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25화 (225/354)

225. 행복한 사람

섬 하나를 사들여 자기만의 공간을 만든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물론 항구 인근에는 고기도 잡고 농사도 짓는 이들이 산다. 그들이 없다면 외롭고 공허할 수 있을 외딴 섬일 테지만 사토시는 그들과의 공존을 통해 인간 사는 냄새까지 구현했다.

도로를 타고 완만한 구릉지를 오르자 산비탈에 가려진 작은 별장이 나타났다. 겨울 북풍을 피하고 따스한 햇살을 받을 수 있도록 지어진 아담한 가옥은 자연의 한 조각처럼 보였다.

“자네 불 피울 줄 아나?”

“불이요?”

“밥부터 지어 먹어야 하니까 저기 쌓아 놓은 장작을 가져와서 불부터 피우게. 난 솥을 씻어 올 테니까.”

“하하. 알겠습니다.”

비서가 한 명 따라왔지만 그도 별장에 도착하자 익숙한 듯 자기가 맡은 일을 감당하기에 바빴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많은 이들의 착각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다행히 시골에서 자란 필상은 능숙하게 장작에 불을 피우고 텃밭에 심어진 야채들을 수확해 먹을 수 있게 다듬었다.

그동안 솥에서는 고소한 밥 냄새가 피어올랐고 사토시는 장독에서 퍼 온 된장을 풀어 찌개를 끓였다.

“고추장은 없습니까?”

“있지. 장독대에서 자네가 좀 퍼 와.”

잠시 후 조촐하게 차려진 밥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 어떤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는 것보다 식욕이 돋았다. 직접 수고해서 만든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몇 술 떠먹은 뒤에야 이야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여긴 어떻게 구하게 되셨습니까?”

“봄이 애미가 살던 곳일세. 일제 때 강제로 끌려와 고생만 했는데 해방을 맞고도 돌아가질 못하고 이곳에 정착했지.”

“그랬군요.”

갑자기 봄이 얘기가 나오자 말문이 막혔다.

사토시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남은 인연은 오로지 그녀뿐이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말없이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야 본론이 나온 것이다.

“자네는 참 무심한 친구야.”

“생각이 다를 뿐입니다. 무심한 게 아니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군. 난 그렇게 배웠고 살아왔으니까.”

그 말을 던지는 그에게서 살기가 느껴진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험한 세상을 능동적으로 헤쳐 나온 그가 겪은 삶의 역정은 정의나 명분 따위와는 상관없었다.

오로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하는 것이 선이었다. 그런 그에게 봄은 마지막 상처였고.

“실망이 크시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이해하네.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하지만 말이야, 자네가 아니면 우리 딸을 거둘 남자가 없는데, 난 그걸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해. 나 김성록이 말이야.”

스스로 한국 사람임을 밝혔다.

구구한 소문은 있으나 돈과 권력으로 철저히 세탁된 신분은 그가 일본인이라는 데 조금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았기에 그 고백이 주는 부담감은 결코 작지 않았다.

하지만 필상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대안을 펼쳐 놓았다.

“왜 짝이 없겠습니까! 너무 단정하지 마십시오.”

“과연 그럴까?”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조바심에 일을 그르치지 마시고 제 짝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토시는 자신처럼 특이한 인간을 처음 봤다.

몇십 년 만에 처음 발견한 필상은 그의 마지막 퍼즐을 풀어 줄 유일한 대안이었다. 돈과 권력을 가졌지만 허망하게 보내야 했던 핏줄들을 생각하면 필상의 존재는 너무도 소중했다.

봄이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된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필상은 이미 짝이 있었다.

웬만하면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필상은 알아서 제 길을 착착 걸어왔고 절대 만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필상의 곁을 지키는 여인도 하늘이 찍어 준 것처럼 필상과 다시없을 궁합의 소유자였다.

찾기만 하면 봄을 맡기고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그래서 오라비가 된 겐가?”

“봄이 원한 겁니다. 또한 봄은 어르신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강한 아이입니다. 생각도 올바르고요.”

“그건 자네의 편한 생각일 뿐이고. 내가 아는 봄은 그렇게 순진하거나 멍청한 아이가 아닐세.”

딸을 그렇게 표현하는 아비의 모습에서 몸서리가 쳐졌다.

