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탁월한 선택
-4온 1퍼팅이면 보기니까 공동 선두가 되는군요.
-제가 볼 때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신지애 프로라도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홀도 아닌데 뭐 그렇게까지 부담을 느낄까요?
-샷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세운 수많은 기록들이 있지만 그건 결과일 뿐, 지금 상황은 절대 가볍지가 않아요.
마치 실패하라고 주문이라도 외우는 사람 같았다.
물론 일본 방송을 시청하는 팬들도 같은 마음이겠으나 지나치게 편파적인 중계가 아닐 수 없었다.
시청자들 중에 일본인이 아닌 사람도 있었는지 실시간 댓글에 항의성 글들이 몇 개 올라왔다. 그러나 무참히 밟혔다.
[이게 국가대항전이냐?]
[조센징 나타난 겨? 얼른 너네 나라로 돌아가!]
[이래서 한국 놈들은 봐주면 안 돼! 확실히 밟아 줘야 한다니까!]
[그동안 우리가 너무 포용하고 키워 줬어. 그만큼 살게 도와줬으면 됐지! 저 거지 근성 좀 봐!]
[은혜를 모르는 놈들! 다시 합병해 일등 국민의 위대한 지도 아래 두자!]
간혹 지나치다는 의견도 나왔으나 점점 더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휩쓸려 흔적을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이 전개된 것은 역시 정치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다. 진정한 사과는커녕 엄연한 역사를 부정하고 경제 제재를 들먹이다가 쓴맛을 본 작자들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다.
텅!
대다수 일본 팬들의 귀에는 그 청명한 소리가 굉장히 거북했던 것 같다. 피아를 떠나 과감했던 퍼팅을 성공하면 박수가 쏟아질 만도 한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지금이야말로 모모코가 확실히 선두로 치고 올라설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정조차 바뀌지 않은 신 프로는 담담하고 과감한 스트로크를 선보였다. 왜 그녀의 속이라고 멀쩡하겠는가?
연거푸 미스 샷이 나온 터라 마음이 상했을 것이고 다시 실수를 하면 선두를 내줘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 컸을 것이다.
게다가 일방적인 응원까지.
뭔가 불합리하다는 생각, 억울한 느낌이 있었을 텐데 그걸 모두 극복한 진정한 강자의 면모였다.
“수고하셨어요.”
“이젠 정말 진검 승부가 되었네?”
“그러게요. 팬들의 반응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호호호. 그렇게 말해 줘 고마워.”
신 프로는 아주 강력한 경쟁 상대다.
절대 그런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은데, 모모코는 진심을 담아 말했고 신 프로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그런 모습에 필상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승부는 참으로 매정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일본 팬들의 고약한 행동을 의식하면 자신이 일본 선수를 돕는 것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믿는 바, 스포츠에 다른 요소들이 끼어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고자 했다.
더욱이 아내의 일이 아니던가!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는데, 모모코의 행동을 보고 역시 자신의 결정이 옳았음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16번 홀, 171야드 파 3]
핀의 위치에 따라 난이도가 확 달라지는 홀이다.
좌우에 병풍처럼 세워진 나무가 너무도 위협적이기 때문인데, 바람도 말썽인 오늘 하필이면 깃대가 우측에 박혀 있었다.
스트레이트 구질로 핀을 바로 공략하려면 우측 나뭇가지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야만 해서 결국 할 수만 있다면 페이드 샷을 구사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이 홀에 불고 있는 바람은 악성 훅이어서 웬만해서는 페이드를 걸어도 먹힌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에 필상도 모모코와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걸까요?
-클럽 선택에 대한 이야기일 겁니다. 바람이 너무 강해서 탄도가 높은 샷을 구사할 수도 없고 페이드를 걸기도 어려운 바람이라서 난감할 겁니다.
-그렇다면 그린 중앙을 보면 되지 않나요?
-그게 최선으로 보입니다만 어정쩡한 위치에 멈추면 경사가 심한 옆 라이에 걸리기 때문에 그게 능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하하. 그럼 대체 어떻게 치라는 말씀인가요?
-탄도가 낮은 페이드 샷. 힘들어도 이번 기회에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쏟아부었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페이드 샷 말고는 답이 없다는 거군요.
바람이 없어도 까다로운 위치에 핀이 꽂혔다.
다나카는 본인 스스로 페이드를 걸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해 놓고 정답은 페이드 샷이라고 말하는 모순을 보였다.
그만큼 이 홀의 공략이 쉽지 않다는 얘기인데, 뜻밖에도 모모코는 6번 아이언을 그냥 들고 티잉 그라운드로 향했다.
