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29화 (229/354)

229. 미스 퍼펙트

“거 봐요. 저한테는 안 된다니까요!”

“하하하. 아직 끝나지 않았어. 골프는 장갑 벗어 봐야 안다는 거 몰라?”

미나미가 결국 보기를 기록하고 말았다.

OB만 아니었으면 적어도 버디는 할 수 있었을 텐데, 못내 아쉬운지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더욱이 만만하게 봤던 봄이 이글을 기록했기 때문에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봄은 싱글벙글, 하고 싶은 말을 아끼지 않았다.

“히히……. 알았어요. 그런데 이 정도 스코어면 선두와 엇비슷해지지 않았을까요?”

“선두권도 도망쳤을 거야. 그거 신경 쓰지 말고 네 게임에만 집중하는 게 더 나아.”

“난 아닌데…….”

보통 선두권은 경쟁자를 의식하면 본인에게 손해다.

때문에 대부분의 선수들은 리더 보드를 애써 외면하는 편이다. 하지만 봄은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본인의 샷에만 집중하라고 했지만 걷다 말고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중계를 보고 있던 팬에게 묻기까지 했다.

“9번 홀에서 방금 버디를 해서 2타 차래요. 근데 선두가 누구죠?”

“어허! 그만하라니까!”

보다 못한 필상이 인상을 쓰자 그제야 입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오늘 우승해도 다음 주 대회에는 나갈 수 없죠?”

“응. 이미 출전 선수들이 확정되었거든.”

“음……. 좀 아쉽네요.”

“봄. 정말 정신 안 차릴래?”

“큭! 근데 오늘 이 홀의 핀이 3단 그린의 가장 위쪽에 꽂혔네요?”

“그래. 슬라이스 바람이 불기 때문에 좌측 벙커를 봐야 할 거야.”

“음……. 벙커 정중앙 볼게요.”

“오케이.”

웬만하면 의기소침하지 않는 건 대단한 장점이다.

특별한 신체 조건을 타고난 탓에 어려서부터 늘 아팠고 죽음과 싸워 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안쓰러웠다. 또한 최근 들어 굉장히 건강해졌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 점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 같더니 요즘은 툭하면 실실 웃을 정도로 밝아졌다.

아주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제대로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앞서 마음에도 없는 인상을 써야만 했다.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야말로 혼자서도 잘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어어……!”

골프는 역시 쉽지 않은 운동이다.

12번 홀은 143야드 파 3홀로 바람까지 고려했기에 무난히 파온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한껏 기세가 올랐던 봄이 엉뚱하게도 뒤땅을 심하게 때리고 말았다.

피칭웨지를 잡지 않고 9번 아이언으로 컨트롤 샷을 한 것은 좋은데, 머리가 업 다운이 되며 헤드업까지 한 결과다.

아마추어들에게서나 나타나는 어이없는 스윙에 타구는 80야드도 나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하필이면 그린 앞이 울룩불룩한 마운드가 연이어진 터라 뻗어 나가지 못한 것이다.

본인도 놀랐는지 클럽을 떨어뜨린 봄이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실망했던 팬들이 그 모습에 웃은 건 다행이려나.

-아이고! 지난 홀에 이글을 잡고 너무 흥분했나요?

-아무래도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다양한 상황을 직접 겪어 본 선수와 똑같을 수는 없지요.

-그래도 좀 터무니없는 샷이네요. 이번 겨울에 바짝 가다듬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야 당연하지요. 코치가 미스터 퍼펙트 아닙니까.

-아! 태국에 새롭게 오픈한 TPK 동계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하겠군요. 그 캠프에 대한 소문이 아주 무성하던데, 벌써 마감했다는 소식도 들리더군요.

-유우키. 선두권에서 경쟁하는 선수들의 성적이 어떤지 확인 좀 해 주시죠.

-아! 네. 워낙 말들이 많아서요. 하하하.

아무리 골프계를 흔드는 화젯거리지만 사적인 사업에 대해 방송에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한 카즈히로 해설이 얼른 화제를 바꾸며 눈치를 줬다.

다행히 곧바로 이해한 유우키가 다른 말을 했지만 그 덕분에 TPK의 겨울 전지훈련 사업은 광고가 된 셈이었다.

“잘한다. 잘해.”

“죄송해요.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일부러 미스 샷을 하는 선수는 없어. 그게 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결과라는 것만 명심해.”

“네.”