물론 자신이 봄에 대해 오판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 온 모습은 사토시의 생각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무엇이 그녀를 사토시와 다르게 판단케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토시는 경고했다.

봄은 무섭게 성장하고 있으니 제발 화를 자초하지 말라고.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내기는 내일 해야겠군.”

“그러시지요.”

비서가 안내한 방에 들어선 필상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는 그 느낌은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담백한 장식 가운데 눈에 익은 여자애의 사진이 여러 장 보였다.

개구쟁이 같은 표정의 주인공은 봄이었다.

방이 많지 않아도 굳이 딸 방을 준 이유는 사토시의 바람과 무관치 않았다.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녀의 밝은 웃음 뒤에 감춰진 깊은 애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각별한 부친의 보살핌이 있었지만 타고난 기운을 감당하지 못해 늘 아팠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정말 사고치는 건 아니겠지?’

필상을 만난 뒤, 최소한 그런 걱정은 덜었다.

하지만 생존이 걸린 문제라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안정되지 않은 주변 상황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 보다 깊게 생각해 볼 필요를 느꼈다.

그녀는 자신을 떠나고자 했었다.

그게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지라도 구차하게 필상에게 매달리지 않으려는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스스로 밝혔듯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언제든 도움을 청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필상은 붙들었고 그녀를 곁에 두고 자신이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오늘 사토시의 말을 듣고는 생각이 많아졌다.

그녀의 능력이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하고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 확인이 필요했다.

다다다다닥!

명상을 하다 좀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굉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지축을 울리기 시작했다.

잠이 깬 필상은 창을 열고 테라스로 나섰다. 이미 정원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저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헬리콥터가 시야에 잡혔다.

이곳을 향해 곧장 날아오는 것을 보면 사토시가 부른 게 분명했다. 뭔가 일이 터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곧이어 사토시가 정원에 나타났고 필상을 향해 손짓했다.

“공 프로. 어서 내려오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봄이 쓰러졌어.”

“봄이요?”

필상은 곧장 헬기에 올랐고 사토시와 함께 에히메 현으로 날아갔다. 처음 타본 헬기의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후쿠오카에서 에히메 현까지는 300km를 넘는데, 한 시간 남짓이 지나자 눈에 익은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봄의 출전이 확정된 엘리에르 레이디스 오픈이 열리는 골프클럽 주차장에는 이미 적잖은 사람들이 대기 중이었다. 한밤중이었음에 그들은 모두 사쿠라 재단 직원들인지, 사토시가 내리자 우르르 몰려들어 허리를 굽혔다.

“가세.”

대기 중인 리무진에 몸을 실은 필상은 오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토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놈의 대회 성적이 뭐라고, 무리를 했다는군. 게다가 자네랑 5일이나 떨어져 있었잖은가! 이 무심한 친구!”

“기혈이 엉키기라도 한 겁니까?”

“낸들 알겠는가! 여하튼 잘 좀 부탁하네.”

뜻밖에도 리무진이 멈춰선 곳은 일전에 자신과 함께 예선 결선을 치르기 위해 머물렀던 시골의 작은 온천 여관이었다.

지금은 모든 손님을 내보냈는지, 사토시를 향해 굽실거리는 직원들뿐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미사키가 필상을 발견하고는 얼른 달려왔다.

“프로님!”

“이제 내가 왔으니까 걱정하지 마. 봄은?”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이 도무지…….”

“괜찮아. 얼른 봄에게 나를 안내해.”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봄은 오늘 저녁에 쓰러졌다.

늦게까지 연습에 몰입하던 봄이 갑자기 숙소로 돌아가자고 말하더니 안색이 창백해지고 부축하지 않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해 기겁했다고 한다.

마침 대기 중이던 택시에 태웠으나 바로 혼절하는 바람에 기사에게 병원으로 가자고 말했는데, 그는 자신이 사쿠라 재단 직원이라며 병원이 아닌 숙소로 데려왔단다.

이후 많은 직원들이 몰려와 모종의 조치를 취했다고 했다.

‘왜 곧바로 움직이지 않은 거지?’

대략 4시간이나 차이가 났다.

