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때아닌 사랑 고백
“멋진 샷이었어!”
“흐흐흐……. 제가 이 정도는 얼마든지 칠 수 있죠.”
“어이구! 어련하시려고요.”
“어? 정말 이러기에요?”
두 손을 허리에 떡하니 올린 모모코가 제법 화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팬들은 그마저도 너무나 깜짝하게 보였는지 박수가 쏟아졌다.
하지만 모모코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필상에게 꽤나 서운한 감정을 느낀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발 물러섰다.
“다 좋은데……. 너무 흥분한 것 같아서.”
“치! 어디 두고 봐요.”
삐친 게 아니다.
강한 승부욕을 드러낸 것이다.
어차피 같은 코스에서 3번째 실전을 치르기 때문에 따로 조언할 것도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집중하느냐가 남았을 뿐.
66야드 남은 세컨샷은 버디로 연결하기에 충분한 거리에 붙였고 정확하게 구겨 넣으며 깔끔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이어진 580야드 파 5홀에서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티샷이 좋았으나 2온이 불가한 상황에서 너무 멀리 보내려다 페어웨이를 놓쳤기 때문이다.
“공이 너무 깊이 잠겼어.”
“그냥 그린에 올린다는 느낌으로 칠게요.”
남은 거리는 52야드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확한 타격이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본인도 무리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나 실제 스윙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냥 시원하게 퍼 올리는 것이 좋았으나 욕심이 생겼는지 거리를 재게 되었고, 헤드가 너무 깊이 들어간 나머지 타구는 그린에 미치지 못한 채 퍼스트 컷까지 다시 굴러 내려왔다.
짧았을 뿐더러 스핀까지 먹은, 결과적으로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형편없는 샷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도 꾹 참고 칩샷을 핀에 붙여 파를 기록한 것은 다행이었다.
[3번 홀. 412야드 파 4-2온 1퍼팅 버디]
비교적 페어웨이가 넓어 힘차게 휘두른 티샷이 무려 302야드를 찍으며 꺾였던 기세를 다시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갭 웨지로 가볍게 핀에 붙여 버디.
[4번 홀. 358야드 파4-2온 1퍼팅 버디]
이 홀의 난점은 티샷 통상적인 랜딩 지점인 260야드 우측에 꽤나 큰 벙커가 있고 그 옆의 페어웨이 한가운데에 작은 나무가 심어져 있다는 것이다.
마치 버디를 막기 위한 장난질처럼 보일 만큼 부담스러운데, 모모코는 아예 그 나무를 넘겨 버렸다.
그러니 남은 거리는 60야드에도 미치지 못했고 가볍게 핀에 붙여 버디를 완성했다.
-드디어 반격이 시작되나요?
-흠 잡을 데가 없는 완벽한 공략입니다. 그 근간에는 역시 남다른 장타가 깔린 것인데, 방향성마저 좋아서 버디를 잡을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하하하! 장타에 정확성까지. 그럼 추격은 시간문제일 뿐이군요.
-그렇습니다. 미스터 퍼펙트처럼 모모코도 한 번 불이 붙으면 좀처럼 끌 수가 없습니다. 한 번 지켜보시죠.
5번 홀이 165야드의 파 3홀이라서 중계진은 물론 팬들도 잔뜩 기대했다. 기세가 너무 뜨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립에 힘이 너무 들어갔는지 임팩트를 하는 순간, 샷이 확 감기고 말았다.
“으흐!”
“설마 나무에 가리지는 않겠죠?”
“가릴 것 같아.”
차마 그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 필상은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고심했다.
이 홀은 방향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린 주변에 3개의 커다란 벙커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데, 더 환장할 것은 그중에 2개는 벙커와 그린 사이에 나무가 식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같은 벙커라도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벙커샷의 난이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퍼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탄도까지 조절해야 한다면 부담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52도로 칩샷을 하자.”
“벙커 턱에 걸리지 않을까요?”
“모래가 아니라 그냥 에이프런에 떨어뜨리는 칩샷이라고 생각해 봐. 그러면 나뭇가지는 물론 턱도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으음…….”
잠시 샷 이미지를 연상한 모모코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공이 벙커에 빠지면 다들 벙커샷을 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모래에 대한 부담만 없다면 칩샷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잔디 위처럼 공이 떠 있지 않은 것이 문제지만 모래는 얼마든지 파고들 수가 있다.
부담만 버리면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파아악!
멋진 벙커샷을 기대했던 팬들은 일단 모래가 사방으로 비산하지 않는 기이한 상황에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벙커 턱을 넘은 공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린에 떨어진 타구는 주르르 굴러 홀컵을 그냥 지나쳤다.
