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21화 (221/354)

221. 악연도 길어지면 인연

“가자!”

“형님은 그냥 계세요. 제가 가서 모셔 올 게요.”

아니라며 일어서려던 필상은 겨우 참았다.

짐작컨대 적잖은 팬들의 관심이 쏠렸을 것이다. 그런데 내일 마지막 라운드를 남겨 놓은 자신이 월미도에 나타난다면 그 또한 굉장한 가십이 될 것이다.

원치 않아도 소문은 꼬리를 물 것, 어차피 술을 마셨다면 누군가 가서 데려와야 하는데 성호보다 적임자는 없었다.

연습을 하고자 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아 필상도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와 자주 가던 산책로를 걸었다.

‘제법 쌀쌀해졌네.’

이미 해는 기울어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저 멀리 내일 경기를 위해 코스를 정비하는 직원들만 불을 밝히고 일에 몰두하고 있을 뿐.

사우스 코스 6번 홀과 7번 홀 사이에는 예비 홀이 하나 마련되어 있다. 만약 어느 한 홀에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하기도 했지만 자투리 공간을 활용해 연습 홀을 만든 것이다.

그 홀 티 박스 옆의 화단을 돌아 나가면 작은 오솔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가면 직원들만 아는 명소가 등장한다.

서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작은 정자를 만들라고 지시한 사람은 필상이다. 일상에 찌든 직원들이 언제라도 찾아와 시름을 덜 수 있는 공간이었다.

“밤에 혼자 오니 좀 을씨년스럽군!”

등이라도 하나 밝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정자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명상에 잠겼다.

복잡했던 머리가 맑아지며 자신을 관조하게 되었다.

많은 것을 이뤘지만 돌이켜 보면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평범했던 직장인의 삶이 파국으로 끝나는 순간, 마음의 상처가 깊었던 자신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세상은 노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분명했고 남을 이용하고 짓밟는 자들이 호령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행복도 끝이 났다고 판단했다.

아등바등 용을 써 봐야 한 개인을 둘러싼 환경은 도무지 바꾸기 힘들며 자신은 그렇게 독하게 살 자신도 없었다.

‘그게 다 비겁한 핑계였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도 그런 자들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능력과 상황이 따라 주지 못했을 뿐, 성공의 노예로 끌려 다녔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을 인지하는 순간, 자신이 패배자로 전락한 순간, 더는 버틸 수가 없어 모든 것을 부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각박한 삶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거대한 목표가 없어도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해 희생하는 삶이 있었다.

호강시켜 주겠다며 평생 흰소리만 떵떵 치다가 결국 빚과 마음의 상처만 잔뜩 남기고 떠난 남편, 오로지 자신 하나만 바라보고 있는 어린 자식들, 그 박복한 삶을 어렵게 이어 왔건만 마지막 희망인 아들이 술주정뱅이가 되어 돌아왔다.

제 소중한 삶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아들을 보며 그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런데도 몸이 불편한 엄마는 남의 집 밭일을 하러 다니셨다.

‘이젠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때야!’

개인적인 성공도 중요하지만 그건 이미 충분했다.

더 이상의 높고 숭고한 가치를 쫓지 못한다면 자신은 결국 지금까지 이뤘던 성공의 열매를 따먹는 운 좋은 사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을 구분하고 보다 의미 있는 일에 자신을 투자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의 주변부터 깔끔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고 프로 골퍼로서 본분을 망각하지 않으며 이미 벌인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거기에 보태 이 모든 것들이 사회에 미칠 영향까지 고려해 현명한 비전을 제시하고 앞장서서 이끌어야 한다.

‘너무 거창한가?’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많은 것을 얻었다.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쟁취할 자신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걸 모두 싸 들고 무덤으로 가져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자본주의적 사고에 깊이 젖은 자신이 과연 어설픈 이상과 냉혹한 현실과의 접점을 어떻게 찾느냐는 것이다.

현대의 거대 자본은 언제까지고 모든 것을 누리고 장악할 수 있다고 믿지만 민주주의는 건전한 사고를 지닌 시민들이 제 권리를 인지하고 행사할 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때론 상상하기 힘든 피를 흘리고도 실패할 수 있지만 불평등이 최고조에 달하면 시민은 깨어나며 결국 혁명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 일시에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린다.

역사는 그렇게 정반합을 이뤄 왔다. 하지만 그건 거대한 줄기일 뿐, 언제나 처한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가 않았다.

