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18화 (218/354)

218. 캐디를 하기 싫은 날

-아름다운 장미에 현혹되면 돋친 가시에 찔리게 마련이죠?

-적절한 비유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시아 코스는 쉽다는 선입견을 가졌던 유럽과 PGA 선수들만 호되게 당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지금까지 경기를 마친 64명의 선수 중에 1오버가 4명인데 그중에 한국 선수는 1명뿐입니다.

-아! 김경태 선수의 정교함은 일찌감치 정평이 났으니까요. 그런데 이 코스 설계에 관여했다는 타이거 우즈마저 버디 없이 1오버로 가고 있는 것은 설명하기가 좀 어렵네요.

-이론과 실전의 괴리가 그만큼 크다는 거겠죠. 또한 TPK가 인수해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끝내기 이전에도 이 코스는 절대 쉽지가 않았습니다.

메이저 대회가 될 것을 의심치 않는 초대형 대회다.

그래서 상당한 난이도를 지닌 코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코스를 경험한 아마추어들의 평판은 제각각이었다.

화이트 티에서 플레이하는 중급자들까지는 비교적 호평이 많은 반면, 블루나 블랙 티에서 플레이하는 고수들의 반응은 거의 일치했다.

몇 홀 지나면 절대 아름다운 풍광 따위는 즐길 겨를이 없을 거라고. 그리고 이 대회를 통해 사실로 증명되는 중이었다.

그 말은 곧 가장 긴 전장을 사용하는 프로 대회의 경우, 장타자가 유리할 수 있다는 계산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골프를 어렵게 만드는 방법이 정말 다양하다는 것도 동시에 드러났다. 심한 언듈레이션 말고 또 다른 어려움을 선사하는 조건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육안으로는 쉽게 구분되지 않는 한국형 신품종 잔디가 심어져 있다는 점이다.

“다들 애를 먹고 있나 봐요.”

“아주 좋아.”

“그런데 언듈레이션에 대한 이야기는 많아도 잔디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나 봐요.”

“연습 라운드를 2번이나 하고도 그걸 미처 파악할 겨를이 없다면 좀 심각하군.”

프로라면 언듈레이션이 심한 스탠스에 맞춰 다양한 연습을 진행한다. 물론 이렇게 심한 경우가 드물어 적응하기 쉽지 않겠으나 그래도 결과는 생각보다 좋지 못했다.

그 원인을 필상은 잔디에 대한 적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타이거나 미켈슨도 버디 없이 6개 홀을 지났다는 말에 살짝 긴장했다.

-나이스 샷!

-역시 공 프로인가요?

-비거리는 팬들이 기대했던 장타는 아니었습니다만 그 이유가 다 있었군요. 하하하!

1번 홀은 438야드 파 4홀이다.

전장이 제법 길지만 330야드 이상을 가볍게 날리는 필상이 보낸 티샷 비거리는 뜻밖에도 315야드에 불과했다.

드라이브를 잡고 굳이 그곳에 보낸 이유는 세컨샷에서 드러났다. 핀이 좌측에 치우쳐 꽂혔고 그 앞의 커다란 벙커를 피하기 위해서는 드로우 샷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필상은 공이 발보다 약간 높은 지점에 티샷을 떨어뜨린 후 자연스러운 드로우 샷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리고는 가볍게 버디를 작성했다.

“시작이 괜찮네.”

“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잖아요. 팍팍 줄이죠.”

필상은 코스를 리노베이션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담았다.

그중에 하나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성 있는 코스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대다수의 선수들이 평소와 달리 샷의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은 잔디의 특성과 무관치 않다.

페어웨이에 놓인 공이 양잔디보다 조금 더 지면에서 떠 있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해야만 한다. 그 미세한 차이가 구질과 방향성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충분히 설명을 했는데도 거장인 타이거와 미켈슨도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필상으로서는 정말 느긋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기세 좋게 출발한 필상은 2번 홀부터 다른 선수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못했다.

‘봄?’

갤러리들 사이에 모자를 꾹 눌러쓰고 자신의 경기를 관전하고 있는 봄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토시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숙제가 생긴 것을 알았지만 천천히 풀어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경기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는데 혼자 외롭게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마음이 쓰렸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꿀 의향은 없지만 자신의 삶도 중요하듯이 그녀의 삶도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음에도 묵묵히 따르고 지켜보기만 했던 그녀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답답했다.

‘좀 더 솔직할 수는 없었나?’

