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44화 (244/354)

244. 무모한 도전

“왜 울어?”

“지고 있잖아요. 다 저 때문이에요.”

“아니야. 도로시. 넌 네 역할을 다하고 있어. 내가 준비가 덜 되어서 그런 거야.”

홀수 홀은 포볼, 짝수 홀은 포섬 방식이다.

필상의 조와 맞대결을 펼친 상대는 필 미켈슨의 조였고 1, 3번 홀은 비겼지만 2, 4홀을 져서 현재 투 다운이었다.

2번 홀에서는 도로시가 상대보다 더 짧은 퍼팅을 놓쳤고 4번 홀에서 상대는 페어웨이를 지켰지만 도로시는 확 감겨 헤비 러프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래도 남은 거리는 189야드, 6번 아이언을 잡은 필상은 충분히 온 그린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짝 두껍게 맞은 타구는 그린에 올라가지 못했다.

도로시는 큰 부담을 느꼈는지 칩샷이 그린을 넘겨 버렸고 결국 4번 홀도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저 더 잘 칠 수 있는데…….”

“그래. 알지.”

“어? 어떻게 아세요?”

그냥 던진 덕담인데 대꾸를 하자 당황했다.

하지만 필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로시를 띄워줬다.

“스윙이 군더더기 없이 좋잖아.”

“정말이세요?”

“그럼. 하지만 하나만 고치면 정말 더 좋아질 거야.”

“말씀해 주세요. 미스터 퍼펙트. 금방 고칠 게요.”

언제 울었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필상을 바라보는 도로시에게 필상은 가장 기본을 가르쳤다.

“샷 루틴이 일정하지 않아. 기분에 따라 속도가 달라진다는 건데, 이기고 싶다면 언제나 네 마음을 드러내지 말아야해.”

“포커페이스 말인가요?”

“그래. 기분이 좋아도, 기분이 나빠도 경쟁자들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게 일정한 포스를 풍기란 말이야.”

“히이이! 포스요?”

“네가 강자라는 것은 실력으로 당당히 보여 주면 돼. 선수는 결과로 말하는 것이지, 다른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거든.”

경기에 임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어려서부터 좋은 선생님 밑에서 배웠기 때문에 스윙에는 특별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꼭 이기겠다는 의욕이 앞서 감정의 굴곡이 너무 심했다.

재능도 뛰어나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강적을 만나거나 운이 따르지 않을 때, 지금처럼 심하게 흔들려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언제나 일정한 루틴을 밟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을 다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웬만한 상황에서도 일정한 루틴을 밟으면서 평소 연습했던 것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와야 하는 것이다.

“기복이 없는 플레이를 하라는 말씀이죠?”

“그래. 때로는 멋진 샷도 필요하지만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일관성이거든.”

“알았어요.”

녀석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어린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교육을 시키는 것이 아닌지 염려되었지만 그런 탄탄한 성향은 어릴 때 확고히 잡아야 한다.

덜렁대고 기분에 좌우되는 습관이 굳어지면 당연히 패배가 많아질 것이고 유망주라는 딱지는 온데간데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엘리트 코스를 쭉 밟아 프로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또래들과는 남다른 마음가짐이 요구된다.

“굿 샷!”

좋은 스윙이 나와 필상이 칭찬하면 방긋 웃는다.

하지만 금방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 샷을 준비했다. 9살 꼬마의 그런 진지한 모습은 필상의 근성도 살아나게 만들었다.

비록 완벽한 몸 상태는 아니었지만 실전을 통해서 그동안 잠자고 있던 샷 감각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결국 8번 홀까지 어렵게 올 스퀘어를 만든 필상과 도로시는 마지막 홀에서 승부를 봐야만 했다.

그런데 9번 홀로 이동하던 도로시는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미스터 퍼펙트. 1온 시켜 줘요!”

“1온?”

9번 홀은 342야드 파 4홀이다.

초등학생은 285야드에서 티샷을 하지만 이벤트 대회라서 프로들도 프런트 티로 설정해 재미를 더하기 위한 세팅이다.

물론 쉬운 상황은 아니다. 좌측으로 크게 휘는 도그렉 홀이라서 1온을 노리는 생각조차 떠올리기 힘든 구조다.

하지만 필상의 손을 잡고 보채는 도로시의 행동에 필상은 모험을 한 번 걸어 봐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팬들을 위한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필상이 드라이브를 꺼내 들자 녀석의 얼굴이 환해졌다.

“올리실 거죠?”

“응. 도전해 보려고.”

“그럼 저랑 내기해요.”

“내기?”

“만약 1온을 하시면 이번 겨울에 저도 프로님의 전지훈련에 데려가 주세요.”

실로 엉뚱하고 영악한 행동이었으나 흥미로웠다.

성공하지 못할 때를 가정하지 않고 성공하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뤄 달라는 녀석의 말이 무척 기분 좋게 들렸다.

