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20화 (220/354)

220. 가슴이 철렁

용쟁호투(龍爭虎鬪)!

결선에 오른 선수는 64명, 다들 예선과는 달리 힘을 냈다. 코스에 대한 적응이 끝났다는 의미였고 결선이라고 딱히 코스 난이도를 높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무빙데이였기에 우승 가능성을 높이려는 선수들의 집요한 노력은 갤러리들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안병훈과 함께 가장 마지막에 배정된 필상은 연습장에서 경기 소식을 접했다. 하지만 두려운 기색은커녕 굉장히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그에게는 여유가 넘쳤다.

“누가 치고 올라올 것 같아요?”

“글쎄……. 직접 스윙을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어.”

“그래도 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같이 플레이하는 안 프로는 어때요?”

멀지 않은 타석에서 안 프로가 연습 중이었기 때문에 질문하는 모모코의 음성은 들릴 듯 말 듯 작았다.

좋아하는 동료이자 골프로는 선배이고 인생에서는 후배인 안병훈의 스윙을 잠시 바라보던 필상의 귀에는 예상치 못한 음성이 들렸다.

“왼쪽 팔꿈치가 불편한 것 같아요.”

뒤쪽에서 들려온 그 음성에 필상과 모모코의 고개가 돌아갔다. 거기엔 흠뻑 젖은 땀을 닦는 봄이 씩 웃으며 서 있었다.

“봄. 안 프로가 부상이란 말이야?”

“압박 붕대를 감았잖아요. 진통제를 먹으면 당장은 괜찮겠지만 후반에는 스윙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아요.”

왼팔에 붕대를 감은 건 눈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의 스윙을 하고 난 뒤엔 어김없이 쉬는 것을 보면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그녀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모모코의 시선은 절로 필상에게로 향했다. 정말 그런 것인지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끄덕 끄덕!

“타고난 체력을 지녔는데, 하기야 고갈될 때도 됐지. 강행군을 했으니까.”

“정말 그런 상태로 2위까지 치고 올라온 거예요?”

“응. 나도 봄이 지적하지 않았으면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역시 날카롭네.”

“아!”

모모코는 봄의 각별한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봄의 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제가 오늘 새벽부터 살펴봤는데요. 매킬로이와 존 람의 컨디션이 아주 좋더라고요.”

“그래?”

모모코는 반응하지 못했지만 필상은 굉장히 흥미로운 시선으로 봄을 쳐다봤다. 자신도 관찰하면 그 정도는 파악할 수 있지만 그럴 이유도,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눈 뜨자마자 연습을 한다면서 드라이빙 레인지에 있었던 봄은 필상의 경쟁자들을 주의 깊게 봤던 것이다.

공식적인 직책은 피지컬 트레이너였으나 그녀의 역할이 더 확장될 수 있는 여지를 보여 준 셈이었다.

본인도 뭔가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배시시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런 관계의 진전이 달갑지 않은 것 같던 모모코가 갑작스럽게 태도의 변화를 일으켰다.

“봄. 어차피 오빠는 곧 시합에 나가야 하니까 나랑 연습 라운드나 나갈까?”

“연습 라운드요?”

“응. 근처에 아주 재미난 코스가 있거든. 오렌지 듄스라고.”

“듄스요?”

“응. 듄스 코스(Dunes Course)는 해안과 내륙의 크고 작은 모래언덕(Sand Dunes) 사이에 만들어진 코스를 말하는데, 아마 굉장히 신선할 거야.”

필상은 모모코가 생각을 바꾼 줄 알았다.

그런데 내용을 들어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필상의 경기를 보지 않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곧 JLPGA에 출전하기 위해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어 놓은 그녀가 굳이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봄과 동반 라운드를 할 필요는 없다.

아마도 기를 꺾으려는 의도인 듯.

하지만 봄은 폴짝 뛰며 기뻐했다.

“좋아요. 언니. 저 골프 좀 가르쳐 주세요.”

“가자. 오빠, 저녁 먹기 전에 돌아올게요. 오늘도 파이팅!”

“그, 그래. 살살 하고.”

모모코보다는 봄이 걱정스러웠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괜히 두 여자 사이에 끼어 난처한 꼴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모모코야 두말이 필요 없는 사랑스런 아내지만 지금은 봄을 그녀에게 맡겨야 하기 때문에 제발 둘이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모모코와 나란히 걷던 봄이 살짝 뒤돌아보며 눈을 찡긋했다. 내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 같은데,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보통내기가 아니에요.”

“누가?”

“봄이 말이에요. 걱정 마세요. 모모코도 프로님 입장을 이해하기 때문에 알아서 잘할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 하하하.”

