인도 실수를 하고 말았다.

러프에서 때린 타구가 일명 뽕샷이 되면서 하늘 높이 치솟아 날아간 거리는 대략 80야드, 게다가 방향도 좋지 못해 여전히 러프를 벗어나지 못한 샷이었다.

“201야드라도 히데키라면 그린에 올릴 수도 있을 거야.”

“러프인데요?”

“그 정도 기량은 되지.”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해졌다.

미켈슨은 안전하게 296야드만 공략했다. 히데키의 티샷이 좋지 못해 굳이 2온을 노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는데, 235야드를 남긴 봄이 5번 우드로 온 그린을 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샷 하나로 경기 분위기는 완전히 쏠렸다.

봄은 일본 팬들의 열렬한 응원을 한 몸에 받으며 터트리는 샷마다 절정의 감각을 드러냈다. 미켈슨이 잘했다면 모를까, 일본인이 경기를 주도한다고 생각했는지 2조를 향했던 응원도 모두 봄에게로 이동하고 말았다.

“봄도 배짱이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응. 그건 당신을 빼닮은 것 같아.”

“좋겠어요. 저런 예쁘고 능력 있는 여동생을 둬서.”

“하하하. 왜 그래? 둘은 단짝 아니었나?”

“누가 뭐래요. 괜히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아서 그러죠.”

“그래도 나한테는 당신뿐이야. 그거 알잖아.”

“흐흐흐……. 이젠 그런 달콤한 말도 하고. 정말 아저씨가 다 됐나 봐!”

이래도 불만 저래도 불만 같지만 모모코의 표정은 밝았다.

전에는 마음에 있어도 뱉지 않은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된 것은 씁쓸했지만 강한 구속력이 되레 안정감을 준다는 장점도 고려하면 나쁘지 않았다.

“축하해요!”

“하하하. 나보다 봄이 더 빛난 경기였어. 오늘은 내가 한턱 쏴야 할 것 같은데?”

미켈슨은 봄에게 모두 공을 돌렸다.

사실도 그러했지만 복식 경기에서는 누구 한 명이 특출하다고 이길 수는 없다. 미켈슨이 안정된 샷으로 봄을 받쳐 줬기에 그녀가 더 빛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주최한 경기에서 우승한 것이 쑥스럽다며 경기 후 인터뷰에서 자신의 상금까지 모두 기부한 미켈슨 때문에 대회는 더욱 멋지게 마무리가 되었다.

후원사로 참여한 스폰서들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 뿐더러 성황리에 끝난 이 대회를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 * *

일본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모모코가 시즌 최종전에서 우승했고 봄도 예상을 뛰어넘어 일본 투어 시드를 확보했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추진한 이벤트 대회가 성황리에 끝나면서 차후 TPK의 일본 사업에 파란 불이 켜졌다.

생각하면 너무도 감사한 일이기에 불편했던 감정들은 모두 잊을까 고려도 해 봤다. 과연 자신이 뭔가를 의도한다고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국하기 전에 필상은 모모코, 봄, 이 대표와 나란히 기자들의 앞에 앉았다.

“늘 응원해 주시고 걱정해 주시는 팬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를 빌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모모코의 내년 시즌 JLPGA 불참 의사는 이미 퍼질 대로 퍼졌다. 협회가 나서서 제어했고 정정하기를 바라는 의사를 전해 왔지만 모모코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신데렐라로 등장한 이즈카 하루마저 필상, 모모코와 함께 출국하는 장면을 눈앞에 두게 되자 기자들은 긴장했다.

이미 올 시즌 거의 일본 투어를 보이콧을 하다시피 했던 필상의 전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3명이 내년에 일본 투어에 불참한다면 그 파급효과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모모코는 갓난아이를 키우는 엄마입니다. 프로 선수로서 자신의 일을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아이는 금방 훌쩍 커 버린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래서 가급적 많은 시간을 아이와 함께 보내고자 합니다.”

-그 말씀은 내년에도 그녀가 일본 투어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말인가요?

“그럴 것 같습니다. 일본이 가깝지만 투어에 참가하려면 대회가 치러지는 4일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일주일 내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가급적 한국 투어에 전념할 것 같습니다.”

모모코가 밝히면 금방 감정을 드러낼 것 같아 필상이 나선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은 기자들은 모모코의 음성을 원했다. 옆에 앉아 있어서 대답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게 더 참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그들의 몫이었다.

-모모코 양에게 직접 묻겠습니다. 아이의 양육은 중요하고 일본 골프계는 전혀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건가요?

“제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그런 어리석은 질문은 난생 처음 들어보네요. 기자님은 직업 때문에 아이를 소홀히 하실 수 있나요? 당연히 제게는 아이가 더 소중합니다.”

-그래도 일본 투어를 병행할 수도 있지 않나요?

“저를 좋아하시는 팬들 여러분에게는 정말 송구하지만 일본에만 골프 투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KLPGA는 세계가 인정하는 경쟁력을 갖춘 멋진 투어이고 거기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행히 한국에서는 제가 일본인이라고 구박하고 그러지 않거든요.”

