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17화 (217/354)

217. 심미안(審美眼)

나이키는 인기 스포츠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두말이 필요 없는 최고의 스포츠 브랜드다.

농구, 야구, 축구는 물론 골프에서도 영향력은 지대하다. 그런데 최고의 선수들을 후원하지만 대회를 주관하지는 않는다.

관련 용품을 빠짐없이 판매하는 기업이 대회를 주최할 경우에 빚어질 폐단이 눈에 보듯 뻔해 사무국에서도 배재했었다.

그런데 PGA도 아닌 한국 투어에서 드디어 관례를 깨고 대회를 주최하게 되었는데, 첫 판부터 대박의 조짐이 보였다.

일단 코리안 투어, 아시안 투어에 이어 유러피언 투어가 공동주관하게 되면서 제1회 아시안 챔피언십은 명실상부 아시아에서 열리는 최고의 대회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대회 열기가 예상보다 훨씬 뜨거워요.”

“이게 다 대표님이 수고한 덕분이죠. 하하하.”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지만 공 프로가 다시 필드에 나타난다는 소식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거 같아요.”

“하하. 뭐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대회가 열리는 첫날 일찌감치 연습장에 나와 몸을 풀고 있는 필상은 이 대표와 두런두런 대회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그 둘을 주목하고 있는 눈길은 한둘이 아니었다.

캐디인 미사키와 연습 도우미를 자처하고 나타난 성호는 이해가 되지만 평소 같으면 이렇게 아침부터 따라다닐 것 같지 않은 모모코도 같이 연습을 한다며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옆 타석에서 뭇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또 한 여인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필상의 피지컬 트레이너였다.

“봄의 스윙이 많이 좋아졌는데요?”

“싱글 플레이어에 접어든 지 오래입니다.”

“네? 원래 골프를 배웠었나요?”

“아니요. 그립부터 배운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뿐입니다.”

“에이. 실력을 감춘 거겠지요.”

연습해야 할 필상은 쉬고 있었지만 모모코와 봄은 공과 원수라도 진 사람들처럼 연이어 스윙을 하고 있었다.

모모코야 이미 검증된 골프 여신이었으나 그녀 못지않은 임팩트를 과시하고 있는 봄의 스윙은 아무리 봐도 아마추어처럼 보이지 않았다.

“저러다 프로 데뷔하는 거 아닐까요?”

“그럴 일은 없을 거랍니다. 그냥 재미있어서 한다네요.”

“두고 봐야죠.”

만약 정말로 골프를 배운 지 한 달 남짓이라면 그녀는 필상과 모모코 못지않은 골프 천재다. 아직은 다소 거칠고 실수도 나오지만 그냥 공을 맞추는 수준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며칠간 함께 연습하던 미켈슨이나 타이거도 그녀의 자질에 대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걸 보면 범상치가 않았다.

그런 봄이 왜 여태까지 골프를 하지 않았는지, 대체 스무 살이 되도록 뭘 하고 살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필상은 아는 바가 없었다.

사적인 대화는 최대한 자제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끌어내는 그녀의 신비한 재능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만약 조금만 사근사근한 태도를 보였다면 모두 그녀의 측근이 되지 않았을까?

“티오프 전에 간식이라도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네. 그래야죠.”

클럽하우스 레스토랑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이곳은 필상의 안방이었기 때문이다. 측근 한 부대를 이끌고 요기를 위해 이동한 곳은 직원 식당이었다. 그곳에는 엄마가 만들고 누나들이 가져와 차려놓은 풍성한 식탁이 마련되어 있었다.

필상보다 한식에 더 매달리는 미켈슨과 타이거의 캐디들까지 한 부대가 어울려 배를 채우는데 뜻밖의 인사가 나타났다.

“나도 밥맛 봐도 되려나?”

“물론입니다. 어르신.”

사토시의 등장에 다들 어리둥절했지만 이미 그의 기운을 감지했던 필상은 자신의 옆자리를 권했다.

“소식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아시아 최고의 대회가 열리는데 직접 보고 싶었네.”

“아직 그런 거창한 수식어가 붙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왜 이러나. 잘 알면서. 일본에서는 이 대회를 미스터 퍼펙트 토너먼트라고들 부른다네. 자네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잘 알기 때문이지.”

“공을 들이기는 했지만 돈은 들어간 게 없습니다. 하하하.”

