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39화 (239/354)

239. 이 맛에 골프를 친다.

-19 신지애

-18 김하늘, 미야 모모코

-17 안선주, 배희경, 윤채연, 히가 마미코

모모코도 선전했지만 선두권도 일제히 불꽃 쇼를 펼쳤다.

5타를 줄인 신지애가 굳건히 최상단을 유지했고 김하늘도 -6을 치며 모모코와 어깨를 나란히 한 부분이 눈에 띠었다.

그 외에도 우승 경쟁에서 물러서지 않은 선수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마지막 라운드의 뜨거운 경쟁을 예고했다.

3라운드 성적에서 우위를 보인 모모코가 규정에 따라 챔피언 조에서 출발하게 된 것이 일본 팬들을 안심시켰다.

“한일전이 따로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양상으로 번지는 것은 정말이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스포츠에 왜 국가적인 감정을 담는 건지.”

실제 심각한 양상으로 번지고 있었다.

일본 골프팬이라면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데, 문제는 언론이 기름을 붓고 불을 지피고 있다는 것이다.

흐름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저녁을 먹으러 둘러앉은 측근들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문제의 심각성을 가감 없이 지적했고 필상은 자신의 입장을 보다 분명히 했다.

이미 뜨겁게 겪어본 터라 이제는 잠잠해질 것이라 여겼건만 엉뚱한 곳에서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워낙 두 나라가 특수한 관계라서 그런 것 같아요.”

“특수한 관계?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굳이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건 억지이며 추악한 짓입니다.”

너무 거친 표현에 다들 숨을 죽였다.

어찌 되었든 일본 투어는 한국 선수들에게 좋은 시장이다. 경쟁력은 이미 확인되었고 가까운 거리여서 참가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 힘들 정도다.

미국 투어가 부담스러운 경우, 한국 투어의 과도한 경쟁을 적절히 피하면서 일본 투어를 뛰어 성공한 선수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가급적 정면으로 치받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누구보다 잘 참았던 필상이 속내를 드러내자 극렬히 동의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죠.”

“그게 문제입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점점 더 심각해지는 환경을 왜 협회나 전문가들이 두고만 보는 건지, 그 결말이 어찌 될지 정말 모르는 걸까요?”

달콤한 열매를 잃는 것에 대한 걱정은 많았어도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다들 숨을 죽인 채 필상의 입만 바라봤다.

사실 이 자리에는 일본 국적을 가진 모모코와 봄도 함께하고 있었다. 하지만 필상이나 측근들은 일절 개의치 않았다. 적어도 그 두 여인은 한국인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시 침묵이 강요된 듯 무거운 분위기에서 필상이 언급한 부분에 대한 개략적인 답은 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외국 선수들이 다 빠지면, 아니 한국 선수들이 다 빠지면 일본 투어는 금방 시들해질 거예요.”

“과연 그럴까?”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는지 조용히 듣고만 있던 모모코가 대꾸를 했다. 물론 그녀의 입장이 일본 편인 것은 아니다.

한국 선수들이 빠지는 것은 본인에게도 손해이고 대다수의 일본 팬들이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필상은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작년에 일본이 한국에게 무역 제재를 했던 것 기억나?”

“아!”

“일방적인 조치는 단기적인 이익처럼 보이지만 그 일과 다르지 않아. 결국 폐쇄적인 시장은 도태될 수밖에 없지.”

“네. 누가 일본 투어에 올 것이며 흥행이 되겠어요. 당장은 일본 선수끼리 휩쓸면 좋아하겠지만 스스로 벌인 낯 뜨거운 행동은 늘 께름칙하고 점점 더 시장을 위축시킬 거예요.”

가장 어린 봄이 그런 고견을 밝힐 줄은 몰랐는지,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일본 재계의 큰손인 부친의 혜안을 물려받은 것인가?

그래도 그녀의 의견에 완벽히 동조하기는 어려웠으나 필상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만약 한국 투어가 활성화된다면 그 몰락은 더욱 가속될 겁니다. 이미 그런 분위기는 충분히 조성된 상태고요.”

“정말 그렇게 되겠네요.”

“일본 전문가라는 작자들이 그런 시건방진 생각을 하는 것은 일본이 여전히 아시아 최고의 시장이라고 오판하기 때문이지. 물론 그랬던 것이 사실이지만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밖에 없을 거야.”

얼마 전 극렬한 혐한주의자에게 봉변을 당한 뒤, 필상은 많은 생각을 했다. 비록 일부 몰상식한 이들의 만행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애써 외면하려고 했다.

