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쌩으로 먹었잖아요
12월이 성큼 다가온 미야자키는 아직 본격적인 추위가 닥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법 쌀쌀한 날씨 때문에 라운드를 하려면 바람막이를 입어야 한다.
특히나 해안가에 가면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때문에 모자를 꾹 눌러쓰지 않으면 휙 날아가 버린다.
그래도 미야자키 골프클럽은 해안에서 10km 이상 떨어진 내륙에 위치해 바람의 영향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 1라운드는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는데, 어젯밤부터 때아닌 비가 퍼붓더니 아침에는 다행히 잦아들었다. 그러나 잔뜩 흐린 하늘 아래 바람은 아주 강하게 휘몰아쳤다.
사전에 확인했던 일기예보와는 너무 달랐다.
“흐리거나 때때로 비가 온다네?”
“이 동네는 날씨의 변덕이 아주 심해요.”
“그럼 오늘은 바람이 관건이겠네!”
“그러니까 전 유리한 거죠?”
모모코는 필상을 철석같이 믿었다.
물론 남다른 감각을 지녔으니 상대적으로 유리한 것은 분명하지만 아침 일찍 티오프가 잡힌 날이어서 염려스러웠다.
대체로 기온이 오르는 대낮이 되면 하늘이 맑아지고 바람도 덩달아 약해지기 때문이다.
“탄도가 낮은 샷을 연습해야겠어.”
“그거 우리 전문이잖아요. 흐흐흐…….”
“자만은 금물이야.”
필상이 누차 강조했지만 모모코는 시큰둥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연습은 소홀히 하지 않았건만 실전에 접어든 상황은 썩 좋지 못했다.
대부분의 홀이 높은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서 지상에서 느끼는 바람과 높이 치솟은 타구가 날리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그저 동반자들과의 상대적인 우위에 만족하기에는 괜히 찜찜했다. 전반에는 보기와 버디를 하나씩 맞바꿨고 바람이 잦아든 후반에 2타를 줄인 것이 고작이었다.
“수고했어.”
“오빠도요. 확실히 후반이 더 쉽네요.”
“쉬운 게 아니라 바람이 잦아들어서 편했던 거지.”
“아! 그럼 지금 출발하는 선수들은 유리하겠네요.”
말이 필요 없는 사실이다.
그나마 2타를 줄여 -8로 올라선 것은 다행이지만, 오후가 되자 속이 거북한 소식들이 연이어 들려왔다.
선두권은 -12, -13까지 치솟으며 상대적 박탈감에 젖게 만들었다. 그게 그냥 타수 차가 벌어진 것이라면 남은 라운드에서 분발하면 되지만 이중 부담도 가중시킬 가능성이 높다.
오늘처럼 오전에는 바람이 강하고 오후에 날씨가 좋아진다면 늦게 출발하는 선두권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오늘 경기의 총평을 부탁드립니다.
-날씨가 좌우한 라운드였죠! 티오프 시간에 따라 성적의 차이가 너무 명확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공평하지 못했다는 진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자연적인 조건은 주최 측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요?
-물론 그렇습니다. 억울한 선수가 있을 수 있으나 그 또한 경기의 일부분이라고 인정하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기대했던 모모코가 선두와 6타까지 벌어진 것도 솔직히 바람 때문이죠? 그래도 많은 팬들이 내일 또 찾아와 그녀의 역전 드라마를 열렬히 응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대놓고 모모코를 언급하는 것은 그녀의 확고부동한 지명도도 한몫을 했지만 선두권을 모두 한국 선수들이 휩쓸고 있었기 때문이다.
-14 신지애
-13 안선주
-12 김하늘, 배희경, 윤채연
-11 테레사 루, 황아름, 히가 마미코
그 밑으로도 모모코보다 성적이 좋은 한국 선수가 3명이나 더 있었다. 이보미, 전미정, 이지희 프로까지.
리더 보드를 온통 한국 선수들이 메우고 있어서 마치 KLPGA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타도 한국!’을 외쳐도 뭐라고 따질 팬이 없는 아주 씁쓸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모모코가 공동 16위까지 주르르 밀린 것이 날씨 탓이라는 해설에 공감이 가기에 더 억울한 측면이 부각되었다.
“한국 선수들 정말 대단해요!”
“그러니 당신이라도 좀 분발해 봐.”
“저도 한국에 사니까 절반은 한국인인데요?”
“팬들이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지. 문제는 일본 선수들이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게 왜 안 되는 걸까?”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시즌 최종전에 너무 일방적으로 한 나라의 선수들이 상위권을 휩쓸어 버리면 팬들의 외면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실망이 커져 외면하는 사태는 투어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한국 선수들의 졸전을 종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할 뿐.
“콩!”
“아니.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도쿄에서 일처리부터 하시는 것 아니었나요?”
“하하하. 당신들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일은 이미 라일리가 다 꼼꼼하게 처리해 놨더구먼!”