그래서 티잉 그라운드로 향하던 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허! 에임이 완전히 왼쪽인데요?

-네. 1온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 홀에서 말입니까?

-네. 평소 그의 장타력을 고려할 때 거리가 부족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린을 바로 보려면 좌측의 나무들을 넘겨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선 이벤트라서 팬 서비스를 하려는 것 같군요. 하하하!

-하지만 아까 지고 있다고 펑펑 울던 아이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저런 무모한 도전은 삼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오전 내내 무미건조한 해설을 이어오던 카즈히로 해설이 느닷없이 인화성이 강한 발언을 터트렸다.

그 볼모는 도로시였고 필상의 팬 서비스를 무모하다는 표현으로 일축하는 모습은 아직도 그의 뇌리에 각인된 필상과 한국 선수들에 대한 반감이 드러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었을 리 없는 필상은 묵묵히 연습 스윙을 하면서 샷 이미지를 생성해 가고 있었다.

몇 번을 시도해도 나무를 완벽하게 넘기는 것은 불가했다. 탄도와 비거리가 일치하지 않았다. 다소 지루한 시간이 흐를 쯤, 마침내 하나의 파란 선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뭇가지 사이를 뚫어야만 가능하다는 거지?’

가지 사이로 햇살이 통과하는 그 공간은 넓게 봐도 직경이 5m를 넘지 않았다. 게다가 가느다란 가지와 나뭇잎들도 무사히 통과해야 한다.

누렇게 죽은 나뭇잎일지라도 타구에 맞으면 비거리의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최적의 궤적을 잡은 필상은 차분하게 샷 루틴을 밟아 나갔다.

까앙!

얼마나 강력한 임팩트가 이뤄졌는지 곁에 있던 도로시는 깜짝 놀라 앙증맞은 두 손으로 자신의 귀를 꼭 막은 채 총알처럼 튀어 나간 타구의 궤적을 쫓았다.

-와! 뚫었습니다. 저걸 그냥 뚫어 버리네요!

-방향이 너무 우측입니다. 저래서는 그린이 아니라 벙커나 우측의 러프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런 위험한 시도를 하는 필상이 아무런 대책도 없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런 무모한 사람이 미국 기자들이 선정한 올해를 빛낸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선정될 수가 없을 테고 세계 랭킹 1위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도 운이 좋아 거저 얻은 게 아님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나.

“와아아아!”

뜨거운 함성이 터진 순간은 강력한 드로우 드라이브가 걸린 시점과 일치했다.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지 유감없이 보여 준 그림 같은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우후! 그린 바로 앞에 떨어졌어요. 순수 캐리만 308야드를 찍었습니다. 올라가겠죠?

-넘어갈 것 같습니다. 그린을.

-카즈히로. 너무 초를 치시는 것 아닌가요? 설사 그럴 것 같아도 모든 팬들이 환호하는 이런 위대한 샷 앞에서 꼭 그렇게 부정적인 말씀을 하셔야 속이 시원합니까?

-사실을 사실대로 해설하는 것이 제 몫입니다. 그런 모욕적인 말씀은 삼가 주십시오.

-사실이요? 뭐가 사실입니까? 무모한 도전이라면서요? 차라리 도전이라는 말이나 쓰시지 마시지, 대체 왜 이러십니까!

둘 다 지나치게 흥분했다.

카즈히로가 설사 틀린 해설을 하더라도 캐스터는 그걸 슬쩍 뭉개고 가는 것이 옳다. 둘은 호흡을 맞춰 무난한 중계를 책임질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가 막힌 샷을 보고도 엄한 소리만 지껄이는 카즈히로의 편협한 해설을 듣는 것이 너무 답답했던 것이다.

방송 중계의 기본을 어기는 행동은 그가 먼저 했고 시청자들이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순간의 감정을 자제하지 못한 유우키도 차후 징계를 받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찌근거렸다.

보기 드문 중계방송을 보던 골프팬들의 실시간 댓글이 소나기처럼 화면을 훑고 지나갔다.

-잉? 둘이 뭐하는 거임?

-카즈히로. 방송 하차할 때가 됐네! 너무 옹졸해!

-무모한 시도였던 것은 맞다. 정상적인 대회였다면 미스터 퍼펙트, 과연 그런 샷을 했겠나?

-중요한 것은 정상적인 대회가 아니라는 거지. 이건 이벤트야, 팬들을 위한 이벤트 대회라고!

-멋진 샷을 날린 미스터 퍼펙트는 죄가 없음. NHK 스포츠 채널은 이제 골프 중계는 그만해야 할 듯.

-교체를 하든지! ㅋㅋ

-왜 일본에는 이런 위대한 선수가 나오지 않는 거지? 김치의 힘인가?

-위대한 선수? 너 조센징이지? 가라 네 나라로.

팬들의 반응도 엇갈렸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필상의 샷을 폄하한 카즈히로의 오판을 비난했지만 몇몇은 고집스럽게 그를 대변했다.

