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 정말 이상한 나라
지극히 아전인수를 떠올리게 만드는 해설이었다.
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나뭇가지를 무사히 뚫고 벙커까지 건너뛴다는 전제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그린에 올릴 수만 있다면 방향은 나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갤러리들이 비켜 준 비좁은 공간에서 빈 스윙을 하며 최적의 플레인(Plane-스윙 궤도가 그려지는 상상 속의 공간)을 구상하던 모모코가 드디어 어드레스를 취했다.
적절한 탄도와 힘 조절이 병행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만만치가 않았다. 하지만 침착하게 하프스윙을 가져간 모모코의 피칭웨지는 정확하게 공을 타격했다.
팍!
큰 먼지를 일으킨 샷이 터지는 순간, 필상은 전신에 이는 전율을 통해 최상의 샷이 만들어졌음을 직감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맞추기는 했다. 하지만 산산이 부숴 버린 타구는 그로 인해 벙커에 떨어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공은 벙커를 넘어 그린에 무사히 안착했다. 맨땅에서 친 타구라서 잔뜩 힘을 머금은 공이 멈출 줄 모르고 구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강한 타구를 바라보며 필상은 염력이라도 써야 하는 게 아닌지 망설였다. 그런데 참기 잘했다.
우측에 꽂힌 핀과는 인연이 없어 보였던 타구가 오르막을 타다가 버거웠는지 방향을 바꿔 휘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와! 저놈이 방향을 바꿨습니다!
와타나베가 흥분해 속어를 사용한 이유는 휘던 타구의 방향이 홀컵을 훌쩍 지난 것 같았으나 힘이 빠지자 갑자기 내리막을 타고 홀컵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의 180도 방향을 바꾼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떨어진 지점과는 한참 떨어진 지점까지 휘고 난 뒤라서 그대로 내려오면 샷 이글이라도 나올 기세였다.
-이런! 이런 기가 막힌 샷이 또 있을 수 있을까요! 정말, 정말 절묘한 샷이 탄생했습니다.
-우후! 왜 그냥 스쳐 지나가는 거죠! 그냥 콱 들어갔다면 세상이 뒤집어졌을 텐데요! 하하하.
내리막을 타고 내려온 공이 결국은 홀컵을 지나갔다.
들어갈 정도로 바짝 붙었던 것은 아니지만 근처를 지나는 순간, 소름이 돋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모모코의 타구가 나무숲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우승은 물 건너갔다고들 생각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냥 레이 업을 하지 않고 도전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기는 했으나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낼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나무가 우거진 공간을 뚫은 것도 대단한데 벙커를 넘겨 거리까지 맞췄다. 그것만으로도 2온이 된 것이니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흥분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타구가 마술을 부리자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비명이라도 지른 사람은 강심장이었다.
“오빠!”
“하하하. 나이스 샷! 우리 마나님.”
“마나님? 그거 별로 어감이 좋지 않은데요?”
하기야 결혼하고 애까지 있지만 21살에 불과한 처자에게 붙이기에는 과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사랑스러워 목마라도 태워 주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나름 높여 부른 것이다. 필상도 2온을 바라기는 했지만 이런 훌륭한 결과까지 나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환호하는 팬들의 응원을 더 오래 받고 싶었으나 필상은 얼른 흥분을 자제했다. 심각해진 신 프로가 세컨샷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결국 그 한 방의 샷이 우승을 견인했다.
돌부처처럼 평상심을 유지하는 신 프로가 그 홀에서 보기를 범하며 스스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버디를 낚아 전세를 역전시킨 모모코는 18번 홀에서도 환상적인 아이언 감각을 선보이며 타수를 줄였으니 완벽한 한 편의 드라마가 탄생한 셈이다.
지난주 봄의 우승에 이어 돌아온 여신 모모코가 최종전을 집어삼키자 그동안 흉흉했던 분위기는 일거에 걷혔다.
경기가 끝났음에도 시상식을 지켜본 팬들은 우승 인터뷰까지 보려고 기자회견 룸을 가득 메웠다.
“전 당분간 일본 투어를 뛸 생각이 없습니다.”
인터뷰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 좋았던 분위기가 갑자기 차갑게 식어 버린 발언이 모모코의 입에서 터졌다. 곁에 앉아 있던 필상도 미처 예상치 못한 발언에 당황스러웠으니 기자들은 오죽했을까!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죠?
“저를 응원해 주신 팬들에게는 너무도 감사하고 죄송하지만 일본 골프 투어는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너무 편협하고 폐쇄적이라서 부끄러워요.”
