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더도 말고 1타만
‘신경을 끄자!’
필상도 그 축축한 인간이 어찌 신경 쓰이지 않겠는가?
그는 필상을 꼭 집어 테러를 가한 것이다. 하지만 맞상대를 하는 순간, 원하든 원지 않든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게 뻔했다.
결코 자신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2번 홀로 이동하는 필상의 앞에 그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경기 진행요원들이 근처에 있었지만 집요한 그의 돌출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더러운 놈! 한국으로 돌아가!”
불쑥 쏟아진 욕설.
환갑에 가까워 보이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고지식한 그자의 면상을 대하는 순간, 그냥 한 방 먹이고 싶었다.
아니, 그냥 툭 밀치기만 해도 벌렁 나자빠질 체구다.
그렇기 때문에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냥 멈춰 선 채로 진행요원이 달려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자신의 도발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오히려 놈이 달려들었다. 지켜보는 이들이 많았지만 워낙 갑작스러운 기행이었기에 누가 말리고 마시고 할 겨를도 없었다.
“이런 미친놈!”
놈이 필상의 멱살을 잡기 직전, 그는 돌연 뒤로 확 밀려났다. 오늘 따라 예쁘게 단장한 봄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채며 소리를 지른 것이다.
키는 더 작고 왜소하지만 봄의 강한 아귀힘에 그는 맥없이 뒤로 끌려가 대롱대롱 매달린 형국이 되고 말았다.
결코 아름다운 장면은 아니었다.
“뭐합니까? 어서 저분을 필드에서 내보내세요.”
“아. 네.”
황급히 다가오던 젊은 진행요원 둘이 봄의 과격한 대처에 깜짝 놀라 멍하니 서 있었다. 설마 그런 행동이 나올 줄은 몰랐을 테니까.
하지만 필상의 다급한 말을 듣고 나서야 서둘러 그를 양쪽에서 잡은 채 끌고 나갔다. 그 와중에도 그자는 험한 말을 마구 쏟아 냈다.
‘뭐든 과하면 역효과를 내는 법인데!’
차라리 그자가 오버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편협한 생각만 드러내고 말았다면 일부 동조하는 이들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처럼 상대를 무시하고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설사 그의 주장이 옳아도 힘을 잃는다.
문제는 자신보다 봄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지금 대회에 참가한 선수다.
좋은 이미지를 쌓아도 부족할 판에 타인을 힘으로 제압한 것은 선수로서, 또 여자로서 그다지 예뻐 보일 리는 없지 않겠나.
그러나 묘한 상황이 펼쳐졌다.
“이즈카 하루! 멋지다!”
“와아아! 대단하네!”
“난 너를 응원한다. 꼭 우승해!”
마치 치한을 퇴치한 영웅처럼 보였던가!
하기야 필상을 일방적으로 공격한 자를 막아선 봄은 필상의 선수다. 필상이 직접 대처하지 않은 자세가 혹여 비겁하게 비쳤을지는 모르나 자신의 코치를 커버한 그녀의 행동은 용감해 보인 것이다.
갤러리들의 뜨거운 반응에 머리를 긁적이는 봄이 필상의 눈치를 살폈다. 필상이 그 행동을 좋게 보지 않을 것 같았던 모양이다.
실제 필상의 생각은 그랬지만 지금 그녀를 타박할 수는 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직 경기를 마치지 않았다는 점이었기 때문이다.
“고마워.”
“나중에 뭐라 그러실 거 아니죠?”
“내가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네 행동이 다행히 좋게 비친 것 같아 한숨 돌렸어.”
“전 걱정하지 마세요. 제게는 이럴 때 알아서 나서 줄 사람이 있잖아요.”
“하하. 그렇군.”
모르긴 몰라도 오늘 돌출 행동을 한 사람은 사토시의 분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봄이 관여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의 딸이 힘자랑을 하고 말았으니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그의 치솟은 분노.
-아! 이건 정말 아니지요. 아무리 한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고 이념적인 주장이 다르다 하더라도 경기 중에 난입해 진행을 방해하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물론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당당하게 사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중계방송 중인 것을 알면서 이런 물의를 일으키는 것은 결코 나라를 위해서나 투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 골프팬들이 이 장면을 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다행히 퇴장시킨 것 같은데, 정말 큰일 날 뻔했네요. 만약 미스터 퍼펙트의 멱살이라도 잡았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이즈카 하루의 행동이 적절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선수가 나설 때까지 가만히 지켜만 본 공 프로의 행동도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그렇지 않다.
대처하지 않은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유우키는 판단했다. 하지만 해설위원이 굳이 그렇게 언급하자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를 일방이 아닌 쌍방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의도가 없지 않고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야만 일본 투어에 대한 반감이 낮아질 것이라는 계산도 깔린 것이다.