그 언사가 하나같이 상당히 폭력적이고 억지에 가까웠다. 그 내용만 쭉 읽어 봐도 일본 골프계의 삭막한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이미 시즌이 끝났지만 이 주제는 오프 시즌 내내 골프팬들의 술안주로 오르내릴 것이 불을 보듯 훤했다.

그 와중에 그린을 지나칠 것 같다던 필상의 타구가 멈춰 섰다. 카즈히로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결과가 나왔다.

홀컵에서는 8야드 가량 떨어졌지만 중요한 것은 1온에 성공한 필상이 이글 기회를 맞이했다는 점이었다.

“저는 대충 쳐도 되죠?”

“대충?”

“아니요. 그냥 그렇다는 거예요. 잘 칠게요.”

필상의 서늘한 눈빛을 대한 도로시는 얼른 도망치듯 티잉 그라운드로 향했다. 어차피 포볼 방식은 둘 중에 좋은 성적만 따진다.

적어도 버디는 확보했다고 확신한 도로시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단지 이겨서가 아니라 1온에 성공했기 때문에 이번 겨울은 태국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푼 것이다.

하지만 막상 샷 루틴을 밟을 때는 웃음이 사라지고 필상의 조언대로 차분하게 일정한 리듬으로 티샷을 시행했다.

“나이스 샷”

“우와! 220야드 넘은 거 맞죠?”

“아니. 218야드야.”

“에이! 재보면 220야드 넘었을 거예요.”

“좋은 샷이었던 건 분명해. 잘 붙여서 버디 잡아 봐.”

“네. 선생님.”

왜 호칭이 변했는지 짐작이 되었기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필상이 1온에 성공했으니까 태국 전지훈련에 초청받을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물론 그럴 생각이었으나 녀석의 부모님과 상의가 필요한 사안이라서 자꾸 캐물어도 답을 주지 않았다.

그랬더니 76야드 세컨샷을 그냥 홀컵에 쑤셔 넣었다.

“선생님!”

“아이고! 이 녀석!”

공이 그린 위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 도로시가 필상에게 달려오더니 폴짝 뛰어 품에 안겼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필상의 목을 끌어안고 볼을 막 비벼 댔다. 순간, 수미가 크면 이렇게 될 것 같다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녀석의 등을 두드려 줬다.

“도로시. 동반자들과 인사해야지.”

“네! 그래야죠.”

상대 어린 선수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도로시도 미안했는지 꼭 끌어안아 주면서 또 만나자는 말을 건넸다. 적어도 10년 후에는 프로 무대에서 만날 경쟁자이자 동료가 될 아이들의 훈훈한 모습을 보며 필상도 미켈슨과 악수를 했다.

“도로시라고 했던가?”

“네! 미켈슨 선생님.”

“선생님?”

도로시는 미켈슨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전지훈련에 가게 되면 미켈슨도 자신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영문을 모르는 미켈슨이 필상을 쳐다봤지만 그저 씩 웃고 말았다.

“그 녀석 물건이네!”

자초지종을 들은 미켈슨의 반응이었다.

그도 경기 내내 자신과 호흡을 맞춘 아이보다 도로시를 더 높이 평가했다. 리틀 모모코라고 말했던 것을 그도 들었는지 유심히 지켜본 것이다.

“재능이 탁월한 것은 맞습니다만 좀 더 두고 봐야죠.”

“하기야. 가까운 한국 여자 선수들이 주름을 잡아서 쉽지는 않겠지. 그러고 보면 한국은 참 특별한 나라 같아.”

“일본을 담당하시는 분이 그런 말을 하면 곤란하죠. 찍히지 않게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그래야겠지.”

12시 정각에 1차전이 1, 2, 3번 홀에서 동시에 시작되었다.

필상과 모모코가 상대할 조는 1조, 타이거와 이보미의 조합이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지고 말았다.

시즌 최종전에서 우승한 모모코의 기세가 이보미를 압도했지만 씁쓸하게도 필상이 타이거를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다.

“2&1로 끝나다니, 난생 처음 자네를 이겨 보는군!”

“축하합니다. 근데 태국에서 일은 안 하고 매일 골프만 쳤습니까?”

“하하하. 일도 잘해 놨으니까 졌다고 보복은 하지 말자고. 결승에서 봐. 오케이?”

“네.”

일본에 입국할 때, 타이거는 왜 시끄러운 대회를 열어 성가시게 만드느냐고 말했지만 사실은 매일 5시간 이상 연습했다.

120여 명이 참가하는 보통 투어 대회가 아니라 최고의 선수, 단 6명만 겨루는 대회이기 때문에 점점 수그러드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 줄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러니 지난주 우승자 모모코와 함께 호흡을 맞추고도 패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했다.

2:30부터 시작된 매치는 마쓰야마 히데키와 하라 에리카로 구성된 2조였다. 그나마 상대하기 편한 팀이라고 생각했으나 결과는 또다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이 나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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