은근히 돌려 말한 그 발언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일본인들의 우월 의식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사실 많은 한국 프로들이 JLPGA에서 성공하고 있지만 그동안 한국 여자 골프는 비약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남자 투어보다 훨씬 많은 대회가 개최되고 상금도 크게 올라 이미 일본 여자 골프 투어를 위협한 지 오래다. 한국 선수들이 일본에 진출하듯이 일본 선수들도 한국 투어에 진출해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그 또한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아시아 최고를 고집하며 폐쇄적인 정책으로 일관해 온 일본 투어는 이번 기회에 객관적인 시야를 가질 필요가 있다.

만약 모모코가 일본에 온 한국 선수처럼 여러 불합리한 일을 겪는다면 그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인 것이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모모코 양의 멋진 플레이를 직접 보기 원하는 일본 팬들을 위해서라도 가끔은 일본 투어에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네. 그 조언은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렇게 좋게 마무리가 되나 싶었으나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도 있는지 다시 엉뚱한 질문이 허를 찔렀다.

-아예 한국으로 귀화를 하지 그러세요?

“귀화요?”

-네. 한국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한국에 사는 것이 좋다면 굳이 일본 국적을 유지할 필요가 없잖습니까?

이건 정말 뱉으면 안 되는 경계를 넘은 발언이었다.

교만한 일본인들 중에는 한국인을 미개한 2등 국민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오로지 황국민만이 제일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방식은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 범죄마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은혜를 베풀었다느니, 헛소리를 지껄이게 만든다.

“솔직히 말하면 귀화하고 싶어요. 저는 한국 사람들의 진솔하고 대범한 자세와 생활 방식이 너무 마음에 들거든요. 오빠가 말려서 그러지 못할 뿐이죠.”

필상은 등줄기에 땀이 주르르 흘렀다.

그녀의 생각은 이미 알고 있었던 바, 아무도 몰래 책상 아래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아 만류의 의사를 밝혔지만 그녀는 자신의 속내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일본 투어 불참도 큰 화제지만 이건 정말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초대형 사건이다. 추후 여론이 어떻게 형성될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그녀를 향한 즉각적인 비난은 팬심을 모두 잡아먹고 남을지도 모른다.

일본 입국 불가는 떨어지지 않겠지만 그녀를 향했던 팬들의 무조건적인 애정은 이제 모두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너무도 어이가 없는지,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 몰랐던 기자도 어안이 벙벙해 추가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그때 이 대표가 나섰다.

“사랑은 국경도 초월한다는 말이 실감나네요. 곁에서 지켜보는 저도 샘이 날 정도니까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애써 의미를 희석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던져진 충격을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다들 질문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이 대표는 얼른 TPK 사업 홍보에 열을 올렸다.

틈새시장 공략이라고나 할까?

그중에는 기자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도 있었다. 실제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TPK의 일본 사업 규모가 밝혀진 것인데,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6개나 동시에 오픈을 한단 말인가요?

“네. 1차적으로 도쿄 인근에 3개 코스를 구상했는데, 아시다시피 경영난을 겪는 명문 코스들이 워낙 많아서 기존 3개 코스 이외에 후쿠오카, 에히메, 그리고 오사카에 각기 하나씩 좋은 코스를 더 추가했습니다. 거의 손을 볼 필요가 없을 만큼 좋은 코스라서 머잖아 개장할 수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이러다 TPK가 일본 골프 체인 사업을 모두 장악하는 것 아닌가요?

“호호호. 어림도 없죠. 그럴 생각도 없고요. 저희는 12개까지 직영할 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12개요?

그 숫자가 예상을 뛰어넘어 다들 놀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일본의 골프장은 3,200여 개에 달할 만큼 엄청나게 많은 코스가 있고 지금도 개장을 준비하는 곳이 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골프 코스의 숫자를 자랑하기 때문에 일본이 아시아 최고를 자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제 800여 개를 넘어서 세계 8위에 랭크된 한국과는 비교하기 힘들지만 문제는 그 운영의 효율성이다.

얼핏 생각하면 골프장 운영은 핑크빛처럼 보이지만 실제 운영 상황은 적자에 허덕이는 곳이 훨씬 많다. 남들과 다른 경영을 할 수 있다고 믿고 뛰어든 자들이 고전을 거듭하다가 모기업이 망한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와중에 신생 기업이 6개의 코스를 개장하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12개까지 늘릴 구상을 한다는 말에 지나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다행히 도쿄 인근의 코스들은 소멸성 회원권이 이미 완판이 되었습니다. 또한 아직 오픈하지 않은 타 지역도 문의가 쇄도하고 사전 예약률이 60%를 넘어섰죠.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만 남았을 뿐입니다.”

고가의 회원제 골프장은 아니다.

하지만 1, 3, 5년 유효기간인 소멸성 회원권을 구매하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회원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그 장점을 알고 있는 많은 골퍼들이 구입을 희망했지만 일반 고객을 위해 한정 판매를 구실로 사실은 굉장히 적은 수만 판매하다 보니 생각보다 일찍 완판이 된 것이다.

전략적 경영의 승리라고 볼 수 있는데, 이제 언론의 바람까지 타게 되었으니 경영은 순풍을 맞게 된 셈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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