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27화 (227/354)

227. 최고의 샷

“타구가 좌충우돌할 때, 가장 쉬운 교정은 힘 조절이야.”

“한 클럽 길게 잡고 가볍게 치라는 거죠?”

“필요하면 두 클럽 길게 잡아도 괜찮고 파격적인 시도를 하는 것도 좋지. 평소에 연습하지 않은 샷은 위험하지만.”

대부분의 아마추어들이 가진 단점을 봄도 가지고 있다.

매번 풀 스윙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습관은 프로라면, 아니 골프를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반드시 버려야 한다.

하루 이틀 골프를 칠 것도 아닌데, 어찌 매일 일정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때로는 지치고 힘든 날도 있고 부상 때문에 최고의 스윙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재현할 수 있는 적절한 힘 조절인 것이다.

“피칭 주세요.”

“오케이!”

봄의 13번 홀 티샷은 아주 훌륭했다.

우측으로 완만하게 휘는 도그렉 홀로 밀리면 여지없이 벼랑 아래의 OB에 빠지기 때문에 대부분 좌측을 공략한다.

하지만 봄은 과감하게 벼랑을 건너 페어웨이 정중앙을 공략했다. 비거리도 258야드, 남은 거리는 105야드에 불과했다.

평소라면 샌드웨지를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갭 웨지도 아닌 피칭웨지를 요구한 그녀는 필상이 원하는 부드러운 컨트롤 샷을 구현해 냈다.

홀컵 앞에 떨어진 공이 길게 튀었으나 마지막에 백스핀이 걸리며 핀에 다가오자 팬들의 비명은 고막을 찢을 것 같았다.

-우후! 백스핀!

-갸름한 체구와는 달리 힘이 아주 좋군요. 기본은 확실하게 닦인 선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컨트롤 샷을 하면서도 스핀을 거는 것은 확실히 좋아 보이기는 하네요. 하지만 실수가 너무 잦지 않나요?

-그 점은 공감합니다. 하지만 골프를 배운 지 몇 달 되지 않은 아마추어가 저런 실력을 보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골프를 배운지 몇 달 되지 않았다고요?

-아! 네.

이즈카 하루라는 일본 이름을 가진 봄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고향, 나이, 출신 학교 외에 그녀를 평가할 그 어떤 정보도 없어 방송을 준비하던 중계진은 난감했다.

분명히 필상 때문에 팬들의 관심을 받을 텐데, 아무리 뒤져도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어제까지 자신과 똑같았던 해설위원이 갑자기 폭탄 같은 발언을 한 것이다.

아무리 아마추어라도 바늘구멍이라는 오픈 대회 예선을 통과했으며 프로들과 당당히 겨루고 있는 선수가 또다시 골프를 배운 지 몇 달 되지 않았다니!

필상도 비슷했지만 그래도 캐디로 일한 경력도 있고 한국에서 세미프로 자격을 얻고 일본에 와 도전했다.

-만약 골프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확실히 센세이셔널한 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골프를 즐긴 팬들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닐 것 같군요.

-세상 불공평하다는 의미인가요?

-네. 그렇지 않을까요?

-묘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전시키는데, 그건 그렇게 바라볼 사안이 아닙니다. 아마추어 고수들이 프로 전향을 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먹고살기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요?

-잘 알고 계시는군요. 프로 데뷔를 원한다고 해도 쉽게 되지 않을뿐더러 프로 선수가 되려면 많은 것을 내려놔야 합니다. 또한 일정한 결과를 얻기 전에는 혹독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자기희생과 결단, 그걸 왜 가볍게 여기시는 겁니까!

모든 프로 선수가 위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종목이고 인생을 건 직업으로 선택하려면 많은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골프에 전념해도 먹고 살 형편이 되거나 누군가의 희생, 또는 후원자가 있어야 한다.

또한 무수히 많은 이들이 도전하지만 치열한 경쟁을 뚫고 데뷔하는 비율도 극히 낮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는 것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훨씬 어렵고 비좁기에.

게다가 프로의 자격을 갖춰도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생활을 영위할 만한 성적이 받쳐 주지 못해 방향을 선회하는 경우가 허다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선택받은 일부 슈퍼스타에게 지나치게 부와 명예가 쏠리는 것도 부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미 그 길을 걸어 봤던 카즈히로의 반응은 모두의 예상보다 거칠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뜬금없는 반응을 보여 유우키는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눈치가 빨라 다른 이유도 있을 거라는 짐작은 했다.

-팬들은 영웅 스토리에 열광하기는 하죠. 만약 이즈카 하루가 이 대회를 우승하고 일본 여자 골프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다면 그 또한 아주 흥미로운 일일 것 같기는 하네요.

-저 또한 아직은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는 도전하는 정신이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젊고 유망한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바라본다면 하루의 선전도 우리 일본 골프계를 위해 바람직한 일인 것입니다.