“그야 그렇겠지. 자네가 지닌 위상만 쏟아부어도 충분했을 테니까.”

“그나저나 이번 골프장 인수 협상에서 보여 주신 파격적인 지원은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는 내가 아니라 저 아이에게 해야지. 허허.”

그의 시선은 말석에 앉아 조용히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는 봄에게로 향했다. 소중한 딸이라면 유부남에게 묘한 상황으로 보낼 수는 없다고 여겼으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 대표에게 전해 듣기로 사토시는 이끌어 온 사업의 모체인 사쿠라 재단의 지분 대부분을 봄에게 넘겼다고 한다.

또한 그에게 많은 아내가 있다는 말에서 자식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젊었을 때 얻은 아들 둘에 딸은 늦둥이 봄 한 명뿐인데, 아들들은 일본에 살지 않을뿐더러 그의 사업과는 무관한 분야에 종사했다.

또한 봄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말도 전했다.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일선에서 물러나 골프만 즐기신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게 그다지 없더군. 그래서 자네 소식이 가장 궁금했고 고비를 넘겼다는 말에 축하하기 위해 왔네.”

“관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은 이 대표에게 시선이 잠시 머물렀던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자네 주변에 이미 좋은 여인들이 있었군.”

“하하. 제가 인복이 많은가 봅니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새로운 체질을 얻게 된 이후 필상도 사토시처럼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가 트였다. 스스로 규정하길 심미안(審美眼)이라고 이름을 붙인 그 능력은 사람이 지닌 특성과 자질에 대한 분석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때로 사물에 대한 통찰력도 발휘되는데, 연습 중에 찜찜했던 공을 타격했는데 어김없이 깨지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사물의 상태에 대한 판단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대표야말로 나를 오랫동안 지탱해 온 지주였던 거야!’

그녀는 모모코나 봄 못지않은 천성적 음기를 타고난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필상에게 호감을 느끼고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것도 자연의 이치에 가까웠다.

다만 서로가 처한 입장이 확연히 달랐고 모모코를 만나게 되면서 관계를 분명히 한 것이 지금의 기묘한 관계를 설정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만약 자신이 모모코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와의 인연이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그녀에게 자신의 기운이 머물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게 일전의 위기에 도움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그걸 캘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자신도 그녀를 영원한 아군이라 생각하지만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깊이 각인되었는지는 굳이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바쁜 거 알지만 이 늙은이를 만난 김에 따로 차 한 잔 나눌 시간을 내줄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제 사무실로 가시죠.”

식사를 마친 필상은 사토시와 독대했다.

그가 어떤 제안을 할지 대충 짐작이 되지만 그 과정은 두 남자 사이에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기도 했다.

잠시 후 비서가 차를 내려놓고 나가자 닦달하듯 물었다.

“봄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마음에 듭니다. 그녀는 제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왜 취하질 않지?”

“…….”

이렇게 직설적인 표현을 쓰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말문이 닫혔다. 그라고 왜 이유를 모르겠는가!

엄연한 유부남이며 보수적인 성향을 지녔음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들이대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모모코가 절대 허용하지 않는 겐가?”

“아내와의 신뢰도 중요하지만 제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평생을 자네 곁에 묶어 두겠다는 겐가?”

“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요?”

“법이 허용하지 않아도 자네들처럼 특수한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서로 간에 합의할 수 있다고 생각했네. 요즘 젊은 친구들답지 않게 순정을 따지는 것 같으니까.”

“일부일처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끼시는 딸이 제 첩이 되는 걸 진정 바라십니까?”

“그게 그 아이가 사는 길이라면 어쩔 수 없지.”

황당한 말이다.

자신과 함께하지 못하면 봄도 부작용을 겪는다는 말이다.

그것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가 그건 자연의 섭리가 작용할 것이라고 봤다는 말에 필상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진지하게 내뱉는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모모코나 이 대표의 경우는 인세에 보기 드문 케이스지만 봄의 경우는 달랐다. 특이한 몸을 지닌 부친에게서 태어난 존재이기에 필상과 함께하지 못하면 일찍 생을 마감한 다른 자식들처럼 견디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져지지는 않았으나 난 지독히도 딸만 낳았네. 대부분은 자신이 타고난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일찍 생을 마감했지. 오로지 봄만 스물을 겨우 넘겼네. 그것도 자네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네.”

