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26화 (226/354)

226. 홀로 서기

“가셨어요.”

“아무 말도 없이?”

“전하라는 말씀이 있기는 했어요.”

“무슨?”

“일생일대의 내기에 졌다고 하던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든 오빠가 원하면 오다 섬은 넘기시겠다고.”

내기를 하자는 말은 있었지만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백 가지 얼굴을 지녔다는 홀에서 멋진 샷 대결을 연상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전혀 다른 의미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이 벌일 위험한 일에 대한 반대급부나 보험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을 염두에 뒀을 테고 실패한 뒤에 그런 말을 전한 이유는 일종의 회유가 아닌가 싶었다.

“당치도 않은 말을 하셨군!”

“맞아요. 거긴 제몫이거든요.”

“아! 그러네. 하하하.”

다시 생각해 보면 중의적인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그 와중에도 봄과 함께하라는.

도대체 얼마나 더 무리를 거듭할지 알 수가 없어 대회가 끝나면 직접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반면에 봄에 대한 신뢰는 더욱 깊어졌다. 그녀가 돕지 않았다면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토시와의 의도와는 달리 모든 관계는 단절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는 돌이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승하지 못해도 실망하지 않을 거지?”

“무슨 말이 그래요!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죠.”

“그래. 일단 부딪쳐 보자.”

봄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나름 신경을 썼지만 여전히 그녀는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한계다.

그러나 이번 일을 겪으며 깨달은 바, 그녀는 자격이 있다.

필상과 모모코의 관계를 존중하며 부적절한 그 어떤 사리사욕도 부리지 않는다면 필상이 챙기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에히메에서 봄과의 관계는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늘 스스로 격을 두던 녀석과 부쩍 친해졌다.

“마음껏 날려 봐.”

“정말이요?”

“그래. 시원하게 시작해 보자고.”

1번 홀 티 박스 근처에는 수많은 골프팬들이 몰렸다. 이번 조에 유명한 선수가 포함된 것도 아닌데, 기이한 일이었다.

떠들썩한 팬들의 시선을 끌어 모은 두 남녀는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오히려 이 상황을 한껏 즐기는 것 같았다.

하기야 세계 랭킹 1위인 미스터 퍼펙트가 무명 신인 선수의 캐디로 나섰으니 그럴 만했다.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모모코에 이은 새로운 신데렐라가 탄생할 것이라고들 하지만 그런 기대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따앙!

마침내 첫 티샷이 터졌다.

다소 빠른 스윙 템포였으나 큰 스윙 아크에 적절한 체중 이동이 이뤄졌고 시원한 피니시는 완벽에 가까웠다.

-와우! 굉장히 다이내믹한 스윙이군요.

-이즈카 하루. 적어도 공에 힘을 실을 줄 아는 선수군요.

-하하하. 그야 당연하죠. 오늘 가장 주목을 받는 선수이고 미스터 퍼펙트가 가르친 제자인데 허술할 리가 있나요!

-그녀에 대한 기록을 살펴봤는데 아마추어 전적이 전혀 없더군요. 후쿠오카에서 자랐고 다른 운동을 했던 기록도 없는데, 어떻게 공 프로와 인연을 맺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의 골프팬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이었다.

그녀의 기량이나 성적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에 말할 것이 없지만 일본 국적을 지닌 무명 선수가 세계 최고의 선수와 대체 어떻게 맺어졌는지 의아해했다.

-그러게요. 예선 성적도 딱히 대단하지는 않던데 이렇게 대단한 관심을 받는 건 미스터 퍼펙트의 후광이라고 봐야겠죠?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골프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미스터 퍼펙트이기 때문에 저도 좀 기대가 되기는 하네요.

-가장 교과서적인 스윙 폼을 지녔고 골프 여신 모모코의 코치이며 골프 레슨과 관련된 사업을 하고 있어서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모모코는 어려서부터 촉망받던 선수였지만 이즈카 하루는 무명 선수인데, 부담도 클 것 같아요. 괜히 망신만 당하는 건 아닐지……. 하하하!

매번 혹평을 하다가 망신을 당했음에도 여전히 필상의 이번 행동에 대해 좋은 평가는 내리지 않았다.

그럴 만한 여건인 것은 맞다. 프로 대회에 출전한 아마추어 선수라면 출전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적절한 접근이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번에도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 언제 필상이나 봄이 관심을 가져 달라고 했던가? 그들 스스로 이슈화시켰고 북과 장구를 치는 꼴인데, 웃기는 일이었다.

필상 본인이 똑같은 방식으로 전무후무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그런 일이 또 발생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만약 일본 골프계의 대부라 불리는 사토시가 딸을 위해 직접 손을 썼다면 상황은 다르게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뜻밖에도 사토시는 이 문제에 관해 관여치 않았다.