그냥 참고 지나가야 할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마저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에 굳이 불참 의사를 밝힐 이유도 없다. 하지만 모모코는 ‘편협’, ‘폐쇄적’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기자들도 황당했는지 금방 질문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여신의 귀환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그 주인공이 터트린 폭탄은 모든 골프팬들의 뇌리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그 파급효과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인데, 필상은 일단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사회를 보고 있는 이 대표에게 눈짓을 했다.
“여러분. 오늘 인터뷰는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기자들의 거센 반발이 빗발쳤다.
하지만 필상은 얼른 모모코를 데리고 일어섰다.
그녀는 물론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에 직면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뒤통수에 자신을 향한 질문도 쏟아졌지만 필상은 얼른 클럽하우스를 나와 차에 올라탔다.
머리가 복잡했다.
이 사건은 단지 이번 대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어린 모모코를 꼬드긴 필상의 생각이라고 해석할 가능성이 높다.
또 하나 난감한 것은 다음 주에 열린 이벤트 대회마저 이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는 점이었다.
“왜 아무 말이 없어요?”
“하하하.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칭찬할 것 같지는 않지만 전 오빠를 헐뜯는 이들의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을 보고 그냥 무시할 수는 없어요.”
“그 타개책이 투어 불참인가?”
“최소한 경각심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일본 사람이잖아.”
“그래요. 일본인이에요. 하지만 제 아이는 한국 국적을 가졌고 저도 한국인 남편을 사랑해요. 그리고 국적을 떠나 일본 골프계를 위해서도 그런 발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나랑 미리 상의를 좀 하지 그랬어.”
“그럼 잘도 동의했겠네요!”
갑자기 다투는 모양새가 되어 버려 더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고 점점 더 심해지는 반감, 아니 혐오감 때문에 뭔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치받는 것은 상책이 아니다.
우회적인 묘수를 찾아야 하는데, 쉽지 않았고 효과도 장담할 수 없어 차일피일 미루며 생각을 더 정리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모모코가 자신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때를 노려 이렇게 정면 승부로 나서자 이젠 더 이상 주저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녀를 지지하고 같은 목소리를 낼 수밖에.
“좋아. 함께 부딪쳐 보자.”
“흐흐흐. 그럴 줄 알았어요. 오빠!”
“하지만 앞으로는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하니까 이 문제와 관련된 것은 가급적 나랑 상의를 먼저 해 줘. 알았지?”
“네. 서방님.”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는지, 적재적소에 예쁘게 써먹는 모모코를 보며 안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호텔로 복귀한 필상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곧바로 대책 회의를 소집했다. 필상과 모모코, 이 대표와 봄, 그리고 미켈슨과 미사키도 참석했다.
“언니. 통쾌했어요.”
“그치? 흐흐흐.”
“기자들과 협회 사람들 표정 보셨어요? 완전히 뭐 씹은 표정들이더라고요. 키키키.”
회의를 시작하기 전, 모모코와 봄이 나눈 잡담에 다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희한하게 내는 웃음소리는 깜찍한 외모와는 너무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얼른 중심을 잡은 사람은 역시 이 대표였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파장이 클 것 같아요.”
“아닙니다. 어쩌면 그와 관련된 내용은 일절 방송을 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똘똘 뭉쳐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이 바로 일본인들의 특성이다.
아직은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이미 쏟아지기 시작한 대회 소식에 모모코의 극적인 우승만 다뤘지, 민감한 사안은 일절 언급되지 않았다.
협회에서 아무리 단속해도 결국은 터질 수밖에 없는 것이 언론의 특성이지만 아직은 잘 통제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다.
여러 얘기가 오갔고 결론은 의외로 쉽게 났다.
모모코는 본인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내년에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KLPGA에 전념하기로 했다. 아이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그녀를 말릴 사람은 없었다.
“저도 일본에서 뛰기 싫어요.”
“안 돼! 나랑 이미 약속했잖아. 적어도 5승은 하고 난 뒤에 다시 얘기하기로.”
“좋아요. 까짓 거 바로 해낼 거예요. 하지만 그 뒤에는 제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되죠?”
“그래.”
봄도 그대로 뒀다면 폭탄선언에 동참했을 것 같았다.
모모코와 이미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고.
그래서 에히메 현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단 모든 상황을 보류하기 위해 장막을 쳐 놨는데, 그게 묘수인 셈이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좀 불리한데?”
“인정해요. 하지만 필 형, 그런데도 일본에서 우리 사업이 성공한다면 더 큰 성과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하! 그렇게 되는 건가?”
어떻게 흐를지는 모르나 모모코는 물론 필상도 모든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일본 투어는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올해도 그러했으니 거의 두 시즌을 불참하는 것인데, 그 발표를 하면 필상에게 쏟아질 비난은 더욱 거세질 게 분명했다.
