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우승 가시권
“조금 변화를 줬는데도 느낌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핀 위치는 말할 것도 없고 티 에어리어도 영향을 미치지. 티샷 방향을 결정하거든.”
“언니. 전지훈련은 어디로 가세요?”
“나? 나는 그냥 할 일도 좀 있고 해서 일본에 있으려고.”
“태국으로 오세요.”
“거긴 벌써 꽉 찼다고 하던데?”
“아닐 걸요! 그리고 다 찼어도 저랑 같이 계시면 되죠. 싱글 침대 2개 넣어 달라고 할게요.”
“호호호. 생각해 볼게.”
무슨 이유에서인지 봄은 전 프로에게 굉장히 친근하게 매달렸다. 보통 캐디와 홀 공략에 대해 논의하는 것 외에는 잡담은 그다지 유익하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전 프로도 한참 어린 봄이 붙임성 있게 다가오자 싫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오랫동안 타국인 일본에 머물며 이렇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후배는 없었던 듯.
그러나 필상은 짐작이 가능했다.
어차피 필상은 오늘 이후 자신을 돕지 못할 것이고 어쩌다 캐디백을 매도 모모코의 것을 매지, 자신을 도울 수는 없다.
모모코와 각별한 관계지만 그래도 전 프로를 롤 모델로 삼고 깍듯하게 대하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전 프로의 마음을 얻는 것은 좋은데, 경기에 집중해.”
“물론이죠. 걱정 마세요. 근데 이 홀은 어떻게 공략할까요?”
“음……. 안전하게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네.”
나이도 어린데 곤란한 상황을 회피하는 솜씨는 일품이다. 웬만한 잔소리 정도는 간단히 화제를 돌려 넘겼다.
하기야 6번 홀까지 둘 다 무난한 플레이를 이어 가고 있었다. 까다롭게 세팅되었지만 그래도 봄은 3번 홀에서, 전 프로는 5번 홀에서 버디를 잡아 -12로 한 걸음 올라섰다.
우에다 모모코는 1타를 잃어 둘과 동타가 되었고 신지애가 -13으로 올라서 쑤카판을 1타 차로 바짝 추격 중인 것을 보면 버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필상은 먼저 티샷을 하고 내려오는 전 프로에게도 돌아가는 상황을 알려 줄 필요를 느꼈다.
“선두는 그대로 버티고 신 프로가 1타 줄였답니다.”
“오! 봄, 너도 들었지?”
“네.”
7번 홀은 351야드의 파 4홀로 티샷 랜딩지역부터 급격하게 우측으로 휘는 도그렉 홀이다.
장타를 날리지 못하면 세컨샷이 긴 벙커를 넘겨야하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장타자의 경우에는 좌우의 지저분한 페어웨이 벙커가 눈을 어지럽힌다.
마치 페어웨이가 벙커 사이에 끼어 있는 느낌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전 프로는 안전하게 240야드만 공략했지만 봄은 힘차게 드라이브를 휘둘렀다.
안전한 공략이 좋다고 추천했고 본인도 동의했건만.
-어? 너무 강하지 않나요?
-페이드를 구사한 것 같은데, 벙커를 넘기려면 캐리가 250야드는 나와야 합니다. 다소 무리한 공략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우우……. 넘어갑니다. 저게 넘어가네요!
홀의 모양을 따라 절묘하게 휜 타구의 비거리는 상상을 초월했다. 보통 페이드 샷은 거리의 손해가 있는데도 벙커를 넘긴 타구는 러프에 떨어진 뒤, 크게 튀어 페어웨이까지 굴러들어갔다.
필상과 나란히 서서 봄의 드라이브 티샷을 바라보던 전 프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힘 정말 좋네.”
“보기와 달리 강골입니다.”
“근데 하루, 아니 봄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제 피지컬 트레이너입니다. 본인이 원해서 가르쳐 봤는데 재능이 있고 정말 무서운 속도로 배우더군요.”
“요즘 젊은 애들이 워낙 강력해서 기가 죽어.”
“하하하. 왜 이러십니까! 아직 한창 나이에.”
“정말 그럴까?”
“그럼요. 전 환갑 전까지 투어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환갑? 도대체 몇 승이나 하려고?”
“글쎄요. 골프는 힘으로 치는 게 아닌 것 같아서요.”
젊으면 경험이 부족하고 경험이 풍부하면 기력이 딸린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만 필상의 생각은 다르다.
자신이 특별한 재능을 지녀서가 아니고 실제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이 아닌 샷의 일관성이기 때문이다.
