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5번 우드 소녀
중계진도 필상의 예측처럼 장타자인 봄의 이번 홀 공략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17번 홀 티 박스에 도착한 필상은 홀 주변을 휘감아 돌고 있는 바람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뒤 고심했다.
봄의 스윙이 최정점에 이르렀지만 과연 드라이브를 잡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지 확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필상이 선뜩 드라이브를 건네지 않는 걸 본 봄이 필상의 의견을 물어왔다는 점이다.
“바람이 너무 심한가요?”
“응. 생각보다 훨씬 복잡해. 수시로 방향이 바뀌고 그 양도 예측하기가 애매하네.”
“그럼 우드 잡을게요.”
자신의 고집을 잘 꺾지 않는 봄이 너무 쉽게 결정을 내리자 오히려 필상이 당황스러웠다.
“3번 우드?”
“아니요. 5번 우드요. 내리막 경사만 잘 태우면 생각보다 많이 굴러가잖아요. 방금 전에 쳐 봤기 때문에 실수할 가능성도 아주 낮고요.”
“좋아! 마음껏 때려 봐!”
봄이 드라이브가 아닌 우드를 들고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서자 팬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무조건 응원하는 팬들도 있지만 1타 차로 뒤지고 있는 와중에 장타자인 그녀가 자신의 장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어쩌면 후자가 더 열성적인 팬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그런 반응은 중계진도 마찬가지였다.
-어? 우드를 잡나요?
-아무래도 캐디가 우드를 추천한 것 같은데, 이건 좀 아니다 싶네요. 비교적 방향성도 좋은 장타자인데, 왜 그러죠?
-본인의 경기를 할 때는 굉장히 공격적이지 않나요?
굳이 나설 이유까지 없는 최고의 선수가 캐디로 나섰다.
그런데도 또다시 비판적인 언급을 꺼내는 자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할지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봄의 티샷 결과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던 이들의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아까보다 탄도가 조금 더 높았을 뿐인데, 캐리 207야드를 찍은 타구가 내리막 경사를 타고 하염없이 굴렀던 것이다.
-우우우! 계속 구르네요. 하하하!
-런이 많도록 스핀을 적당히 조절한 것 같습니다.
-아! 그런 기술도 있나요?
-지금처럼 드로우 구질을 구사하면 평소보다 훨씬 많이 구르지요. 하하하!
언제 비판적인 언급을 했나 싶을 정도로 칭찬일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염없이 구른 타구는 좌측으로 약간 당겨지기는 했으나 무려 304야드 지점에 멈춰 섰다.
비록 드라이브 샷을 했을 때만큼 나오지는 않았으나 5번 우드로 보낼 수 있는 최대치라고 봐도 무방한 비거리였다.
“멋진 샷이었어.”
“아! 조금만 더 구르면 좋았을 텐데요.”
“남은 거리는 209야드지만 내리막을 감안하면 정확히 199야드만 보면 돼. 그 정도면 충분히 2온 가능하잖아.”
“좋아요. 일단 공이 놓인 라이부터 확인해요.”
우드를 잡고도 2온을 노릴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는지 세컨샷 지점으로 향하는 봄의 발길이 가벼웠다.
3일간 악전고투를 펼쳤고 팽팽한 승부가 이어지는 마지막 라운드에 이렇게 지친 기색이 없는 선수는 본 적이 없다.
각별한 능력을 지닌 필상도 이쯤 되면 피곤하기 마련인데, 체력 하나만큼은 세계 최고가 아닐지.
어차피 이 홀은 티샷이 270야드 이상 날아가면 페어웨이는 끝이 난다. 다만 러프라도 비교적 짧은 퍼스트 컷인데, 아쉽게도 봄의 공은 생각보다 러프에 깊이 잠겨 있었다.
살짝 떠 있거나 무난하게 유틸리티를 때릴 수 라이가 아니었다. 강하게 퍼낼 수도 있지만 잔디가 주는 저항을 정확히 계산하는 것은 절대 쉽지가 않았다.
“4번 아이언 치면 안 될까요?”
만약 그린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벙커라면 얼마든지 도전해 볼 만하다. 하지만 심한 내리막인 이 홀에서 감히 2온을 노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린 앞 좌우에 작지 않은 연못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에 도로가 뚫린 듯 페어웨이가 존재하지만 잘라 가는 선수들도 그곳을 공략하기보다는 차라리 연못에 미치지 못하는 지점에 떨어뜨려 3번째 샷을 붙이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기껏 우드로 장타를 날리고 그렇게 잘라 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억울했다. 120야드만 보낼 거면 뭐 하러 장타를 날리려고 애를 먹었단 말인가!