필상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묻고 자신의 상태에 대해 터놓고 얘기했다면 그나마 대안이라도 고려했을 텐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부친의 말을 따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본인의 인생과 생존이 걸린 문제가 아니던가.

결국 내 잇속만 챙긴 셈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일단 시합 중에는 오로지 스윙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생각이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감이 너무도 확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TPK 서해안 CC가 어렵기는 어려운 모양입니다. 세계 랭킹 1위인 우리 공 프로가 좀처럼 타수를 줄이지 못하네요.

-하하하. 타수를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팬들은 이미 행복하실 것 같습니다. 투어 챔피언십에서 갑작스럽게 기권하면서 그의 건강 이상에 대해 얼마나 많은 얘기들이 오갔습니까!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팬들 앞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요.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모든 언론들이 그를 찾아 미국은 물론 한국의 큰 병원들은 다 뒤져봤는데, 흔적을 찾을 수 없어서 엉뚱한 구설도 많았지요.

-그런데 오늘 경기하는 모습을 보니 다 쓸데없는 기우에 불과했던 겁니다. 하하하!

허 위원은 그렇게 둘러댔으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아플 때, 병원을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중요한 대회를 포기할 만큼 심각했던 필상이 의학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던 것이다.

항간에서는 주치의가 은밀하게 처리했을 것이라고도 하지만 평소 인계를 벗어난 것 같은 신비한 기량과 맞물려 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기이한 병에 걸렸다는 말도 나왔다.

물론 한 달 반의 공백을 깨고 나타나 예전 같은 실력을 보여 주면서 잡설은 수그러들 테지만 필상을 바라보는 팬들의 시선에는 늘 불안감이 상존했다.

“프로님. 561야드 파 5홀이에요.”

“드라이브 줘.”

11번 홀은 오르막인데도 상당히 전장이 긴 롱 홀이라서 웬만한 선수는 2온을 노리기 힘들다.

하지만 필상은 연습 내내 2온에 성공했으며 확실한 공략 방법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사키가 오늘 전장의 길이를 일부러 틀리게 제공했는데도 필상은 지적하지 않았다.

이는 곧 정신이 딴 데 팔렸다는 의심이 확증으로 변하는 계기였다. 평소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라는 드라이브를 꺼내 놓고도 건네지 않았다. 당연히 클럽을 주리라 생각했던 미사키가 손에 든 채 자신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필상은 신경질적인 어투까지 보였다.

“왜?”

“저 이런 날은 처음이에요.”

“무슨 날?”

“프로님 캐디를 하는 것이 싫은 날이요.”

언제 어떤 상황에서고 항상 가득한 정성을 보이던 미사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필상은 뜨끔했다.

자신이 지금 경기에 몰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스코어도 나쁘지 않았고 설사 선두에 나서지 못해도 공백이 길었기에 명분이 있고 남은 기간에 얼마든지 따라갈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캐디를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을 돕는 도우미가 아니다. 스스로 캐디 출신이기에 그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으며 그녀와의 대화와 교감을 통해 외로운 필드의 전쟁에서 큰 힘을 얻는다.

그런데 그걸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해.”

“제게 미안해하지 마세요. 저는 한 편이잖아요. 오랜만에 필드에 나온 프로님의 이런 무성의한 스윙을 혹시 알아보는 팬들이 있을까 두려워요.”

“으음!”

간단하지만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녀만큼 정확한 상태를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몇몇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 한 명이 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필상의 시선은 갤러리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런데 보이지 않았다.

첫 홀부터 지금까지 조용히 자신의 경기를 관전하던 그녀가 떠난 것이다. 그게 뭐 대수일까 싶기도 하지만 불길했다.

“프로님!”

다시 한 번 주의를 환기하는 미사키의 음성에 정신이 퍼뜩 든 필상은 그녀가 건넨 드라이브를 들고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서며 이를 악물었다.

이러다 너무도 많은 것을 한꺼번에 잃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때문에 집중하고 강력한 티샷을 날렸지만 타구는 의도치 않은 드로우 구질이 걸려 버렸다.

-어어! 너무 휘는 것 아닌가요?

-약간의 미스 샷이 나온 것 같습니다. 페어웨이가 일제히 좌측으로 기울어 우측은 여유가 있지만 좌측은 위험합니다!

-아이고 이런!

페어웨이 왼쪽 끝자락에 떨어진 타구가 그만 멈추면 좋으련만 러프를 지나 카트 도로에 맞더니 급기야 좌측 벼랑 아래 숲으로 기어들어 가고야 말았다.