세컨 샷이 다운 힐 라이에 걸린 탓에 결국 보기를 기록하고 말았다. 이후 정신을 차렸지만 한번 흐트러진 스윙은 좀처럼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버디와 보기를 맞바꾸며 이후 이븐파를 기록한 봄은 결국 -11로 경기를 끝마쳤다.

-14 눅 쑤카판

-13 우에다 모모코

-12 신지애

-11 히가 마미코, 전미정, 이즈카 하루

선두와 3타 차 공동 4위, 실망할 성적은 아니기에 언론의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당사자는 시무룩했다.

“고개 들어. -5는 나쁜 스코어가 아니잖아.”

“창피해요. 제 스스로에게.”

남들의 시선이 아닌 본인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한 부분은 바람직한 일이었다. 이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뿐.

“그럴 것 없어. 다시는 실수하지 않도록 죽어라고 연습하면 되니까.”

“네. 얼른 씻고 나올게요.”

사실 2타 정도는 더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한 번 실수가 나온 뒤, 의심이 싹튼 것 같았다. 과연 자신이 좋은 샷을 할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으로 어떻게 최고의 샷이 나오겠는가!

“공 프로!”

“아! 안녕하세요?”

“그럼. 나야 늘 잘 지내지. 근데 좀 섭섭한데?”

“네?”

“아무리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었다지만 선배인 내가 먼저 이렇게 찾아와 인사해야 하나?”

“아이고. 죄송합니다. 보시다시피 워낙 바빠서요.”

농담을 진담처럼 뱉는 전미정 프로가 찾아왔다.

내일 봄과 한 조에서 함께 경기를 할 것이기에 어차피 만나서 인사를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본의 아니게 미안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엉뚱한 핑계의 대상은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봄이었다.

“괴짜가 하나 더 나타난 건가?”

“프로님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음……. 미스터가 아니라 ‘미스 퍼펙트’ 같다고나 할까?”

본인을 빗댄 표현이 쑥스러웠지만 대단한 칭찬이었다.

아직 프로 자격도 갖추지 못한 아마추어에게 감히 붙이기 힘든 표현이지만 전 프로가 실없는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님을 알기에 눈이 마주친 봄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그런데 다가오며 던진 봄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저 연습 좀 더 하고 싶어요.”

“어서 이리와. 인사 드려야지.”

“누구신데요?”

농담할 상황도 아닌데 해맑은 봄의 표정에 가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정말로 JLPGA 통산 26승에 빛나는 전설의 전 프로를 모르는 게 분명했다.

슬쩍 곁눈질로 확인한 전 프로의 얼굴에도 당황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필상의 난처한 입장을 이해하는지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즈카 하루. 내일 같이 경기를 할 전미정 프로에요.”

“아! 한국 분이시네요?”

“어? 한국말을 잘하네?”

“그럼요. 언니. 제 한국 이름은 봄이에요. 김 봄.”

“교포야?”

“네. 아직 밝힐 상황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살고 싶은 한국 귀화 희망자에요.”

“아! 그렇구나.”

좀 더 연습하고 싶다더니, 금방 전 프로와 죽이 맞아 수다를 떨었다. 아무래도 후덕한 전 프로를 단번에 알아본 듯.

커피를 홀짝이는 모습이 싫지는 않지만 내일 경쟁할 선수인데, 이렇게 친해져도 되나 싶을 정도로 급격히 친해졌다.

* * *

“어? 대표님.”

“갑자기 새벽에 나타나 더 반갑죠?”

“네. 온다고 말씀이라도 해 주시지.”

“그런다고 달라질 것도 없을 것 같은데요 뭘.”

“그렇기는 하죠. 하하하.”

“근데 봄은 아직 안 일어났나요?”

“아뇨. 나온다고 하더니 왜 늦는지 모르겠습니다.”

새벽 6시였다.

호텔 로비에 나와 봄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 대표가 갑자기 나타났다. 어젯밤에 미야자키에 도착해 모모코를 만나고 야간 기차를 타고 지금 막 도착한 것이다.

“대회를 준비하려면 제가 직접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어차피 오늘 밤에 미야자키로 넘어갈 텐데 피곤하지 않으세요?”

“다 이유가 있죠.”

“이유라니요?”

“봄이 시드를 받으면 누군가는 매니지먼트를 해야 하잖아요. 먼저 연락이 왔던데 모르고 있었나 보네요.”

“아! 하여간 재미있는 녀석이라니까요.”