필 미켈슨이 미야자키에 나타났다.
도쿄에 도착해 TPK 이벤트 대회를 챙기겠다더니 일보다 사람이 더 그리웠는지 곧바로 비행기를 갈아탄 것이다.
필상과 모모코, 이 대표까지 반갑게 인사를 나눴는데, 어제와 같은 일이 또 발생했다.
필 미켈슨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연습장에 있던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도 자신의 인기가 실감나지 않는지 연신 싱글벙글하며 한동안 떠들썩했다.
“공동 16위?”
“네. 바람이 말썽을 부려서요.”
“우후! 그래도 좀 심한데?”
미켈슨은 모모코의 우승을 기정사실처럼 알고 있었던 듯, 예선 성적을 듣고 난 뒤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선두권을 차지한 선수들이 한국 여자 프로들이라는 말에 입을 닫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여자 골프의 탁월함은 이미 전 세계가 인정하는 바였던 것이다. 그래도 지난 시즌 워낙 파격적인 성적을 거뒀던 모모코였기 때문에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르다는 말로 위로코자 했다.
만약 모모코의 성적이 좋았다면 본인이 직접 모모코의 캐디를 해 보고 싶었다는데, 지금 같은 성적이라면 감히 나설 수 없다는 것도 인정했고 아쉬워했다.
[투어 챔피언십 리코 컵, 별들의 전쟁!]
수많은 스타 중에 유독 한국의 별들만이 빛나는 이유에 대해 각 언론은 다양한 분석을 내놨다.
JLPGA의 네 번째 메이저 대회이자 시즌 최종전인 리코 컵은 올 시즌 우승자와 상금 순위 25위에 든 선수들만 출전하는 왕중왕 대회의 성격이 강하다.
모모코는 디펜딩 챔피언의 자격으로 출전한 것이고, 올해는 총 32명이 출전 기회를 얻었는데 그중에 한국 선수가 무려 10명으로 일본 다음으로 많다.
3분의 1에 가까운 수치인 것도 놀라운데, 2라운드를 마친 상황에서 10명 중에 7명이 탑 10에 들었다는 건 충격이었다.
마지막을 축제로 마쳐야 하는데 너무 편중된 성적 때문에 우려를 나타내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언론도 떠들썩했다.
“저도 토납을 하고 싶어요.”
“난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을 쓰고 싶은데?”
“농담 아니에요. 오빠.”
“좋아. 그럼 오늘은 조금 더 일찍 철수하자.”
필상은 토납만 한 것이 없다.
봄도 그건 마찬가지지만 모모코는 아쉽게도 그렇지가 않다. 토납보다는 필상의 사랑을 받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걸 잘 알면서도 모모코는 고집을 피웠다. 본인도 일정 경지에 이르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것 같고 필상도 일정 부분 공감했다.
그래서 연습을 평소보다 일찍 마무리한 부부는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는 서로 마주보고 앉아 토납을 시작했다.
“꼭 이래야만 해?”
“네. 서로의 기운을 느끼기 가장 좋은 자세잖아요.”
“으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가부좌를 틀고 마주 앉았다. 어찌 심란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욕망을 억누르고 각자 기운을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때때로 서로 음양의 기운을 나누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차츰 평정심을 되찾게 되었고 어느 한 순간, 신기한 현상을 경험했다.
‘오빠. 너무 행복해요.’
입을 열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외침이 들렸고 혼자 운공을 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생생한 기운이 샘솟았다.
하지만 그건 모모코가 느끼는 환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전에는 자신의 몸에 내재된 순수한 기운을 감지하면서도 그걸 운용할 여력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살아 움직이는 내공의 존재를 명확히 인지하게 되었고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도 가능했다.
아직은 좁쌀만 한 크기의 기운에 불과하지만 전신의 혈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강한 전율과 함께 자신감이 넘쳤다.
무아지경에 빠져 얼마나 시간이 빠르게 흘렀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어느새 동녘이 뿌옇게 밝아 오고 있었고 더 중요한 것은 모모코가 새로운 실마리를 찾았다는 점이다.
“오빠! 아주 좋은 경험이었어요.”
“이미 날이 샌 것 같은데 잠을 자지 않아도 될까?”
“네. 전혀 피곤하지도 않고 전신에 힘이 넘쳐요.”
“그럼 토납은 성공인 건가?”
“아마도요. 흐흐흐…….”
이미 필상도 오래 전에 경험한 것이다. 무아지경에 이른 토납은 숙면보다 훨씬 효과가 높고 모든 감각을 배가시키는 효능을 보인다.
골프는 자신의 몸을 컨트롤하는 것이 가장 근간인 운동이기에 모모코가 토납에 눈을 뜨면 한 단계 더 높이 비상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 섞인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다행입니다. 주최 측이 바람이 강한 오전에 플레이하는 선수들을 배려해 전체 티오프 시간을 미뤘다고 합니다.
