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더 볼 것도 없네요.
“어서 타.”
“여긴 뭐 하러 오셨어요.”
차에 쭈뼛쭈뼛 다가온 사람은 봄이었다.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외모지만 필상이 기억하는 그녀는 늘 보이시한 검정 점퍼 차림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늘씬한 몸매가 한껏 드러나는 핫팬츠에 하얀 스타킹, 실크 블라우스 위에 하늘색 니트를 걸쳐 어딜 가나 시선을 끌 눈부신 외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렇게 한껏 멋 부릴 나이에 모모코의 눈치를 보며 스스로를 낮추고 감추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티켓은 취소했지?”
“아뇨.”
그녀는 일본행 비행기에 오르던 차에 필상의 연락을 받았다. 워낙 강경했기에 마지못해 사람들의 시선이 뜸한 주차장까지 나왔지만 길게 이야기를 나눌 눈치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가 차에 오르자 필상은 곧바로 출발했다.
필상을 잠시 째려보던 그녀가 이내 안전벨트를 매더니 조용히 기다렸다. 이러지 말라는 말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듯.
하지만 필상이 미처 확인하지 못한 그녀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필상이 자신을 위해 공항까지 차를 몰고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떨렸기 때문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필상이 차를 몰고 간 곳은 골프장 인근의 해안 도로였다. 석양이 길게 드리워졌지만 바닷가에 놀러 온 사람들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그냥 한적한 곳에 차를 대세요.”
몇 번이고 주차를 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좀 예쁘다 싶은 커피숍마다 놀러온 사람들이 붐벼 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급기야 외진 해안 도로변에 차를 댔다.
그나마 저 멀리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노을이 바다에 부딪쳐 반짝이는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말도 없이 어딜 가려고?”
“이제 제 역할은 끝난 것 같아서요.”
“누가 끝났대?”
봄은 바다를 바라볼 뿐 쳐다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필상이 이제 큰 고비를 넘겼고 추후 자신의 존재는 점점 더 의미를 잃는 것이 싫었던 걸까?
그러나 알맹이만 쏙 빼먹은 필상은 그녀를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그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면 또 모를까, 이대로 보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해 줘.”
“뭐를요?”
“나 없이 잘 살 수 있어?”
굉장히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막상 뱉고 보니 바위를 짊어진 듯 어깨가 무거웠다.
“오빠는 저 없이도 잘 살 수 있잖아요.”
“그래. 그게 다 네 덕분이지.”
“아니에요. 오빠 때문에 저도 당분간 괜찮을 것 같아요.”
“당분간?”
“…….”
적시에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과연 자신은 고비를 넘길 수 있었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빠른 복귀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최악의 경우에는 골프를 칠 수 없거나 그리운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신의 은인이다.
그런데 그녀의 어려움을 알고도 이대로 외면할 수는 없다. 다만 문제는 영원히 맞닿을 수 없는 관계를 어떻게 푸느냐는 것이다.
“나를 좀 더 도와줘.”
“싫어요.”
“왜?”
“몸은 편할지 모르지만 너무 힘들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거 알잖아.”
“아니요. 몰라요. 언제 제가 오빠더러 저를 안아 달라고 했나요? 사랑해 달라고 했나요?”
갑자기 격정적인 음성으로 토해내는 그 말에 필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다. 봄은 자신에게 원한 것이 없다. 단 하나도.
지레짐작한 자신이 그녀를 애써 멀리했을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반 뼘도 남지 않은 석양을 바라보는 시선도 감히 돌리지 못했다.
그 침묵이 사고를 정지시킬 듯 하얗게 채색할 무렵, 봄은 전혀 예상치 못한 화두를 꺼냈다.
“저 오빠 여동생하면 안 돼요?”
“여동생?”
“네. 연인도 될 수 없고 아내는 더더욱 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은 남매가 되는 것뿐이잖아요.”
“그래도 돼?”
“치! 이렇다니까! 제가 무슨 음탕한 마녀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좀 마세요. 아저씨!”
“미, 미안해.”
봄은 음탕하지 않을지 몰라도 자신은 음탕한 자가 분명했다. 이제 갓 스물인 그녀를 오로지 성적인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띠 동갑인 모모코와 결혼을 해서 그렇지, 13살이나 어린 봄에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범죄로 취급받을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좀 묘한 것 같아요. 그냥 좋으면 좋은 거지, 그걸 굳이 사랑이니, 정이니 자꾸 구분할 필요가 있나요?”
