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팔불출
“이거 넣으면 싸이클링 버디야.”
“아! 그래요?”
10, 11번 홀에서 잠시 숨을 고른 모모코는 12번 140야드 파 3홀과 13번 495야드 파 5홀에서 연이어 버디를 낚았다.
그리고 맞이한 핸디캡 2번, 14번 홀에서도 2야드에 붙이는 신들린 아이언 샷을 터트렸다.
선수들을 혼란케 하는 장애물이 도처에 자리 잡았지만 그녀의 물오른 시야에는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뜻밖에도 아주 신중한 태도로 퍼팅을 했다.
‘으이 씨!’
괜히 싸이클링 버디를 언급했다고 후회했다.
모모코가 평소와 달리 너무 부드러운 스트로크를 보였는데, 공이 홀컵 바로 앞에서 멈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까딱까딱 거리던 공이 뚝 떨어지는 순간, 필상은 물론 모모코도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만세를 불렀다.
본인도 너무 소심했던 스트로크에 당황했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떨어지는 순간, 서로를 마주 본 부부는 차오르는 감동을 이길 수 없었던 것 같다.
“아! 서 버리는 줄 알았어요.”
“나도. 하하하.”
이번에도 두 부부는 서로를 꼭 안아 줬다.
같은 마음으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 지금의 관계를 만들어 준 원동력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이런 소중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가끔 시간을 내 모모코의 경기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참 보기 좋은 모습이죠?
-크음! 부부지만 보기가 좀 민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공식 경기에서는 자제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건 아니죠. 불륜도 아니고,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일본도 이젠 저런 모습을 받아들일 때가 된 것 같아요.
혹자는 말하기를 일본 사람들이야말로 겉과 속이 다르다고들 한다. 공개석상에서는 얌전을 떨지만 야한 동영상을 가장 많이 제작하고 유통하는 곳이 일본 아니던가 말이다.
음습한 그늘에서는 온갖 추악한 것을 탐하고 변태적인 성향을 인정하면서 밝은 대낮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 듯 예의를 차리는 모습은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여하튼 부부 사이의 애정을 마음껏 자랑하는 모습을 아니꼬워하는 이들도 적지는 않았다. 그 배경에는 둘이 부부라는 것을 아직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작용한 것이리라.
감히 한국 남자가 일본 남자들의 우상을 데려갔으니, 시기 어린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이젠 아이까지 낳은 유부녀다.
그녀 스스로가 선택한 결혼, 이제는 인정하고 순수한 팬으로 돌아서야 하지만 아직도 깜찍한 외모가 걸림돌인 듯.
“다시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아.”
“네. 어깨가 너무 일찍 열렸어요.”
15번 홀의 티샷도 완벽했다.
413야드의 긴 파 4홀이라서 힘찬 스윙을 했고 비거리가 296야드나 나오면서 또다시 119야드의 세컨샷을 남겼다.
하지만 피칭웨지로 가볍게 컨트롤 샷을 했는데도 휙 말려 버려 버디는 이어 갈 수 없었다. 하지만 파로 잠시 숨을 고른 모모코는 16, 17번 홀에서 다시 연속 버디를 기록하며 1라운드를 최종 -6로 끝마쳤다.
공동 3위. 선두와 2타 차였고 선두는 지난 대회 준우승자 신지애 프로, 그리고 2위는 -7을 친 안선주 프로였다.
“선두권이 만만치가 않아.”
“그러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요. 오빠가 있어서.”
“그래. 나도 당신을 믿어.”
첫 홀의 더블 보기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처 의식하지 못했으나 오랜만에 찾은 고국 무대는 모모코에게는 적잖은 부담이 되었던 듯, 그러나 한 번 홍역을 앓았기에 더욱 강하게 무장이 되었다.
경기 중에 흘린 땀을 씻어 낸 필상과 모모코는 언제나처럼 연습장으로 향했다. 모모코는 미리 대기하던 봄과 함께 연습을 시작했는데, 느긋하게 이 대표와 상의할 것이 있던 필상에게 뜻하지 않은 상황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공 프로님.”
“아! 반갑습니다. 하타오카.”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앉아도 될까요?”
“그러시죠.”
하타오카 나사는 모모코와 동갑으로 같은 또래 중에 가장 주목을 받던 선수다. 모모코가 치고 나오기 전까지 제일 성적이 좋았고 지금도 하라 에리카, 가쓰 미나미와 더불어 일본 여자 골프의 미래를 짊어질 신예 강자로 인정받는 선수다.
