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인 더 홀!
“나이스 샷!”
“고마워.”
“뭘요.”
경쟁자인 신 프로는 굉장히 차분했다.
어제 10언더를 치며 턱밑까지 추격한 모모코에게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응원이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묵묵히 자신의 스윙을 했다.
첫 홀은 둘 다 파로 마쳤고 모모코가 신기에 가까운 온 그린에 성공했음에도 안전하게 잘라 간 그녀는 5야드 버디 기회를 맞이했다.
맞바람이 거셌지만 바람을 뚫고 날아가는 타구를 보며 진정한 강자의 면모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린의 표면에도 바람이 작용할 거야.”
“아! 그렇겠네요.”
라이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퍼팅이 썩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오로지 선수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는 조언이 필요했다.
-우후! 정말 아깝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멋지게 그린에 올려놓고 버디를 놓치니 맥이 턱하니 빠지는군요.
-그래도 파로 막아 낸 것은 다행이죠. 다들 우수수 무너지는 상황이니까 말입니다.
그 말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신 프로도 버디를 놓쳐야 한다. 하지만 돌부처처럼 탄탄한 멘탈을 지닌 신 프로는 그 와중에도 버디를 성공시키며 공동 2위와의 격차를 2타로 벌렸다.
타수를 잃지만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던 팬들은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모코도 그 버디에 적잖은 영향을 받은 듯 보였다. 웬만해서는 의기소침한 표정을 짓지 않는 그녀가 다음 홀로 이동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그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에 정곡을 찔렀다.
“신 프로는 최고의 선수야.”
“누가 뭐래요?”
“하지만 당신도 그녀 못지않은 기량을 갖췄지. 아니, 훨씬 좋은 스윙을 가지고 있어. 그런데 왜 고개를 숙이느냐고.”
“알았어요.”
대답은 잘했지만 여건은 쉽지 않았다. 바람이 널뛰었고 아너로 나선 신 프로가 도무지 빈틈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5번 홀에서 모모코가 5야드 버디 퍼팅을 성공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더 짧은 거리를 남긴 그녀도 실수하지 않고 버디로 맞불을 놨다.
“으음!”
“하하하. 2타 차는 한 홀에서 뒤집어질 수도 있어. 그러니까 때를 기다리면서 정확한 스윙에 집중해.”
185야드 파 3홀인 8번에서 신 프로가 그린을 놓치며 기회가 찾아왔지만 모모코도 그린을 놓치고 말았다.
“어? 바람이 바뀌었나 봐요.”
“응. 이놈의 바람이 왜 그러지?”
먼저 칩샷을 한 신 프로가 핀에 붙이지 못하며 다시 한 번 더 따라잡을 기회가 주어졌으나 어이없게 모모코의 칩샷도 길었다.
-아! 정말 어렵네요.
-괜찮습니다. 추격하는 모모코보다 쫓기는 신 프로가 더 심란할 겁니다. 그러니까 버티며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겠죠? 이 험악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만 명이 넘게 오셨는데, 기대에 부응해야지요.
그러나 상황은 진전되지 않았다.
신 프로가 실수를 하면 모모코도 어김없이 따라 했다.
그 결과 14번 홀을 마친 신 프로는 -18까지 내려섰지만 모모코도 3타를 잃어 여전히 2타 차를 좁히지 못했다.
남은 홀은 이제 4개뿐,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경쟁자들이 더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18 신지애
-16 미야 모모코
-14 김하늘, 윤채연
-13 히가 마미코, 안선주
2위는 확보된 것처럼 보였지만 표정이 밝을 수 없었다. 모모코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우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5번 홀. 412야드 파 4]
거리에 대한 부담이 컸기 때문인지 드라이브를 잡은 신 프로의 샷이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처럼 우측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저 5번 우드 칠게요.”
“좋은 생각이야. 일단 거리보다는 방향성이 중요해.”
“어딜 봐야 할까요?”
“나무 좌측 끝 언저리.”
슬라이스 바람이 제법 강하게 불었다.
경쟁자가 치명적인 실수를 했기 때문에 힘이 들어갈 만도 하건만 모모코는 가장 확실한 스윙을 보여 줬다.
탄도가 낮은 방향성 좋은 우드 샷.
페어웨이 한가운데 심어 둔 나무의 왼쪽 끝을 정확히 꿰뚫은 타구는 바람을 타며 페어웨이 좌측에 안작했다.
“바람이 약해졌어.”
“근데 결과는 더 좋아요. 그린을 공략하려면 최고잖아요.”
“물론 그렇지.”
