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33화 (233/354)

233. 다들 널 기다리잖아

아무래도 불안해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귀화가 불러올 파장이 너무 막대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JLPGA 시드를 확보할 경우, 그녀를 응원한 팬들이 받을 충격도 대단할 것이며 프로 선수로서 치명적일 뿐만 아니라 부친과의 관계도 묘하게 꼬일 수 있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필상이 느끼는 바, 그녀는 부친이 생각하는 만큼 부친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단순히 유아기적 반항은 아니다.

부친의 품에서 벗어나 이제 한 명의 떳떳한 성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욕망의 발로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하지만 그게 반드시 귀화가 답이 될 수는 없지 않겠나.

“왜 대답을 안 해?”

“알았어요.”

봄은 상당히 꼼꼼하게 라이를 살폈다.

그린 중앙을 볼 때만 해도 안전하게 파로 끝낼 것이라고 봤는데, 퍼팅을 앞둔 그녀는 필히 넣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런데 그건 옳은 선택이었다.

16번 홀에서 공동 선두인 신 프로와 쑤카판이 나란히 버디를 잡으며 1타 차로 추격해 왔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최상의 샷을 연거푸 터트렸지만 역시 우승의 길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쑤카판은 올 시즌 최다승자이고 신 프로는 말이 필요 없는 여자 골프의 최강자 중에 한 명이다.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대이기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았다.

“우후!”

오르막 7야드에 우측으로 한 컵 정도 봐야 하는 라이였다. 절대 쉽지 않은 퍼팅이었으나 봄은 과감하게 밀었고 아슬아슬하게 홀컵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걸 넣었다면 경쟁자들의 샷을 볼 필요도 없었지만 열렬한 박수를 받으면서도 결국 챔피언 조의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에 이르고야 말았다.

“에이! 진짜!”

“정말 잘했어.”

“제가 우승할 수 있을까요?”

“90%이상이야.”

“정말이죠?”

“그럼. 이 홀의 핀이 어려운 곳에 꽂혔잖아.”

봄을 진정시킨 필상은 일단 홀을 벗어나 스코어 카드를 제출하기 위해 함께 움직였다. 아직 우승이 확정된 것도 아닌데, 축하한다는 말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그러나 봄은 담담하게 지나쳤다.

어찌 보면 너무 냉정한 반응이지만 그게 바람직했다.

팬들의 축하에 덩달아 흥분하면 행여 플레이오프에 돌입했을 때, 심적인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행히 팬들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인상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스코어 카드를 제출하고 나오자 한 팀은 빠져나왔고 챔피언 조 선수들이 세컨샷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허! 이러면 정말 90% 이상인데?”

“왜요? 왜요?”

뒤늦게 따라온 봄이 고개를 쭉 내밀고 상황을 살폈다.

쑤카판의 공은 우측, 신 프로의 공은 좌측 러프에 빠져 있었다. 아무래도 버디가 절실하기에 강력한 티샷을 날린 듯 보였는데 좁은 페어웨이를 지킬 수는 없었던 듯.

필상은 봄과 함께 18번 홀 그린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쑤카판의 타구가 날아와 우측 벙커에 빠지는 것이 확인되었다. 핀을 직접 노렸으나 러프에서 날린 샷이 그린 우측 가장자리에 떨어진 뒤, 후면의 벙커까지 굴러 들어갔다.

문제는 138야드를 남긴 신지애 프로였다.

경험이 많고 기량이 출중한 그녀는 그린에 올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래도 팽팽한 긴장감을 이기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정확한 임팩트가 가해진 타구는 그린을 향해 정확히 날아왔다.

“우와아아! 나이스 샷!”

“치! 지금 그런 말이 나오세요?”

“하하하. 잘 친 샷은 잘 쳤다고 해야지. 이런 상황에서 그럼 야유라도 보낼까?”

“흥!”

신 프로는 2017년 이 대회 우승자다.

매년 같은 코스에서 열린 이 대회의 단골 출전자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코스를 잘 알고 적응되어 있는 선수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우측 벙커에 바짝 붙은 핀 위치에도 불구하고 2야드에 바짝 붙이며 연장전을 향한 의지를 불태웠다.

“저거 넣겠죠?”

“넣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아! 저 언니 엄청 잘 치는 선수죠?”

“하하하. 4대 투어시드를 모두 Q스쿨 없이 확보한 세계 최초의 선수지. 프로 통산 59승을 거뒀고 JLPGA에서만 26승을 기록해 영구 시드 확보도 눈앞에 둔 선수야.”

“돈도 엄청 벌었겠네요?”