-아! 그렇군요. 이번 대회는 불참했지만 여신 모모코가 다시 투어로 돌아온 이 시점에 경쟁력을 갖춘 신인 선수들이 등장해 춘추전국시대를 이루는 것을 저도 기대해 보겠습니다.

-급성장한 한국 투어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즈카 하루와 같은 신인의 발굴은 기뻐해야할 일이지요. 하하하.

13번 홀에서 버디 작성에 성공한 봄은 드디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힘을 뺀 컨트롤 샷의 묘미에 푹 빠진 듯, 절묘한 샷을 연이어 선보이며 팬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잃었던 타수를 복구했을 뿐더러 차분하게 타수를 줄여 2라운드도 -3으로 마쳤다. 예선 종합 -6, 공동 9위에 이름을 올리며 우승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경기를 마친 소감이 아주 흥미로웠다.

“너무 재밌어요.”

“한 라운드는 한 편의 드라마이지. 얼마나 꼼꼼하게 준비하고 냉정하게 치르느냐에 따라 결과가 주어지니까.”

“정말 드라마가 맞는 것 같아요. 아쉽고 안타깝지만 절대 돌이킬 수는 없는 인생의 축소판 같아요.”

스무 살 여자애의 입에서 나온 표현치고는 독특했다.

그녀가 짊어지고 살아왔던 삶이 결코 녹록치 않았음을 방증하는 것 같았다.

“항상 자신이 끝낸 경기를 분석하고 복기한 뒤에 조금이라도 나아지려고 노력해야 해.”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매일 골프를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팔자인가!

하지만 대부분의 아마추어들은 없는 시간을 쪼개고 여력을 아껴 벼르고 별러 필드에 나간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잠까지 설치지만 막상 라운드에 임하면 기대와 결과는 딴판이다.

그래도 좋았던 샷 몇 개를 떠올리며 샤워를 하고 동반자들과 식사를 나눌 때면 성적에 상관없이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프로가 되고자 한다면 그런 자세는 버려야한다.

골프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라운드 하나하나가 다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소중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오늘 보니까 샘이 나던데요?’

“샘이 왜 나?”

‘봄을 너무 예뻐하는 것 같아서요.’

“하하하. 당신이 질투를 하니까 왜 기분이 좋은 거지?”

‘진짜 나쁘다. 수미한테 다 이를 거예요.’

물론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수미가 알아들을 리 없다.

하지만 모모코의 기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어느 여인이 다른 여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걸 좋아하겠는가.

물론 그걸 언급하는 순간, 불필요한 오해는 없다는 것을 알려 주는 셈이니 마음은 한결 편했다. 그런데도 화제를 돌렸다.

일본 투어 시즌이 종료되는 시점에 이벤트 대회를 열 것인데, 여자 선수들 수급에 대한 그녀의 조언을 구했다.

‘치! 그걸 걱정이라고 하세요?’

“왜?”

‘줄을 설 걸요! 소문만 나면.’

하기야 남자는 최고의 선수들만 초청할 것이다.

다른 선수는 다 제켜두더라도 타이거나 미켈슨과 한 팀을 이뤄 라운드를 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추억이 되는 것이다.

미국 출신이 둘, 한국 출신이 둘, 그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남자 프로 둘을 섭외하기로 결정했고 여자 프로들은 가급적 젊고 전도유망한 선수들로 구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 대표가 전면에 나서겠지만 모모코도 적극 돕기로 했다. 오랜만에 시즌 최종전에서 만나는 동료들에게 슬쩍슬쩍 흘리기만 해도 충분할 거란다.

“결선에서는 다른 거 보지 말고 동반자만 이길 게요!”

“그래. 그것도 좋지.”

동반자만 이기겠다는 말은 무빙데이에 임하는 선수의 마음가짐으로 그다지 좋은 자세라고는 할 수는 없다.

-6, 공동 9위이기 때문에 5타 차인 선두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지난 두 라운드보다 더 세게 몰아쳐야 한다.

처음에는 출전에 의미를 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기대 이상의 성적으로 결선에 오르자 우승에 목이 말랐다.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판단이 섰으나 문제는 봄이 과연 결선의 중압감을 극복하고 평소보다 더 나은 기량을 보일 수 있을지, 그걸 자신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봄이 상대를 이긴다는 전제하에 기왕이면 동반자가 잘 쳐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도착한 1번 홀에서 기다린 상대는 가츠 미나미였다.

“안녕하세요?”

“아! 네. 반갑습니다.”

“작년에 인사드린 적이 있는데, 저 기억 못하시죠?”

“JLPGA 최연소 챔피언. 미나미 맞죠?”

“아! 고마워요. 선생님.”

먼저 도착한 미나미는 필상과 봄이 나타나자 얼른 달려와 인사했다. 동반자인 봄과는 건성건성, 필상에게는 깍듯했다.

