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23화 (223/354)

223. 쉽지 않을 거야.

다사다난했던 2020시즌을 마무리했다.

누가 뭐래도 골프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이뤘다.

하지만 필상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던 목표는 아직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고 있으니 이걸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게다가 어쩌다 보니 골프 관련 사업을 벌이게 되었고 그 또한 가파른 성장세로 발전을 거듭하는 중이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한 결과라지만 예상보다 훨씬 거대한 성공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일본 간다더니 안 가?”

“담당자가 알아서 잘하고 있나 봐요.”

“며늘아기는 일본에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것 같던데?”

“일단 좀 며칠 쉬고요.”

“그러든지.”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처럼 집에 돌아온 필상은 일체 외출도 하지 않고 집에서 뒹굴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한 해 동안 정말 바쁘게 살았다는 것을 알기에 가끔 엄마를 제외하고는 잔소리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 덕에 낯설기만 하던 딸과 친해진 것은 큰 소득이었다. 전에는 안아 주려 해도 할머니나 엄마만 찾던 녀석이 엉금엉금 기어와 품에 안긴다. 그리고는 늘어지게 같이 자는데, 하루의 절반은 그렇게 멍하게 세월만 보냈다.

“모모코. 아직도 집에서 두문불출인가요?”

“네. 도무지 운동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데, 정말 가관이에요.”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잖아요.”

“그러니까요. 처음에는 워낙 힘들었으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이러다 습관이 될까 봐 걱정이에요.”

아시안 챔피언십이 끝난 지 4주가 지났다.

한두 주가 지날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워낙 성실하고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필요한 휴식을 마치면 다시 활동을 재개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휴식기가 4주에 이르자 급기야 주변 사람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대표와 모모코, 그리고 봄과 미사키까지. 성호는 연이어 챌린지투어에 출전하고 있어서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었다.

“일본에 가자고 해 봤나요?”

“네. 제가 JLPGA 투어 챔피언십 리코 컵에 나간다니까 잘 다녀오래요.”

“그럼 공 프로도 일본 시리즈 JT 컵에 나갈 생각도 없는 거네요?”

“자신의 올 시즌은 끝났다고 내버려 두라고 투덜대요.”

물론 날이 더 추워지면 전지훈련을 떠날 계획이 진즉에 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건 12월 중순, 아직도 3주 이상이 남았는데 그 소중한 시간을 그냥 집에서 뒹구는 것이 못내 불안했던 것이다.

모모코는 물론 이 대표도 염려의 말을 수차례 건넸지만 끄덕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조용히 듣기만 하던 봄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먼저 입을 뗀 사람은 이 대표였다.

“봄. 프로님 좀 움직여 봐요.”

“제가요?”

“네. 우리가 하는 말은 꿈쩍도 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봄이 씨가 나서면 가능할 것 같아서요.”

“그게 될까요?”

봄의 미지근한 반응에 모모코가 설득에 나섰다.

“혹시 넌 오빠가 더 쉬었으면 좋겠어?”

“고생 많이 했잖아요.”

“그건 알지. 하지만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너도 잘 알잖아. 수련을 하지 않아도 멀쩡한 것은 좋은데, 오히려 너무 게으름을 피워서 살이 피둥피둥 쪘잖아. 과연 이 상태가 괜찮은가?”

“알았어요. 일단 말은 해 보겠는데 뭔가 확실한 동기가 필요한 거 같아요.”

필상을 움직이기 위해 네 여인이 모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필상은 인천공항에 나타났다. 어제 작당을 했던 여인들과 함께였는데 한 명이 더 늘었다.

그 주인공은 필상이 앞으로 맨 아기 띠에 앉아 방긋방긋 웃고 있는 수미였다. 계획에 없던 일본행이라 기자들은 없었고 필상 일행을 알아본 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런데 인파를 피하기는커녕 필상은 팬들과 수다를 떨었다. 아기가 예쁘다는 말에 동조해 흐뭇한 표정을 짓는 필상은 영락없는 딸 바보였다.

“정말 귀여워요.”

“그렇죠. 제 엄마를 닮아서 얼마나 거만한지 모릅니다. 하하하.”

그런데 한가했던 인천공항과는 달리 도쿄공항에는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취재진이 몰려 있었다.

사전에 언급이 없었지만 수미를 품에 안은 필상은 보무도 당당하게 그들이 준비한 인터뷰 룸으로 향했다.