다행히 이번 대회는 한국에서 중계를 하지 않았다. 물론 오늘 벌어진 상황과 일본 중계진의 그 발언은 차후 관심을 가진 한국 골프팬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다.
다른 투어에서도 심각한 사안으로 다뤄질 게 분명하다. 그때를 대비해 투어를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되지만 그래도 공평하지 못한 평가는 한국인들의 분노를 자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제 경기에 집중하자.”
“네. 어제 제가 뒤땅을 때린 홀이네요.”
“그래. 오늘은 안전하게. 오케이?”
“예썰!”
집중하고자 했고 실제 봄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최고의 샷이 터지지는 못했다. 한창 기세가 좋았건만 방금 전에 벌어진 일이 안타깝게도 기이한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그럴수록 누군가의 분노가 그자에게 끔찍하게 작용할 가능성은 점점 높아진다고 봐야 했다.
그 와중에 11번 홀에서 2위인 신 프로와 단독 선두 쑤까판이 1타를 줄이며 3위로 밀려나게 되었다.
“봄. 이럴수록 너무 잘 쳐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차분하게 자기 스윙을 유지해야 해. 기회는 불현듯 찾아오는 거거든.”
“네. 언니.”
“자신의 운과 스윙을 믿어.”
“아! 운과 스윙을 믿으라는 그 말, 정말 좋네요.”
필상도 어떻게 조언을 해야 할지 애매한 상황이었는데 뜻밖에도 전 프로가 봄을 다독였다.
같은 스코어에서 출발한 본인은 봄보다 쳐지고 있으니, 그런 조언을 하는 것이 기꺼울 리 없을 텐데도 넓은 포용력과 선배로서의 기품을 보인 것이다.
이후 답답한 경기를 이어 오던 봄에게서 드디어 환상적인 스윙이 터지고야 말았다.
[15번 홀 355야드 파4]
페어웨이 우측은 왼쪽으로 경사진 러프 지역인데, 워낙 러프가 길고 질겨 공이 떨어져도 잘 타고 내려오지 않는다. 물론 세컨샷 컨트롤도 어렵다.
하지만 페어웨이 좌측은 아예 나무가 우거진 비탈로 OB 지역이고, 페어웨이가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아주 좁아 대부분의 선수들은 우측을 보는 경향이 심하다.
그런데도 오르막에 전장마저 짧지가 않아 결국 2온이 쉽지 않은 홀이다. 그래서 필상은 묘수를 짜냈다.
“봄. 5번 우드 어때?”
“3번도 아니고 5번 우드요? 아! 페어웨이를 무조건 지키라는 거군요?”
“5번으로 220야드만 보내고 세컨샷으로 승부를 보자.”
“좋아요.”
오르막이라서 웬만한 여자 선수는 우드를 잡아도 200야드 이상을 보내기 어렵다. 그 이상을 보내려면 방향성에 문제가 생겨 차라리 드라이브를 드는 게 낫다.
하지만 봄에게는 남다른 장점이 있다. 장타!
게다가 3번과 5번 우드의 거리 차이가 별로 나지도 않을뿐더러 특히나 5번 우드는 신기할 정도로 방향성이 좋아 지금으로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쉬익!
얼마나 잘 맞았는지 공이 맞아 나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일직선으로 쭉쭉 뻗어 나간 우드 샷은 탄도가 높지 않았으나 그 대신 엄청난 런을 보이며 경사를 타고 올라갔다.
-우후! 정말 굉장한 힘이네요!
-3번도 아닌 5번 우드랍니다. 무려 222야드나 나왔습니다.
-정확히 페어웨이 정중앙을 갈랐으니까 그럼 남은 거리는 133야드, 아니 오르막을 감안하면 138야드 정도 되네요.
-숏 아이언으로 충분히 붙일 수 있는 거리지요.
-이번 홀에서 1타 쫓아가면 오히려 뒤따라오는 선수들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네요. 하하하!
앞선 두 선수가 태국과 한국 선수였기에 봄을 향한 응원은 더 열기가 가득했다. 동타로 출발한 히가 마미코는 초반에 경쟁에서 탈락했고 기대했던 우에다마저 갑작스러운 샷 난조를 보이며 홀로 무너지고 있어서 아마추어인 그녀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점도 흥미로웠다.
기존 베테랑 선수들과 젊은 선수들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티샷 비거리다. 날로 장비가 좋아지는 측면도 있지만 한번 몸에 새겨진 스윙은 아무리 장비를 바꿔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른 해석을 가능케 한다.
보다 우월한 체격과 건강한 체질, 또한 어려서부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을 통한 완벽에 가까운 스윙을 익히다 보니 출발점부터 다른 것이다.
“포대 그린이고 그린 뒤가 높으니까 아예 140야드를 보자.”
“네. 8번 아이언 주세요.”
“오케이!”