‘가진 자들의 논리!’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대변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떨어지는 나락이라도 얻어먹는다면 이해가 되지만 맹목적인 편향과 오염된 지식에 기반을 둔 그들은 좀처럼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게 다 쉽게 부서지지 않는 기득권 세력의 농간이며 거대한 술책인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꼭두각시 노릇을 자행한다.

자본은 나팔수들을 내세워 오히려 다양한 이념적 논쟁을 끌어들여 사회를 편 가르게 만들고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나 이기주의를 자극해 자신들의 논리를 그럴싸하게 포장한다.

자본주의의 폐해는 오히려 민주적 절차로 인해 오염되고 훼손되는 경우가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 그저 답답할 노릇이다.

‘나도 이미 자본가잖아!’

이미 상당한 부를 축척했으며 새로운 부를 창출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의도와 생각이 좋아도 현실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표출될 수 있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인 집단이기에.

자본의 본성은 ‘돈이 돈을 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때문에 현장에서는 각박한 현실이 작용될 수밖에 없다.

‘선한 자본’이란 말 자체가 허망한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에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자본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

이미 모범적인 사례를 봐 왔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물론 자신도 그에 대한 깊은 고민이 선행되어야 하며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다.

“떳떳하게 벌고 의미 있게 쓰자!”

거창하게 내세울 것도 없다. 그저 작은 것부터 하나씩 실천해 나가면 될 테니까.

그러나 과연 자신의 의도를 동업자들이 있는 그대로 받아 줄 것인지에 대한 확신도 부족하다. 단지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다는 것이 소중했고 그를 위해 많은 생각과 대비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던 이 사안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정리하게 된 것이 뿌듯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명상을 하는 내내 절로 피어나는 만족감에 전신이 상쾌해지는 기분 좋은 경험을 했다.

“형님. 대체 어디를 다녀오신 겁니까?”

“네 문자 받고 바로 내려왔잖아. 그래 지금 어디에 있어?”

“말도 마십시오. 겨우 숙소로 모셔 드렸습니다.”

“숙소에?”

필상은 곧바로 콘도로 향했는데 아무도 반겨 주지 않았다. 기이한 느낌에 침실 문을 열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부부의 침대에 두 여인이 널브러진 채 이미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와중에도 손을 꼭 잡고 자고 있는 것인지.

그러나 둘 사이에 이전과는 다른 좋은 기운이 깃든 것을 발견한 필상은 비로소 안심했다.

“봄. 속 쓰리지 않아?”

“네. 아주 죽겠어요.”

“그럼 우리 해장하러 갈까?”

“해장이요?”

“응. 난 얼큰한 국물이 먹고 싶어.”

필상은 지난밤 결국 거실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그런데 하도 시끄러워 잠이 깼는데 이제 겨우 새벽 5시도 되지 않을 걸 보고는 다시 잠을 청하려고 했다.

오늘 마지막 라운드를 위해 최적의 컨디션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모를 리 없는 모모코가 기어코 필상에게 해장국을 먹으러 가자고 졸랐다.

“오빠. 우리 아는 데가 없단 말이에요.”

“모모코. 대체 왜 이래? 나 오늘 시합이 있잖아.”

“한 시간 일찍 일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요. 어차피 아침은 먹어야 하고요.”

“잠깐만!”

필상은 얼른 성호를 호출했다.

그러나 결국 넷이 해장국집을 찾아 함께 나섰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두 여자가 아침 댓바람부터 해장을 한다며 소주를 한 병 시켜 나눠 마셨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무슨 말이 있었는지 몰라도 다시는 두 여자 때문에 속 썩을 일은 없다는 것이 확인되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 * *

-드디어 아시안 챔피언십 마지막 날이 밝았습니다. 가을의 청명한 아침 공기가 무척 싱그러워 경기를 준비하는 선수들도 상쾌한 하루를 기대할 것 같습니다.

-다소 쌀쌀하지만 오후로 접어들면 한국의 가을 날씨는 골프 경기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아서 다들 신기해하더군요. 외국에도 이런 조건을 지닌 코스가 흔하지 않죠?

-물론입니다. 푸르고 높은 하늘도 인상적이지만 녹음이 우거진 천혜의 자연을 붉게 물들기 시작한 단풍은 아주 절경이지요. 가장 좋은 시기에 대회가 열려서 주최한 나이키도, 참가한 선수들도 아주 좋은 기억을 가지고 돌아갈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골프 용품 사업에 소극적이던 나이키가 다가올 시즌에 전격적으로 새로운 시리즈를 내놓는다던데, 확실히 탄력을 받은 것 같더군요.