탄도를 낮추면 한 클럽 정도 길게 잡는 게 좋은데,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으로 비쳤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의 기대를 충족하고도 남을 만큼 훌륭했다. 낮게 깔린 타구가 그린 전방 15야드 지점, 러프에 떨어졌지만 힘차게 굴러 그린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그래. 휘어!”
그린 정중앙으로 올라선 타구는 힘차게 굴러 옆 라이를 따라 구르기 시작했다. 짧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의 억측을 완전히 잠재운 한 방이었다.
평소보다 강하게 때리고도 정확성을 유지한 모모코의 놀라운 기량에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이 샷이야말로 오늘의 샷으로 뽑힐 만했다.
그런데 잠시 후 더 놀라운 상황이 펼쳐졌다.
5번 아이언을 잡은 신 프로가 마치 비디오를 재생하듯이 정확한 궤적으로 온 그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3.5야드가 남은 모모코보다 1야드 이상 가깝게 핀에 붙여 버리는 기적 같은 스윙을 선보였던 것이다.
“으흐! 라이를 다 가르쳐 줘야 할 판이네요.”
“그렇다고 일부러 엉터리로 칠 수는 없잖아,”
“기필코 넣어야겠어요!”
모모코도 놀란 것 같았다.
나름 고심하고 정확히 이미지 샷대로 시행하고도 그 결과에 스스로 놀랐는데, 어떻게 그 궤적을 똑같이 따라 할 수 있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충격이 너무 컸던 걸까?
쉬운 라이는 아니었지만 필히 넣었어야 할 퍼팅이 홀컵을 외면하고 말았다. 얼마나 아쉬워하는지 모모코는 멍 하니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를 못했다.
탕! 타… 타… 타… 타……당!
모모코는 실패했지만 신 프로에게 자비란 없었다.
이번에도 라이를 많이 보지 않은 과감한 퍼팅이 그대로 홀컵에 빨려 들어가면서 청명한 소리를 생성해 냈다.
누군가의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드는 음향이었다.
-하아! 대단하네요. 정말 대단해요!
-아시아인 최초로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던 선수입니다. 한 해에 세계 4대 투어를 모두 우승한 최초의 선수이기도 하죠.
-아무리 그래도 사람 아닙니까! 방금 전에 보기를 기록하면서 추격을 허락했는데, 어떻게 곧바로 이런 신기한 샷을 보여 줄 수가 있는 걸까요?
-골프 역사에 길이 남을 선수입니다. 그런 선수와 당당히 맞대결을 펼치며 옥신각신하는 모모코, 역시 일본 여자 골프를 짊어질 대들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쩐 일로 신 프로를 높이 띄워 주나 했더니 결국은 모모코를 더 높이 띄우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 속내는 달랐다. 공동 선두들 만들고 이 어려운 홀에서 온 그린에 성공하는 순간, 모모코의 우승을 예상했다.
그럴 만큼 충분히 멋진 샷이었기에 그런 와중에 신 프로가 그런 귀신같은 샷으로 따라올 것이라고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그 한 방으로 인해 이제 기세는 오히려 신 프로에게 넘어갔다고 보는 것이 합당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모모코를 띄우기에 여념이 없는 그들의 바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편파 중계의 끝을 보는 것만 같은 짜증이 이는 광경이었다.
“기회가 왔어요.”
“무슨 기회?”
17번 홀은 317야드의 짧은 파 4홀이다.
하지만 핸디캡 8번을 기록할 만큼 타수가 잘 나오지는 않는다. 울창한 좌우의 나무들로 인한 위압감이 워낙 큰데다가 페어웨이가 아주 좁은데 러프는 길고 질기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신 프로는 드라이버를 잡지 않고 3번 우드로 242야드만 안전하게 공략했다. 앞선 자의 여유라기보다는 그게 이 홀에 임하는 올바른 자세였다.
모모코도 크게 다르지 않은 공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기회라는 말을 꺼내자 솔직히 뜨끔했다.
필상도 그녀와 똑같은 생각을 하던 차였기 때문이다.
파 4홀 1온!
“파워를 90%까지 써 보려고요.”
“아직 기회는 남았어. 그리고 바람도 너무 위험해.”
“아니에요. 남은 두 홀 모두 만만치가 않잖아요. 신 프로님은 파 작전으로 나갈 텐데, 저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딴에는 맞는 말이었다.
정교한 샷의 대명사인 신지애 프로가 실수할 것이라는 예측은 너무 안일한 대처다. 적어도 우승을 원한다면 지금이 바로 모험을 걸 때였다.
그런데 그녀가 적극적으로 원하고 자신도 동의하건만 묘하게도 내키지가 않았다.