한 클럽을 더 길게 요구하는 봄이 기특했다.
컨트롤 샷을 하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물이 흐르는 방향대로 바람도 불고 있어. 더도 말고 두 클럽 정도만 보자.”
“두 클럽이요?”
“응. 내 말을 믿어.”
“당연하죠. 흐흐흐.”
필드 위에서는 바람의 양을 확인하기 어렵다.
오전과 오후가 다르고 날씨에 영향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의 초감각은 유감없이 바람의 양을 정확하게 측량해 냈고 그것을 믿은 봄은 확신에 찬 스윙을 가했다.
임팩트가 이뤄지는 순간, 다시 한 번 전신에 소름이 돋은 것을 보면 결과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린 타구가 바람을 타고 홀컵으로 정확하게 향하는 것을 바라보던 팬들의 입에서 먼저 비명이 터졌다.
-어어! 들어가는 거 아닌가요?
-아! 정말 아깝네요!
홀컵 앞에 떨어진 공이 예상보다 크게 튀면서 핀을 훌쩍 오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짝 한 번 튄 공이 멈춘 뒤에 슬슬 뒤로 굴러 내려왔다.
강한 백스핀이 걸린 것이다.
물론 프로라면 이 정도 거리에서 원하면 얼마든지 스핀을 걸 수는 있다. 하지만 샷이 짧을지 길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 무턱대고 스핀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그린의 경사가 오르막이기에 짧으면 그린에 떨어뜨리고도 러프까지 내려올 경우 그 충격은 이루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봄은 확신에 찬 스윙을 했고 자신이 의도한 대로 정확하게 떨어뜨려 스핀까지 먹인 것이다.
“이야! 저게 안 들어가네!”
“흐흐. 저게 어떻게 들어가요! 홀컵이 보이지도 않았는데!”
“들어가지 말란 법도 없지. 하지만 정말 잘 쳤어.”
홀컵 앞 1야드도 되지 않는 지점에 멈췄다.
오르막에 좌우 경사도 없는 거의 완벽한 버디 지점이었다. 봄은 침착하게 그걸 구겨 넣으며 1타차 공동 2위로 올라서고야 말았다.
누가 그런 봄을 아마추어라고 하겠는가!
사실 필상도 적잖게 놀라고 있었다.
분명 출중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실전에 강한 면모를 보일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좋았어!”
“그래도 좀 아쉬워요.”
“하하하. 아직 두 홀 남았잖아. 그리고 16번 홀은 막판에 몰린 선수들에게 쥐약이니까 파만 해도 아주 훌륭한 거야.”
16번 홀은 191야드 파 3홀이다.
언덕 위에서 51야드 아래에 위치한 그린에 떨어뜨려야 하는 홀이라서 거리에 대한 부담은 없지만 문제는 사방이 확 트여 바람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놈의 바람은 아무리 읽어도 초 단위로 바뀌기 때문에 대체적인 경향밖에는 알려 줄 수 없다는 점도 난점이었다.
그 와중에 그린에 올려 2퍼팅으로 파를 기록한 것만으로도 필상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느낌상 경쟁자들이 이 홀에서 해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봄아. 더도 말고 1타만 더 줄이자.”
“다음 홀은 이글 홀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아! 그런가?”
1타차 공동 2위였고 16번 홀에서 묘한 느낌을 받은 필상은 봄의 우승 가능성을 계산하느라 자신이 오늘 경기 전에 언급했던 17번 홀의 상황을 잠시 헷갈렸다.
511야드 파 5홀이다.
하지만 그린까지 쭉 내리막이 이어진 홀이라서 제대로 떨어뜨려 굴릴 수만 있다면 엄청난 비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2001년 20회 대회 때는 지금보다 훨씬 짧게 세팅되었지만 우승한 이지희 프로가 첫날, 둘째 날 2온에 성공해 이글을 잡았고 최종 라운드에서는 티샷 비거리가 300야드를 훌쩍 넘겨 겨우 130야드 세컨샷을 남긴 기록도 있다.
-오늘 17번 홀이 승부처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렇습니다. 승부에 화룡점정을 찍으라는 의미인지 오늘 핀 위치가 전에 비해 아주 편안한 위치에 꽂혔기 때문입니다.
-아! 거의 그린 정중앙이군요.
-그렇습니다. 과감하게 2온을 노려 보라는 거지요. 특히나 뒤지고 있는 선수들에게는 아주 좋은 추격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세팅입니다.
-지난 3라운드까지 평균 타수는 4.81이었고 버디는 87개나 나왔지만 이글은 2개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핸디캡 18번이었다는데, 요즘은 다들 잘라 가는 홀이 되었군요.
-장타자들이 즐비하다 보니 티 박스를 40야드 이상 뒤로 뺀 결과입니다. 그래도 핀 위치가 오늘 같다면 얼마든지 이글이 나올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