평소 같으면 신경을 바짝 쓸 모모코가 웬일인지 그냥 씩 웃으며 연습에 매진했다. 마치 무슨 내용인지 알고 있다는 듯.
오히려 봄이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귀를 쫑긋 세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다음 주에 열리는 이벤트 대회 있잖아요.”
“아! 네.”
“모모코가 얘기를 해 줬어요. 저도 참가하고 싶은데, 가능한지 직접 여쭤 보라고 해서요.”
“저야 감사하죠.”
“정말이시죠? 호호호.”
하타오카라면 흥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기꺼이 허락했는데, 그건 결코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로 눈에 익은 경쟁자들이 줄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녀와 더불어 일본 여자 골프의 황금 세대를 이끌고 있는 에리카와 미나미,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래도 꽤나 알려진 선수들이 이때다 싶었는지 우르르 몰려들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뵈어요. 저 아시죠?”
“공 프로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와 인사하는데, 맞아 주는 것도 정신이 없었다. 문제는 그녀들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연습장에 있던 상당수의 선수들이 모두 이곳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모모코는 몇몇 선수들에게만 알려 줬지만 그새 소문이 쫙 퍼진 듯, 갑자기 여자 선수들에게 둘러싸이자 필상은 이게 함부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하타오카에게는 허락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미 모모코와 봄, 하타오카는 확정된 상태였기에 누군 되고 안 되고를 통지할 상황이 아니었다.
“자. 이제 그만 인사를 나눴으면 연습들 하러 가시죠?”
급기야 보다 못한 모모코가 나타났다.
이런 상황을 미리 예측이라도 한 듯이 오만한 표정, 마치 자신의 남편인 필상을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그녀와 친한 한 선수가 부탁의 말을 얹었다.
“모모코. 프로님께 말씀 좀 잘해 줘.”
“알았어. 다들 봐서 알겠지만 아무래도 TPK 이벤트 대회는 주최 측에서 따로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아. 혹시 연락이 없어도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그 말은 이제 그만 돌아가라는 축객령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뒤로도 몇몇 선수들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마치 눈도장이라도 찍으려 듯, 적극적인 태도에 결국 필상은 이 대표와 함께 먼저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죠?”
“우리 해변으로 드라이브나 가요.”
“아! 그거 좋겠네요.”
차에 오른 필상은 서서히 주변 풍광을 즐기며 이 대표와 다음 주에 개최할 대회에 대한 의논을 시작했다.
“코스는 TPK 도쿄1 클럽으로 잡았어요.”
“거긴 지금 리노베이션 준비 중이라고 들었는데, 아직은 괜찮은가요?”
“네. 미켈슨이 내일 직접 도쿄에 들어와 코스를 점검한다고 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아! 필 형이 내일 들어온답니까?”
“기왕이면 그가 직접 주관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건 가능하죠. 어차피 그가 책임질 지역이니까.”
“그나저나 여자 선수 선택은 어떡해요?”
“하하하. 그건 일단 천천히 논의하고 먼저 일본 남자 선수는 섭외가 끝났나요?”
“네. 세계 랭킹 순서대로 마쓰야마 히데키와 이마히라 슈고를 섭외했는데, 둘 다 출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어요.”
“이마히라 슈고요?”
“히데키가 랭킹 29위이고 그 다음이 83위인 슈고더라고요.”
“아!”
이마히라 슈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2018년 JGTO 상금왕이었으나 어부지리나 다름이 없었다. 그해 유난히 다승자가 없어 우승을 1번밖에 하지 못하고도 영예로운 타이틀을 차지했다.
2위를 2번, 톱 10에 10번이나 든 것은 대단했지만 그래도 상금왕을 차지할 기량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통산 3승에 지나지 않아 강자라고 할 수 없는 선수다.
그런데 그가 히데키의 바로 다음 세계 랭커라니?
그것도 83위, 일본 남자 골프가 최근에 얼마나 위축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니 시즌 후에 상당한 거금을 쥘 수 있는 이벤트 대회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그로서는 인정받는 것 같아 오히려 신이 났을 것이다.
“히데키는 벌써 연습에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일본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각오를 다지겠군요.”
“네. 공 프로도 연습해야죠?”
“서서히 페이스를 올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자 선수였다.
일단 모모코는 진즉에 확정되었고 봄이 지난주에 우승하면서 팬들의 주목을 받은 터라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두 명은 일본 국적이고 처음에는 여자 선수의 경우, 모두 일본 선수를 섭외할 생각이었으나 일본 투어의 강자인 한국 선수들도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실제 JLPGA에서 위용을 떨치는 선수 중에 한국 선수들이 워낙 기량이 뛰어나고 인기도 높다는 것을 감안한 조치였다.