동의하지만 바람의 강도가 수시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유념한 필상의 시선은 이미 경쟁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타구는 하필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걸쳐 있었다. 그래도 무난히 쳐낼 수 있으리라고 봤는데, 이변이 터졌다.
너무 상심이 컸는지 다소 무성의하게 때린 타구는 일명 ‘뽕샷’이 되고 말았다. 클럽페이스가 너무 깊이 들어가는 바람에 탄도가 확 치솟았고 절대 걸리지 않을 것 같은 나뭇가지에 맞은 공은 숲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하하. 천하의 신 프로도 저런 샷을 하는군요!
-크흠! 누구든 방심하면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냥 툭 때리면 되는데 공이 나갈 방향으로 고개를 쳐든 게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을 낳고 말았습니다.
너무 기뻐하는 와타나베의 웃음을 지적하며 정확한 해설을 보탰지만 사실 화면에 비친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만연했다.
어차피 타수를 줄이기는 힘든 상황이기에 경쟁자가 무너지는 수밖에, 우승을 향한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좀 천박해 보인 것은 사실이다.
어차피 자신들의 해설을 선수가 듣는 것도 아니라서 가급적 중립적인 자세가 바람직하지만 그런 것을 기대하기에는 일본 골프계가 앓고 있는 증상이 너무 심각했다.
“어이! 선물을 주시려나 봐요.”
“선물?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이빨을 보이지는 마.”
“어! 네.”
안타까웠다.
입장을 바꿔 놓고 보면 지금 신 프로의 심정은 매우 복잡할 것이다. 그녀도 일본 언론들이 최근에 아주 악독한 기사들을 쏟아 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눈앞에 다가온 우승을 포기할 수는 없다.
다만 너무도 당연한 우승에 대한 갈망이 일본 팬들의 시선에는 그다지 아름답게 비치지는 않을 것 같아 그건 좀 염려스러웠을 것이다.
“저건 아닌데?”
“시야만 나온다면 그린을 노릴 수도 있죠!”
“아니야. 저 에이밍을 좀 보라고.”
이미 앞에서 모모코의 타구가 보여 줬다.
슬라이스 바람이 줄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자신의 공이 놓인 라이를 살피느라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지금 같은 방향이라면 설사 장애물을 피하더라도, 본인이 원하는 샷이 나오더라도 그린에 올라가기는커녕 우측 벙커에 빠질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딱!
그 와중에도 신 프로는 정확한 임팩트를 만들어 냈다.
그녀를 향한 응원이라기보다는 그저 놀라움에 대한 비명이 터진 것인데, 필상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살짝 스친 나뭇잎의 영향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은 슬라이스 바람의 영향을 받은 공이 결국 벙커에 푹 박히고 말았다.
“에그 플라이 같죠?”
“응. 모래가 튀어 오른 걸 보면.”
“뭘 잡을까요?”
“당신 생각은 어떤데?”
“167야드면 6번 아이언 잡고 싶어요.”
“좋아. 더도 말고 그린 좌측 끝을 봐.”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기왕이면 나이스 샷으로 스스로 만들고 싶었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파를 잡기에도 급급한 상황에 버디는 언감생심이었다.
이렇게 지독한 라운드가 다 있나 싶을 정도다.
그러던 차에 철벽같던 신 프로가 빈틈을 보였다. 이게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를 알기에 어드레스를 취했던 모모코는 바람이 불자 자세를 풀고 물러나 다시 루틴을 밟았다.
조금이라도 찜찜하면 그게 옳다. 무조건 긍정적인 생각만 하며 샷을 결행하면 결과는 기대를 벗어나고 만다.
발바닥으로 힘을 내린다는 느낌으로 하체를 단단히 고정한 모모코는 천천히 테이크백을 시행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스윙이 요구되었다.
-중요한 샷이죠?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신중한 겁니다.
-와우!
테이크 백은 쳐다보는 사람들이 지루할 만큼 느렸으나 다운스윙은 가차 없었다. 정확히 공을 때린 클럽페이스가 깊은 디봇 자국을 만들며 힘차게 돌았다.
제발 그린에 잘 올라서기를 바라는 팬들의 소망이 담긴 응원 소리가 메아리치는 가운데 타구는 쭉쭉 뻗어 나갔다.
그런데 뒤에서 지켜보던 필상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임팩트는 기가 막혔지만 타구의 방향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좌측이었기 때문이다.
‘안 돼!’
아차 싶었으나 필상의 시선은 팔로우 스로우를 마치고도 피니시 자세를 풀지 않고 서서히 타구를 바라보는 모모코의 뒷모습에 닿아 있었다.