국가나 민족, 정치적인 입장은 스포츠에 개입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표현이 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일본인들의 의식구조는 지극히 편협하고 이기적이다. 한국을 만만히 보는 정도를 넘어 혐오하기에 불매운동을 벌인 한국인들을 오히려 비웃었다.

한 여론조사를 보면 무려 81%가 무역 제재에 동의했었다. 그러나 싹수가 노란 주장을 펼치다 오히려 추한 과거가 적나라하게 조명되면서 스스로 내밀었던 주장을 접고 말았다.

온 세계가 자신들의 치부를 파고들자 그제야 입장을 바꿨다. 뻔한 수작을 벌이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실로 치가 떨리는 짓을 저지르고도 사과는커녕 말까지 쉽게 뒤집었다.

“그럼 결행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뭘?”

“대회 보이콧이요.”

“하하하. 시즌 최종전이잖아. 그리고 당신은 해당 사항이 없어.”

“치! 왜 없어요. 제 인기 못 봤어요?”

“그 말이 아니고 일본인인 당신은 이 문제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좋다는 말이야.”

필상의 어조가 강경했기 때문인지, 모모코는 더 이상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화는 좀 더 길게 이어졌고 이 화두는 두고두고 생각할 여지를 남겼다.

몇몇 선수들이 결론을 내린들, 그게 일본에 진출한 한국 선수들 전체의 의견은 아니기 때문이다.

* * *

“이놈의 일기예보는 맞는 날이 없어!”

“하늘의 조화를 인간이 어찌 헤아리겠어요.”

“그걸로 밥 벌어먹는 이들이 얼마인데! 여하튼 날씨 한 번 고약하네.”

“흐흐흐. 제게는 나쁜 신호는 아니잖아요.”

아침 일찍 일어났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바람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거세게 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과연 경기를 진행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해가 뜨면 낮에는 점점 더 맑아지기 때문에 가장 늦게 출발하는 모모코로서는 나쁠 게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필상은 내내 찜찜했다.

오늘 이 바람은 쉽게 잦아들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얼른 밥 먹고 연습하러 가자.”

“느낌이 안 좋아요?”

“바람이 말썽을 부릴 것 같아.”

“그럼 빨리 가요.”

모모코도 이번 대회 우승을 간절히 바랐다.

디펜딩 챔피언이고 팬들의 열렬한 응원에 부합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간절한 것은 출산을 하고도 자신의 기량이 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 같았다.

때문에 필상은 그녀가 바람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철저하게 대비하는 훈련을 진행했다.

-드디어 시즌 최종전의 마지막 라운드가 시작되었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다들 고전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경험이 많은 선수들이 유리하겠군요?

-그렇습니다. 하필이면 우승 경쟁에 나선 우리 선수들이 대부분 젊기 때문에 변수는 적을수록 좋은데, 그 점을 유의하시면서 경기를 관전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람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선수들을 나락으로 밀어 내렸다. 특히나 바람이 거센 오전에 출발한 선수들은 두 홀 건너 한 타씩 까먹을 정도로 애를 먹었다.

“5번 우드 줘요.”

“3번도 아니고 5번?”

“네. 그게 더 정확할 것 같아요.”

‘봄이 때문이 아니고?’

그 말을 던지고 싶었으나 차마 뱉지 못했다.

드라이브를 고집하지 않고 안정된 공략을 떠올린다는 것부터가 안심이 되는 대목이고 지금은 모모코의 컨디션이 가장 중요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362야드야. 더도 말고 220야드만 보내도 돼.”

“네.”

대답은 시원하게 했지만 모모코는 우드 샷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나마 탄도가 낮은 것이 다행이었는지 러프에 기어들어 가고도 큰 걱정은 없었다.

비거리가 246야드나 찍혔기 때문이다.

필상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미안했는지 모모코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클럽을 건네줬다.

“120야드 러프에서 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페어웨이에서 145야드 샷을 하는 게 나을까?”

“전 120야드를 더 좋아해요.”

“아이고! 어련하시겠어요.”

“정말이라니까요!”

“결과로 얘기하자고. 결과!”

“흥!”

필상이 이겼다.

러프에서 최선을 다한 샷을 했지만 그린에 떨어진 타구는 그린을 훌쩍 넘겨 버렸다. 스핀을 걸려고 했으나 그놈의 스핀은 간절히 원하면 도망가는 연인과 같다.

그래도 칩샷이 좋아 타수를 잃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2번 홀에 들어선 모모코는 여전히 어깨에 힘을 빼지 않았다. 무려 582야드 파 5홀이다.

바람이 잔잔해도 2온은 무리다.

그런데 3번 우드로 바꿔 잡은 모모코가 대체 얼마나 보내고 싶었던 것인지, 이번 샷은 아까보다 더 감겨 헤비 러프에 잠기고 말았다.