미사키의 말을 들어보면 괜한 걱정일지 모른다.

모모코는 늘 기대 이상의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이미 봄이 필상을 남자가 아닌 핏줄처럼 여기겠노라 선언했기 때문에 괜한 불을 지필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잡다한 생각은 접고 연습을 시작했다.

-드디어 자랑스러운 챔피언 조가 1번 홀에 등장했습니다. 둘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면서 걸어오는 걸 보면 한국 골프의 밝은 미래가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현재 세계 랭킹 100위 안에 우리 한국 선수가 7명이 포함되어 있더군요. 그중에 공 프로를 제외하면 안병훈 프로가 41위로 가장 순위가 높죠?

-네. 54위에 김시우 프로, 61위에 강성훈 프로, 63위에 임성재 프로가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그중에 4명이 이번 대회에 출전했고 다 예선을 통과한 걸 보면 확실히 한국 남자 골프가 중흥의 시대에 접어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도 좀 아쉽기는 하죠. 다들 우승을 거둘 기량은 충분한데 좀처럼 인연이 닿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다음 시즌에 큰 기대를 걸어 봅니다. 앞에서 우리 공 프로가 잘 이끌고 있기 때문에 자신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 프로의 동계 전지훈련에 같이 좀 참가하면 어떨까요?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만 공 프로가 워낙 바쁜 일정을 소화해서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TPK 사단의 프로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이 있으니 전혀 불가능한 것 같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한국은 이미 골프 붐이 크게 일었다.

과거에도 이런 현상은 있었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지금과는 감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필상의 등장은 안 그래도 골프에 대한 관심이 많던 한국인들에게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경쟁력이 높은 스포츠로 인식된 측면이 강했다.

아시아 최고는 물론 세계적인 골프 메카로 자리매김하는 추세가 너무도 반갑고 즐거웠던 것이다.

3라운드는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묘하게도 봄이 찍었던 매킬로이와 존 람이 프런트나인에 5타를 줄이며 단숨에 -6까지 치고 올라왔기 때문에 필상의 새로운 경쟁자로 지목을 받았다.

하지만 안 프로와 필상도 차분하게 타수를 줄여 10번 홀에 도착했을 때, 나란히 -13, -7이 되었다.

-역시 프로는 다른 것 같습니다. 너무 성적들이 좋지 못해서 코스 세팅을 거의 수정하지 않았더니 결국은 이렇게 일들을 내는군요.

-아! 그런 측면이 있는 거군요.

-네. 경사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한 것 같고 한국형 잔디에 대한 적응도 웬만큼 마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공 프로도 후반에는 더 줄일 수 있겠군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오늘 공 프로는 상당히 안정적인 공략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그런 입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에이, 그래도 막상 따라오면 부담스러울 겁니다. 남의 사정을 봐줘야 할 이유가 없지요. 그냥 팡팡 치고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뱁새가 황새 따라오면 어찌 되는지.

-하하하.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요.

필상의 고공 행진은 백 나인에서는 그 색깔을 바꿨다.

아예 드라이브를 잡지 않고 3번 우드나 18도 유틸리티로 공략하는데, 공이 떨어진 지점은 어김없이 평평한 라이였다.

그게 때로는 300야드 안팎이든, 340야드 부근이든 정확히 최적의 세컨샷 지점을 얻어 그린을 공략하기 때문에 한 홀 건너 한 홀마다 버디가 나왔다.

하지만 동반자인 안 프로는 12번 홀 티샷을 할 때, 모두가 깜짝 놀랄 치명적인 미스 샷이 나오고 말았다.

207야드 파 3홀인데, 아마추어에게는 끔찍한 거리지만 그에게는 6번 아이언이면 충분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탑핑이 나면서 저공비행한 타구가 153야드에 멈춰서고 말았다.

“괜찮아?”

“네.”

“팔꿈치가 삐끗한 것 같은데, 이리 좀 와 봐.”

티샷을 하고 내려오던 안 프로에게 먼저 다가간 필상은 그의 부상 부위를 정확히 짚어 잠시 기를 불어넣었다.

경쟁하는 선수끼리 뭐하는 짓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나 대부분의 팬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누가 봐도 안 프로의 이번 샷은 불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에 다소 이상하게 비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필상은 그가 절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안 프로도 느닷없는 필상의 행동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필상은 엉뚱한 이야기로 주의를 분산시켰다.

“동창이랑 결혼하면 무섭지 않아?”

“네?”

“사사건건 부딪칠 것 같은데?”

“부딪치기는요! 부딪칠 엄두도 못 내죠. 하하하!”

