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22화 (222/354)

222. 유종지미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이라는 표현이 절로 떠오를 만큼.

마음을 비운 매킬로이는 장타를 앞세운 공격적인 전략으로 매섭게 치고 들어왔다. 초반에 강한 필상의 기세에 뒤지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PGA 시즌이 끝난 시점인데, 이런 좋은 샷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깝게 느껴질 만큼 본인이 의도한 대로 플레이를 착착 풀어 나갔다.

그에 반해 필상은 장타로 맞서지 않고 정교한 샷으로 차분하게 상대하고 있다는 점이 아주 흥미로웠다.

-굉장히 특이한 진행이군요. 세계 최고의 장타자 앞에서 장타를 마구 뽐내는 모양새가 마치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것 같지 않나요?

-그렇게 보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매킬로이 역시 현존하는 프로 골퍼 중에 한 손가락 안에 드는 선수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공 프로가 적극적인 장타로 대응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지금 공 프로가 최적의 대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타 대결에 부담을 느껴서가 아니라 골프에서 장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교한 샷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거죠.

-정교함에 장타까지 더해지면 더 좋은 것 아닌가요?

-공 프로가 워낙 그런 인상을 강하게 심어 줬지만 그건 전체적인 맥락을 짚지 못하고 무늬만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허!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네요.

평소 허 위원은 이렇게 대놓고 타박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전문가가 아닌 시청자들을 위해 대부분 사근사근하게 설명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상당히 강한 어조로 지적했다.

그럴 경우 실수할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것을 알지만 이미 기분이 상한 임 캐스터는 짜증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허 위원의 설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지만.

-아무리 힘이 좋고 체력이 탁월한 선수라도 3일간 치열한 경기를 치르고 최종일에 들어서면 심신이 정상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선수는 체중이 5kg 이상 빠지기도 합니다.

-아! 피가 말리는 승부를 펼치니 어쩔 수 없겠군요.

-네. 게다가 가장 중요한 마지막 라운드를 끝내려면 최소한 5시간 이상을 집중해야 하는데, 경기 내내 강한 스윙만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가 나옵니다.

-아!

-당장은 빵빵 날려 기분은 좋을지 모르지만 체력이 방전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그 끝이 좋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합니다.

프로라고 완벽할 수는 없다.

아마추어의 눈에는 샷 머신처럼 보이지만 그들도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에 한계에 다다르지 않도록 조절해야 한다.

자신의 상태를 얼마나 정확히 인지하며 경기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느냐는 것도 프로의 중요한 자질 중에 하나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공 프로도 장타를 남발하는 스타일은 아니로군요. 한 방 날려 주면 좋을 것 같은 타이밍에 참는 것이 다 힘과 체력을 적절히 분배하는 거였군요.

-그렇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아주 끔찍할 정도로 냉정하고 굉장히 현명한 경기 운용을 하는 선수입니다. 또 하나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 있는데, 강한 스윙만 고집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리듬에 적응이 된다는 겁니다.

강약의 조절에 대한 언급이었다.

샷이 좋아 신바람을 내다보면 평소 스윙 리듬보다 빨라져 컨트롤 샷을 비롯한 정교한 샷에서 엉뚱한 실수가 터진다.

골프가 몇 번 잘하다가도 한 번 무너지면 치명적인 운동이기 때문에 그 점을 간과하면 결국 제 리듬을 지키는 것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6번 홀까지 서로 버디를 주고니 받거니 하더니 결국 7번 홀에서 사달이 났다. 418야드 파 4홀, 제법 페어웨이가 넓어 아너로 나선 매킬로이는 다시 한 번 강력한 티샷을 발사했다.

그런데 350야드까지 무난한 홀이라서 너무 마음을 놨던 것인지, 그의 티샷이 푸시성 악성 슬라이스가 나 버렸다.

“어? 저게 뭐죠?”

“갔네!”

“에이, 설마요!

밀리기는 했어도 우측의 호수까지 기어들어 갈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퍼스트 컷에 떨어진 공이 크게 바운드가 되더니 헤비 러프로 쑥 들어가고 말았다.

그나마 러프에 잡혔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 뒤로 물방울이 튀는 장면이 잡혔기 때문이다.

필상이 추론컨대, 그는 이번 홀부터 가볍게 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미 몸에 붙은 관성이 작용해 몸은 빨리 돌고 클럽 헤드는 늦게 쫓아 나온 기괴한 스윙이 되고 만 것이다.

까앙!

그 순간, 필상의 깔끔한 장타가 터졌다.

지금까지는 320야드 안팎의 안정된 거리를 보내더니 기회가 찾아오자 여지없이 빈틈을 파고든 것이다.

-역시! 348야드. 바로 러프 앞에 멈추는군요. 하하하!