‘믿음인가?’

필상과의 인연에는 지나친 집착을 보였다.

마치 그게 일생일대의 숙제인 양 나섰지만 정녕 봄이 원하는 일에는 잠잠한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필상은 그 이유가 굳은 신뢰라고 판단했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자신의 꿈을 이뤄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이젠 부디 딸을 놔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홀을 거듭하면서 좀 기이한 반응이 나타났다.

시원시원한 티샷이나 정교한 아이언 샷이 터질 때면 어김없이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지만 실수할 때는 야유가 터졌다.

미스 샷을 하고 싶은 선수가 어디 있겠나!

때문에 실수가 나오면 팬들은 보통 안타까워하거나 아쉬운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봄은 필상이라는 거대한 후광 때문에 도리어 손해를 보는 측면이 있었다.

“빨라. 조금만 더 천천히. 스윙 궤적이 오락가락하잖아.”

“흥분이 잘 가라앉지 않아서 그래요.”

“그럼 아예 이를 악물고 치든지.”

“싫어요.”

“왜?”

“안 그래도 미운 털이 박혔는데 너무 독해 보일 것 같아요.”

“사람들은 지금 네 얼굴이나 패션을 보려고 온 게 아니야. 네 샷을 보러 온 거지. 네가 왜 여기 왔는지 생각해 보라고.”

“알았어요.”

고집은 무척 세지만 젊은 여자치고는 보기 드물게 털털한 성격이다. 오랫동안 준비했던 대회에 출전하면서 연습 때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나왔다.

모모코와 완벽하게 대비되는 부분인데, 남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자신감의 발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팬들을 의식하는 발언을 해 적잖이 놀랐다.

‘어쩔 수 없는 여자라 이건가?’

일의 선후를 명확히 하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무리한 도전을 하는 무명 선수가 실력보다 미모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다지 좋아 보일 리가 없다. 더욱이 필상이 뒤를 지키고 있어 그에 대한 부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필상은 알고 있다.

봄이 상당한 매력을 지닌 여자라는 것을.

타고난 뽀얀 피부는 햇살 아래 수없이 라운드를 반복해도 거칠어지거나 타지 않았고 선명한 이목구비는 마주할 때마다 전형적인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얼핏 보면 남자처럼 보일 정도로 외모에 신경 쓰지 않지만 때가 되면 드러날 것이다. 보석은 아무리 감춰져 있어도 빛을 발하게 마련이니까.

“나이스 샷!”

골프는 한 홀에서 나이스 샷이 한 번만 나와도 타수를 잃지는 않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버디를 잡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번 이상의 굿 샷이 필요하다.

그런데 봄의 이날 플레이는 뭔가 이빨이 빠진 것처럼 조화롭지가 못했다. 티샷이 좋으면 아이언이 흔들렸고 아이언이 좋을 때는 숏 게임이 말썽을 부렸다.

경험이 일천한 심리적인 압박감이 작용한 결과였는데, 마침내 6번 홀에서 첫 버디 기회를 잡았다. 262야드 티샷에 이어 122야드를 피칭웨지로 공략해 2야드 안팎에 붙인 것이다.

필상의 칭찬에 격한 하이파이브를 나눈 봄은 정확한 퍼팅 스트로크로 버디를 잡은 이후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필상처럼 줄버디를 잡지는 못했으나 프로들과 겨룬 첫 라운드를 보기 없이 -3으로 끝마친 것은 칭찬받을 만했다.

동반 플레이를 했던 선수들 중에 가장 좋은 스코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했어.”

첫 라운드를 마친 느낌은 좋았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으나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다부진 성격과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기대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의 반응도 체크했는데, 필상의 생각과는 달랐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인데, 그들에게는 그런 것까지 봐 줄 여유 따위는 없어 보였다.

“얼른 씻고 나올게요. 저 어프로치 좀 봐주세요.”

“뭐가 부족한지 알아 다행이네. 하하하.”

산뜻하게 출발한 필상과 봄은 샤워를 마친 뒤, 연습용 필드로 향했다. 오늘 불안정했던 숏 게임을 다듬기 위해서였다.

필요 이상의 시선이 껄끄러웠지만 필상도 봄도 타인의 눈길은 안중에 없었다.

“헤드 무게를 느끼면서 더 천천히!”

기본은 이미 익혔다.

하지만 실전에 들어서면 묘하게도 스윙 템포가 빨라졌다. 특히 중간에 장애물이 있을 경우, 실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클럽을 가파르게 드는 습관도 보였다.

그린을 놓치더라도 숏 게임이 되면 골프는 쉬워진다. 그래서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필상은 어프로치 리듬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연습에 몰입했다.

더도 말고 20야드를 기준으로 확실한 감을 잡는 데 주력했다. 웬만해서는 그 이상의 실수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응급 처방을 내린 것이다.