2018년 연말에 가약을 맺은 상대가 초등학교 동창생이라는 사실을 필상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기분 좋았던 모양이다.

순진한 표정이 매력인 안 프로가 크게 웃으며 지금 상황을 깜빡하는 사이, 어느새 필상은 잡고 있던 팔을 놨다.

그리고는 어깨에 팔을 두른 필상이 함께 걸으며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팔꿈치의 통증이 완화된 것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올 겨울 전지훈련은 어디서 할 거야?”

“보통 남해안 쪽에서 체력 훈련을 마치고 좀 더 따스한 곳에서 동계 훈련을 해 왔습니다.”

“음……. 소속사에서 동의하면 올 겨울에는 나랑 같이 움직일까?”

“그래도 됩니까?”

“물론이지. 소수 정예 군단을 한 번 꾸려 볼까 싶어.”

“기회를 주시면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한국 남자 골프의 미래를 짊어질 몇몇 선수들은 기량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좋다.

특히나 가장 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동갑내기 안병훈과 노승렬은 가히 으뜸이라 할 만하다. 만약 그들이 합류한다면 이미 기대를 잔뜩 하고 있는 김경태, 임성재와 더불어 환상의 조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굿 샷!”

“고맙습니다.”

“뭐야? 아까 그 샷은 대체 누가 때렸던 거야?”

“팔꿈치에 문제가 좀 있었는데, 형님의 기운을 받아서 그런지 제 정신을 퍼뜩 차린 것 같은데요?”

“하하.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으면 그 팔은 이제 내 건가?”

농담으로 받아쳤지만 사실은 움찔했다.

형님의 기운을 받았다니?

물론 그건 정확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어려운 상황에서의 각별한 배려가 통증을 잊게 해 줬다는 의미였다.

실제 필상이 치유에 도움이 되는 정순한 기운을 나눠줬다는 것은 말을 해 줘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하튼 애써 준 보람이 느껴지게끔 안 프로는 멋진 웨지 샷으로 무난하게 파를 잡을 수 있는 위치에 공을 보냈다.

-16 공필상

-9 안병훈, 로리 매킬로이

-8 존 람, 김경태

-6 이시카와 료, 필 미켈슨, 이형준, 타이거 우즈, 김비오

필상은 전후반 3타씩 줄여 여전히 7타 차 단독 선두를 유지했다. 하지만 매킬로이는 이날 무려 8타를 줄이며 안 프로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게다가 존 람과 이형준, 김비오가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와 탑 10에 이름을 올렸다.

일본 골프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던 이시카와도 나름 선전했지만 10타 차로 벌어진 필상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팬들은 없는 것 같았다.

“선두권의 절반이 한국 선수네요.”

“그러니까 너도 얼른 투어프로 자격부터 갖춰.”

“알았다고요. 내년에는 저를 경계하셔야 할 겁니다.”

“제발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하하하.”

필상이 5주간 공백을 가졌을 때, 한국에 먼저 돌아온 성호는 챌린지 투어 17회 대회에서 우승하며 코리안 투어 무혈입성에 한 발 더 바짝 다가갔다.

굳이 선발전을 치르지 않고 바로 자격을 얻어야만 필상과 함께 동계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3번 남은 대회에서 톱 10안에 2번을 들어야 한다.

물론 한 번만 더 우승하면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필상과 정말 경쟁 선수로 함께 필드에 나설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근데 형수님은 왜 안 오시죠?”

“전화 좀 해 봐. 샤워하고 올 테니까.”

라운드를 나간다는 코스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감안해도 필상보다 먼저 티오프를 했기 때문에 이미 돌아왔어야 할 시간이다.

아무래도 시합과 연습 라운드의 소요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혹시 다투기라도 한 건 아닌지 염려했는데, 샤워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성호가 여러 번 전화를 했는데, 둘이 같이 라운드를 마친 뒤에 놀고 있다는 말만 전하고 그냥 끊었다고 했다.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식사를 마친 필상은 다시 연습장으로 향했는데, 성호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형, 큰일 났습니다.”

“왜?”

가슴이 철렁했다.

정말 두 여자가 무슨 사고라도 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호가 보여준 스마트폰 가십 기사를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봄은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모코는 한국에서도 유명 인사다. 그런데 버젓이 사진이 찍혔다.

기자도 아닌 일반인이 찍어서 자랑하듯이 올린 유튜브 영상이 기사의 근거였는데, 둘은 지금 인천의 명소인 월미도에 있었다.

함께 돌아다니며 쇼핑도 하고 놀이기구도 탄 둘이 지금은 한 횟집에서 걸쭉하게 한잔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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