“닉네임이 신기록 제조기야. 17세에 첫 프로 대회 우승을 했고 일본에서만 10억 엔을 돌파했을 걸. 순수 상금만.”

“와아! 대박이다!”

현역 최다승 기록을 보유한 신 프로였지만 그녀의 짧은 퍼팅은 홀컵을 돌아 나오고 말았다. 분명 정확한 라이로 보였건만 홀컵 앞에서 갑자기 우측으로 밀린 것이다.

본인도 황당했는지 한참 공을 노려보다가 마무리를 했다.

“뭐 해?”

“네?”

“다들 널 기다리잖아.”

“왜요?”

“팬들이 우승자의 인사를 기다린다고. 어서 나가봐.”

“에이 같이 가요.”

용감무쌍 김봄이 얼굴을 붉힌 채 팬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는데도 발길을 떼지 못했다.

하는 수없이 필상이 그녀의 등을 떠밀어 함께 그린으로 나서야 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봄의 뒤에 선 필상도 모자를 벗고 팬들의 환호에 함께 머리를 숙였다.

누군가 확 달려 나와 샴페인을 봄에게 퍼부었는데 다름 아닌 전미정 프로였다. 그녀의 뒤로 일본 선수들도 여럿이 함께 축하 행렬에 동참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축하해 준 동료들에게 인사하던 봄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정장을 입은 자들이 갤러리들을 가로지르며 길을 텄고 그 뒤로 대회 관계자들의 안내를 받은 사토시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어르신!”

사토시는 딸이 아닌 필상에게로 먼저 다가왔다.

“수고가 많았네. 공 프로.”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내 인생에 오늘만큼 기뻤던 날은 없었네.”

필상을 꼭 끌어안은 그가 심하게 흥분했음이 느껴졌다.

그 당당하던 양반의 몸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봄을 향해 돌아선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딸의 손을 꼭 잡았다.

“아빠!”

“고맙다. 봄아.”

“저도 감사드려요.”

-저분은 사쿠라 재단의 사토시 회장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이즈카 사토시. 바로 하루 양의 아버지시죠.

-네? 이즈카 하루가 사토시 회장의 딸이란 말입니까? 손녀가 아니고요? 아이고!

유우키 캐스터는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얼른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들 사토시라는 인물이 어떤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놀란 사람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웬만한 골프 팬들은 거의 다 사토시 회장을 알고 있다. 그가 재계의 거물이며 일본 골프협회 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했고 지금도 다수의 골프장을 소유한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신데렐라의 탄생! 이즈카 하루!]

[아마추어 자격으로 출전한 이즈카 가문의 영애, 이즈카 하루. 첫 출전에 JLPGA 시드 확보!]

[보기 드문 장타, 정교한 아이언 샷, 자로 잰 듯 정확한 퍼팅. 모모코에 버금갈 초대형 신인 등장!]

[극적인 역전 드라마. 이즈카 하루, 미스터 퍼펙트의 전격적인 지원을 받아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서다.]

[5번 우드 소녀, 미스 퍼펙트라는 애칭을 얻은 이즈카 하루, 일본 여자 골프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가!]

[쟁쟁한 프로들을 제치고 우승한 아마추어 골퍼, 이즈카 하루. 그녀의 4라운드를 집중 분석하다.]

안 그래도 일본 선수의 우승이 절실한 때였다.

시즌 최종전 때문에 일부 고수들이 불참했지만 그래도 절대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낱 아마추어가 극적인 역전 우승을 거뒀으니 언론의 반응은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토시가 등장하면서 그 열기에 기름을 부었다. 이제 겨우 첫 승을 거둔 봄에게 지나칠 만큼 대단한 호평을 퍼부은 것은 일본인들의 독특한 사고방식이 작용한 결과다.

약자에게는 거만하지만 강자에게는 철저히 굽히는 습성,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일본 골프계가 뜨겁게 열광하는 이유가 너무도 얄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터뷰 안 할래요.”

“그건 기본이야. 넌 이제 프로잖아.”

“그럼 저랑 같이 올라가요.”

거부하고 싶었지만 그 자리가 힘들고 어색할 그녀를 홀로 기자들 앞에 세울 수는 없어 결국 함께 단상에 올라갔다.

함께 따라오려던 부친, 천하의 사토시를 눈짓 한 번으로 막은 봄이 이럴 때는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첫 승과 더불어 시드를 확보한 것부터 먼저 축하드리고 우승 소감부터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전 곁에 앉은 이분, 미스터 퍼펙트의 제자입니다. 이 자리를 빌러 가르침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축하해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토시 회장님께는 감사를 표하지 않으시나요? 하하하.

