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15화 (215/354)

215. 봄

“아무리 그래도 얼굴이나 좀 보고 가지.”

“우리가 대회 끝나고 들리면 되죠.”

“타이거. 자네는 콩이 어디 있는지 아는 거야?”

“네. 제 마이애미 별장으로 갔습니다.”

“이런!”

미켈슨은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오죽하면 대회를 포기했을지, 그걸 생각하면 투정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부탁도 있었습니다.”

“부탁?”

“우리 둘 중에 한 명이 반드시 우승하랍디다.”

“으음!”

PGA 시즌이 종료되면 필상에게 남은 대회는 2개뿐이다.

9월 셋째 주에 펼쳐지는 신한 동해오픈, 그리고 오랫동안 공을 들인 아시아챔피언십이 시월 첫 주에 개최된다.

두 대회가 2주 간격으로 열리고 투어챔피언십이 끝난 뒤에도 3주의 여유가 있기 때문에 출전은 무난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에 정진해야 할 시기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한국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필상은 뜻밖에도 마이애미를 선택했다.

그곳에 뭇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고 아늑한 미켈슨의 별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또한 대서양을 마주 보고 있어 자연지기가 차고 넘쳐 토납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가는 길은 험난했다.

“교대해 줄까?”

“아뇨. 재미있어요.”

“하하. 나름 운치가 있기는 하네.”

무려 660마일의 거리였으나 필상과 모모코는 교대로 운전하며 마이애미로 향했다. 공항에 나타나면 벌떼처럼 몰려들 기자들도 문제지만 모모코와 단둘이 여행하는 것이 좋았다.

1,000km가 넘는 거리를 1박 2일에 걸쳐 운전한 부부는 피곤이 몸을 잠식할 무렵,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드리워진 마이애미에 도착했다.

반짝이는 바다, 싱그러운 바람을 느끼며 그간 마음에 담아 뒀던 모든 짐을 풀어놓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작정이었다.

* * *

필상의 기권은 굉장히 뜨거운 이슈였다.

하지만 당사자는 물론 에이전트도 일절 대응하지 않는 바람에 한두 주 뒤에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대회가 없는 오프시즌이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1500만 달러는 디샘보에게 돌아갔다. BMW 챔피언십에서 연장 승부 끝에 필상에게 패한 그로서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셈이다.

1라운드 샷 난조가 필상의 기권으로 홀연히 사라졌으며 끝까지 추격한 미켈슨과 타이거가 제풀에 무너진 점도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여긴 뭐 하러 왔습니까?”

“이거 너무하네. 여기 내 소유거든.”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어린 친구 하나 못 누르고 거금을 안겨 준 소감이 어떠세요?”

“괜히 걱정했네. 이렇게 펄펄 기운이 넘쳐 나 따질 줄 알았으면 그냥 집으로 가는 건데.”

“하하하. 우리 부부의 오붓한 시간, 방해하지 마시고 내일 각자 떠나세요.”

필상이 까칠하게 군 이유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눈치 빠른 타이거는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고 이후 태국으로 건너가 시작할 일에 대해 논의하고는 정말 다음날 아침 떠났다.

미적거리고 싶었으나 지금 필상에게 필요한 것이 혼자만의 시간임을 깨달은 미켈슨도 결국 LA로 떠났다.

그리고 필상은 다시 자신과의 싸움에 돌입했다.

* * *

“꼭 만나서 할 말이 있다네요.”

이 대표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필상의 상황을 알고 있어서 여간해서는 방해하지 않고 알아서 모든 일을 처리했지만 사토시의 집요한 요청이 필상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관계가 있다는 말에 결국 움직였다.

필상도 몇 번을 거부했지만 결국 자신의 위치를 알려 줬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저녁, 그가 마이애미 별장으로 찾아왔다.

당당했던 어깨가 만난 지 오래지도 않았는데 구부정해진 것 같았고 자글자글한 얼굴의 주름도 한층 더 깊어진 모습이었다.

그는 뜻밖에도 여비서 한 명만 대동한 채였다.

“어서 오십시오.”

“참. 자네 만나기 힘들군!”

“그러게 왜 사람 불편하게 하셨습니까?”

“허허.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백기 투항을 하는 거잖은가!”

“모모코. 차 좀 부탁해.”

“네.”