“봄아. 22도 유틸리티로 콱 찍어 치자.”
“정확히 임팩트만 가하자는 거죠?”
“그래. 공이 좀 깊이 박혔으니까 정타를 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 평소보다 업라이트 하게 치면 좋을 것 같아.”
“알았어요.”
이번에도 필상의 추천에 대해 중계진은 투덜거렸다. 아까워도 러프에 깊이 잠긴 공을 때려 2온을 시도하는 것은 무리수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필상은 유틸리티를 잡으면 최소한 짧지는 않다는 판단하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설사 그린을 오버해도 80야드 서드 샷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버디를 잡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깡!
평소보다 스윙 궤적이 가팔랐다.
아무래도 플랫한 스윙은 탑핑을 내거나 러프의 저항을 많이 받기 때문인데, 스윙 궤적을 일부 수정했음에도 봄은 정확한 타격을 만들어 냈다.
공과 함께 잘려 나간 풀들이 사방으로 분산되는 광경은 그녀의 아름다운 스윙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또한 날아가는 타구의 방향은 아주 정확해 좌우에 도사리고 있는 연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정중앙으로 뻗어 나갔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살짝 왼쪽 방향으로 치우쳤다는 점인데, 놀랍게도 뻗어 나가던 타구가 페이드를 먹기 시작했다.
“아! 업라이트 스윙이었지!”
가파르게 때리려다 보니 평소보다 어드레스가 가까웠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페이드 구질이 먹힌 것이다.
그 점을 고려하라고 진즉에 조언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음에도 봄의 샷은 최상의 궤적을 보이며 날아갔다.
-와우! 저게 됩니까?
-조금 긴 것 같습니다. 러프에서 유틸리티로 때린 타구는 런이 많아서 그린에 떨어지면 막창나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설마요!
궤적이 아주 애매했다.
얼핏 그린 앞에 떨어질 것 같기도 하지만 카즈히로 해설의 예측처럼 그린에 직접 떨어질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필상은 누구보다 봄의 임팩트를 가까이에서 지켜봤기에 이 타구가 쭉쭉 뻗어나가 그린에 떨어질 것이라는 예감을 했다.
“떨어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워낙 급박했기 때문인데 그 순간, 뻗어나가던 타구가 맞바람에 부딪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뚝 떨어졌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궤적은 아니었지만 그린 앞 러프에 떨어진 타구가 크게 튀어 그린에 올라섰고 거침없이 핀을 향해 구르는 광경에 비명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앨버트로스!”
“들어가! 제발!”
간절한 소망이 담긴 외침은 기적을 만들어 냈다.
누가 러프에서 때린 199야드 샷이 홀컵에 빨려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공은 정확하게 핀을 향해 굴렀고 깃대를 제법 강하게 맞춰 버렸다.
팅.
그 소리에 전율이 돋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지상에서 공이 쑥 사라진 순간에는 오히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1초 남짓 이어진 침묵, 그건 천둥과 같은 함성을 일시에 자아내기 위한 폭풍의 전야제였다.
“와아아아! 하루! 하루! 하루!”
영웅의 탄생이었다.
앨버트로스를 잡으며 단독 선두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물론 쑤카판과 신 프로가 이후 어떤 경기력을 보일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이즈카 하루는 일본 팬들의 마음속에 우승자였다.
필상이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 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미친 듯이 열광하는 팬들의 함성이 뒤에서 쫓아오는 4명의 선수들에게도 선명하게 들렸을 게 분명했다.
필상도 차오르는 감격을 감당하기 어려워 멋쩍게 웃으며 클럽을 건네는 봄을 꼭 안아 줬다.
“오빠. 언니가 다 보고 있거든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사랑하는 여동생의 감격적인 샷에 너무 고마워서 그러는 건데!”
“그렇다면야. 흐흐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뜨끔했던 필상은 얼른 자세를 풀었다.
모모코는 둘째치고 자신을 향하고 있는 일본 남성 팬들의 따가운 시선이 전신에 마구 꽂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15 이즈카 하루
-14 눅 쑤카판
-13 신지애
봄과 함께 18번 홀에 들어서는 순간, 챔피언 조가 16번 홀 경기를 끝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 멀리 보이는 리더 보드의 숫자가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신 프로는 그대로였지만 묘했던 느낌대로 쑤카판이 -13으로 내려섰다.
언덕 아래로 쏜 파 3홀 티샷이 심하게 밀려 그린 우측 벙커로 떨어진 뒤, 단번에 탈출하지 못하고 보기를 기록했다.
남의 불행을 즐기고 싶지는 않지만 팬들은 기쁨의 함성을 마음껏 질러 댔다. 일본 선수가 우승할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봄은 그런 환호를 받을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도 담담하게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미소를 띤 것이 다소 아쉬울 뿐.