필상에게서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 드라이브 티샷 미스가 나온 것이다. 놀란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가끔 실수를 해도 이렇게 해저드에 빠질 만큼 치명적인 실수는 하지 않는 선수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야유를 하는 팬들은 없지만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따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마중 나와 클럽을 챙기는 마사키는 정확한 상황을 짚어 줬다.

“350야드 지점에서 들어갔기 때문에 드롭하면 남은 거리는 217야드 정도 될 것 같아요. 오르막 감안해도 225야드?”

“그래. 3온 하지 뭐.”

“그럼요.”

미사키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는 것 같았다.

‘차라리 잘됐어요. 이제 정신 바짝 차리세요!’

그런 말을 할 것 같았으나 그마저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선수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캐디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필상은 생각한다.

저변에 선수를 위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면.

하지만 그녀는 아끼는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상에 대한 신뢰를 놓지 못하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으나 여하튼 그 미스 샷은 집중력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으흐! 하필 그린에 떨어져서.”

“괜찮아. 포대처럼 생긴 그린이라서 짧았다면 내리막 칩샷이 남았을 거야.”

“그것도 그러네요.”

필상의 세컨샷은 조금 길었다.

의도한 지점은 그린 앞 러프였다. 거기에 떨어져 내리막을 타면 해저드에 빠지고도 버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나 간발의 차이로 그린에 떨어지는 바람에 그린을 오버했다.

하지만 마사키의 표정이 밝아졌다.

2번 홀부터 일체 말도 없이 스윙을 하던 필상이 평소처럼 공략 방법에 대한 의논을 재개했기 때문이다.

“칩인 버디 어때요?”

“하하. 당연히 노려야지.”

런을 통해 홀인을 노린 필상은 피칭웨지를 잡고 범앤런을 구사했다. 그리고 의도한 대로 정확하게 떨어져 구르는 것을 보며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깃대를 맞고 툭 떨어지지 않고 슬쩍 비껴 나는 모습에 아쉬움을 표했다. 좀처럼 경기 중에 액션을 취하지 않던 필상이 무릎까지 구부리며 아쉬워하자 팬들의 격려의 박수가 쏟아졌다.

해저드에 빠지고도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보기 좋았던 것이다. 이후 필상은 14, 15번 홀에서 연속 버디를 작성하며 결국 -3로 경기를 끝마쳤다.

그나마 오후에는 언더파가 3명이나 나왔다.

-3 공필상

-2 안병훈

0 이시카와 료

+1 김경태, 필 미켈슨, 사토시 고다이라

2오버파가 공동 7위였고 무려 11명이나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위의 6명만 주목을 받았다. 필상이 가장 윗줄에 오른 것은 반가움 이외에 다른 언급은 없었다.

오히려 안병훈이 오랜만에 한국 대회에서 우승권에 나선 것이 더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6명 중에 일본 선수가 2명인데 반해 유러피언 투어 출신은 한 명도 끼지 못했다.

게다가 세계 랭커인 PGA 선수 중에 유일하게 미켈슨만 이름이 오른 것도 굉장히 이색적인 결과라 할 수 있었다.

“누가 괴물 아니랄까 봐! 보기 없이 버디만 3개 잡았다면서?”

“네. 오늘 컨디션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블랙피그. 이제 너마저 대놓고 우릴 압박하는 거냐?”

“아! 진짜!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블랙피그가 뭡니까! 멀쩡한 이름 놔두고.”

“네 애칭이잖아. 공 프로가 부를 때는 그냥 웃어넘기더니 너 정말 나를 우습게 생각하는 거 아냐!”

먼저 경기를 마친 미켈슨은 타이거와 함께 연습장에서 필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성호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다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전에는 전설을 만난다며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영광이라던 성호가 이젠 친구처럼 편히 대하는 모습이 낯설지도 않았다.

“킴. 공 프로는 왜 안 오지?”

“그러게요. 샤워 끝날 때가 지났는데.”

잠시 연습을 하다가 함께 저녁을 먹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필상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미사키가 전한 말은 먼저 식사하러 가라는 문자가 왔다는 것이었다.

그 시간, 샤워를 마친 필상은 차를 몰고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인천공항이 멀지는 않지만 대회 중에 예정에 없던 일정을 소화하는 이유는 그곳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항 주차장에 차를 대고 몇 번이나 전화를 건 필상은 한참 기다린 뒤에야 만나고 싶었던 사람의 얼굴과 마주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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