TPK의 사업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미켈슨에게는 본의 아니게 미안한 상황이 되고 만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 * *
“정말 이상한 나라 아닙니까?”
도쿄로 이동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나 언론은 그에 대한 언급을 끝내 하지 않았다. 이럴 수가 없다고 여겨졌기에 이 대표와 이벤트 대회에 대해 논의하려고 만난 필상은 그 화두부터 꺼냈다.
그런데 예상을 빗나간 말을 듣게 되었다.
“사쿠라 재단이 전면에 나선 것 같아요.”
“사토시 회장이 왜요?”
“그가 자신의 측근을 내세워 골프 협회를 다시 장악할 것 같은데, 오히려 다들 반기는 분위기라고 해요.”
“협회는 물론 언론들도 그의 눈치를 본다는 건가요?”
이해는 된다.
그에 대한 풍문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당히 축소된 면이 강한데, 그야말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자다.
자신의 반대편에 선 자는 철저히 부수고 따르는 이들은 기대를 넘어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 주기 때문에 그 수확을 나누고자 하는 이들이 줄을 선다고 했다.
“봄을 위해서 나선 거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내부로부터의 개혁이 일어날까요?”
“글쎄요……. 그건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직은 전략을 수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나쁜 방향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의 뿌리 역시 한반도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성공을 위해 발버둥을 칠 때는 그 모든 것을 감춰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굳이 스스로 밝히지 않을 뿐, 설사 밝힌다고 해도 바뀔 것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핵심이 아니고 그가 가진 금력과 권력이 진정한 본질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영향력이 막강한 사토시 회장이 구태여 협회까지 장악하려는 이유는 딸에 대한 지원이 가장 중요한 대목일 테지만 점점 더 위태로운 일본 골프계를 걱정하는 마음도 없지 않다고 판단했다.
물론 그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를 꾀할지는 알 수가 없다. 어설픈 혁신을 들고 나올 인사가 아니기에 기회가 되면 직접 만나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언론이 터트리지 않아 대회 개최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하지만 저와 모모코는 내일 잡힌 기자회견에 빠질 게요.”
“으음……. 그럼 필 형과 봄을 데리고 나갈게요.”
“필 형?”
“공 프로가 자꾸 그렇게 불러서 나도 모르게 입에 익었나 봐요. 둘은 언제 다시 폭탄을 터트릴지 몰라서 굳이 부르라고 하지 않을 것 같기는 해요.”
“그럼 저희는 연습이나 하고 있을 게요.”
본의 아니게 일본 골프 협회의 도움, 아니 정확히 지적하자면 사토시 회장의 덕을 보고 있는 셈이었다.
[1조 - 타이거 우즈 / 이보미]
[2조 - 마츠야마 히데키 / 하라 에리카]
[3조 - 공필상 / 미야 모모코]
[4조 - 필 미켈슨 / 이즈카 하루]
[5조 - 이마히라 슈고 / 전미정]
[6조 - 김경태 / 하타오카 나사]
TPK 골프꿈나무육성 자선 이벤트 대회의 요강이 발표되었다.
일단은 참가자의 면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남자들은 한/미/일을 대표하는 프로들이 총출동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 골프팬들의 마음을 끄는 것은 여자 선수들이 JLPGA의 강자들이고 일본 선수가 가장 많다는 대목이었다.
-첫째 날 오전: 아마추어 꿈나무들과 9홀 동반 라운드
-첫째 날 오후: 9홀 1, 2, 3차전 라운드
-둘째 날 오전: 9홀 4, 5차전 라운드
-둘째 날 오후: 9홀 결승전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조 편성과 대전 방식이었다.
첫째 날 오전에 일본 골프꿈나무 12명을 초대해 프로들과 짝을 이뤄 자선 라운드를 진행한다. 일종의 프로암인 셈이다.
그러나 오후부터는 일정이 빡빡하다. 다음 날 오전까지 올라운드 방식으로 모든 팀이 9홀 매치플레이를 하고 최종 성적을 따져 두 팀이 결승전을 치르는 방식이다.
모든 참가자에게는 기본적으로 300만 엔의 초청비가 보장되고 최종 우승자는 500만 엔을 시상할 계획이다.
상금의 금액이 크지는 않으나 대회가 없는 시즌에 특별히 초청받은 것이 영예로운 일이고 부수입으로도 짭짤했다.
또한 모든 매치마다 승자의 이름으로 100만 엔씩 기부가 되는데, 무려 16경기가 치러지기 때문에 총 기부금만 1600만 엔에 이른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