‘이벤트 대회요?’

“네. 팬들과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구성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날 밤 필상은 이 대표와 긴 통화를 했다.

일본에 오기 전에는 전혀 생각지 않았는데, 막상 일본에서 몇 주 생활하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팬들의 성원이 살갑고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JGTO 대회에 출전할 여건은 되지 않아 그 대신 팬들과 만날 수 있는 이벤트 대회를 구상했다.

‘나이키로서는 아주 반길 것 같기는 해요.’

“후원은 나이키지만 대회 주관은 저희 TPK 일본 사업부가 하고 선수 섭외도 직접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필상이 구상한 이벤트 대회는 2라운드 36홀 경기다.

기존 대회와는 달리 남녀 선수가 한 팀을 이뤄 다양한 매치 방식으로 승부를 가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프로들이 겨루는 정규 대회가 아닌 자선 골프 대회라는 점이다.

상금은 후원사가 지원하지만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해 수익금을 전부 일본 골프 꿈나무 육성 자금으로 기부할 계획이다.

오프시즌에 열리기 때문에 좋은 선수를 섭외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일단 타이거와 미켈슨이 있고 얼핏 떠올려도 협조할 의향을 가진 선수는 많았다.

다만 남자 선수들과 팀을 이룰 여자 선수를 매치시켜야 하는데, 일본에서 진행하는 만큼 JLPGA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을 우선 고려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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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연습한 거 확인하고 싶은 거야?”

“흐흐흐……. 네.”

완벽하면 좋으련만 2라운드에 임한 봄은 아이언이 말썽을 부렸다. 기껏 좋은 티샷을 날리고도 그린에 올리지 못하면 선수는 흔들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텨야 한다.

“18야드 지점에 정확히 떨어뜨려 봐. 우측으로 한 클럽 정도 봐야 해.”

“네. 차분하게 칠게요.”

세컨샷이 너무 짧아 26야드가 남았다. 중간에 벙커가 놓여 있어 시각적인 부담이 확연했지만 봄은 정확한 거리감을 보이며 핀에 쩍 붙였다.

실전을 연습처럼 하라는 말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정말 아슬아슬하군요.

-그래도 타수를 잃지 않는 것이 신기합니다. 든든한 정신력 하나는 인정을 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전체적인 기량은 좀 아쉽습니다.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요? 어제는 숏 게임이 흔들리더니 오늘은 아이언 샷이 자꾸 감기잖습니까! 이래서야 어디 버틸 수나 있을까요?

-그래도 예선 통과는 무난한 성적입니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11명의 아마추어 선수 중에 가장 성적이 좋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경험과 경력은 되겠지만 우승과는 좀 동떨어진 기량이라고 생각되네요. 아직 어리니까 내년, 후년을 염두에 두고 꾸준히 훈련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어제는 해설위원 카즈히로가 냉담한 평가를 내렸는데, 오늘은 오히려 캐스터인 유우키가 모진 칼날을 들이밀었다.

카즈히로가 애써 말을 아끼며 오버하고 있는 유우키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음을 당사자는 모르고 있었다.

여하튼 위험천만한 파 행진을 이어가던 봄은 결국 8번 홀에서 첫 보기를 기록하고 말았다. 151야드 파 3홀에서 티샷이 짧아 가드 벙커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벙커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2퍼팅 보기를 기록한 뒤,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스스로 자신의 기량에 대해 크게 실망한 듯.

“뭐가 문제일까?”

“가르쳐 주세요.”

“생각부터 해 봐. 내가 지적하는 것보다 스스로 느끼고 해결책을 찾는 게 더 낫거든.”

봄의 오늘 아이언 스윙은 거의 일관되게 감겼다.

본인이 가장 답답하겠지만 스스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면 필상이 코치해 해결할 수는 있어도 자기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필상은 스스로 대안을 찾으라고 권했다.

성적도 중요하지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홀로 당당히 설 수 있는 기반을 닦아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깃을 더 오른쪽으로 이동할까요?”

“그건 임시방편이지.”

“그럼 아예 페이드 샷을 구사할까요?”

“오늘만 골프치고 말 거야?”

“에이. 그냥 살살 치는 게 낫겠네요.”

“딩동!”

샷 교정이 필요한 경우, 교정 없는 연습은 무의미하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반복되는 연습은 오히려 나쁜 습관을 굳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아마추어들은 스윙의 일관성이 부족한 것이 더 큰 문제다. 어느 날 갑자기 좋은 샷이 나오면 그게 진리인 양 따라 하게 되는데, 그게 며칠 못 가 다시 말썽을 부린다.

본인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구현해 보라면 재현이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그게 만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일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를 꿈꾸는 봄의 경우는 그 정도로 일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시적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스윙 자체를 교정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며칠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회귀하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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