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34화 (234/354)

234. 그립을 너무 꽉 쥐는 것 같아.

필상의 행동은 모범 답안이었다.

감정을 가진 사람이, 게다가 불합리한 대우를 받은 건장한 남자가 그런 상황에서 참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불상사가 발생하면 그게 모두 선수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불문율이다. 사적인 억울함은 엄연했지만 프로 골퍼, 전문 캐디로서 투철한 직업 정신을 발휘한 셈이다.

그런데도 그걸 도리어 도발의 소재로 삼는 기자야말로 스포츠 정신을 훼손하고 인내심을 발휘한 프로를 모독한 것이다.

말문이 막힌 그를 대신해 다른 기자가 나서려고 했으나 뒤에서 갑자기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수고 많았어. 오늘 내가 크게 한턱 쏠 테니 집에 갈 생각들 하지 말라고.”

“와아아아!”

사토시 회장이었다.

인터뷰가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막은 것이다. 단상에서 내려온 필상에게 사토시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앞으로 그런 추태가 없도록 내 단단히 주의시키지. 그리고 언론도 우호적으로 바뀔 수 있도록 신경 써 보겠네.”

“우호적인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공정하기만 해도 좋겠습니다.”

“허허허. 자네 말이 맞네. 여하튼 정말 수고가 많았네.”

* * *

에히메 현에서 보낸 한 주는 많은 것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 오래 전도 아니건만 도전을 위해 일본에 처음 발을 디딜 때와는 너무도 달라진 자신의 위상도 그렇거니와 초심을 잃은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다.

봄의 우승을 통해 자신이 나아갈 바를 다시금 살피고 어떤 것을 우선시해야 하는지도 재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사업도, 한국 골프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가장 본질인 프로 골퍼로서 스스로를 갈고닦는 일에 소홀하면 안 된다.

남들은 위대한 업적을 이뤘다지만 필상이 목표했던 꿈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명심하고 새로운 시즌에는 더욱 확고한 목표 아래 쟁취하는 삶을 살기로 각오를 다졌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세요?”

“한동안 너무 게으르게 퍼질러 있었던 것 같아서.”

“전 이해가 되요. 직접 시합을 뛰어 보니까 알겠어요. 골프가 얼마나 어려운지, 또 경쟁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고 피곤하게 만드는지.”

“하하하. 벌써 그걸 느꼈다니 다행이군.”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제가 골프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는 거예요. 이렇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준 오빠한테 정말 큰 고마움을 느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고맙다. 봄.”

모처럼 봄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삶에 대한 희망이나 꿈을 꿀 수 없는 시절을 보냈다. 그저 한 해 한 해 무사히 사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으나 이젠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되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 그녀에게는 전부였다는 고백을 들으며 자신도 그녀의 삶에 보탬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조언과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아낌없이 털어놨다. 프로 골퍼로서의 마음가짐과 생활양식, 그리고 어떤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언니가 내년에는 주로 KLPGA에서 뛰겠다고 했으니까 저는 일본 투어에 전념하면 좋을 것 같아요.”

“좋은 생각이네. 내년 한 해 JLPGA에서 바짝 단련하고 후년에는 미국으로 건너와야지.”

“아! 오빠는 PGA에 전념할 건가요?”

“아무래도.”

그러고 보니 셋이 다 떨어져 지내야 하는 상황이다.

모모코는 아이 때문에 원정 경기는 최대한 삼가기로 결정했고 봄은 시드를 확보한 김에 일본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적절했다.

물론 필상은 이제 본격적인 미국 정복에 나설 생각이었고.

* * *

“축하해. 봄.”

“고마워요. 언니. 이게 다 언니 덕분이죠, 뭐.”

“야! 이제 우리 경쟁자가 된 건가?”

“아뇨. 대회는 많고 투어도 여러 개잖아요. 언니가 한국에 있으면 전 일본에, 언니가 일본 대회에 참가하면 전 한국 대회에 나가면 되죠.”

“크흐흐. 그러면 되겠네.”

드디어 JLPGA 투어챔피언십 리코 컵이 열리는 미야자키에 입성했다. 오자마자 연습하고 있던 모모코를 찾은 필상은 보고 싶던 아내와 포옹부터 나누고 싶었으나 그럴 틈이 없었다.

모모코는 필상보다 우승하고 돌아온 봄을 먼저 포옹하며 뜨겁게 반겼기 때문이다. 멀뚱히 쳐다보는 남편에게는 눈만 찡긋거리는 모습이 얄밉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와 오랜만에 맞이한 밤은 뜨겁고 격렬했다.

“엄청나게 몰렸군!”