“우드가 말을 안 들어요.”

“말을 듣지 않는 건 우드가 아니라 모모코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지.”

“알았어요. 힘 뺄게요.”

금방 고집을 꺾어 다행이다.

어차피 2번 홀은 3온을 할 수밖에 없는 홀이다. 다행히 모모코는 6번 아이언을 잡아 페어웨이로 무난하게 꺼냈다.

하지만 남은 거리는 168야드, 결코 쉬운 거리는 아니었다. 이번 홀에 실수가 나온다면 신 프로를 따라잡는 것은 한층 더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에 필상은 모든 감각을 동원했다.

“22도가 좋겠어.”

“유틸리티요?”

“응. 맞바람이 강해. 걱정하지 말고 185야드만 보내자.”

“아! 그렇게나 강하게 쳐야 해요? 방향은요?”

“그린 좌측 끝을 봐.”

사실 그 방향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물론 정상적인 샷이라면 신경 쓸 게 없는 위치지만 만약 그린 끝을 보다가 바람이 불지 않으면 그린을 훌쩍 넘길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모모코는 일절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샷을 준비했다. 연거푸 고집을 부린 것이 이때는 오히려 약이 된 듯.

-모모코의 컨디션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죠?

-우승에 대한 열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나쁘지 않은데, 너무 강하게 치려는 것이 오히려 문제입니다. 이럴 때는 캐디가 적절하게 나서 줘야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내용을 모른다고 쳐도 너무 편파적인 발언이다.

세계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는 필상의 캐디로서의 능력은 이미 검증된 바 있다. 또한 평범한 선수와 캐디의 관계가 아닌 부부다. 누가 봐도 깨가 쏟아지는.

그런데도 경기 초반 모모코의 샷이 좋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은 오로지 필상에게로 향했다.

까앙!

모모코의 깔끔한 스윙이 경쾌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필상이 원했고 그녀가 바라던 샷이 이뤄졌건만 그 내용을 모르는 팬들의 표정에는 놀라움이 먼저 나타났다.

-우후! 너무 강하지 않나요?

-왜 유틸리티를 잡았는지 그것부터가 의문입니다.

-그건 상의해서 결정한 것 아닐까요?

-168야드입니다. 아무리 부드럽게 쳐도 훅 넘어갈 겁니다. 게다가 저 탄도를 좀 보십시오.

너무 낮은 타구는 설사 그린에 떨어져도 확 지나갈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뱉는 순간, 타구는 이상하게 휘기 시작했다.

탄도의 최고점에 이른 바로 그 순간이었다.

“좋아!”

“으흐흐흐…….”

좋은 샷이 터질 때의 그립감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짜릿하다. 그리고 날아가는 타구가 자신이 원하는 궤적으로 움직일 때는 소름이 돋는다.

바로 이 맛에 골프를 친다.

지금이 바로 그러했다.

다들 미스 샷이 나왔다고 생각할 시점부터 슬라이스 맞바람을 타기 시작한 타구는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그린 중앙을 향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린에 못 미친 러프에 떨어졌고 크게 바운드가 된 공은 홀컵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8야드 퍼팅을 남겼다.

-으음……. 정확한 샷이었네요. 아니, 짧았습니다.

-허허허! 바람 때문입니다. 중계석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거든요.

핑계가 너무 허접했는지 실시간 댓글이 난리가 났다.

차라리 모르면 닥치고 있으라는 직설적인 표현에 공감하는 숫자가 주르륵 올라가는 것을 보며 다나카는 등 뒤로 흐르는 진땀을 몰래 닦아야만 했다.

모모코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골수팬들은 그의 해설을 듣고 크게 상심했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탓하기도 어려웠다.

동의하지 않았던 와타나베 캐스터도 잠시 할 말을 잃었는지 대화가 잠시 뚝 끊겼다. 방송 사고가 난 것처럼.

-역시 미스터 퍼펙트의 감각은 특별한 것 같습니다. 방향도 방향이지만 저 거리에서 유틸리티 우드를 권한 것은 신의 한 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모코의 샷이 좋았던 거죠. 허허허.

-다나카. 잘한 것은 선수 몫이고 못한 것은 전부 캐디의 탓인가요? 모든 영광은 선수가 독차지하는 게 보통이지만 이번 경우는 그렇게 말하면 곤란할 것 같아요.

-허허허. 그런가요?

웃음으로 대충 때우는 그의 변명은 치졸했다.

아무리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보수적인 팬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상황이다. 자신의 실수는 돌아보지 않고 애꿎은 와타나베를 은근슬쩍 째려보는 모습은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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