필상은 봄과의 관계를 피지컬 트레이너로 설정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던 중에 그녀에게 자신의 토납을 가르쳤다.

마주하고 앉아 함께 명상하며 서로의 기를 나누며 불안했던 진기를 안정시키고 혈도를 든든하게 넓히는 데 성공했다.

차마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욕망을 억누르는 데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었는지 이루 말하기 어렵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때면 하는 수 없이 아내와 운우지락을 나누며 해소해 왔다. 그 과정에서 봄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상황이 왜 없었겠는가!

필상은 물론 모모코도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만 부담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지극히 이기적인 행동의 발로였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현재 봄의 상태는 정확히 어떻습니까?”

“그건 나도 모르네. 괜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봄이 밝히질 않으니 나도 알 도리는 없네.”

직접적인 관계를 하면 위험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차마 그 질문은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이 자리에 이끈 것은 사토시지만 그 문제는 봄과 직접 대화를 해 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만 그런 상황인 것을 알려 주기 위해 그가 어려운 발걸음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자신은 큰 해방을 맞이했지만 뭔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말았다. 당장 큰 고비를 넘겼으나 그렇다고 추후 봄의 도움이 불필요하다고 장담하기도 어려웠다.

자신의 상태가 늘 예상대로 흘러왔던 것은 아니었기에.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될 무렵, 사토시는 긴 한숨과 함께 이런 말도 덧붙였다.

“자네를 진즉에 먼저 찾지 못한 것이 애비로서 이렇게 큰 죄가 될 줄은 몰랐네.”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인위로 되는 것은 아닌 줄 압니다.”

“공 프로. 부디 더 넓게 포용하길 바라네. 그렇다면 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봄과 자네에게 물려주겠네.”

“…….”

얼토당토않은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답은 하지 않았다.

그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대단하고 많은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것을 알지만 그게 욕심이 났다기보다는 그렇게까지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는 그를 욕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정말 아름다운 코스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화면에 비치는 광경 하나하나가 모두 다 연출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고 멋져서 외국 기자들도 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하더군요.

-산과 바다가 만나는 천혜의 자연환경, 27개 홀에서 모두 바다가 훤히 보이는 골프 코스는 외국에도 드물지요?

-실제 바닷가에 조성된 코스는 많지만 바로 산이 이어진 코스는 아주 드뭅니다. 울창한 해송(海松)에서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와 갯벌에서 생성된 좋은 공기가 라운드를 즐기는 플레이어들에게 건강을 선사한다고 합니다.

-바다와 산, 해송, 갯벌……. 이곳 TPK 서해안 CC를 찾았던 외국 골퍼들은 한국의 멋진 경관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간직하고 돌아갈 것 같아 저는 아주 뿌듯합니다.

-경관뿐이겠습니까! 새롭게 단장한 코스 레이아웃은 세계적인 명문 골프 코스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찬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인수하기 이전에 조성된 이 코스의 레이아웃은 거의 부족함을 느끼지 못할 만큼 훌륭했다. 다만 챔피언십 대회를 개최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짧은 전장의 길이였다.

그래서 필상은 타이거와 상의한 결과 파격적으로 긴 전장을 지닌 홀들을 추가했고 거기에 보태 또 하나의 카드를 추가했는데 코스의 언듈레이션을 조정한 것이다.

어찌 보면 자연친화적인 기존의 지형을 더 살린 것인데,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코스에 감동한 선수들은 실제 연습 라운드를 끝낸 뒤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면에 숨은 코스의 난이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언더파는 둘째치고 파를 잡기도 버거운 홀들이 많았다. 잔디도 좋고 그린도 훌륭하며 장애물도 위협적이지 않지만 아무 생각 없이 공략하면 경사가 심한 스탠스에 처하게 되는데, 그게 실수를 유발했다.

‘평지가 없어!’

공이 발보다 높거나 낮은 지역이 워낙 넓어 공이 직선으로 날아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캐디들이 그 어느 대회보다 바빴다. 야디지북에 나타나지 않은 숨은 경사를 찾는 것이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힘든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마침 첫 라운드가 시작되었고 아침에 출발한 선수들 중에 언더파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그중에 페덱스 컵을 거머쥔 브라이슨 디샘보와 필드의 물리학자라는 브룩스 코엡카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때문에 오후에 출발하는 선수들 중에 몇몇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었다. 바로 이 코스를 운영하는 주체인 TPK 컴퍼니의 대주주들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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