“여신이 돌아왔잖아요.”

“하하. 자기 입으로 그런 말하면 얼굴이 뜨겁지 않아?”

“전혀!”

마침내 대회가 개막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 연습에 매진한 모모코는 최고의 샷 감각을 유지한 채 첫 라운드를 향했다.

디펜딩 챔피언으로서 정확히 1년 만에 일본 여자 투어로 복귀한 모모코를 보기 위해 정말 엄청나게 많은 팬들이 몰려들어 길을 트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상을 향한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아도 필상의 아내가 되었고 아이까지 낳은 모모코를 향한 애정과 관심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우우우! 드디어 모모코가 1번 홀에 등장했습니다.

-여전히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군요. 역시 골프 여신이라 불릴 만합니다. 하하하!

-결혼과 출산을 했지만 더 예뻐진 것 같지 않나요?

-그러니까요! 아직도 귀엽고 깜찍한 외모, 그걸 고스란히 드러낸 그녀만의 품격 높은 패션은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한국 투어에서 재기 후 첫 승을 신고한 경기를 봤는데, 출중한 기량은 역시 어딜 가지 않았더군요.

-아! 그 경기, 우승은 했지만 다소 불안했습니다. 기량이 완벽하게 회복한 것은 아닌 듯 보였으나 그런데도 우승을 하더군요.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고 합니다. 거의 최고의 감각을 찾았다고 하더군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중계진은 물론 실시간 댓글 창은 지금 한창 난리가 났다.

지난 주 혜성처럼 등장한 봄에 대한 이야기로 골프계가 뜨겁게 달아올랐으나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굉장한 주목을 나 홀로 받았다.

아무래도 신인인 봄과는 구별되는 안정감과 신뢰가 이미 든든하게 쌓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부정적인 시선도 적지 않았다. 1년여의 공백을 과연 완벽하게 메울 수 있을지 의문부호를 다는 이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렬히 응원했지만.

-부군이 그녀의 골프백을 메고 든든하게 곁을 지키고 있으니 그것도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아! 미스터 퍼펙트 말씀이군요. 저도 동의하지만 그 좋은 기량을 가지고 왜 대회 출전은 하지 않고 남의 백이나 메는 것인지 그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부상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가 보여 준 기량이라면 아무리 준비가 되지 않았더라도 웬만한 성적은 거둘 수 있을 텐데요.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참가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웬만한 성적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 성적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용납되지 않는 샷을 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었다.

또한 봄이나 모모코의 캐디를 보는 것도 필상이 원하는 바다. 측근들의 안정된 데뷔와 복귀는 필상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다.

그녀들이 제 자리를 잡아야 자신도 마음 편하게 제 길을 갈 수 있지 않겠나.

[#1 362야드 파4 홀]

“핸디캡 6번 홀이라니까 장타보다는 페어웨이를 지키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네. 드로우를 걸게요.”

티 박스에서도 그린이 보인다.

하지만 페어웨이는 완만하게 좌측으로 휘어져 있고 그린은 다시 우측으로 꺾인 후면에 위치한 홀이다.

홀의 좌우에 거대한 성벽처럼 나무들이 빽빽하게 심어져 있고 특히나 페어웨이 좌측과 그린 우측 앞에 툭 튀어나와 있는 나무들은 정교한 샷을 강요한다.

까앙!

제대로 맞았다.

부드러운 스윙의 끝에 만들어진 임팩트도 흠결을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갑자기 타구가 좌측으로 확 당겨졌다.

원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드로우가 걸렸기 때문이다.

“스탑!”

필상의 입에서 그 외침이 들리자 헤드업을 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처박고 있던 모모코도 타구로 시선을 홱 돌렸다.

캐리 239야드, 거기까지는 나무랄 게 없고 역시 모모코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지만 타구의 런이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그 결과 페어웨이 좌측 중앙에 툭 튀어나온 나뭇가지 밑동까지 굴러갔다.

“나무 밑이죠?”

“응. 하지만 그린을 노릴 수 있을 거야.”

“뭐 이렇게 멀리 나가죠?”

“악성 드로우가 걸렸으니까!”

“에이! 안다고요 알아.”

굳이 그걸 끄집어 낼 필요가 있냐는 투였다.

하지만 필상은 아무리 그녀의 컨디션이 좋아도 상황은 정확히 인지시켜야만 한다. 그래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막상 세컨샷 지점에 가 보니 공이 놓인 라이가 좋지 못했다.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을 제때 치우지 않았는지 나무 아래는 잔디가 죽어 있었던 것이다.

“남은 거리는 94야드야.”