힘이나 체력이 부족한 상황이 온다면 그에 맞는 스윙을 찾으면 된다. 비록 우승을 못하더라도 투어시드가 있는 한, 필드에 나오는 기쁨을 어찌 포기할 수 있겠나.
사업에 대한 비전과 욕망도 있지만 그건 부수적인 부분이다. 할 수만 있다면 오랫동안 투어에 참여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제 흉보셨죠?”
“알긴 아네. 이번 샷은 결과가 좋았지만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은데?”
“왠지 자신이 있더라고요.”
“떠난 버스 아쉬워해 봐야 소용없고 만약 캐디와 생각이 다르면 미리 얘기를 해. 그래야 그에 맞는 조언을 해 줄 거 아냐.”
“네.”
“대답만 잘하지!”
“히히히……. 정말 알았다니까요.”
하도 천연덕스러워 더는 타박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런 성격이 골프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와! 역시 노련하네요.”
전 프로가 114야드 세컨샷을 무난히 그린에 올렸다.
안 그래도 좁고 기다란 그린인데, 핀을 2단 그린의 위쪽이며 좌측 벙커에 바짝 붙여 놔 일단 안전한 공략을 한 것이다.
하지만 옆 라이라서 버디를 잡기에는 상당한 부담이 되는 거리, 6야드였다.
“스핀을 걸지 말고 굴리자.”
“아! 그거 좋을 것 같아요.”
남은 거리는 67야드, 하지만 웨지 샷을 할 경우 백스핀 때문에 오히려 경사의 아래까지 굴러 내려올 수도 있다.
그래서 굴리는 샷을 요구했다. 평소 할 수만 있다면 굴리는 것이 낫다고 가르쳤고 연습했기 때문에 봄도 동의하고는 9번 아이언을 들고 샷에 임했다.
-9번 아이언이네요?
-네. 좋은 선택으로 보입니다.
-전 프로처럼 그린 중앙을 보는 게 낫지 않나요?
-그럴 경우 버디는 어렵지요. 기왕 티샷을 길게 보냈기 때문에 버디를 노려보려면 범 앤 런이 좋아 보입니다.
봄은 스탠스를 열지 않은 채 정확한 거리감을 염두에 두고 하프 스윙을 가했다. 이거야말로 감각적인 임팩트가 필요한 경우인데, 필상은 그녀의 탁월한 감각을 믿었다.
따악!
차라리 자신이 샷을 하고 말지, 남이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더 힘들었다. 하지만 부드러운 스윙이 이뤄지는 순간, 필상은 다시 한 번 소름이 돋았다.
“인 더 홀!”
“들어가!”
“와아아아!”
봄의 타구는 그린 앞쪽 러프에 떨어졌다.
다소 길게 느껴졌지만 필상이 염두에 둔 지점도 바로 거기였다. 잔디에 큰 자국을 낸 타구는 일단 크게 튀었으나 자연스럽게 머금은 스핀이 적절하게 거리를 조절했다.
그러면서도 2단 그린으로 기어 올라갔고 핀을 향해 곧장 굴러갔다. 그냥 확 들어가 버릴 것만 같은 모습에 갤러리들의 고막을 때리는 비명과 응원의 함성이 쏟아졌다.
팅!
아쉽게도 타구는 깃대를 정통으로 맞췄지만 들어가지는 않았다. 힘도 적절했건만 무척 아까운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봄도 들어간다고 생각했는지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었으나 살짝 빗나간 공이 1야드나 벌어지자 멋쩍었는지 필상을 보고 씩 웃었다.
“나이스 샷!”
“아! 저게 왜 안 들어가죠?”
“그러게. 하지만 정말 좋은 샷이었으니까 그냥 들어간 거라고 생각해.”
“에이! 확 들어갔으면 공동 선두가 되는 건데!”
“하하하. 뭐든 지나치면 독이 돼. 차분하게 퍼팅 준비나 해.”
전 프로의 버디 퍼팅은 짧았다.
옆 라이라서 넣으려고 하다가 지나치면 낭패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크를 한 봄이 퍼팅을 하려는 순간, 묘한 상황이 벌어져 자세를 풀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갤러리들 사이에서 엉뚱한 외침이 들렸기 때문이다.
“미스터 꽁! 한국으로 돌아가!”
실은 엄한 놈이 갤러리들에 끼어 있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보통 스포츠는 국가나 정치와는 별개인데, 미리 준비한 작은 피켓을 든 자가 있는 것을 봤다.
그 내용은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것이었다.
[돈만 밝히는 한국인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
극렬한 혐한이었다.
