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45화 (245/354)

245. 남자를 잘못 만나

“일본 언론들이 지금 난리에요.”

“왜? 우리가 져서?”

“히데키와 에리카는 순수한 일본 팀이잖아요.”

“우리가 패한 팀이 2조만 있는 건 아니잖아?”

“흐흐흐……. 자랑은 아니죠?”

돌아보기 껄끄럽지만 3조는 타이거와 이보미의 1조에게도 패했다. 미켈슨과 봄이 한 편이 된 4조도 2패를 기록했다.

최상의 조합이라 평가받던 팀들이 연패를 했지만 일본 언론이 주목한 부분은 순수한 일본 선수들의 조합인 2조가 1승 1무로 공동 선두에 올라선 대목이었다.

“이 대회마저 그런 방식으로 오염을 시킨단 말이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필상은 안티도 많지만 다수의 골수팬들이 존재한다. 게다가 모모코의 인기는 여타 여자 선수들이 감히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드높다.

그런데도 꼴찌를 달리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와 기대보다는 히데키와 에리카의 선전을 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3팀이 공동 선두를 달리고 있는데도 유독 그 팀만 주목했다.

최근에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한국 선수들에 대한 반감이 가감 없이 표출된 현상이라는 해석이 가능했다.

“오늘 NHK 중계방송에서 카즈히로가 지나치게 편파적인 언급들을 연이어 터트리는 바람에 문제가 많았나 봐요.”

“그 사람은 늘 왜 그러지?”

“아무래도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여요.”

그 말은 곧 응분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말이다.

부친에게 부탁해서.

말리는 것이 옳다는 생각은 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인터뷰를 자청해 썩어 빠진 일본 골프계를 비판하고 투어 불참이라도 선언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TPK의 축제가 펼쳐지는 현장이다. 나름의 생각이 있고 계획도 갖고 있지만 대회가 끝난 뒤로 미뤘다.

“근데 우리 이제 결승에는 못 오르는 건가요?”

“아직 확언하기는 어려워. 서로 물고 물린다면 3승으로 결승에 오르지 못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근데 우리가 3승을 할 수는 있을까요?”

“노력해 봐야지.”

오늘 충격적인 2패를 당했으나 필상의 입에서 확신 어린 대답이 나오지 않자 모모코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하지만 필상의 생각은 달랐다.

이 대회의 목적은 TPK의 일본 사업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일본 선수들이 우승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봤다.

그런데 승부에 집착을 보이는 모모코의 모습을 대하자 그냥 맥없이 물러서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오전에 9홀 매치 세 경기를 펼쳐야 하기 때문에 3차전은 아침 일찍, 7시에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 상대가 하필 어제 승점을 하나도 챙기지 못한 미켈슨과 봄의 조합이라는 것이 은근히 신경 쓰였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최선을 다해 경쟁에 임했다. 그런데 어물쩍하다 보니 금방 2다운이 되었고 오늘도 필상의 샷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한 달 이상을 쉬었다지만 그래도 최근에 몸을 만들고 샷도 점검했는데, 이상하게도 결정적인 뭔가가 부족했다.

티샷이 좋으면 아이언이, 아이언까지 좋아도 퍼팅이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면서 2홀을 남기고 도미 상황이 되어 버렸다.

“물 건너 간 거죠?”

“승점 5점이면 거의 그렇다고 봐야지.”

승자는 2점, 비기면 1점, 패자는 승점이 없다.

남은 두 홀을 이겨 비기고 5, 6조를 연이어 이겨도 승점은 5점에 불과하다. 현재 승점 3점인 세 팀은 한 경기만 이겨도 5점이 되고 1조도 이미 2점을 얻어 앞서가고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성적에 신경 쓰지 말고 좋은 샷으로 팬들에게 서비스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모모코는 굉장히 아쉬워했지만 그때부터 필상의 샷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남은 두 홀에서 환상적인 샷으로 버디를 낚으며 질 것이라고 봤던 경기를 비기는 데 성공했다.

“물귀신 작전인가?”

“하하하! 왜 이러십니까! 아직 다 끝난 것도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제 겨우 1점인데.”

미켈슨은 세 번째 경기를 이기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하지만 꼴찌들끼리 비겼으니 전혀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결승에 오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조가 6조를 잡고 히데키와 슈고가 겨룬 승부도 비기면서 상황이 조금 더 복잡해졌다.

4번째 매치에서 1조와 2조가 비겼고 미켈슨의 4조가 5조를 잡아 버렸다. 게다가 필상과 모모코는 경기 시작과 함께 연이어 5홀을 내리 이기면서 5&4의 압도적인 첫 승을 거뒀다.