일단 자리를 권하고 마주 앉았으나 서로 말은 없었다.

사토시는 필상의 상태를 파악하려는 듯 눈빛이 사뭇 날카로웠다. 하지만 끝내 아무런 소득도 없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겐가?”

“같은 경험을 했다고 증상마저 같다는 보장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어야 하는 겐가.”

나이 지긋한 그를 존중할 의사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격식을 따질 이유가 없다. 먼저 악의를 드러낸 자에게 예의를 차릴 만큼 녹록한 성품이 아니었다.

“난 그 일이 있은 뒤, 많은 것을 얻었지. 특히나 상대의 마음을 읽거나 의도를 파악하는 것에 특출한 재능을 얻어 지금의 적잖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네.”

“그걸 다 무덤에 지고 갈 수는 없으실 텐데요.”

“허허. 그렇지. 그걸 좀 늦게 깨달았어. 하지만 사람은 말이야 좀처럼 변하지 않는 법이거든.”

“결국 다시 제자리로군요.”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스스로 밝혔던 백기 투항과는 상반된 의미였기에 필상의 이마에는 주름이 잡혔다.

이럴 거면 왜 만나자고 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어진 그의 말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부작용이 있더군. 뇌기를 몸에 담아서 그런지 수시로 양기가 뻗쳐 몹쓸 짓도 참 많이 했다네.”

“몹쓸 짓이라니요?”

“난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었거든.”

그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필상은 치미는 분노를 잠재우기 어려웠다. 물론 이해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으나 그가 가진 금력과 권력을 이용해 얼마나 많은 패악을 저질렀을지 생각하면 그와 마주 앉은 것도 역겨웠다.

“내가 한창 젊었을 때는 그게 어느 정도 허용되는 사회 분위기였지.”

“구차한 변명입니다!”

“물론 어느 순간부터는 나름의 방도를 찾았네. 가진 게 많은 내가 굳이 지탄 받는 더러운 짓을 할 필요는 없었거든.”

“…….”

“자네는 그러지 않더군.”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애매했다.

실제 아랫도리를 마구 쓰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유혹을 이기지 못해 수많은 상상을 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나 행동하고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차이는 컸다. 또한 그와 달리 자신이 짐승이 되지 않은 것은 토납법이라는 제법 좋은 수단을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저게는 유혹을 이길 수단이 있었습니다.”

“대충 짐작은 하네만 그게 과연 충분한 대안이 되었다면 자네 왜 이러고 처박혀 있는 겐가!”

사토시는 필상에 대해 꼼꼼하게 살펴본 게 분명했다.

토납이라는 수단을 통해 고비를 넘기고 잘 버텨 왔음을 파악했다면 지금 얼마나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일단 부정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가 자신을 만나고자 했던 이유가 그 해결책과 무관치 않기를 바라며 만약 해법을 제시한다면 그와의 관계는 어떻게 풀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향이 좋군. 한국에서 가져온 차인가?”

“네.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이네요.”

“고맙소. 모모코.”

어느새 차를 준비해 온 모모코가 필상의 곁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녀도 지금 이 화제에 대해 아는 바가 적지 않기에 필상도 굳이 자리를 피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모모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토시는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며 다소 엉뚱한 말을 뱉었다.

“자넨 아내를 아주 잘 얻었군.”

“무례한 말씀은 자제해 주시길 바랍니다.”

남의 아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언급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봤기에 필상의 몸에서는 강한 기세가 뻗쳤다.

하지만 모모코에게서 거둔 시선을 필상에게로 향한 그는 필이 전혀 생각지 못한 화제를 꺼내 들었다.

“모든 사람은 음양의 이치에 맞는 기운을 품고 있다네.”

“음양의 이치라…….”

납득할 수 있는 언급이다.

실제 자신이 주체하기 힘들었던 양기를 다스리는 데 모모코가 절대적인 역할을 해 왔던 게 사실이다.

“모모코와 자네의 인연도 뇌기를 몸에 담은 것과 무관치 않다네. 강한 양기에 자연스럽게 끌렸을 테지. 모모코는 보기 드문 극음의 몸을 지닌 여인이니까.”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저 아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녀의 존재는 너무 특별했기 때문이다.