“오빠. 수미는 제게 주세요.”

“아니 괜찮아. 봄, 너도 같이 가자.”

“저는 왜요?”

“그냥. 어차피 이제 프로 데뷔하면 기자들과도 낯을 터야 하잖아. 분위기나 익히라고.”

“에이. 시드 얻기 전에는 싫어요.”

“오라니까!”

도쿄는 애증이 교차하는 장소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단추를 맨 곳이 바로 일본이다. 너무도 고마운 무대지만 올해는 개막전 이후 일본에 오지 못했다.

원인은 사토시가 제공했고 자신도 과한 반응을 보였지만 그래도 아직 일본 팬들의 반응은 좋다고 보기는 힘들다.

필상 개인의 기량과 성공은 인정하지만 일본을 배척하는 듯 행동한 것과 더불어 코리안 투어가 급성장한 것이 필상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기자들 앞에 앉은 필상은 당당했다.

전혀 부담을 가지지 않은 듯 여유마저 비치는 표정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일본 기자들이었다. 이 대표의 유창한 일본어 사회로 기자회견이 곧 시작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일본에 오셨는데 감회가 어떻습니까?

“어느새 1년 반이 훌쩍 지나갔네요. 당시 KPGA 세미프로였던 저는 투어 시드를 얻기 위해 일본에 건너와 던롭 스릭슨 후쿠시마 오픈 예선전부터 치렀던 기억이 아직 생생합니다.”

-한국에도 대회가 있는데 왜 일본을 택했던 거죠?

“기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심한 정체기를 겪고 있던 코리안 투어는 오픈 대회가 거의 없었고 입문의 폭이 좁아 엄두를 낼 수가 없었는데, 다행히 제가 일본어가 되고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모모코의 캐디로 일하게 된 것이 지금의 성공을 이루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모모코는 더 제게 소중한 사람입니다. 다행히 운이 좋아 예선을 통과해 결선에 나가게 되었고 시드도 얻게 되었지요. 그런 기회를 부여한 JGTO에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진심이었다.

만약 당시에 한국에서 챌린지투어부터 밟아 나갔다면 지금처럼 빠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 소중한 인연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다 보니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일본 투어와 약연으로 이어진 점은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심경의 변화에 찬물을 끼얹는 언급이 터졌다.

-그런데도 배신을 한 겁니까?

“…….”

너무 직설적이고 황당한 발언에 생각 같아서는 강하게 맞받아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 꾹 참은 필상은 자신을 쳐다보며 헤헤 웃는 수미의 볼을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좀 바빴습니다. 아시다시피. 또한 오해의 소지가 많은 결과로 이어진 점은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난 일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감정적인 행동을 먼저 보인 것은 공 프로 아닌가요?

“대체 무슨 감정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으나 저와 관련된 지난 자료들을 꼼꼼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루키에 외국 선수인 저를 환영할 이유는 없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을 호도하고 비방했던 수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그에 반해 공 프로를 좋아하고 열렬히 응원했던 팬들도 있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다시 한 겁니다.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TPK 일본 사업이 본격적으로 재개되었기 때문에 상업적인 광고를 위해 온 것은 아니고요?

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이 대표가 적절히 자르려고 했으나 사전에 질문을 일임 받은 듯 막무가내로 나서는데도 다른 기자들은 듣기만 했다.

사실 그런 측면도 의식했으나 그럴 거면 아시안 챔피언십을 마치고 미켈슨과 함께 건너와 활동을 했을 것이다.

이미 골프장 인수 계약은 마무리가 되었고 구체적인 진척이 진행되는 마당에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도발이었다.

때문에 곁에 앉은 모모코가 참다못해 나서려는 것을 손을 잡아 제지시킨 필상은 숨을 한 번 돌린 뒤 화제를 돌렸다.

“제 이번 일본 방문은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처가 식구들에게 우리 아이를 보여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캐디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본 시리즈 JT 컵의 챔피언 방어전을 치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뭔가 잘못 전달이 되었거나 아니면 필상과 상의 없는 내용이 있는 것 같았다. 두 가지 목적 중에 대회 출전이 포함된 줄 알았던 기자들은 느닷없이 필상이 캐디를 하러 왔다는 말에 심하게 술렁거렸다.