물론 농담이다.

부모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봄은 뜻밖에도 그 말에는 일체 대꾸하지 않았다. 오히려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 같아 기자들이 당황했다.

-내년에는 정회원의 자격을 갖췄는데,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지 그 포부부터 밝혀 주시죠?

“그저 한 경기, 한 라운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제 코치님은 아직 한참 멀었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번 동계 훈련을 통해 부족한 기량을 최대한 가다듬겠습니다.”

-하하하. 골프 신이라 불리는 코치님이지만 제자에 대한 평가는 너무 박하시군요. 한참 기량이 부족한 선수가 어떻게 우승을 한다고.

기자들은 너무했다는 표정이었다.

결과만 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 말을 들은 필상이 씩 웃고 말자 봄이 나섰다.

“기자님이 혹시 세계 랭킹 1위인 제 코치님보다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아! 그게 아니고…….

“그렇다면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코치님이 없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앉기는커녕 결선에 올라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이건 절대 겸손이 아니고 팩트입니다. 팩트!”

일단 나이도 어리고 프로 경험도 없는 봄이 이렇게 기자의 질문에 대해 강하게 반응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생각하기에 따라 상당히 건방진 태도로 비칠 수도 있으나 그 질문을 했던 기자는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마이크를 다른 기자에게 넘겼다.

‘바로 저런 근성! 강자에게는 단번에 꼬리를 마는구나!’

곁에서 지켜보던 필상은 기자의 고분고분한 태도에 은근히 짜증이 났다. 대꾸를 포기한 것을 탓하는 게 아니라 그런 얄팍한 국민성이 한일 관계의 깊은 파국을 맞이하게 만든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혹자는 극우 정치인들만 편향되었을 뿐, 일본의 대다수 시민들은 반한 감정이 없거나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고 믿는다.

물론 그런 이들이 상당수일 테지만 모든 상대를 항상 갑을 관계로 규정하는 일본인들은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절대 따스한 시선이나 온정을 베푸는 법이 없다.

강자가 짓밟고 올라서는 것에 곧바로 순종하며 따르는 것이 그들의 오랜 습성이라는 것이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오로지 미국에게만 납작 엎드리지!’

중국이나 하물며 러시아도 과거 승전했기에 한 수 아래로 보는 시각이 만연한 것이 일본인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그러니 과거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 따위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을 압도할 만큼 강해지지 않는 한, 한국은 여전히 자신들이 통치하던 식민지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실로 소름이 돋게 만드는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집단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정치적인 소견과는 무관하게 프로 골퍼로서 정당한 승부를 이어 가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드러나는 이들의 갈라파고스적인 사고방식을 접하노라면 울화가 치밀었다.

-미스터 퍼펙트. 아직도 일본 시리즈 JT컵에 출전할 의사는 없으십니까?

봄의 포부에 이어 골프와는 무관한 그녀의 가문이나 성장 환경에 대한 질문을 쏟아 냈지만 봄이 일체 대꾸를 하지 않자 김이 빠진 기자들의 포문이 엉뚱하게도 필상에게로 향했다.

사토시 회장이 뒤에 떡 버티고 앉아 있으니 봄에게 더 이상의 추궁을 할 수 없었던 기자들의 눈빛은 제법 사나웠다.

안 그래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조심스러웠지만 입에서 터져 나온 대답은 그리 곱지 못했다.

“그건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그 대신 다른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벤트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곧 준비를 마치는 대로 저희 회사에서 공식 브리핑을 해 드릴 겁니다. 오늘은 하루 양의 캐디로 이 자리에 앉았으니 그와 관련된 질문만 받겠습니다.”

사실 기자들이 묻고 싶은 화제는 따로 있다.

돌출 행동을 했던 혐한 꼴통의 사건은 입에 올리는 순간, 자신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이니 조심스러웠을 뿐이다.

하지만 필상이 먼저 방어막을 펼치자 괜히 찔리는 것이 있거나 되레 반감이 생겼는지 그 질문이 쏟아졌다.

-오늘 경기 중에 험한 꼴을 당하셨는데,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더군요. 왜 그러셨죠?

“혹시 제가 그를 제압이라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모욕을 당했는데, 그게 자연스러운 행동 아닌가요?

“하하하. 모욕이라고요? 당신이야말로 신성한 스포츠를 모독하는군요. 경기에 임한 캐디는 선수와 동일한 규정을 적용받습니다. 규정을 어기면 벌타를 먹거나 실격이 되죠. 제가 그에게 물리력을 행사해 제 선수의 우승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어야 옳았다는 말입니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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