그런 행동이 봄을 심하게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당사자는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녀의 커리어를 보면 이해는 된다.

15세 293일인 고교시절에 발렌타인 챔피언십을 거머쥐며 최연소 우승 기록을 갈아치운 그녀는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괜히 미야자토 아이랑 비교되는 게 아니구나!’

157cm, 56kg. 작고 귀여운 외모만 보면 절대 최고의 골프 선수가 될 것이라고는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모모코보다 한 살 많은 그녀는 2017년 데뷔 후 꾸준한 성적을 기록하며 일찌감치 강자가 싹수를 보였다.

모모코가 여신으로 떠오른 작년에 2승을 거뒀고 모모코가 빠진 올 시즌에는 3승을 거두며 상금 순위 2위에 자리 잡았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강적들과의 맞대결에서 강점을 보이며, 말이 필요 없는 강자인 전미정 프로를 플레이오프에서 이긴 장면 때문에 크게 주목을 받기도 했다.

시즌이 막바지를 향하고 있는 터라 남은 결과에 따라 얼마든지 상금왕을 비롯한 각종 타이틀 획득도 가능한 상태였다.

“개 건방!”

“22살에 7승을 거둔 커리어를 쌓았으면 필드에서 나와 저럴 만도 하지. 프로는 오로지 결과로 말하는 거니까!”

“모모코 언니는 저러지 않는다고요. 오늘 제가 저 꼬마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거예요.”

“하하하. 골프는 아마 입으로 치는 게 아니지?”

“당연하죠!”

필상은 얼른 자료를 확인했다.

오늘 라운드에 대비해 필요한 자료를 J&L에서 보내 왔는데, 자세히 보지 않았으나 지금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가츠 미나미가 어떤 선수인지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이터를 확인한 필상의 표정은 굳었다.

평균 퍼트 수 1.75 랭킹 1위

평균 버디 수 3.79 랭킹 2위

파 세이브 비율 86.2% 7위

파 온 비율 69.9% 랭킹 14위…….

대부분의 지표가 최고 상위권이었다.

작은 체구 때문에 취약하리라 봤던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마저 247.16야드로 랭킹 10위에 마크되어 있었다.

그나마 약점을 찾자면 비거리에 대한 집착 때문인지, 거리는 나가지만 페어웨이 안착률은 62.8%로 랭킹 64위였다.

봄에게 힘이 될 자료를 찾던 필상은 얼른 자료를 덮었다. 그 어느 하나 봄이 낫다고 주장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굿 샷!”

아너는 미나미였다.

팬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고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섰지만 부담은커녕 깔끔한 스윙으로 246야드를 찍었다.

살짝 당겨졌지만 페어웨이를 무난하게 지켰고 세컨샷으로 그린을 공략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에 비해 봄은 꽤나 상기된 표정으로 타석에 올라섰다. 아무래도 인지도가 크게 밀리기에 그나마 박수를 보낸 팬들도 언더독을 향한 응원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했다.

괜히 울화가 치민 필상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봄. 파이팅!”

필상의 갑작스러운 응원소리에 쓱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긴장한 게 아니었다.

천천히 샷 루틴을 밟은 봄이 어드레스를 취했고 필상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아주 만족스러운 스윙을 보게 되었다.

테이크 백은 평소보다 느렸다.

강한 임팩트를 위해 봄은 대체적으로 빠른 템포를 유지했는데, 지금은 마치 필상의 티샷 스윙을 보는 것 같았다.

커다란 스윙 아크도 얼마나 이번 스윙에 집중하고 있는지를 증명했다. 완벽하게 돌아간 왼쪽 어깨가 그녀의 턱에 닿을 무렵 스윙 탑에서 잠시 머문 클럽 헤드를 보는 순간, 필상은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강조하고 훈련을 시켜도 잘되지 않던 최고의 풀스윙이 실전에서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쉬이이익!

하체부터 시작한 체중 이동의 타이밍도 기가 막혔다.

과감하게 당긴 다운 블로우 때, 가장 주의할 점은 세게 치려는 마음이 강하다보면 그립에 힘이 잔뜩 들어가 오히려 가속을 방해하는 것인데, 그마저도 완벽했다.

게다가 폭발적인 임팩트가 이뤄진 뒤의 팔로우 스로우도 정확한 궤적을 따라 멋진 피니시 동작을 만들었으며 그 와중에도 시선은 공이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야말로 필상이 원했던 최고의 샷이 구현된 것이다.

“나이스! 나이스 샷!”

칭찬에 인색한 필상의 입에서 연이은 찬사가 터졌다.

자신의 스윙을 음미하듯 자세를 풀지 않고 유지하던 봄이 씩 웃으며 돌아서는데, 필상은 다시 한 번 전율을 느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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