한껏 반감을 드러냈는데 일본에 온 이유가 대회 출전 때문이 아니라니, 이제까지 자극한 명분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저는 한 달 동안 훈련을 하지 못했습니다. 시즌을 치르는 동안 너무 지쳐 매일 집에서 우리 아이와 뒹굴고 놀았습니다. 그랬더니 체중이 10kg이나 불었더군요. 하하하.”

갑자기 인터뷰 분위기가 바뀌었다.

필상의 대회 불참 선언이 준 충격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이제라도 JGTO에 참가하는 것이 일본 골프를 위해 낫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구박부터 한 셈이다.

-팬들을 위해 이제라도 출전하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다른 기자였다.

그에게서 느껴진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그는 적어도 다른 시야로 상황을 바라보는 것 같아 대답하는 필상도 한결 편하게 답을 줄 수가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모습으로 팬들 앞에 설 수는 없습니다. 내년에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면 JLPGA 리코 컵에서 뵐 수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또한 에히메 현에서 열리는 엘리에르 레이디스 오픈에서도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 모모코 양이 그 대회도 참가합니까?

그 질문에 대해서는 그냥 웃어 넘겼다.

모모코가 다른 대회에 참가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오랜만에 일본을 찾은 골프 여신에 대한 관심이 워낙 높아 은근히 반기는 분위기였다.

마이크를 이어받은 모모코도 굳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필상과는 달리 모모코의 인터뷰는 내내 화기애애했다. 그녀의 재등장이 시들해진 일본 골프의 희망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모모코는 실제 일본보다는 한국 투어에 더 전념할 생각을 가졌지만 구태여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듯.

인터뷰를 마친 필상은 오랜만에 가와사키 집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장인을 비롯한 처가 식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흘 뒤, 모두가 예상치 못한 곳에 나타났다.

시코쿠 에히메 현, 엘리에르 레이디스 오픈 예선 결선이다.

“저 떨려요.”

“떨려? 장난하지 말고 집중해.”

“정말 떨린다고요. 이런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아무래도 오빠랑 같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1차 지역 예선 때는 미사키가 수고했다.

도착한 바로 다음 날부터 이틀간 치러진 36홀 경기여서 움직일 수 없었고 9오버만 치면 통과할 가능성이 높았다.

첫날 4오버로 다소 부진했던 봄은 이틀째 -1을 치며 예선 결선에 당당히 5위의 성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예선 결선은 절대 만만한 과정이 아니다. 과거 필상이 그랬던 것처럼 150명 중에 단 3명에게만 대회 출전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너 치킨이야?”

“네?”

“팔이 왜 자꾸 들리냐고!”

“그러게요.”

연습하면서 티오프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자를 꾹 눌러쓴 키 큰 남자가 어린 여자 선수를 구박하는 모습에 인상을 쓰는 남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 남자가 필상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보다 못한 필상의 입에서 몇 마디 한국어가 튀어나온 뒤,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혹시 미스터 퍼펙트 아니십니까?”

“쉿!”

필상은 오늘 봄의 캐디로 여기에 왔다.

때문에 모든 것이 단판 승부인 그녀에게로 맞춰져야 옳다고 생각하기에 팬들과 일정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극성팬들은 어디든 있게 마련, 그들로 인해 봄이 신경 쓰일까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봄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162cm, 51kg.

모모코에 비하면 체격은 좋은 편이 아니다.

그나마 운동하며 잘 먹고 체중을 늘리라는 필상의 조언 때문에 최근에 4, 5kg이 불었는데도 여전히 가냘픈 체구다.

그러나 체격이 작다고 힘이 부족한 편은 아니었다.

따앙!

368야드 파 4, 1번 홀에서 봄의 첫 티샷을 날았다.

그녀의 구력과 경험을 감안하면 약간 당겨지기는 했으나 비거리가 무려 254야드나 나온 아주 훌륭한 결과였다.

그런데도 클럽을 반납하는 그녀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당겨졌어요!”

“페어웨이 잘 지켰잖아.”

“거리도 한참 부족해요.”

“254야드면 충분해. LPGA 평균도 253야드에 불과하거든.”

“에이! 그건 평균이잖아요. 전 언니처럼 270야드를 넘기고 싶다고요.”

“멀리 보낸다고 이기는 건 아니야. 모모코가 장타자지만 너는 대신 더 정확한 샷을 구사하면 되지.”

“제가 언니처럼 잘나갈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을 거야.”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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