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16화 (216/354)

216. 못난 놈!

사토시의 제안은 단순했다.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양기를 다스리기 위한 최선의 방도는 토납이 아니라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음기가 강한 여인을 데려왔다. 자신의 딸이기에 필상에게 소개하는 것이 결코 쉬운 결단은 아니었을 것이다. 필상은 이미 아내가 있는 남자였기에.

하지만 봄에게 웬만한 남자는 성에 차지 않는 점을 그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사상이 불손하지만 필상은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둘 겨를은 없었고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봄을 고용하겠습니다.”

“고용?”

사토시가 모르는 것이 있다. 음양의 조화를 맞추기 위해서 반드시 합방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의도가 불손하게 느껴졌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은 끄기 위래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좀 두고 보시죠.”

“허허. 쉬운 길을 놔두고 돌아가는군.”

“그게 왜 쉬운 길이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과연 그럴까?”

그 시점에서 모모코와 봄은 먼저 자리를 떴다.

어찌 되었든 봄이 필상 일행과 함께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고 두 남자가 나눌 얘기가 더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점은 모모코의 태도였다.

분명 굉장히 거슬릴 텐데, 봄에게 꾸밈없이 대해 줬기 때문이다. 물론 속마음은 다시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사토시는 호의를 베풀었다.

딸까지 동원한 것이 어이없지만 그 또한 작은 정성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얘기는 하나뿐이었다.

TPK 일본 사업에 관한 논의.

그런데 그는 뜻밖에도 그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혹시 필상이 먼저 꺼내기를 바란 것일까?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그런데 사업 얘기는 안 꺼내십니까?”

“사업? 난 그 일에서 이미 손을 뗐네. 자네가 워낙 내 말을 듣질 않아 아직 그 소식을 접하지 않았나 보군.”

“그게 사실입니까?”

“이렇게 된 마당에 내가 뭘 감추겠나? 내가 무리수를 둔 것은 사실이네만 그건 자네의 오해도 적잖게 작용한 걸세.”

듣고 보니 자신이 편견을 가진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가 과거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것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최초 의견이 충돌된 이후 무조건 배척했던 게 사실이다.

그로 인해 작게는 TPK 일본 사업이 중단되었고 필상도 JGTO에 일절 출전하지 않으며 간극이 점차 더 벌어졌다.

“네 마지막 제안은 이미 이 대표에게 가 있으니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한 번 살펴보시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일어섰다.

애증이 교차하는 상대지만 나이 먹은 손님을 이 늦은 밤에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올 때는 봄이랑 같이 왔지만 간다는 말에 나타난 봄은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하지 않는가!

“늦었는데 하룻밤 유하시고 가시죠?”

“그럴 것 없네. 차에 기사가 기다리고 있고 이미 호텔도 잡아 놨으니.”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가시면 제 입장이…….”

그는 손을 휘휘 젓더니 그냥 문을 열고 나섰다.

올 때와 달리 어깨가 좀 펴진 것이 다행스럽게 보였지만 막상 오늘 그와의 일을 되새겨 보니 처음부터 매듭이 잘못 꿰어진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결국 그를 태운 리무진은 어둠속으로 사라졌고 거실로 돌아온 필상은 이제 봄과 구체적인 대화의 필요성을 느꼈다.

“당신은 왜 여길 따라왔지?”

“당신이라는 호칭은 너무 딱딱해요. 언니처럼 저도 오빠라고 부르고 싶어요.”

음성의 톤이 간드러졌다.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것처럼 들렸는데, 그게 혼자만의 착각일지라도 너무 위험했다.

“그럴 수는 없어. 당신을 오늘부터 내 피지컬 트레이너로 고용할 테니까, 프로님이라는 호칭이 가장 적절하겠군.”

“흥! 알았어요. 공 프로님.”

“아직 대답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프로님도 제 요구에 답을 주지 않으셨어요.”

“요구?”

“저도 골프를 배우고 싶다고요. 단, 지금 조절되지 않는 기운을 조화롭게 만드는 데 적극 협조한다는 전제하에.”

“좋아. 그건 받아들이지. 하지만 사토시의 일방적인 강요라면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가도 돼.”

“누가 그래요? 아빠의 강요라고?”

“…….”

“제가 먼저 요청한 거예요. 아빠는 프로님에게 내가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입도 벙긋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 부탁을 거부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왜지?”

“그래야 저도 살거든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놀란 사람은 필상만이 아니다. 곁에 있던 모모코도 이 사안에 생존이 걸려있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차피 관계는 설정되었고 자의적인 선택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순간, 필상은 더 이상 왈가왈부할 게 없다고 판단했다.