“봄. 이빨 보이지 말고 차분하게 마지막 홀을 공략하자.”
“저 5번 우드로 칠게요.”
“좋아. 페어웨이를 지키는 게 중요하니까.”
마지막 홀인데도 후반 홀 중에 가장 페어웨이가 좁다. 끝까지 승부에 마음을 놓을 수 없도록 설계한 것인데, 우측은 OB, 좌측은 벙커와 헤비 러프가 있어 티샷의 정확성이 요구된다.
문제는 380야드에 이르는 긴 전장으로 인해 티샷이 짧으면 역시 세컨샷으로 그린을 공략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하지만 봄은 멋진 우드 티샷을 다시 한 번 그려내어 이날 이후 ‘5번 우드 소녀’라는 애칭을 얻었다.
폭이 10야드에 불과한 페어웨이를 정확히 지켜 냈으며 비거리 또한 229야드를 찍으며 웬만한 선수의 드라이브 거리와 맞먹는 괴력을 선보였다.
-5번 우드 정말 잘 치네요. 거리도 만만치 않은데 방향성도 아주 좋군요.
-미스터 퍼펙트의 유틸리티 샷과 아주 비슷합니다. 제 기억에 그는 단 한 번도 유틸리티 샷 미스를 한 적이 없거든요. 하루가 바로 그런 점을 배웠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아! 이러쿵저러쿵해도 미스터 퍼펙트의 신계에 이른 실력 하나만큼은 인정해 줄 수밖에 없죠. 하하하.
-1년 반 동안 보여 준 대업적도 상상을 초월하지만 아직 그에게 보여 줄 것이 더 많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큰 자랑이며 이는 곧 우리 일본 선수들도 얼마든지 동일한 위업을 달성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만듭니다.
참으로 아전인수 격 해석이었다.
하기야 그렇게라도 자국의 골프가 발전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져 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 누군가 개척자가 있으면 그 뒤를 따르는 경쟁자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한국 골프였다.
진즉에 박세리를 필두로 한 여자 선수들이 세계 골프계를 주름잡더니, 급기야 남자 골프마저 파격적인 스타의 등장을 빌미로 고속 성장할 기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아시아 맹주의 위치를 내놓는 것이 아닌지 불안했다. 이미 세계 골프계는 한국을 아시아 최고라고 인정하고 있지만 오로지 일본만 스스로 쳐 둔 그물을 벗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154야드야.”
“7번이 좋을 것 같아요. 그냥 그린 중앙을 보려고요.”
“좋아. 무리하지 말고 살짝 페이드를 구사해 봐.”
“넵!”
핀이 그린 우측에 꽂혀 있었다.
만약 봄이 직접 핀을 공략하려고 했다면 오히려 말렸을 것이다. 2타를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압박감을 느낄 사람은 오히려 추격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인이 차분하게 안전한 공략을 선택할 마음가짐이라면 조금은 여유로운 공략을 해도 무방하다고 판단했다.
따악!
페이드를 걸려던 봄은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안전하게 그린 중앙을 공략했다. 보다 더 확실하게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읽혔다.
프로라고 다 쉽게 온 그린을 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우승 경쟁을 하고 있는 마지막 홀에서 경험이 일천한 그녀로서는 미스 샷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행히 타구는 그린 중앙에 떡하니 올라섰고 1퍼팅이 쉽지 않은 위치에 놓였다. 물론 2퍼팅은 무난한 거리였다.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실수하고 싶지 않았어요.”
“잘했어. 하하하.”
그린을 향해 걸어가는 봄을 향한 일본 팬들의 반응은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환호였다.
올 시즌 최고의 시즌을 기대했던 모모코가 쉬면서 생각만큼 일본 선수들이 분전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모두 봄에게 푸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일었다.
그런데도 정작 당사자인 봄은 담담했다.
“손이라도 좀 흔들어 주지?”
“에이. 창피하게!”
“프로는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거야. 그런 투철한 직업의식이 없는 선수, 팬들을 존중할 줄 모르는 선수는 성공할 수 없어. 팬들은 선수의 기량만 보는 게 아니거든.”
그제야 과장된 미소를 띤 봄이 팬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손을 흔들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 어색했는지 이내 시선을 돌리고 머리를 긁적였지만 그런 모습이 앙증스러워 폭발적인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거봐. 엄청 좋아하잖아.”
“이게 얼마나 갈까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제가 한국으로 귀화하면 야유로 바뀔 걸요?”
“그러니까 귀화 문제는 깊이 고심해 보고 결정해야지. 나도 기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내게 상의도 없이 결정하면 안 돼. 알았지?”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