“우승은 하늘이 정해 준다잖아. 인위적인 수단을 동원하지 말고 참고 기다리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타수를 줄이지 못하면 우승은 물 건너가는 거잖아요. 이대로 그냥 맥없이 지는 건 정말 싫어요.”
“좋아!”
지금은 말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이 구구절절 옳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험은 결국 실패했으며 오히려 심적인 타격을 입지 않았는지 걱정스러웠다. 슬라이스 바람이 부는 것도 고려했건만 1온을 지나치게 의식한 모모코는 힘이 잔뜩 들어가고 말았다.
그 결과 악성 슬라이스 구질이 나타났고 타구는 어이없게도 우측 나무 사이로 처박히고 말았다.
-이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1온을 노린 것 같습니다.
-317야드인데요?
-모모코의 장타력이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긴장감이 팽배한 지금은 너무 과한 시도였던 것 같습니다.
-으음……. 정말 아쉽게 되었네요.
-장타력에 정교함까지 갖춘 선수인데, 역시 긴 공백은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그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캐디가 리드를 잘했어야 하는데, 실망스럽습니다!
-두 홀이 남은 상황에서 승부를 뒤집으려면 피치 못할 선택 아니었나요? 전 미스터 퍼펙트가 실수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같이 의논한 결과일 테니까요.
그나마 젊은 와타나베가 합리적인 언급을 보탰다.
다나카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어 그냥 지나칠 것 같았으나 엉뚱하게도 불꽃은 실시간 댓글에서 피어올랐다.
캐디인 필상이 제대로 조언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우기는 이들이 아우성을 쳤고 심지어 일본 선수의 우승을 막기 위한 비열한 수작이라는 악담을 퍼붓는 자도 있었다.
다는 아니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편협한 사고에 젖어 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기야 한국에 대한 무역 제재에 82%가 잘했다고 공감한 국민들이니 말해 뭐하랴!
“괜찮아!”
풀이 팍 죽은 채 고개까지 숙인 모모코에게 다가간 필상은 그녀의 클럽을 받아 들고는 어깨를 포근하게 감싸줬다.
누구보다 좋은 샷을 원했던 사람은 바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이미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으로서는 최악이다.
혹자는 필상의 그런 행동마저 불순하게 보겠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남편이 아내를 보듬어 주는 것이 흠이 될 리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나무 사이로 들어간 공의 위치가 중요했기에 다시 경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보이네!”
“여기서 그린을 공략하라고요?”
“응. 저기 나뭇가지 사이를 뚫으면 될 것 같아.”
나뭇잎들이 수북하게 떨어진 지점이라 잔디가 온전하지 못했다. 낙엽은 다 치웠지만 듬성듬성 자란 잔디는 맨바닥이나 다름이 없었다.
핀까지 남은 거리는 61야드, 주변에 그늘이 질만큼 나무가 빽빽했지만 필상은 피칭웨지를 건네며 한 공간을 가리켰다.
절대 넉넉한 공간이 아니다. 타구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궤적은 겨우 훌라후프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린 앞에는 제법 큰 벙커까지 놓여 있다. 그런데도 필상은 아무렇지 않게 뚫으라고 말했고 잠시 머뭇대던 모모코는 이내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허! 나무 사이를 관통하려는 걸까요?
-네. 에이밍 하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은데, 카메라가 자세히 좀 비춰 줬으면 좋겠군요.
카메라 감독이 그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곧바로 모모코가 에임을 하는 방향, 그린 쪽을 바라보는 화면에 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냥 컴컴한 공간만 보일 정도로 나뭇가지들이 빼곡했기 때문이다.
실제의 공간과 화면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왼쪽으로 안전하게 레이 업을 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필상의 오랜 안티처럼 느껴졌던 다나카 해설위원이 모처럼 필상의 선택을 지지하고 나섰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아니, 지금은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안전하게 레이 업을 하고 서드 샷에 집중해서 파를 잡으면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그린 주변의 나무와 벙커, 그리고 우측으로 심하게 기운 라이 때문에 핀에 붙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 프로도 잘라 간 것이죠. 보다 좋은 티샷 랜딩 지점은 좌측 페어웨이인데, 바람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았거든요.
-아! 타구가 페이드를 건 것처럼 휜 것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바람의 영향을 받은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지금 그녀가 핀에 붙이는 시도를 감행하기 어렵다고 볼 때, 잃을 것이 없는 모모코로서는 나무 사이를 뚫어야죠. 만약 성공한다면 공은 런이 없이 멈추거나 우측으로 구를 가능성도 있어서 결과는 나쁘지 않을 겁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