과연 오늘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나을지 지켜보는 수밖에. 더 중요한 것은 사토시라는 사람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다. 과연 자신이 지나치게 과민했던 것인지, 아니면 정확히 봤는지는 이 대표와 통화해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2층 서재에 들어선 필상은 곧바로 이 대표를 연결했다. 그리고는 메일로 장문의 사업 계획서를 받았다. 사토시의 최종 제안이 담긴 문서로 이미 2달 전에 와 있었던 것이다.

“어허!”

읽어 내려가는 동안 필상의 입에서는 한숨만 나왔다.

사토시는 진즉에 손을 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또한 원하는 골프장 인수에 적극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게다가 말미에는 자신의 타성에 젖은 사업 방식에 대해 사과했고 추후 이번 일뿐만 아니라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는 다소 당황스러운 언급까지 했다.

이 대표에게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는지 확인해 달라는 부탁을 한 필상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다.

한평생 자신의 방식이 진리인 줄 믿고 살아온 사람이 이렇게 모든 것을 한순간 손에서 놓기란 어렵다. 만약 사실이라면 자신은 그에게 지나친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럴 만했다고!’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게 많았다.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으나 그날 밤 이후, 필상은 그 문제는 모두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일단 자신이 살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뼈를 깎는, 살을 도려내는 각오로 자신을 가로 막고 있는 벽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봄의 합세가 큰 힘이 되었다.

위험한 순간과 혼란스러운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지만 그때마다 필상은 불굴의 의지로 버텨냈고 모모코가 큰 지렛대의 역할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 * *

드디어 귀국했다.

하지만 아직은 언론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에 거의 비밀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노력이 첨가되었다.

그런데도 공항까지 나온 기자들이 몇 있었으나 이 대표는 현명하게 그들을 돌려보냈다. 이후 정식 기자회견이 있을 때, 그들에게 질문 우선권을 주기로 한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요. 혹시 신한동해오픈에 출전할 건 아니죠?”

“네. 일단 여주 집으로 가서 좀 쉬고 싶습니다. 우리 수미도 보고 싶고요.”

“그래야죠.”

대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던 이 대표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신색의 필상을 보자 미소가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모두에게 굉장히 긴 세월이 흐른 것 같았으나 실제 필상 일행이 마이애미에 머문 시간은 보름 남짓이었다.

마침 디펜딩 챔피언인 신한동해오픈이 이번 주에 열려서 출전하는 줄 알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섣부르게 나설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집에 도착한 필상은 가족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지만 단 한 사람, 엄마에게는 아주 혼이 났다.

엄마는 보자마자 필상의 등짝을 손으로 세게 때렸다. 그녀의 눈꼬리에 맺힌 물기를 본 필상은 그저 엎드려 절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저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그렇게 며늘아기 고생만 시킬 거면 이젠 아예 밖으로 나돌지도 마.”

“네. 그럴게요.”

“못난 놈!”

그게 어디 욕이겠는가!

무사히 환향한 필상을 보며 크게 반기던 가족들이 그 모습에 모두 눈물을 훔치기 바빴다.

그 와중에 엄마의 품에 안긴 수미는 오랜만에 젖을 물고는 이내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꼭 안아 주고 싶었던 필상은 녀석의 볼에 입을 맞춘 것이 고작이었으나 귀찮은 듯 찡그리는 녀석의 행동에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안 돼. 어딜 외간 여자를 집에 들여!”

당황스러운 상황은 식사 중에 나타났다.

필상은 함께 온 봄을 소개했다.

피지컬 트레이너라고.

지금 자신의 건강을 위해 특별히 고용했다고 말했는데도 엄마는 한사코 집에 머무는 것을 거부하셨다.

일본 국적이지만 한국 이름을 가졌듯 한국어에 능통한 그녀가 아무 반응 없이 못 들은 척해 준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지원군으로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모코도 수미를 재워야겠다면서 일어서는 바람에 결국 봄은 페럼CC의 리조텔로 숙소를 정해야 했다.

“엄마 말씀이 맞아요. 저도 봄에게 고맙고 함께 움직이는 것이 싫지 않지만 우리 집에 같이 머무는 것은 싫어요.”

“모모코. 왜 그래?”

“이제 고비는 넘겼잖아요. 그동안 얼마나 조마조마한 상황이 많았는지 정말 모르는 건가요?”

“다 무사히 넘겼잖아. 게다가 이제는 통제를 벗어날 일이 전혀 없어.”

“그야 오빠 생각이죠. 봄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과연 그게 될까요? 제가 없는 상황에서.”

그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순간, 필상은 아차 싶었다. 이건 생각하고 자시고 할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집에서 지내는 기간 동안에 봄의 숙소를 분리하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참으로 대단한 사람은 엄마였다.