“미들 아이언으로 굴려야겠어요.”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나무 밑동은 피할 수 있지만 탄도가 뜨면 가지에 맞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는 펀치 샷을 구사하는 것이 낫다고 봤다.

다만 지금처럼 왼쪽에서는 그린을 공략하는 다른 장애물이 없이 그린이 오픈된 방향이었다.

“탄도가 낮으면 드로우가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거 알지.”

“네.”

바닥을 때리지 않고 공만 정확하게 걷어 내야 한다.

게다가 드로우가 먹지 않도록 오히려 페이드를 의식해야 할 상황이었다. 다행인 것은 모모코의 빈 스윙이 크기도 방향도 알맞았다.

하지만 실제 샷은 연습과 달랐다.

탄도는 낮게 구사되었지만 페이드가 걸리기는커녕 타구는 좌측으로 심하게 휘었다. 그냥 그 방향이라면 좌측 벙커로 기어 들어갈 것만 같았다.

-우후! 벙커인가요?

그린 좌측의 가드 벙커는 이중이었다.

타구는 첫 번째 벙커의 턱을 맞고 튀어 올라갔지만 두 번째 벙커를 피할 수는 없었다.

-아쉽습니다. 드라이브 티샷도 당겨졌기 때문에 세컨샷은 좀 더 유념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스탠스는 페이드 샷을 의도한 것 같았어요. 그렇다면 오늘 모모코의 샷 컨디션은 그다지 좋다고 볼 수는 없겠네요.

-오랜만에 고국의 무대를 밟아서 다소 흥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캐디의 적절한 조언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모모코. 그립을 너무 꽉 쥐는 거 같아.”

“아닌데…….”

“그렇다면 다음 샷을 할 때는 그걸 한 번 의식해 봐.”

그 기회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그녀에게 주어진 다음 샷은 벙커 샷이었기 때문이다.

봄의 우승을 보며 아마도 적잖은 부담을 느낀 것 같다. 언니로서, 또 화려한 경력의 선배 골퍼로서 뭔가 보여 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샷에 힘이 너무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걸 지적할 수는 없었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데 초장부터 의기소침하게 만들 수는 없어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나 한 번 흐트러진 스윙은 좀처럼 돌아오질 못했다.

퍽!

벙커였으나 그리 난해한 상태도 아니었다.

그냥 부드럽게 거리만 맞춘다는 느낌으로 퍼 올려야 하는데, 샌드웨지 헤드가 모래를 너무 깊이 파고 들어갔다.

듬뿍 떠진 모래 때문에 뻗어 나가지 못한 타구가 벙커 턱을 맞고 다시 기어 내려왔는데, 라이가 더 안 좋아졌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자신하던 모모코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엄밀히 판단하면 3번의 샷이 모두 미스 샷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당혹스러운 심정을 읽은 필상은 곧바로 진화에 나섰다.

“하하. 액땜하는 건가?”

“아뇨. 그런 거 하고 싶지 않아요.”

보통은 필상의 말에 그렇게 대꾸하지 않는다.

어차피 벌어진 사태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좋게 해석하고 다음 샷에 대한 마음가짐을 가다듬어야 한다.

늘 그래 왔던 모모코이기에 그녀가 더 흥분했음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봐야 했다. 그래서 정곡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모모코. 지금 당신 흥분하고 있어.”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어허!”

말이 통하지 않아 필상은 얼른 그녀의 샷 방향을 막아섰다. 그녀가 곧바로 샷을 감행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멋진 샷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이 희박했다.

“나왔다 다시 들어가!”

“괜찮아요.”

“…….”

필상은 모모코의 고집을 따르지 않고 버텼다.

주변 팬들의 입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캐디가 무슨 짓이냐고 타박할지 모르지만 지금 허용하면 그 상태가 더 길게 이어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끝까지 비키지 않자 하는 수 없이 벙커 밖으로 나온 그녀가 필상이 원하는 대로 연습 스윙을 수차례 휘둘렀다.

그걸 본 필상이 슬그머니 비켜났고 다소 진정한 모모코가 벙커 샷을 하러 다시 벙커로 향했다.

-흥분을 가라앉히라는 거겠죠?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좀 심하네요. 말로 해도 될 것을 굳이 저렇게 막아서야만 하는지, 그건 의문입니다.

-조언을 해도 듣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뭐라고 하던데, 그냥 버티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모모코. 그녀는 미우라 모모코입니다. 지난 시즌 홀로 11승의 대기록을 달성했던.

-하하하. 다나카. 그건 저도 알지요.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미스터 퍼펙트는 세계 랭킹 1위의 최고 선수입니다. 모모코를 누구보다 아끼는 그녀의 남편이기도 하죠.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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