보통 홋카이도 같은 일본 북부 지역은 한국에 대한 인식이 무척 좋지 않다.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지닌 이들이 많아 한국인을 바라보는 눈빛 자체가 곱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규슈를 비롯한 남쪽 지역은 한국 관광객이 많고 인식도 나쁘지 않아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음에도 혐한의 분위기가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더욱이 운동 경기에서는 정치적인 활동과 차별을 엄격히 금지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찾아보기 힘든데, 지독한 골수분자가 나타난 것이다.
필상이 돈만 밝힌다는 것부터 이치에 맞지 않을뿐더러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혐오를 부추기는 이들이나 사용하는 표현이다.
엄연한 법이 있는데 누가 누구를 가라마라 한단 말인가!
일찍이 한국 프로들이 일본 투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자 일부 나쁜 풍토가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이렇게 노골적인 경우는 처음이다.
“봄. 어디 가?”
경기위원이 나서 소리를 지른 자에게 자제하라고 경고했다.
경기 중인 선수가 직접 움직일 필요가 없다. 여러 모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퍼팅을 하려던 봄이 갑자기 그를 향해 다가가자 필상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얼른 봄을 가로 막았다.
“너무하잖아요!”
“그래도 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
“에이. 또라이 같은 놈!”
봄은 하는 수없이 그린으로 다시 향했지만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잠시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필상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누군지는 봐 뒀어!’
만약 자신이 반응을 하면 그때부터 이슈가 될 것이다.
그냥 쳐다만 봐도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자들의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속에서 천불이 일었으나 애써 꾹 눌렀다.
하지만 생방송 중계 중에 경기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기에 중계진도 관련된 언급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자의 해괴한 행동을 방송 중계진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으나 그걸 화면에 비치는 것이 적절치 않아 피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얼굴은 물론 그가 주장하는 바가 적힌 피켓도 화면에 내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허! 저러면 안 되죠.
-네. 경기를 방해하는 행위는 퇴출되어야 합니다.
-아! 그래야겠네요. 스포츠 경기에 차별과 혐오는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즈카 하루의 행동도 바람직하지는 않아 보이네요. 선수가 팬에게 직접 어필하는 것, 안 됩니다.
-당사자도 아니잖습니까!
-당사자라도 그러면 안 되겠죠? 하하하.
시작은 좋았는데 마지막 몇 마디와 웃음소리는 묘했다.
마치 이해할 수 있다는 느낌을 줬는데, 그 자리에 있던 한국인은 필상만이 아니었다.
“일본의 정치 수준은 너무 저열해.”
“네?”
갑자기 전 프로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일본에서 오래 지냈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선수다.
때문에 그들을 가장 잘 알고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만큼은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일본은 아주 특이한 나라다.
경제 대국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음에도 실제 정치인들의 행동은 경악을 금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근한 예로 가업을 잇는 것은 좋아하고 자랑하는데, 정치도 대대로 해 먹는 나라가 대체 어디 있냐고!
“우리나라도 부녀가 나란히 대통령을 해 드셨잖아요. 그 끝은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우린 성숙한 시민들이 깨어 있잖아. 하지만 일본은 올바르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이들이 좀처럼 나서지를 못해. 사회 분위기를 극우가 휘어잡고 있거든.”
“정치적인 혁명이 필요한 나라지요. 하하하.”
그 말을 끝으로 필상은 전 프로와 거리를 뒀다.
할 말은 많지만 더 이상 전 프로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면 경기력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녀가 일본에서 지내며 경험한 기억들이 그다지 좋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
일본은 좋아할 수 없는 나라다.
과거가 어떠했든 중요한 것은 현실이지만 그 출발은 진솔한 고백과 인식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하지만 잘못된 가르침과 사회적인 인식은 굉장히 편향되어 한국을 올바르게 조명하거나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되지도 않을 말과 행동을 버젓이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남 탓만 하는 이들과 동조하는 세력이 한국 내에도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여하튼 그 와중에도 봄은 차분하게 버디를 완성하며 공동 2위로 올라섰다. 멀게만 보이던 우승이 가시권으로 들어온 것이다.
“저놈 혼 좀 내 주라고 할까요?”
“봄. 똑같은 사람이 될 거야?”
“그게 아니죠. 멀쩡한 사람을 먼저 건드린 대가는 치르게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아빠한테 부탁해 폭력배라도 보내라고 하려고?”
“…….”
이래서 보고 배운 것이 무서운 법이다.
동의하지 않았고 행동한 적도 없겠으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사토시에게서 그녀가 자연스럽게 배운 것이다.
하지만 막상 필상의 입에서 그런 험악한 표현이 나오자 뜨끔했는지 입을 닫고 고개를 숙이고야 말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