-그렇게 강한 샷도 아니었죠? 하지만 이미 정확한 샷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췄기 때문에 이전보다 조금만 더 강한 임팩트를 만들어 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필요한 만큼 보낼 수 능력, 정말 한 수 위의 기량이라고 봐야 할 것 같네요.

해저드에 빠져 드롭을 한 매킬로이는 3번째 샷을 핀에 붙이는 집념을 불태우며 추격에 나섰다. 하지만 61야드의 세컨샷을 더 가까이 붙여 탭인 버디를 기록하는 필상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이곳의 주인은 나야!’라고 외치는 것 같은 필상의 모습에 끓어오르는 감정을 추스른 것이 오히려 성적에는 더 좋은 영향을 미쳤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18번 홀이었다.

이미 전 홀까지 6타를 줄여 -22까지 올라선 필상은 2위와 8타 차다. 그 와중에도 매킬로이가 끈질기게 따라온 것이다.

다만 -14로 먼저 경기를 마친 안병훈과 매킬로이가 동타였기에 파 5홀을 앞둔 매킬로이가 준우승에 더 유리했다.

“3온 가실 거죠?”

“아니. 드라이브 줘.”

“2온?”

“응. 드로우 샷의 진수를 보여줄 테니까 잘 봐.”

비거리는 517야드에 불과하지만 오르막이 무려 28야드다. 게다가 티샷 랜딩 지역이 심한 오르막 경사이기 때문에 런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좌측으로 휘는 도그렉 홀에 페어웨이가 아주 좁아 웬만하면 2온을 노리지 않는다. 티잉 그라운드에서 바라보면 페어웨이는 거대한 잡풀의 바다 위에 떠 있는 난파선처럼 작아 보이기 때문이다.

-공 프로가 드라이브를 잡았네요?

-너무 위험한 시도 같은데, 팬 서비스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러프에 빠져도 2온이 어렵고 좌우로 삐끗하면 레이 업을 해야 하는데,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이유라니요?

-아닙니다. 하하하!

허 위원은 필상이 안 프로의 준우승을 돕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 말을 꺼냈는데, 막상 입 밖에 낼 수는 없는 생각이기에 얼버무리고 말았다.

골프는 개인 운동이라서 이런 경우에 일방적인 응원을 하거나 추론을 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정확했다.

“밥 사겠지?”

2위와 3위의 상금 차이는 밥이 아니라 소형차를 한 대 사 줘도 남는다. 만약 자신이 지난 3라운드처럼 3온으로 나서면 굳이 매킬로이도 2온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3온으로 공략해도 얼마든지 버디를 잡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필상과 경쟁을 한 매킬로이는 필상이 장타를 날리면 따라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때문에 드라이브를 들고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선 필상은 오랜만에 80%에 가까운 힘을 운용하며 샷 이미지를 서서히 완성해 나갔다.

경사 때문에 평상시 거리로 환산하면 355야드 이상의 티샷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필상의 눈앞에 나타난 파란 가상의 선은 벙커로 인해 좁아진 울돌목을 한참 넘어섰다.

과아아앙!

스윙 아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돌아간 클럽 헤드는 정말이지 공을 부숴 버릴 것 같은 엄청난 가속을 생성해 내며 무시무시한 임팩트를 만들어 냈다.

공이 맞는 소리부터가 각별했다.

-우아! 공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드로우! 드로우 샷 같습니다. 그런데 저게 뭐죠?

총알처럼 튀어 나가는 타구의 아름다운 궤적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허 위원은 또 다른 뭔가가 티잉 그라운드에서 튀어 나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윽!”

더 놀란 사람은 필상이다.

팔로우 스로우를 하던 손이 허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클럽은 들고 있었지만 붙어 있어야 할 위치를 이탈한 클럽 헤드는 끔찍한 상황을 도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순간 홱 돌아간 필상의 시선이 얼른 그 위치를 추적했다. 좌우로 엄청난 갤러리들이 운집한 상황에서 그 물체가 머금은 위력은 누군가를 심하게 다치게 만들 수도 있다.

“휴우!”

거의 대부분의 갤러리들이 타구를 쫓느라 정신이 없었으나 구력이 높은 몇몇 아마추어들은 갑자기 어딘가로 달려갔다.

그들은 필상의 드라이브 헤드가 넥(Neck - 헤드와 샤프트가 연결되는 부분)에서 떨어져 좌측 머리를 넘어 나무가 우거진 숲속으로 날아간 것을 본 것이다.

그걸 줍는다면 필상이 돌려 달라고 할 리 만무하다는 걸 알기에 굉장히 소중한 기념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우! 정말 멋지게 휘기 시작합니다.

-클럽 헤드가 분리된 와중에도 타구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네?