에이프런에 떨어뜨리려 했지만 예상보다 낮은 탄도 때문에 그린을 직격한 타구는 거리가 좀 더 나올 수밖에 없었다.
“휴우! 깜짝 놀랐어요. 턱에 맞는 줄 알고.”
“클럽 페이스를 너무 세웠어. 그냥 있는 그대로의 각도를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는데.”
“괜찮아요. 이제라도 넣으면 되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은 좋다.
나쁜 결과에만 집착하면 점점 더 깊은 늪에 빠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편 에이프런까지 굴러간 공은 홀컵에서 7야드나 떨어진 지점에 멈췄다.
라이도 쉽지 않은 더블 브레이크였고 오르막 뒤에 살짝 내리막을 타는 경사라서 힘 조절도 어려운 퍼팅이었다.
하지만 크게 한 바퀴 돌며 경사를 꼼꼼하게 확인한 모모코는 마지막 루틴으로 상체를 푹 숙여 라이를 살폈다.
그리고는 회심의 퍼팅을 감행했다.
-어허!
-괜찮습니다!
너무 세다고 생각한 와타나베의 입에서 걱정 어린 탄식이 터졌지만 다나카 해설은 곧바로 괜찮다며 힘주어 말했다.
오르막 경사가 생각보다 가파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 오버할 것 같았던 공은 겨우 오르막 정상까지 올랐고 슬금슬금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길기는커녕 짧을 것 같았기에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는 팬도 보였다.
하지만 꾸역꾸역 경사를 탄 타구가 설 듯 말 듯 느리게 기어가다가 홀컵 안으로 쏙 빨려 드는 순간, 필상도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야 말았다.
-아! 정말 대단하세요! 정확한 스트로크라는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역시 전문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허허. 칭찬을 받을 사람은 제가 아니고 모모코입니다. 라이를 너무 오래 살피면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진다고들 하는데, 그녀는 끝까지 집중력을 놓지 않았던 겁니다.
-어릴 적부터 골프 천재라는 말을 많이 들었던 그녀지만 사실 퍼팅, 어프로치 같은 세심한 집중력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죠. 그런데 지금의 코치를 잘 만난 뒤에는 확실히 달라진 것 같습니다.
-음……. 그건 인정합니다. 장타 능력과 과감한 코스 공략은 탁월했지만 잘나가다가도 한 방에 무너진 적이 많은데, 그걸 미스터 퍼펙트가 잡아 줬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파를 기록한 모모코는 어느새 -11까지 올라섰다. 아직 선두와는 격차가 있지만 필상은 느긋했다.
아무리 프로 골퍼라도 실수가 없을 수는 없다.
다만 그런 암울한 상황을 얼마나 잘 극복하는지가 관건인데,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훌륭하게 이겨 냈다.
그래서인지 전반에 버디 2개를 더 추가한 모모코는 결국 리더 보드에서 자신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선두권도 무난하게 타수를 줄여 신지애 프로가 -16. 안선주와 김하늘 프로가 -14로 공동 2위를 형성했다.
-전반처럼만 친다면 우승 가능성은 훨씬 높아지겠지요?
-오늘 이미 5타를 줄였습니다. 내일도 남았기 때문에 후반에는 모험보다는 안전한 공략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허! 제가 볼 때는 지킬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요? 경쟁자들의 성적이 더 내려가면 내려갔지, 실수를 해서 스스로 무너질 것 같지는 않거든요.
-크흠! 그건 그렇습니다. 절대 만만한 선수들이 아니죠. 마미코와 더불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죠. 전 우리 선수들이 절대 그냥 물러설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든든한 퍼펙트가 뒤를 받치고 있는 모모코는 오늘 코스 레코드를 갱신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다나카 해설의 입에서 안전한 공략을 권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젊은 두 선수가 선전하고 있지만 그만큼 한국 선수들의 기세가 드높았기 때문이다.
그도 누구보다 자국 선수의 우승을 바라지만 와타나베처럼 코스 레코드 갱신을 운운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 덕에 실시간 댓글에서는 팬들의 질타를 받았다. 전문가가 왜 그러냐는 의견이 주류를 이뤘고 차분하게 풀어 나가다 보면 기회는 올 것이라는 자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후반에 접어든 모모코는 무서운 속도로 타수를 줄여 나가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불꽃 쇼였다.
“나이스 샷!”
“얼마나 날아갔죠?”
“300야드를 조금 넘은 것 같아.”
10번 홀에서 잠시 숨을 고른 모모코는 이어진 501야드 파 5홀에서 드라이브 비거리, 306야드를 기록하며 경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선포했다.
196야드 남은 세컨샷을 22도 유틸리티로 가볍게 그린에 올렸지만 아쉽게 이글은 실패했고 탭인 버디로 -14로 올라섰다.
