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24화 (224/354)

224. 백 가지 얼굴을 가진 한 홀

이럴 때는 그냥 장단을 맞춰 주는 게 좋다.

모모코에게는 대체적으로 그러는 편이지만 봄에게는 가급적 정확한 것만 언급했다.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기 때문인데, 그걸 봄도 이해하고 있다.

그래도 서운한 감정은 별개, 입을 삐쭉 내민 녀석이 먼저 폴짝폴짝 앞서서 뛰어갔다.

“뛰지 마!”

“싫어요.”

봄의 가장 큰 장점은 마르지 않는 체력이다.

한 번은 아이언을 치라고 지시하고 깜빡한 필상이 딴 일을 하다가 늦게 왔는데, 7번 아이언을 무려 2시간이나 휘둘렀다고 했다.

손에 잡힌 물집이 미안해 그 뒤로는 제발 요령껏 하라고 말했지만 하루 종일 연습해도 지치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제법 굳은살도 박이고 골프 스윙에 필요한 근육도 자리를 잡아 부상을 걱정할 일은 없어 좋았다.

“127야드야. 뭐 줄까?”

“갭 웨지요.”

“피칭이나 9번으로 쳐.”

“보낼 수 있다니까요!”

“누가 못 보낸대? 긴 클럽으로 컨트롤 샷을 하라고.”

봄의 단점은 아주 고집이 세다는 점이다.

물론 가장 좋은 샷을 염두에 두는 것은 좋다. 하지만 어떻게 매번 최고의 샷을 만들 수 있겠는가!

그래서 힘을 조절하는 방법에 대해 수없이 설명하고 시범도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직진 성향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좋아. 그러면 이번 샷 결과가 나쁘면 내 말 들을 거지?”

“오케이! 대신 잘 붙여서 버디 잡으면 제 공략대로 하는 거예요?”

“알았어.”

여자 선수가 127야드를 52도 웨지로 보내는 것은 어렵다.

파워가 좋은 모모코도 그런 샷은 하지는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봄은 은근히 모모코를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본인의 의지가 강해서인지 그녀의 샷은 기가 막히게 들어갔다. 좋은 결과를 위해 인위적인 조정을 하려던 필상은 이내 포기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기 때문이다.

“봤죠?”

“그래. 아주 좋은 샷이었어.”

봄은 정말로 버디를 잡아냈다.

3야드 안팎의 부담스러운 거리였지만 그녀의 퍼팅 감각은 필상도 놀라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필상이 지닌 초감각을 그녀도 보유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만약 그런 장점을 십분 활용한다면 세계 여자 골프는 또 다른 괴물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골프는 절대 쉬운 스포츠가 아니다.

거의 매번 풀스윙을 이어 갔지만 2%가 부족한 느낌을 주며 타수를 줄이지 못하던 봄이 결국 5번 홀에서 위기를 맞았다.

451야드 파 5홀, 그녀는 2온을 원했고 누차 강조했건만 어깨에 힘은 빠지지 않았다.

“아! 정말 미치겠어요.”

“…….”

“왜 아무 말씀이 없으세요?”

“포기하자.”

“네?”

“넌 프로가 될 준비가 턱없이 부족해. 설사 이 결선을 통과하더라도 본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은 어림도 없어.”

“…….”

이번에는 봄이 말을 잃었다.

용기를 줘도 시원찮을 상황에 재를 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꾸밈없이 말했을 뿐이다.

자질과 기량은 어느 정도 갖춰졌을지 몰라도 경기에 임하는 자세부터 글러 먹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프로들과 겨루는 것은 무의미했다.

어려서 철이 없다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오빠!”

“지금은 오빠도, 캐디도 아니고 네 코치로서 하는 말이야. 그만 접자.”

필상도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신도 아주 짧은 기간에 성공을 거뒀다. 때문에 봄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가르쳤는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실제 필상이 백을 메고 세컨샷 지점이 아닌 방향으로 걸어갔으나 봄은 선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본인은 납득할 수 없다는 저항의 표현이었다.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멈추고 돌아선 필상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오빠가 됐다고 할 때까지.”

“왜? 경기는 네가 하는 거라며?”

“도와줘요. 여기서 그냥 갈 수는 없어요.”

봄은 필상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연습했다.

또한 자질이 좋은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시간을 두고 가다듬으면 분명히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이 짧아 경기 운영에 미숙하고 고집이 너무 세 사고의 유연성이 부족하다.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단점부터 확실하게 고칠 필요가 있다.