“숙녀에게 녀석이라는 표현은 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봄이 로비로 걸어 나왔다.

그런데 이 대표는 물론 필상도 깜짝 놀랐다.

복장이…….

“봄. 너 왜 그래?”

“안 예뻐요? 다시 갈아입어야 하나?”

털털하게 입던 봄이 완벽한 패션을 착용하고 나타났던 것이다. 노란 티셔츠에 하늘색 스커트, 그 아래 살색 스타킹을 입은 모습이 굉장히 선정적으로 보였다.

예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익숙하지 않아 당황스러웠던 것인데, 곁에 있던 이 대표가 얼른 수습했다.

“너무 예쁘다. 김봄.”

“어? 안녕하세요. 정말 괜찮죠?”

“그럼! 이렇게 예쁜데 왜 그동안 추리하게 입은 거야?”

“히히…….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맙소사!

봄은 오늘 기필코 우승한다고 확신하고 나온 것이다.

하기야 젊고 풋풋한 그녀의 미모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동안 너무 칙칙한 모습을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다.

여자 프로에게 외모는 은근히 중요하다.

팬을 불러 모으고 그로 인해 스폰서가 나서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진즉에 충고를 해 줬어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대표와 얘기를 나누면서도 은근히 필상의 눈치를 살피는 이유는 말을 안 해도 짐작이 되었다.

예쁘냐? 괜찮아 보이냐?

그런 걸 묻고 싶은 것 같은데 차마 입을 떼지 못할 뿐.

“좋네. 당장 남자 팬들이 줄을 서겠어.”

“좀 불편하기는 해요.”

“그럼 편한 걸로 갈아입든지.”

“싫어요. 이거 모모코 언니가 같이 쇼핑해 준 거란 말이에요. 연습하면서 익숙해질 거니까 괜찮아요.”

예쁜 모습이 싫지 않으면서도 괜히 거부감이 일었다.

마치 예쁜 여동생을 둔 오빠의 마음 같다고나 할까?

늑대들의 느끼한 눈빛을 받는 게 불편할 것 같았으나 이유는 다른 것을 가져다 붙였다. 경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낯선 복장은 삼가는 게 좋다고.

물론 처음에는 필상의 눈치를 보던 봄이 이내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연습을 시작했다.

“스윙이 아주 시원시원하네요.”

“아직 어설퍼요. 어제 경기 못 보셨어요?”

“봤죠. 그런데도 전 봄이 우승할 것 같아요.”

“왜 다들 좋게만 보는 거죠?”

“실제 파격적이니까요. 공 프로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둘이 빼다 닮았다고 해요. 그러니까 말이 필요 없는 거죠.”

“혹시 모모코도 그렇게 평가하던가요?”

“네. 좋은 경쟁자가 될 것 같다고 하던데요.”

봄을 가장 잘 아는 모모코마저 그렇게 본다면 더 이상 왈가왈부할 게 없었다. 다만 자신의 눈에 차지 않는 부분을 하루빨리 교정하는 게 남았을 뿐.

-이즈카 하루. 오늘은 전 프로와 매치 업이 되었네요?

-네. 어제 함께 경기했던 미나미와 비교하면 훨씬 부담스러운 상대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 일전에 둘이 파나소닉 오픈에서 연장전을 치러 가츠 미나미가 이기지 않았나요?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1개 홀 플레이였고 한 라운드를 같이 펼치는 것은 그와 또 다릅니다. 분명히 기량 외의 다른 부분이 작용할 겁니다.

-경기 운용이 상대적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의식할 필요는 없지만 전 프로와 같은 대 선수와 플레이를 할 때는 겸손하게 배운다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굳이 되지도 않을 신경전을 펼치지 말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괜히 도발했다가는 오히려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만히 들어 보면 중계진의 속마음은 그대로 드러났다. 우승 가능성이 높은 선두권에 일본 선수가 셋, 타국 선수가 셋이다.

우에다 모모코가 가장 유력한 선수지만 각 조마다 일본 선수와 외국 선수가 매치된 상태이기 때문에 편파적인 중계를 하면서도 그다지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1번 홀부터 시작한 두 선수가 홀을 거듭하면서 중계진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처음 인사할 때부터 포옹까지 하더니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영락없이 오누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 와중에 가장 바쁜 사람은 필상이었다.

최종일에는 코스 세팅을 어렵게 한다고 공지하더니 정말 캐디의 역할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홀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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