한국에 있을 때도 은밀하게 경호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쓰러진 뒤에 곧바로 연락이 왔을 텐데, 왜 뒤늦게 움직인 것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각별하게 돌본 의료진이 응급조치를 취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여하튼 상황이 좀 미묘하게 흐른다는 느낌은 들었으나 일단 중요한 것은 봄을 만나 상태부터 확인하는 것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선 필상은 주변에 있던 이들이 철수하는 것부터 감지했다. 안내한 비서가 미사키까지 데리고 나가는 모습은 왠지 께름칙했다.

“봄아.”

“…….”

봄은 침대에 잠든 듯 누워있었다.

눈을 꼭 감고 있지만 정신을 잃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필상이 왔는데도 아무런 기척을 하지 않았다.

불안감을 느낀 필상은 일단 침대에 다가가 앉은 뒤, 그녀의 손목을 잡아 맥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손이 닿은 순간,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그동안 이럴 때를 대비해 자신의 비법인 토납을 가르치고 함께 운용해 왔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그래서 일단 정순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봄아!”

다급히 그녀를 부른 이유는 그녀가 손을 뺏기 때문이다.

이대로 두면 정말 위험할 수 있는데 왜 치유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애써 고개를 돌리더니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어서 가요. 여기 있어서 좋을 게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이렇게 아픈데 내가 어딜 가?”

“가요. 후회하지 말고.”

“대체 무슨 말이야?”

그 말을 하며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필상은 감각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그 순간, 속에서 뜨거운 불길이 확 일었다.

아주 미묘한 향이 이 작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그게 아마도 기이한 작용을 하는 것 같았다.

“하하하. 이거였어?”

저간의 사정은 정확히 모르지만 사토시는 다시 한 번 실망스러운 일을 벌인 것 같았다.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되지 않지만 어이가 없었다. 이런 어설픈 수작에 넘어갈 만큼 나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충분히 잠재울 수 있다고 판단했던 불길은 정좌를 하고 맞설수록 더욱 뜨겁게 불타올랐다.

‘당황하면 안 돼!’

끈적끈적한 욕망이 전신을 휘감는 가운데 명경처럼 맑은 기운을 피워 올리는 일은 번번이 실패를 거듭했다.

순식간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몰려왔다.

공든 탑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 손만 뻗으면 이 모든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유혹이 모든 사고를 마비시킬 것만 같았다.

* * *

“대체 왜 그런 게냐?”

“…….”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작은 정원의 한구석, 얼굴 가득 주름이 자글자글한 한 노인은 자신의 앞에 다소곳이 앉은 젊은 여자를 추궁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듯 대답 없는 여인을 바라보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복잡 미묘했다. 그러나 여인이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자 서늘했던 기운은 이내 수그러들었다.

“아빠. 이제 그만하세요.”

“뭘 그만해. 넌 왜 차려 준 네 밥그릇도 못 챙기는 게냐.”

“제 밥그릇이 아니거든요.”

“남녀 사이에 임자가 어디 있어. 일단 너부터 살고 봐야지.”

“그 생각은 틀렸어요. 오빠는 그렇게 꺾일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더 힘들어졌을 거예요.”

지난밤 필상을 그대로 뒀다면 욕망의 화신으로 변했을 것이다. 양기를 폭발시키는 악독한 수단을 강구했기에 그 결과는 봄과 남녀의 관계로 묶이는 결과를 낳았을 테고.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봄은 필상을 도와 고비를 함께 넘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닥친 위기도 넘겼지만 그건 사토시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봄이 필상의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아내가 있지만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세상의 법도는 얼마든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애써 참았던 것은 자연의 섭리가 그렇게 인도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인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남녀가 아닌 남매가 되어 정이 들어 버리면 자신이 죽고 난 뒤에 그것을 되돌릴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졸렬한 방법까지 동원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필상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눈에 선했지만 그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짊어지려고 했다.

그런데 결국 봄이 나서서 훼방을 놓은 셈이 되었다.

“평생 지금처럼 살고 싶은 게냐?”

“그게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엄마에 비하면 전 행복한 사람이잖아요.”

“…….”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둘만이 알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한마디에 사토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봄은 부친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이제 그만 가세요. 그리고 앞으로는 사람을 붙일 필요도 없고 찾아오지도 마세요. 그게 저를 위한 거예요.”

“봄아!”

“엄마 기일에는 찾아뵐게요.”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