“그래도 다른 건 다른 거 아닌가?”
“함께 자고 싶은 건 물론 특별한 감정이죠. 하지만 그건 감정이라기보다는 본능 아닌가요?”
“본능을 꾸밈없이 드러내도 되는 사이가 바로 사랑하는 사이지.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되고.”
기껏 양지로 나왔건만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뭔가 아쉬웠던 걸까?
“여하튼 전 이미 포기했으니까 그냥 여동생 할래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봄이 새로운 관계의 정립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기에 이견을 낼 필요조차 없다. 그래서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 말하려는 순간, 조건이 붙었다.
“어머니. 너무 무서워요.”
“우리 엄마?”
“네. 제가 오빠를 잡아먹을 여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건 내가 잘 말씀드려 볼게.”
“그럼 저도 잘할게요.”
자초지종을 다 말씀 드릴 수는 없다.
하지만 처음 보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봄에게 거부감을 보였던 엄마를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 또 봄을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동안 대화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방도를 모색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필상은 허심탄회하게 봄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고집이 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둘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필상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 물꼬가 트이자 신선한 방향도 제시했다.
“일본에 그냥 가서 뭘 하려고 했어?”
“프로 데뷔할 거예요.”
“고작 그 실력으로?”
“흥! 두고 봐요. 언니보다 못하지는 않을 테니까.”
“계속 혼자 지낼 수는 없다면서?”
“가끔 오빠를 찾아오려고 했죠. 설마 진 빚이 있는데 모른 척하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글쎄. 우리 싫다고 떠난 애를 내가 왜?”
“아! 진짜 나쁜 놈이다.”
“뭐?”
“아! 나쁜 오빠. 오빠!”
* * *
여자의 촉은 무섭다.
봄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온 필상은 모모코와 마주쳤다. 여주 집이 멀지는 않지만 예선 때는 오지 않겠다고 말했던 그녀가 부지불식간에 떡 나타난 것이다.
뜨끔했지만 그런 마음자세로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악화시킨다는 생각에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식사는?”
“조금 먹었어요.”
“잘됐네. 난 아직 식전이니까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
필상의 태도가 너무 당당했기 때문인지 모모코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를 데리고 레스토랑에 들어온 필상은 일단 주문한 뒤에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했다.
“봄이 떠나려고 했어.”
“왜요?”
놀라기는 했으나 그 표정이 좀 애매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자신에 대한 사람이 적어도 봄에게만은 집착이나 소유로 발현되는 게 아닌지 염려되는 대목이었다.
“몰라서 물어?”
“제가 뭘요.”
“기본적으로 문제는 내게 있지. 그동안은 내 코가 석 자였으니 그렇다 쳐도 이젠 그럴 수 없잖아.”
“인정해요. 봄이 당신을 위해 큰 역할을 한 것을. 하지만…….”
봄의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일단 부정적인 접속사부터 꺼냈다. 그러나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머뭇거리자 필상이 먼저 정확한 상황을 언급했다.
“내가 봄의 도움이 필요했듯이 그녀도 내 도움이 필요해.”
“도움이라니요?”
“나도 그랬지만 당신도 부정적인 생각은 버려. 그동안 다소 찜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잘 버텨 왔잖아.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무식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아도 될 거야.”
“방안이 있나요?”
“응.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봐야지. 중요한 것은 어렵게 봄의 마음을 돌려놨고 그녀는 절대 우리 관계에 금이 가는 행동은 하지 않을 거야.”
“제가 뭐라고 했나요?”
극구 부정하지만 사실 그녀의 입장을 모르지 않는다.
봄이 수행한 역할에 비해 애써 의미를 절하한 주동자는 바로 자신이었다. 모모코도 불안감에 동조했을 뿐이고.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는 것을 느낀 필상은 저녁에 나눴던 얘기를 해 줬다.
“여동생이요?”
“응. 그냥 서로가 잘되기를 바라는 정이 깊은 사이, 그 정도는 우리가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왜 하필 여동생이에요?”
“나이가 어린데 누나가 될 수는 없잖아. 그녀가 바라는 것은 더 이상 아웃사이더로 겉돌고 싶지 않다는 거야.”
모모코는 좀처럼 동의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누구보다 살갑게 굴었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가 자신과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벽을 쌓은 것 같았다.
그래서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난 당신이나 수미, 가족의 마음을 아프게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다만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봄은 오래 살지 못할 거야.”