-날씨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어제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은 누가 봐도 바람직하지 않으니까요.
-하기야 16개 조에 불과해서 10시부터 티오프를 해도 5시면 모든 경기가 끝나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 같긴 하네요.
만약 일본 선수들이 선두권을 독차지하고 있었다면 과연 이 같은 결정을 내렸을까?
그건 부정도, 장담도 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조치로 인해 모든 선수들이 보다 공평한 경기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10:56분으로 미뤄졌다더군.”
“잘됐네요. 뭔가 냄새가 좀 나기는 하지만. 크크크.”
“모모코. 이제 수미도 곧 말문이 트일 텐데 그 웃음소리는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
“네? 언제는 너무 귀엽다면서요?”
“물론 나한테는 그렇지. 하지만 수미가 크크크, 흐흐흐 이렇게 웃으면 어떨까?”
“무지 귀여워 뽀뽀해 주고 싶겠지요. 흐흐흐.”
“허! 그래. 그러자고.”
어이가 없었으나 그녀의 말처럼 꼭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다. 아이가 부모를 닮은 것은 당연한 것이며 부끄러워 할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앙증맞은 아기가 ‘까르르’ 웃지 않고 엄마처럼 허파에 바람 빠지는 이상한 웃음을 흘린다면 아주 이상할 것 같기는 했다.
그런 소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필상과 모모코는 1번 홀에 도착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하지만 하늘색 티셔츠에 블랙 앤 화이트 체크무늬 반바지를 입었고 롱 스타킹으로 무장한 그녀의 깜찍한 패션은 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모았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그녀가 입은 복장은 바로 패션 잡지나 골프 전문 채널에 소개되면서 의류 후원사는 행복한 비명을 지를 것이다. 왜냐면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물량이 부족해 난리가 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바람막이 입어.”
“아직 괜찮아요. 스윙 장면을 몇 번 찍히고 나서 입을게요.”
“하하하. 그런 것까지 배려할 필요는 없는데…….”
그 와중에도 모모코는 후원사에 대한 도리를 다했다. 상금보다 더 큰 거금을 매달 쏘아 주기 때문이다.
대형 스폰서는 남자 선수들과는 달리 여자 프로들을 후원할 때, 골프 실력과 비등한 조건으로 미모와 패션 감각, 그리고 팬들을 대하는 태도를 확인한다.
프로는 그야말로 움직이는 광고판이기 때문이다.
모자는 물론 티셔츠의 가슴 부근과 양 팔에 새긴 상징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돈이다. 때문에 화면에 얼마나 자주 비치는지가 굉장히 중요한 체크포인트가 될 수밖에 없다.
“제가 올 한 해는 너무 쌩으로 먹었잖아요.”
“투어에 나가지도 않고 후원을 받았다고?”
보통 선수가 경기에 나서지 않으면 후원사는 해당 기간 동안 지원을 끊는다. 너무도 당연한 시장 원리인데, 후원을 받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궤를 벗어난 행태였다.
후원사는 자신의 선수가 얼마나 광고 효과를 내는지 일일이 체크하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거금을 안겨 주는 것이다.
특히나 모모코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초특급 대우를 받기에 ‘쌩으로 먹는다’는 표현 말고는 대체할 게 없었다.
“올해 계약이 끝나거든요. 재계약을 맺지 못할까 봐 걱정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좀 심했다. 재계약은 반드시 해 줘야겠네.”
“그러려고요. 흐흐흐.”
그 대화를 끝으로 모모코는 티잉 그라운드로 올라갔다.
경기를 앞둔 선수와 캐디가 코스 공략에 대해 의논하지 않고 엄한 이야기만 한 셈인데, 일단 티 박스에 올라가자 모모코의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쉬익!
바람을 가르는 빈 스윙의 소리가 유난히 강렬했다.
1번 홀은 사실 부담스러운 홀이다. 첫날 더블 보기를 안겨 줬던 씁쓸한 홀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모코의 드라이브 티샷은 과감했다.
평소보다 더 강하게 휘두른 타구는 무서운 속도로 하늘로 치솟았고 지켜보는 이들의 입에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우우우! 정말 강력하군요!
-아주 작정하고 휘두른 것 같은데, 당연한 선택입니다. 오늘 선두와의 격차를 줄이지 못하면 우승은 물 건너가죠.
-한 홀도 쉬어 갈 수 없다는 거군요. 그래도 어차피 1온도 되지 않는 홀인데, 아이언으로 승부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하하하! 결과를 좀 보십시오!
우려했던 와타나베 캐스터는 얼른 제 입을 가렸다.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한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총알처럼 튀어 나간 타구는 무려 297야드를 찍었다. 게다가 살짝 페이드가 걸리면서 우측으로 휘어진 페어웨이의 모양을 정확히 따랐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