나이키는 공 프로를 전면에 내세워 큰 수확을 거뒀다.

항상 세계 최고의 선수를 앞세워 마케팅을 해 왔지만 골프 용품에 관해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기술적인 부분도 작용했지만 용품 사용에 보수적인 골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이 우승을 거듭할 때마다 사용했던 클럽의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타이거나 매킬로이를 내세웠을 때도 성공하지 못한 가파른 성장세에 놀라 결국 큰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필상이 직접 제품들을 사용해 보고 적극적으로 조언해서 개량한 신제품들이 지금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직 구체적인 판매 카탈로그도 나오지 않았는데 문의가 쇄도한다고 하더군요. 그게 다 미스터 퍼펙트 효과라고들 하는데 정말 대단합니다.

-그렇게까지 후원사에 기여하면 대체 공 프로는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거죠?

-제가 듣기로 이미 공 프로의 수입은 역대 최고를 갱신했다고 하는데, 워낙 베일에 가려져 함부로 말하기가 좀 껄끄럽네요. 하하하!

필상의 수입에 관한 화두에 많은 이들이 귀를 쫑긋했다.

아무래도 돈에 관한 부분은 민감하며 흥미롭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문제는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형. 지금 중계방송에서 형 올 시즌 수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요?”

“내 수입?”

“대체 올해 얼마나 번 겁니까?”

“나도 모르는 걸 누가 알까?”

실제 상상도 못할 거금을 벌었다.

메인 스폰서는 물론 서브 스폰서들도 많기 때문에, 또 버는 족족 다시 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대표도 금방 계산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어느 수입 하나도 허투루 관리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벌어들인 상금만 해도 대략 2000만 달러를 상회하고 만약 페덱스 컵까지 거머쥐었다면 4000만 달러를 훌쩍 넘었을 것이나 그게 아쉬운 대목이기는 했다.

또 하나 애매한 것은 세전 수입과 실제 수입은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추산하기 힘들 것이다.

“형은 상금보다 보너스가 더 많잖아요?”

“그렇지.”

“그럼 1억 달러는 가볍게 넘겼을 것 같은데요?”

그럴 것이라고 추산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필상을 후원한 기업들은 예상을 뛰어넘은 호황을 누렸고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치렀다. 나이키만 해도 기본 계약은 10억 엔에 불과했지만 그건 아시아 시장에 국한되었고 PGA 성적에 따른 인센티브는 따로 조정했다.

다른 스폰서도 그 상황은 동일하게 적용되었기 때문에 배보다 배꼽이 3배 이상 큰 기형적인 계약의 결실을 가감 없이 취한 게 사실이었다.

다만 워낙 거액이라서 서로가 비밀을 유지하기로 했던 것이 유효해 말만 무성할 뿐, 구체적인 금액은 언급되지 못했다.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로리.”

“그 인사는 제가 먼저 했어야 하는데 좀 늦었네요. 공 프로님의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하하하. 그런가요?”

챔피언 조의 파트너는 로리 매킬로이였다.

벌써 3번째 맞대결을 펼치게 된 셈인데, 이전과는 달리 그의 표정이 밝아 다행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심한 침체기를 겪었으나 이제는 거의 극복한 것 같았다.

“한국에서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렇게 먼 한국까지 찾아 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그 말씀도 제가 먼저 드렸어야 하는데. 이 좋은 코스에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특히 마지막 날 공 프로님과 함께 경기에 나서게 된 걸 보면 제가 그만큼 잘하고 있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확실하게 둘의 입장이 바뀌었다.

작년에 멕시코에서 처음 만났을 때, 매킬로이는 신흥 강자로 떠오른 필상을 쉽게 누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경험이나 기량이나 세계 최고의 선수였기에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그게 도리어 맹독이 되어 그를 쓰러뜨렸고 깊은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 긴 방황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그런 부담은 가질 필요가 없다.

필상의 현재 위상은 이미 견줄 수 있는 선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호되게 당해 봤기에 나름 적응도 된 것 같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악연도 길어지면 인연이 된다는 말이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코어와 상관없이 오늘 멋진 대결을 만들어 볼까 합니다.”

“나도 기꺼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하.”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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