‘여자의 직감인가?’

엄마의 모성애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했다.

보통 엄마들은 늘 아들 편인데, 아버지에게 큰 상처를 입으셨던 엄마는 필상이 다른 여자를 쳐다보는 것도 기겁하셨다.

그게 틀린 가르침이 아니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던 필상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엄마 요즘도 신륵사 자주 가세요?”

“거긴 안 가셔. 열심히 공을 들였는데도 네가 다쳤다고 법천사에 가셨다가 어제 내려오셨어.”

대답은 큰누나가 대신했다. 필상이 사투를 벌이는 내내 엄마는 불덕을 기원했던 것이다.

“왜? 절에 가려고?”

“네. 엄마. 저랑 같이 가실래요?”

“이제야 정신을 좀 차렸구나. 우리 아들이.”

엄마는 크게 기뻐하셨다.

기복신앙을 지니신 당신은 이게 다 부처님의 은공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필상은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그동안 모모코와 봄의 도움으로 큰 고비를 넘겼으나 그 모든 것을 확정짓기 위해서는 음기가 없는 공간에서도 모든 것이 평안한지 확인이 필요했다.

모모코의 불안한 눈빛을 뒤로한 필상은 아침을 먹자마자 바로 엄마를 모시고 인근에 위치한 법천사로 향했다.

봄에게도 알리라고 했으나 모모코나 봄이나 조마조마하게 기다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지금이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를 자각했다.

* * *

“어서 오세요.”

“정말 살아있네?”

“부고장이 가지 않은 걸 보면 모르겠습니까!”

“그러게.”

필상은 나이키 아시안 챔피언십이 열리는 TPK 서해안 CC에서 대회에 출전하는 PGA 선수들을 맞이했다.

가장 먼저 입국한 미켈슨은 필상을 마치 헤어진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듯 포옹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몸을 마구 더듬으며 이젠 괜찮으냐고 묻는 통에 당황스러웠지만.

“이래서 사람은 바빠야 하는가 봐.”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타이거의 일성이었다.

그는 태국에 계속 머물며 이번 대회에 출전하는 것도 망설일 만큼 자신이 맡은 일에 모든 열정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가롭게 대회 준비를 모두 마치고 한국에 들어온 미켈슨을 한심하다는 투로 몰아붙였다.

그런데 미켈슨의 반응은 의외였다.

“타이거. 고생이 많았지?”

“어허! 고생은 공 프로가 더 심했지요. 그런데 어째 반응이 예상과 너무 다른데요?”

“으하하하! 나도 이제 일을 시작하게 되었거든.”

“일본 사업이 드디어 재개된 겁니까?”

질문은 미켈슨에게 던졌지만 시선은 필상에게로 향했다.

환한 미소를 띤 필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도 포옹을 나눈 뒤, 셋은 둘러앉아 한동안 TPK 사업에 대해 논의했다.

필상도 절에서 하산한 뒤 이 사안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일을 추진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대표가 그동안 워낙 꼼꼼하게 일처리를 해 둔 터라 복잡할 건 없었다.

“그 노인네가 손을 들었다니! 그건 참 믿기 어렵군.”

“제가 과민하게 반응했던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오해와 편견은 풀렸고 이제는 오히려 든든한 우군이 된 것 같습니다.”

“으흠! 그래서 필 형이 이렇게 신이 난 거로군.”

“대회가 끝나는 대로 일본에 함께 건너가 그간 미뤄뒀던 일부터 처리할까 합니다.”

“나도 바람잡이 역할을 좀 해야겠군.”

“그러면 고맙죠.”

태국은 한 달 후면 전면 오픈한다.

때문에 더 바쁘고 챙길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타이거는 필상의 부재를 느끼지 못할 만큼 모든 것을 완벽히 처리했다.

그에 비하면 늦게 출발하는 일본 사업은 십시일반 도울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했고 늦은 만큼 더한 열정이 요구되었다.

* * *

-120명이 출전했는데, 그 면면을 보면 정말 화려하군요.

-그렇습니다. 코리안 투어에서 60명, 아시안 투어에 20명, 유러피언투어에 20명을 배정했고, PGA를 비롯한 여타 투어에서 20명을 추리고 추렸는데 짐 퓨릭이 출전을 원했는데도 불발되었다는 소식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짐 퓨릭의 세계 랭킹이 45위였기 때문입니다. 유러피언 투어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마지막에 JGTO의 강력한 요청에 시드를 4개 나눠주면서 무산되었다고 하더군요.

-혹자는 한국 선수들을 절반이나 배정한 것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한국에서 열리는 1회 대회이니 그건 씨알도 먹히지 않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말이겠습니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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