임 캐스터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홀의 모양을 그대로 따라간 타구가 환상적인 곡선을 그리며 페어웨이가 좁아지는 334야드 지점을 무사히 건넌 것에 극찬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중계 화면이 둘로 나눠지며 몇몇 갤러리들이 숲을 뒤지는 모습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 공 프로의 티샷 때, 클럽 헤드가 떨어져 숲으로 날아갔습니다. 지금 그걸 찾고 있는 겁니다.

-헤드가 부서졌다고요?

-아닙니다. 넥이 빠진 것 같습니다. 경기 전에 클럽의 이상 유무를 점검했을 텐데 이번 샷의 파워를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나 봅니다.

클럽에 관련된 이런 사고는 용품을 지원한 나이키의 입장에서는 아주 치명적인 사건이다. 하필이면 마지막 홀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하지만 때마침 필상의 티샷이 페어웨이에 떨어졌고 기적 같은 비거리에 압도되어 혼란은 급격히 수그러들고 말았다.

캐리만 무려 358야드를 찍었고 힘차게 바운드가 된 공이 데굴데굴 굴러 멈춰선 지점은 무려 379야드였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한 티샷이 만들어졌습니다. 오르막이 아니었다면 400야드도 훨씬 넘었을 것 같은데요?

-오르막마저 기어오르는 드로우 샷의 진가를 극명하게 보여 준 멋들어진 결과입니다. 저러니 클럽이 어찌 버티겠습니까!

-아! 그도 그러네요. 다른 선수는 감히 흉내를 낼 수 없을뿐더러 아마추어인 우리들도 행여 저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하하.

찰나의 순간 두 중계자는 현명한 판단 아래 적절한 해설을 더했다. 기껏 축제를 만들어 놓고 장비 때문에 흥이 깨지는 것은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키는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만약 클럽 헤드에 누군가 다치기라도 했다면 모든 것이 공든 탑이 무너지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하늘이 보우한 것이다.

“지금 380야드를 날린 겁니까?”

“대충 그 정도 날아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우리 용품을 바꿔 보는 걸 고려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하하. 선수가 장비 탓을 하면 되겠습니까! 하하하.”

매킬로이도 나이키 소속 선수다.

비록 같은 제품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필상의 클럽이 말썽을 부리는 것을 본 그로서는 샷을 하기가 껄끄러웠던 것이다.

그래도 드라이브를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회심을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승패와 상관없이 호전적인 그의 과감한 티샷을 기대했지만 그는 의외로 320야드만 잘라 갔다.

“흐흐흐……. 작전 실패하셨어요.”

“그러게. 이건 장비 탓이야!”

맞불을 놓으리라 생각했지만 매킬로이는 승패를 인정한 것이다. 굳이 무리수를 두다가 팬들의 눈살을 찌푸리느니, 차라리 안정된 공략으로 2위라도 확보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헛심만 뺐네.”

“헛수고는 아니죠. 세컨 샷이 142야드 남았으니까요.”

“그런가?”

결과만 보면 헛수고는 아니었다.

기세가 꺾인 매킬로이는 세컨샷을 잘 보내고도 핀에 붙이지는 못했다. 3온 2퍼팅으로 안 프로와 공동 2위로 끝냈다.

반면 피칭웨지로 완벽한 컨트롤 샷을 구사한 필상은 2야드 이글 퍼팅을 성공하며 자신의 우승을 자축했다.

“오빠!”

우승이 확정된 순간, 그린으로 달려 나온 모모코와 진한 포옹을 하며 또 한 편의 그림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뒤를 이어 엄마와 누나들, 캐디 미사키와 성호, 그리고 봄까지 다 나와 줄줄이 포옹하며 우승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또한 샴페인을 들고 나와 축하한 동료들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았다. 한국 선수들도 많았지만 이름만 들었던 세계적인 선수들도 모두 달려 나와 축하하는 모습은 이곳이 과연 한국이 맞는지 의심케 할 정도였다.

[PGA 7승, JGTO 1승, 코리안 투어 4승.]

유종의 미를 거둔 올 시즌 필상이 거둔 눈부신 성적이다.

3개 투어에 걸쳐 단일 시즌 최다승을 기록을 갱신한 지 오래였고 앞으로 이 기록을 깰 선수는 오로지 필상 자신뿐이라는 기사도 쏟아졌다.

“진즉에 말을 하지 그랬어?”

“뭘요?”

“봄이 말이다.”

“봄이 왜요?”

“그 아이가 네 부상을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면서?”

“네. 봄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저는 무척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내가 그것도 모르고 구박만 했으니, 어린 그 아이가 얼마나 서운했겠냐고. 이 무심한 녀석아!”

대회를 마친 필상은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여주 집으로 복귀했다. 집보다 편한 곳은 없으니까. 그런데 오는 내내 같은 차를 탄 엄마에게 혼쭐이 났다.

아무래도 오늘 경기를 관전하는 동안 모모코가 봄에 대한 진실을 엄마에게 말씀드린 것 같았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구박은 왜 모두 자신의 몫인 것인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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