“자네와 다른 내 능력 중에는 누가 나를 위해 필요한 사람인지 파악하는 재능이 있으니 내 말을 허투루 듣지 말게.”

“좋습니다. 그렇다면 구구한 얘기는 그만 접고 결론부터 말씀해 보시죠.”

그의 눈길이 잠시 모모코에게 머물다 뒤를 향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뒤에 조용히 시립한 여인에게 말했다.

“봄아. 이리와 앉거라.”

봄?

그녀의 이름이 한국어라는 사실에 먼저 놀랐다.

그리고 그녀가 천천히 걸어와 그의 곁에 앉는 순간, 필상은 절제하기 힘든 이상한 기운이 자신을 온통 휘감는다는 것을 느끼고 애써 숨을 골라야 했다.

요물인가?

“모모코. 내 먼저 그대에게 양해를 좀 구하고 싶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런데 모모코도 뭔가 감을 잡았는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오빠가 건강해질 수 있다면 약간의 불편함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요.”

약간의 불편함, 그 단어에 필상도 움찔했다.

아직 구체적인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봄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풍기는 기운을 그녀도, 필상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토시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다.

“내 딸일세.”

이제 겨우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다. 여든이 넘은 그에게 그렇게 어린 딸이 있다는 사실이 뭔가 부자연스럽게 들렸지만 양기가 남다른 그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놀랄 새도 없이 그녀의 입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정확한 발음의 한국어였고 음성에 뭔가 끈적끈적한 기운이 묻어난다는 느낌은 자신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반가워요. 봄. 전 모모코라고 해요.”

“네. 언니. 제가 한 살 더 어려니까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그래요.”

필상은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서 발산되는 강한 기운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양기를 억누르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욕망을 자극하는 매우 강한 유혹이었다.

문제는 그런 필상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토시의 느긋한 태도가 자꾸 거슬린다는 것이다.

“난 아내가 여럿이네.”

이런 망종이!

감히 어디서 그런 망발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 미처 분노를 표출하기도 전에 그의 변명이 들렸다.

“난 살아야 했네. 그리고 억지로 인연을 맺지도 않았네. 서로 오해는 있었어도 난 그녀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최선을 다해 이뤄 줬고 떠나고 싶은 이들을 잡지도 않았네.”

그 말을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낸 이유는 추론이 가능했다.

그는 필상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딸을 소개했는데, 그녀는 가히 요물이라 느껴질 만큼 강한 음기를 소유한 여인이다.

또한 자신은 주체하기 힘든 양기를 해소하기 위해 아내를 여럿 거느렸다고 말하지 않는가. 필상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행동을 자행했는데, 살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한다.

또한 그걸 지금 필상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딸을 내세워.

곁에 앉은 모모코 보기 너무 부끄러워 이제 그만 그의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거절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모코가 한발 빨리 나섰다.

“봄이 오빠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쳐요. 또 제가 용납한다고 쳐요. 하지만 본인이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 아빠라고 강요할 수 없는 거 아닌가요?”

충분히 논리정연한 말이다.

필상이 대단한 남자여도 그는 이미 유부남이다.

그리고 봄은 누가 봐도 풋풋하고 예쁜 어린 여자애다.

아빠가 강요한다고 임자가 있는 남자에게 호감을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토시의 시선은 그냥 자신의 딸을 향했다. 마치 네가 말해 보라는 그런 의미였다.

필상도 모모코도 그녀에게로 시선이 따라갔다.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싱긋 웃은 봄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말을 꺼냈다.

“전 아빠랑 생각이 좀 달라요.”

“그렇죠?”

“꼭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요. 지금까지 제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 본 적이 없거든요.”

“네?”

“그런데 저 오빠는 좀 다르게 느껴져요. 그냥 끌려요.”

맙소사!

스무 살 여자애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는 하는 걸까?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머리가 찌근찌근 아파 왔다.

“제가 오빠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언니도 좋지 않나요?”

“무얼 어떻게 도와주는 건지 알기는 하는 건가요?”

“네. 복잡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게 뭐 있나요? 그냥 서로의 기운을 나눠 건강하게 잘 지내자는 거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다른 수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은 은밀한 행위를 그냥 지나치기 힘들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필상을 바라보는 모모코의 표정에도 진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 와중에 봄은 다른 요구 사항을 꺼냈다.

“저도 골프 배우고 싶어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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