필상이 마지못해 세컨샷 지점으로 이동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폴짝 다가와 팔에 매달렸다.

“잘할게요.”

“일단 공부터 확인하자.”

그녀가 날린 타구는 우측 나무숲으로 기어들어 갔다. 확인한 결과 레이 업 외에는 답이 없었다. 그런데도 더 멀리 보낼 구멍만 찾는 녀석에게 필상은 피칭웨지를 건넸다.

“25야드. 페어웨이로 꺼내.”

“네!”

일단 고분고분 꺼냈다.

남은 거리는 211야드, 필상은 6번 아이언을 건네고 170야드를 주문했다. 유틸리티를 잡으면 3온도 가능하지만 흥분한 봄이 가드 벙커를 피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딴생각하지 말고 페어웨이만 지켜.”

“네!”

입이 십 리는 나왔지만 다행히 시키는 대로 잘라 갔다. 그리고 남은 41야드를 칩샷으로 붙여 파를 기록했다.

잘 쳐도 파, 이렇게 잘라 가도 파를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봄은 이후 필상의 지시에 따라 경기를 운영했고 급기야 후반 시작과 함께 타수를 줄이기 시작했다.

“우와! 봤죠?”

“그래. 지금처럼 오로지 네 스윙에만 집중해.”

오픈대회를 통해 프로에 도전하는 선수는 의외로 많다. 그들 대부분은 베테랑 아마추어이거나 국가대표 수준급 젊은 선수다.

때문에 어정쩡한 성적으로는 어림도 없다.

하지만 전반에 1타를 줄이는 데 그쳤던 봄은 후반에 4타를 줄이며 결국 -5로 경기를 마쳤다.

“통과할까요?”

“글쎄……. 두고 봐야지.”

예전 기록을 참조하면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이날 -6을 친 선수가 이미 나왔기에 긴장한 가운데 결과를 기다렸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5를 친 선수가 무려 4명이 나온 것이다.

단 3명에게만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은 무조건 통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떻게 되죠?”

“백 카운트를 할 거야. 그럼 불리할 게 없지. 넌 후반에 4타나 줄였잖아.”

최종 결과가 나올 때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필상은 통과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행여 다른 상황이 나올 수도 있기에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사이 필상을 알아본 선수나 팬들이 다가왔지만 감히 말을 붙이지는 못했다. 너무 심각해 보였던 모양이다.

“나 샤워하고 올게.”

“금방 결과가 나올 텐데요?”

“너도 결과 보고 씻고 나와. 그 칙칙한 옷 말고 예쁜 옷으로 좀 갈아입고.”

“네. 히히히.”

샤워를 하는 내내 생각이 많았다.

너무 서두른 게 아닌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만약 자신이 캐디로 나서지 않았다면 볼 것도 없이 떨어졌을 것이다.

가르쳤던 책임감에 따라왔지만 지금 봄의 상태로는 설사 본선에 나가도 우승은 어렵다. 그걸 왜 미리 검토하지 않았는지 자책이 들었다.

물론 그녀의 간절함을 알고 있기에 나서기는 했다. 하지만 인생 경험이 많고 쓴맛 단맛 다 본 자신과 입장이 다르다.

좋은 경험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바람이 많이 들어가게 방치한 자신의 어리석음부터 짚어 봐야 할 것 같았다.

“오빠!”

“뭐야? 너 아직 안 씻었어?”

“네. 통과했다는 소식 알려 주고 씻으려고요.”

너무 좋아 마구 매달리는 해맑은 모습을 보노라니, 마음이 푸근해지기는 했다.

하지만 이미 내린 결정이 있기에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5분 줄 테니까 얼른 씻고 나와.”

“치! 알았어요.”

5분은 아니지만 정말 빨리 나오기는 했다.

머리도 다 말리지 않고 예쁜 옷으로 갈아입지 않은 걸 보면 털털한 녀석에게서 미운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늦었지만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하고 나서야 밥을 먹었다.

“안 돼요.”

“뭐가?”

“나에 대한 오빠 결정.”

느닷없는 말에 뜨끔했지만 물러설 용의는 없었다.

녀석이 최근 자신의 마음을 읽는 것 같아 영 불안했는데 설마 말도 꺼내지 않은 걸 맞출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뭘 결정했는데?”

“제 데뷔를 내년으로 미루려는 거잖아요.”

“하하하. 어차피 이번 시즌은 끝났잖아. 이번 대회 빼면.”

“그러니까 반드시 오빠가 도와줘야죠.”

“미사키도 좋은 캐디야.”

“…….”

그때 이후 봄은 입을 열지 않았다.