“전미정 프로는 무조건 넣어야 할 것 같아요.”
“아! 봄이 강력히 추천했다면서요?”
“네.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하하하.”
루키로 투어에 참가할 봄을 위해서라도 그 결정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한 명이 문제인데, 이 대표는 이보미 프로를 추천했다.
최근 성적이 이전에 비해 좋지 못하지만 그녀의 절대적인 인기는 일본에 진출한 한국 여자 선수 중에 최고였다.
또한 기량이 부족한 선수도 아니며 어차피 흥행을 목적으로 개최되는 일회성 대회라서 팬들의 취향을 적극 고려했다.
“제가 아무 생각 없이 덜컥 하타오카에게 허락을 하는 바람에 운신의 폭이 좁아졌네요.”
“하타오카라면 아주 훌륭하죠. 모모코와 쌍벽을 이루는 선수라서 팬들도 굉장히 흥미로워할 것 같아요.”
“그런데 나머지 한 명은 누가 좋을까요?”
“으음……. 중국 선수를 한 명 초청하는 건 어때요?”
“중국 선수요?”
참으로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얼핏 떠오른 중국 선수는 펑 샨샨과 대만 출신의 청 야니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이번 이벤트 대회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이 대표가 갑자기 중국 이야기를 꺼내자 필상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답을 기다렸다.
“스위팅이라고 중국의 모모코로 불리는 선수가 있어요.”
“하하하. 중국의 모모코요?”
“172cm의 늘씬한 키에 제법 귀여운 외모거든요.”
이 대표가 얼른 스마트폰으로 스위팅의 자료를 찾아 운전하고 있는 필상에게 사진을 보여줬다.
그런데 대충 보고도 필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왜요?”
“우리 집사람이 화내겠어요. 감히 비교할 대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머! 공 프로가 이런 팔불출일 줄은!”
“네?”
“아니에요. 화장발이 좀 심하긴 하죠. 호호호.”
미모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제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직 이렇다 할 성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희소성이 있더라도 기본적인 기량이 검증되지 않은 선수를 내세울 수는 없었다.
스위팅 외에도 한국에서 활동하는 수이샹이나 중국 투어에서 활약하는 장 웨이웨이가 거론되었지만 그녀들의 공통점은 미모에 비해 실력이 너무 처진다는 것이다.
후원사의 입장에서는 가치가 있을지 몰라도 경쟁자들이 추리고 추린 강자이기 때문에 어림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일본 선수로 정해야 할 것 같았다.
한국이나 외국 선수들이 너무 많으면 거부감이 일 것 같았고 성적도 고려해야 할 요소였기 때문이다.
“실력과 미모를 모두 고려하면 하라 에리카가 가장 나을 것 같아요.”
“하하. 나머지 선수들이 데모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 대신 경쟁력이 있는 몇몇 선수는 동계 전지훈련에 초대해야 할 것 같아요. 나중을 위해서라도.”
“네. 그렇게 하죠.”
결론이 나올 무렵, 해안가에 도착했다.
길게 늘어진 석양을 바라보노라니 정신없이 달려온 요 며칠간 쌓인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차를 세우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두 잔 뽑아 와 모처럼 느긋하게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그런데 잠시 침묵하던 이 대표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봄이랑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었어요.”
“아! 잘됐네요.”
“그런데 대안은 있어요?”
“무슨 대안이요?”
“내년에 모모코는 한국 투어에, 봄은 일본 투어에 전념하면 공 프로를 누가 보좌해 주냐고요?”
안 그래도 그게 문제였다.
한두 주라면 괜찮겠지만, 또 이번 겨울을 통해 대안을 찾으려고 노력하겠지만 그게 성공하지 못하면 누군가 곁을 지키거나 정기적으로 한국이나 일본에 와야만 한다.
PGA투어에 전념해야 할 입장이라면 그건 굉장히 성가신 과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필상의 특수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이 대표는 그걸 염려한 것이다.
“방법을 찾아야지요.”
“저도 있다는 거 잊지 말아요.”
“네. 누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이지만 진심이었다.
그녀는 친누나나 다름이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다. 이미 필상의 비밀을 소상히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으며 아픈 부분을 감당해 줄 여력도 되는 여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님’이라는 표현이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필상의 기대와는 달리 그 말을 들은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영원히 맞닿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못 박은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