이런 기세라면 와타나베가 말했던 코스 레코드 62타를 넘어설 것 같기도 했다.
[12번 홀 140야드 파 3-1온 1퍼팅 버디]
비교적 짧은 파 3홀이었으나 생각만큼 잘 붙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8야드 롱 퍼팅을 구겨 넣으며 팬들의 흥분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중요한 순간에 더 침착하고 결단력을 보이는 스타 기질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 롱 퍼팅이 박히는 순간, 필상도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워 애써 이를 악물어야 했다. 본인마저도 분위기에 휩쓸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두권도 무빙데이를 맞이해 방어에만 전념하지 않았다. 아직은 서로가 피 터지는 경쟁 중임을 잊지 않았는지, 차곡차곡 타수를 줄여 모모코의 추격에 불씨를 남겼다.
[13홀 496야드 파 5-3온 1퍼팅 버디]
어제 멋진 이글을 기록한 홀이라서 기분 좋게 들어섰으나 드라이버 티샷이 밀리고 말았다. 본인도 차분하려고 노력했으나 이미 뜨거워진 가슴을 진정시키기는 어려웠던 듯.
“으흐! 밀렸어요.”
“괜찮아. 끊어 가면 되니까 일단 차분하게 페어웨이를 공략하자고.”
“네. 오빠. 제 손 좀 잡아 줘요.”
필상은 얼른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던 그녀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녀가 짊어진 경쟁의 압박감이 생각보다 무거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세컨샷 지점을 향해 걷는 내내 필상은 자신의 순수한 기운을 모모코에게 불어넣으려 노력했다.
“오빠. 고마워요.”
“무슨 소리야. 내가 더 고맙지.”
“왜요?”
“나를 사랑해 주고 예쁜 아이도 낳아 주고 또 이렇게 힘들어도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흐으……. 저야말로 고맙죠. 너무 행복해요.”
우측 러프에 떨어진 공은 생각보다 깊이 잠겼다.
하지만 모모코는 안전하게 8번 아이언으로 150야드만 공략했고 이어진 서드 샷을 핀에 바짝 붙이며 버디를 완성했다.
서로가 때아닌 사랑 고백을 한 뒤로 모모코는 한층 더 안정된 기량을 선보였다.
세팅이 어려웠던 14, 15번 홀에서 잠시 주춤하는 것 같더니 16, 17번 홀에서 다시 연속 버디에 성공하며 코스 레코드 타이를 이뤘다.
-우후! 저게 왜 안 들어가죠?
-생각보다 경사가 심합니다. 그래도 예상보다 훨씬 많이 먹네요.
-들어갔으면 -11 아닙니까! 코스 레코드를 갱신할 수 있었는데 정말 아쉽습니다.
18번 홀에서 5야드 퍼팅이 홀컵 가장자리를 스치며 그냥 지나치자 땅이 무너질 것 같은 탄식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모모코는 얼른 탭인 파로 마무리하고 갤러리들 사이로 달려갔다. 성적이 좋았기에 캐디이자 남편인 필상과 뜨겁게 포옹하리라 생각했던 팬들도 깜짝 놀라 그 방향으로 시선이 몰렸다.
-아! 아기군요. 모모코의 아기.
-엄마를 알아봤는지 방긋 웃는 모습이 너무 귀엽습니다.
-엄마 아빠가 모두 선남선녀인데, 그럴 수밖에 없겠죠. 하하하!
굿 샷이 나올 때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팬들의 함성이 너무 뜨거워 수미를 데리고 대회에 참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미사키가 수미를 데리고 가와사키 집에 머물렀는데, 일주일 가까이 아이를 보지 못한 모모코가 보고 싶다고 강력히 원해 오늘 저녁에 아이를 데리고 오기로 했었다.
그런데 18번 홀 그린에 들어서던 모모코는 이 대표와 봄의 곁에 수미를 안고 나타난 미사키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 순간 아이를 향해 달려가려던 그녀를 막아선 사람은 필상이었다. 일단 경기를 마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차분하려고 해도 쉽지는 않았을 듯.
“이 녀석 좀 봐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웃고 있어요.”
“그러게. 엄마 닮았나 보지. 하하하.”
오늘의 주인공은 -10를 기록한 모모코가 아니었다.
너무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모코의 품에 안긴 수미가 주인공이었다. 그 장면을 찍으려는 기자들과 팬들의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돌도 지나지 않은 수미는 놀라기는커녕 방긋방긋 웃으며 멋진 장면을 연출했다.
스코어 카드를 제출하는 동안 필상이 잠시 안고 있었는데, 아빠를 알아본 녀석이 두 팔을 벌리고 발버둥 쳤다.
아빠에게 볼을 비벼 달라는 칭얼거림이었다. 한 달여 동안 골프를 멀리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