늦은 밤 도쿄로 돌아와 제 숙소로 들어갈 때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한 것이 전부였다.

평소 같으면 자고 있는 모모코를 깨워서라도 수다를 떨 녀석이 그냥 들어가는 뒷모습에 마음이 짠하기는 했다.

“오빠. 지금 들어오는 거예요?”

“응. 소식은 들었지?”

“통과할 줄 알았어요. 봄이 어디 보통 애인가요! 크크크. 근데 그냥 자기 방으로 올라간 거예요?”

“응. 많이 피곤했나 봐.”

“피곤은 무슨! 오빠가 수미 깨나 좀 봐줘요.”

자다 말고 일어난 모모코는 후다닥 봄의 방으로 달렸다. 말리고 싶었으나 수미가 보채는 소리가 들려 침실로 향했다.

대체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했으나 딸을 재우다 필상도 같이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부터 필상은 모모코에게 시달려야 했다. 봄이 미사키와 함께 따로 연습을 하겠다며 에히메로 다시 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모모코와 함께 미야자키로 이동했다.

봄은 알아서 하는 게 맞고 자신은 이제 본격적으로 모모코의 연습도 돕고 자신도 컨디션을 끌어올릴 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고요?”

“뭘 감당해.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니까!”

“시간은 충분하잖아요. 전 괜찮으니까 지금이라도…….”

“모모코. 골프가 그렇게 쉬워?”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설사 실패하더라도 용기를 줘요. 알고 보면 봄처럼 불쌍한 애도 없어요.”

실마리를 찾았다. 둘이 왜 친해졌는지.

필상은 봄의 사생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편부 슬하에 자란 모모코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 부분의 공감이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필상은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건은 묘한 곳에서 솔솔 시작되었다.

“여전하군!”

가래 끓는 특유의 거친 음성을 지닌 사토시가 나타났다.

엘리에르 레이디스 오픈이 열리기 이틀 전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살이 쪘다더니 그새 다 빠졌군.”

“네. 요즘 몸이 하도 근질거려 운동을 시작했거든요.”

“괜찮으면 나랑 바람이나 좀 쐬러 갈까?”

사양하려 했다.

마음을 바꿨다지만 그에 대한 이미지는 여전히 곱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을 듣고도 따라나서지 않을 수는 없었다.

“풍수도 공부하셨습니까?”

“공부는 무슨. 허허허. 그냥 나이를 먹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이더군.”

사토시는 필상에게 팔고 싶은 땅이 있다고 했다.

평소 부동산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굳이 미야자키까지 찾아와 그런 말을 꺼낸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와 함께 간 곳은 후쿠오카였다. 부산에서 쾌속선을 타면 3시간에 닿는 큐슈 북단의 거점 도시다. 그런데 항구에 다다르자 멋진 요트가 대기 중이었다.

바다로 나간다는 것인데, 그걸 타고 1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곳은 남동쪽에 항구까지 잘 갖춘 작지 않은 섬이었다.

“오다 섬이네.”

“멋지군요. 이곳을 사시기라도 하셨습니까?”

“샀지.”

“네?”

그저 농담을 던졌는데, 돌아온 대답은 엄청났다.

물론 돈이 많으면 이런 섬 하나쯤 사들이는 것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다만 왜 샀는지, 그 과정에서 적잖은 사연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시 충격이었다.

“난 여기에 골프장을 짓고 싶었어. 나만의 골프장.”

“혼자 치면 어디 재미있나요?”

“그래서 자네를 데려오지 않았는가!”

그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차를 타고 섬을 돌아가자 신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왜 잘 닦인 도로 한가운데를 막고 문을 만들었으며 사유지 출입금지라고 붙여 놨는지 알 만했다.

멋진 잔디가 한없이 펼쳐진 골프코스였다.

보는 순간, 그가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는지 짐작되었다. 그런데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이 코스는 좀 특이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잔디 관리나 조경은 기가 막혔지만 코스 레이아웃이 없었다. 홀의 구분도 없이 군데군데 벙커도 보이고 개울도 흐르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그린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가? 내 놀이터.”

“하하하. 이게 전부 한 홀입니까?”

“백 가지 얼굴을 지닌 한 홀이지.”

“가히 파격이군요.”

“오늘 나랑 여기서 일생일대의 내기를 한 번 해 보자고.”

“내기요?”

골프장에서 필상에게 내기를 하자는 사람이 나왔다.

그것도 거창하게 일생일대의 내기라니.

내용은 아직 듣지 못했지만 괜한 호승심부터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