생존의 문제는 얼마 전까지 필상에게 해당되는 과제였다. 얼마나 마음 졸이며 해결해 왔던가.
그런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봄이 같은 처지에 처한 것을 알면서도 거부하는 것은 그 어떤 말로도 미화될 수 없었다.
결국 모모코는 동의했다. 진심이 아닌 게 문제가 아니고 눈을 밝히고 관전할 요량으로 보였다.
* * *
-와! 정말 멋진 장타가 터진 것 같습니다.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아침 8:10에 티오프를 한 필상은 펄펄 날았다.
머리를 어지럽히던 문제가 말끔하게 정돈되었기 때문이다.
큰 고비를 넘긴 뒤, 필상은 이전보다 감각이 더 향상되고 힘도 좋아졌다. 346야드 드라이브 티샷을 날리는데 사용한 힘은 이전보다 낮은 60% 스윙이었다.
때문에 정확성에 더 공을 들일 수 있었다. 오늘 인코스부터 출발한 필상은 어제 해저드에 빠졌던 11번 홀에서 마치 복수라도 하듯이 정확하고 긴 티샷을 작렬시켰다.
그러고는 가뿐이 아이언으로 2온에 성공해 이글 찬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비록 이글 퍼팅은 실패했지만 가뿐하게 버디를 신고했다.
[12번 홀, 206야드 파 3홀 1온 1퍼팅 버디.]
[13번 홀, 401야드 파 4홀 2온 1퍼팅 버디.]
[14번 홀, 392야드 파 4홀 2온 1퍼팅 버디.]
하나하나가 만만한 홀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들린 듯 이어진 4개의 버디를 곁에서 지켜본 팬들의 놀라움은 거의 경악 수준이었다.
분명히 무리한 스윙을 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매홀 모든 샷에 여유가 넘쳐흘러 마치 혼자만 다른 쉬운 코스에서 플레이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분위기가 지속된 가운데 필상은 2라운드를 결국 -7로 끝마치는 쾌거를 이뤄 냈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언더파를 기록한 선수가 십여 명 나왔지만 단독 선두인 필상과의 격차는 더 벌어졌다.
-10 공필상
-4 안병훈
-2 이시카와 료, 김경태, 필 미켈슨
-1 로리 매킬로이, 타이거 우즈, 존 람, 브라인슨 디샘보, 저스틴 로즈, 게리 우드랜드.
더도 말고 톱 10에 든 선수들만 언더파였다.
그 뒤로도 동타를 기록한 선수가 많아 예선 통과 컷은 +6로 결정되었다. 그냥 성적만 놓고 보면 가히 메이저 대회라고 해도 될 만큼 와르르 무너진 선수들이 나왔다.
주말을 앞두고 짐을 싼 선수 중에 세계적인 랭커들도 상당수 포함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아시아 시장을 무시하던 PGA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더 볼 것도 없네요.
-저도 동의합니다만 너무 서둘러 단정 짓는 것은 공 프로에게 부담만 가중시킬 뿐입니다. 오늘 선두권에 올라선 선수들은 어제와 달리 이 코스에 적응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쟁쟁한 선수들이 치고 올라왔지만 타수 차가 워낙 크고 오히려 결선에서는 더 벌어지지 않을까요?
-으음……. 솔직한 제 심정은 우리 공 프로가 정말 완벽한 몸 상태인지, 그게 관건입니다. 오랜만에 필드에 나오기도 했고요.
-여하튼 공 프로의 우승 경쟁자는 오로지 본인뿐이라는 거군요. 하하하! 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PGA가 오프시즌이라 이 경기는 미국에서도 중계했다.
또한 공동 주최하게 된 유럽 전역은 물론 마지막에 시드를 4개나 할당받은 일본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켜 역시 생중계를 하고 있었다.
일찍이 한국에서 벌어진 대회에 이렇게 많은 방송사가 참가한 적이 없다. 그 말은 곧 상당한 중계권료가 걷혔다는 의미였고 나아가 아시아 골프 시장의 중심축이 한국이라는 인식도 덩달아 조성되는 분위기다.
가장 배 아픈 곳은 역시 일본일 것이다.
그러나 이날 저녁 TPK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이 대표가 중대한 발표를 했다. 미뤄졌던 일본에서의 사업이 곧 재개된다는 소식이 그것인데, 일본 방송은 그걸로 위안을 삼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