[1조-타이거 우즈/이보미: 2승 1무 1패 / 승점 5점]

[2조-마츠야마 히데키/하라 에리카: 1승 3무 / 승점 5점]

[3조-공필상/미야 모모코: 1승 1무 2패 / 승점 3점]

[4조-필 미켈슨/이즈카 하루: 1승 1무 2패 / 승점 3점]

[5조-이마히라 슈고/전미정: 1승 2무 1패 / 승점 4점]

[6조-김경태/하타오카 나사: 1승 1무 2패 / 승점 3점]

제5경기를 앞둔 상황에서 무승부가 의외로 많이 나오면서 결승에 오를 팀의 향방이 갑자기 오리무중으로 바뀌었다.

한 번도 패하지 않았으나 히데키와 에리카의 조도, 타이거의 조도 마지막 경기에서 패하면 결승에 오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계산이 무척 복잡해졌네요?

-네. 1, 2조가 유리한 것은 분명합니다. 두 팀은 비기기만 해도 6점이 되니까요.

-승점 4점인 5조가 4경기부터 기세가 오른 모모코, 미스터 퍼펙트의 조와 맞붙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더 높겠네요.

-그렇습니다. 1조의 타이거와 4조의 미켈슨이 또다시 운명의 한판을 벌이게 된 것은 골프팬들로서는 아주 즐거운 상황입니다. 전설적인 명승부를 기대해 봅니다.

-2조는 제4경기에서 폭삭 망한 6조와 붙기 때문에 한결 부담이 줄었을 것 같네요. 무패의 결승 진출 팀이 나오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 봅니다. 하하하!

6조에는 하타오카 나사도 있다. 하지만 김경태와 짝을 이뤘기 때문에 편파적인 해설도 아무렇지 않게 떠들어댔다.

점점 더 도가 지나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제5경기 상황은 묘하게 흘러갔다.

필상과 모모코가 슈고, 전미정의 조를 4&3로 일찌감치 잠재웠으며 미켈슨과 봄이 환상적인 호흡을 보이며 타이거의 1조를 역시 3&2로 꺾었다.

두 경기 모두 9홀 매치에서 보기 드문 압도적인 내용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2조와 6조의 대결이었다.

2조가 1업으로 앞선 상황이 길어졌으나 7번 홀에서 올 스퀘어가 되면서 흥분이 고조되었다.

“어? 만약 김 프로님 팀이 이기면 어떻게 되죠?”

“승점 5점이 다섯 팀이나 되네.”

“그러니까요!”

필상도 대회 규정을 상세히 기억하지 못했다.

설마 이런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곁에 있던 이 대표는 알고 있었다.

“승이 많은 팀이 우선이니까 2조는 탈락이에요.”

“우후! 그럼 남은 세 팀은요?”

“세 팀 간의 승자승 원칙이죠.”

또 다시 계산이 복잡했다.

1조와 3조, 그리고 4조가 나란히 승점 5점인데 필상의 조는 다른 두 팀과의 승패가 1무 1패인 반면 1조는 1승 1패이고 4조는 무려 1승 1무였다.

“1조와 4조가 결승이네요!”

참으로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찌되든 떨어진다는 결론에 모모코의 표정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조금 더 일찍 감을 찾지 못한 것이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건 모두 헛된 계산이었다.

두 팀이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8, 9번 홀에서 모두 버디를 잡지 못하면서 비기고 만 것이다.

[1조-타이거 우즈/이보미: 승점 5점]

[2조-마츠야마 히데키/하라 에리카: 승점 6점]

[3조-공필상/미야 모모코: 2승 1무 2패 / 승점 5점]

[4조-필 미켈슨/이즈카 하루: 승점 5점]

[5조-이마히라 슈고/전미정: 승점 4점]

[6조-김경태/하타오카 나사: 승점 4점]

졸지에 2조가 1위가 되면서 승점 5점인 세 팀 중에 상대 전적이 가장 좋은 미켈슨의 4조가 2조의 짝이 되었다.

“그림이 아주 좋게 나왔네.”

“치! 구경만 해야 하는데요?”

“한 팀은 일본 팬들이 가장 응원하는 팀이고 한 팀은 TPK 일본 사업을 주도해야 할 사람이잖아.”

“그래도 전 아쉬워요.”

“하하하. 함께 식사하러 갈 텐데 흔쾌히 축하해 줘.”

오전 경기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다들 허기가 졌다.

그래도 경기 결과를 봐야 했기에 기다렸다가 함께 움직였다. 필상은 기꺼이 웃는 낯으로 식사를 했지만 모모코는 달랐다.

“봄. 이길 수 있지?”

“그럼요.”

“쟤네들 저 거만한 낯짝을 확 눌러 줘. 꼭!”

그 음성이 작으면 상관이 없는데, 모두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그나마 히데키는 씁쓸히 웃었으나 하라 에리카는 발끈했다.