만약 원하던 샷을 만들지 못했다면 저렇게 타구를 진지하게 바라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모모코는 페이드 샷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한 일부 팬들이 너무 좌측으로 쏠린 타구에 놀라 ‘볼!’을 외쳤다. 행여 갤러리들이 다칠까 우려한 것이다.
-페이드! 페이드가 맞죠?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슬라이스 바람이 부는데…….
다나카 해설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
오늘 따라 자신의 예상이 번번이 빗나가 망신살이 뻗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굿 샷에 승부를 걸어야 할 때였다.
기가 막힌 곡선을 그린 타구는 서서히 그린으로 향하더니 끝내 깃대 바로 앞에 떨어졌다. 홀컵과는 다소 엇나간 방향이지만 생각만큼 길지 않았던 타구는 5야드 안팎의 버디 기회로 연결되었다.
보다 완벽한 샷을 만든 적도 많지만 지금처럼 가슴 떨리는 결과는 일찍이 없었다고 장담할 만큼 극적인 전개였다.
“정말 멋진 샷이었어.”
“자꾸 밀릴 것 같았어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페이드를 거는 게 낫다고 판단했어요.”
“잘했어. 샷은 선수가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게 아니잖아. 아주 좋은 결정이었어.”
“흐흐흐. 그럼 한 번 안아 줘요.”
필상은 얼른 꼭 안아 줬다.
모모코는 페이드를 걸면서 상당히 염려했던 것 같다.
결과가 좋았으니 망정이지, 만약 나빴다면 필상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던 것이다. 그 졸인 마음을 알기에 팬들의 따가운 시선 따위는 무시하기로 했다.
-지! 이제 공은 신 프로에게 넘어간 셈이네요.
-그렇습니다. 모모코가 적어도 파를 만들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기에 심장이 심하게 요동칠 겁니다.
-벙커 턱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젯밤부터 내린 비 때문에 모래가 젖어 있고 공도 모래에 절반 이상 잠겨 있어서 평소와 같은 샷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쫓기는 자의 불안감, 그거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칩니다.
아예 대놓고 악담을 했다.
물론 주어진 환경이 좋지 않은 것은 맞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수없이 겪었던 신기록 제조기 신지애 프로다.
적어도 그 정도는 인정하는 것이 좋을 텐데 이번에도 너무 많이 나간 셈이다.
“피칭 아닌가요?”
“응. 턱이 낮고 모래가 정상이 아니라서 굳이 벙커샷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아.”
“으음……. 역시 노련하네요.”
신 프로의 벙커 칩샷은 평가하기 애매한 위치에 멈췄다.
2.5야드, 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크기 때문에 오히려 프로들에게는 부담되는 거리다.
팬들의 반응이 엇갈린 것도 그와 무관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보다 조금 더 길게 남은 모모코의 퍼팅이 중요했다. 넣지 못하면 신 프로는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만 멋지게 성공하면 오히려 부담을 느낀 신 프로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했다.
‘참. 미치고 팔짝 뛰겠네!’
라이를 살피고 퍼팅 루틴을 밟아 나가는 모모코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차라리 직접 퍼팅을 하고 싶었다.
모든 책임도 자신이 지는 것이 훨씬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중에 가장 큰 유혹은 염력을 쓰고 싶은 충동이었다.
애써 결행하지 않아도 간절히 원하면 자연스럽게 작동되기 때문에 강제로 홀컵으로 밀어 넣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약한 마음을 파고든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것을 깨달은 필상은 차라리 고개를 돌렸다.
‘걱정 마요!’
눈이 마주친 저 멀리에 서 있는 봄의 음성이 들렸다.
환청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초감각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이능이라는 것을 인정한 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너무 과도하게 염려하는 것은 본인을 위해서나 선수를 위해서 적절치가 않은 행동이었다.
“인 더 홀!”
“버디! 버디! 버디!”
평소라면 모모코의 5야드 퍼팅의 성공 가능성은 80%에 육박한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가능성이 확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마 보기 힘들었으나 응원 소리가 터짐과 동시에 필상도 홀컵으로 향하고 있는 공에 시선을 박았다.
-들어가죠? 그렇죠?
다나카 해설이 맞장구를 치려는 찰나, 구르던 공이 홀컵 경계선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이런 경우 대부분 아쉽게도 잘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갑자기 푹 꺼졌다.
-버디! 버디를 잡았습니다. 모모코, 그녀의 집념이 만들어 낸 일생일대의 작품이자 인간 승리의 증거입니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공이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는 순간, 다나카 해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의 본분도 잊은 듯.
곁에 있던 와타나베도 깜짝 놀라 덩달아 일어설 만큼 이번 버디는 지켜보는 모든 이들을 강렬한 흥분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