173cm의 타고난 신체 조건에 빼어난 미모는 언제나 모모코와 쌍벽을 이뤘고 오히려 앞서 왔다. 고교 시절 성적도 그러했고 데뷔 시즌에 신인왕도 그녀의 차지였다.

하지만 필상을 만난 모모코가 여신으로 추대 받는 상황이 되면서 역전되었고 지난주 대회마저 오랜만에 나와 우승을 했으니 그녀는 필히 이번 대회를 통해 만회하고 싶었던 듯.

“모모코. 너무 심하지 않아?”

“뭐가?”

필상이 팔을 슬쩍 잡아끌면서 만류했지만 모모코도 지지 않았다. 사실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실례다.

실수는 자신이 먼저 저질러 놓고도 그녀 나름대로 쌓인 것이 있는지, 대꾸하는 기세가 사뭇 날카로웠다.

문제는 에리카의 대응 방식이었다.

그냥 중립을 지키면 좋겠다는 의사 표현을 했다면 좋았을 것을,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고 말았다.

“너도 일본인이잖아!”

“일본인이 뭐? 일본인들의 배타적인 사고방식이 문제야. 너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본 여자 골프가 요 모양 요 꼴인 거라고!”

“이이!”

결국 에리카는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

잠시 뒤에 결승전을 치러야 할 선수에게 이런 감정적인 충격을 준 것은 분명히 모모코의 실수다.

그 내용이 옳든 그르든, 지금은 내색할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이 상황에 대해 모모코에게 설명한 필상은 얼른 일어나 에리카를 찾아 나섰다. 그럴 리는 없지만 경기를 포기하거나 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녀는 곧바로 따라나선 히데키와 함께 연습 코스에 있었다. 연습은 하지 않고 벤치에 앉아 있는 그녀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거침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히데키는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마음은 있어 보였으나 조심스러웠는지 웨지를 휘두르는 중이었다.

“에리카.”

“아! 공 프로님.”

에리카와는 구면이다.

물론 모모코의 캐디를 하면서 알게 되었고 둘 사이는 나쁘지 않다고 알고 있었는데, 상황이 다툼을 부른 듯.

그나마 그녀가 필상에게 곁을 권해 다행이었다.

“모모코 대신 내가 사과할게.”

“프로님이 왜요?”

“지나쳤으니까!”

“모모코의 마음, 아니 외국 선수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떻게 제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지 전 모모코에게 정말 실망했어요.”

“남자를 잘못 만나 그렇지 뭐.”

그 말은 모모코가 한국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해 달라는 의미였다.

한국 선수에 대한 편견과 푸대접을 그녀에게 질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녀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으나 어린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주제다.

경험한 환경이 그러하고 다른 일본 선수들도 그러기 때문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동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했다.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일단 심적인 동요가 없는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하는 것이 공평하다는 생각에 나섰고 그게 가능하도록 주절주절 이전 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절대 수다스러운 성격이 아니건만.

-오후 들어 갤러리들이 더 많아진 것 같지 않나요?

-다섯으로 나눠졌던 팬들이 결승 매치를 보기 위해 다 몰렸었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12,000명이었으나 오늘은 15,000명까지 갤러리들을 받았다고 하니까 주최 측은 안전 통제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야마다 해설께서 결승전 예상을 좀 해 주시죠?

그러고 보니 해설자가 바뀌었다.

하루 만에.

사토시 회장의 입김이 먹혔다고 볼 증거는 없었으나 어제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비판적인 의견보다 그를 옹호하는 극우적인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이 더 문제가 되었다.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이면 모르겠으나 차별을 당연시한 억지 주장은 누가 봐도 공중파 해설로는 적절치 않았던 것이다.

-저는 팽팽하리라고 봅니다.

-아! 그런가요? 안방에서 벌어지는 경기라서 히데키와 에리카가 유리하다는 의견이 많던데, 아닌가요?

-팬들의 뜨거운 응원이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켈슨이 누구입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여자 선수들을 비교하면 무게감이 다르지 않을까요?

-물론 이즈카 하루가 에리카에 비하면 객관적인 평가가 떨어지죠. 하지만 5번의 예선 매치를 자세히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신인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샷이 안정적이었습니다. 미켈슨이 더 덕을 봤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만만한 조가 아니로군요.

필상도 그 의견과 다르지 않았다.

일단 담담한 듯 보이는 히데키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긴장해 있었고 에리카도 꼭 이기겠다는 의지가 지나치게 강했다.

개인전도 아니고 분명한 상대가 있는 매치플레이에서는 경기에 임하는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 자신은 물론 동료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데, 두 선수 간의 호흡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과도한 남녀 구분이 만든 벽을 허물지 못하고 적극적인 대화가 없는 반면 미켈슨과 봄은 서로를 추켜세우며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였다.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